쓸쓸해서 머나먼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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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친구를 만난 것처럼, 잊고 지내던 첫사랑이 생각난 것처럼 반갑게 ‘최승자’를 만났다. 시인을 처음 만난 건 『즐거운 일기』를 통해서였다. 시를 쓰며 살아보겠다는 꿈을 꾸던 무렵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오규원이나 최승자, 이성복, 황지우, 정호승을 만나면서 시인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허접한 글쓰기에 대한 자괴감 같은 것이었을까. 적어도 내게는 최승자의 시가 하나의 세계로 보였다. 살리에르가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낭패감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즐거운 일기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서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 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았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표제작은 이제 빛바랜 사진처럼 추억을 떠올린다. 당시 상황과 현실에 대한 냉소와 반어가 발랄하게 튀어 오른다. 그 젊은 시인을 다시 만나는 일은 또 하나의 기쁨이다. 나이 들어 많이 아팠다는 시인의 목소리에 기운찬 울림이 아니라 멀고도 쓸쓸한 세계의 침묵을 보여준다.

  영원한 삶은 없다. 찰나에 불과한 인간의 삶에 대한 회의. 모든 작가가 한번쯤 부딪치는 문제겠지만 시인이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저기 저 ‘먼 세계’는 설명할 수 없는 거리이거나 자웅동체처럼 한 몸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혹은 한 세계를 완전히 잊고 산다. 곧 만나게 될 그 세계를 완전히 외면한 채.

쓸쓸해서 머나먼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박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마치 선문답을 하듯,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처럼 시인은 세월의 학교를 졸업한 모양이다. 그래서 ‘바다는 바다, 섬은 섬’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다만 건너야 할 바다가 점점 커져 걱정이다. 우리도 그런가? 걱정인가 바다가 커져서? 나는 무슨 바다를 건너려하는가?

  쓸쓸하고 머나먼 세계를 인식했다는 것은 세월의 흐름을 느낄 만큼 살았다는 말이다. 넓고 큰 이치와 흐름을 읽어내고 작고 누추한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서든 그렇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문득 하늘을 본다. 해가 지는 푸른시간과 하늘이 없는 세계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보다 끔찍하다.

세월의 학교에서

거리가 멀어지면 먼 바다여서
연락선 오고 가도
바다는 바다
섬은 섬

그 섬에서 문득문득
하늘 보고 삽니다

세월의 학교에서
세월을 낚으며 삽니다

건너야 할 바다가
점점 커져 걱정입니다


  다변이 달변은 아니다. 침묵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온몸으로 진실을 드러내듯 그렇게 시간과 세월이 흘러 모든 것이 자명해질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어리석은 인간은 지금, 현재를 즐길 줄 모르고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에 눈물 흘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이 쉽게 죽음을 말하듯 원론과 원론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의 울타리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말하지 않아도 사라질 것들을 영원히 지킬 수 없다는 자괴감을 견뎌내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삶이었다는 지당한 말씀.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없는 것은 아니다
나무들 사이에 풀이 있듯
숲 사이에 오솔길이 있듯

중요한 것은 삶이었다
죽음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거꾸로도 참이었다는 것이다

원론과 원론 사이에서
야구방망이질 핑퐁질을 해대면서
중요한 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삶 뒤에 또 삶이 있다는 것이었다
죽음 뒤에 또 죽음이 있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돈이 되어버린 세상,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삶의 참다운 가치를 논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흐린 날에는 주막에 앉아 한 잔 술을 기울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조용히,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먼 하늘에 상현과 하현을 구별하지 못해도 달이 둥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듯 만월과 초승달은 하나다. 차고 기우는 자연의 이치는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세월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구나 흐린 날, 달은 어떻게 바라 볼 건가. 그래도 어디엔가 달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어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

흐린 날

자본도 월급도 못 되었던
내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고
나도 아닌 나를 누군가 흔든다
나는 내가 아닌데 누군가 나를 흔든다
조용히 흔들린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만월이 초승달을 낳니,
초승달이 만월을 낳니

차고 기우는 것, 그게
차다가 기우는 건 아닌데

만월이 초승달을 낳니,
초승달이 만월을 낳니

천장에서 비 새는 듯한 흐린 날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초승달이
보이지 않는 만월을 또 낳기도 하겠구나



10022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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