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1
로버트 맥키 지음, 고영범.이승민 옮김 / 민음인 / 200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같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

 

중학교에 입학하고 사춘기가 찾아왔다. 방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사람들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는 소음에 불과했으며 하루하루의 일상들이 낯설어지던 시절이었다. 토요일 오후, 우연히 집 근처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해바라기>라는 영화를 보았다.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1969)>는 이전에 보았던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쏟아져나왔고 알 수 없는 흐느낌과 응어리진 뭉텅이가 요동치는 바람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전해졌다. 그것은 영화에 대한 감동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불꺼진 극장에 혼자 앉아 있는 사춘기 소년이 감지했던 생의 고통 때문이었을까. 달리는 차장 밖으로 하늘과 맞닿아 지평선을 이루어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의 강렬함 때문이었을까. 그것이 무엇 때문이었든 소피아 로렌의 슬픔에만 감정이 이입되어버린 토요일 오후의 어느 날.

 

사람들은 영화 같은 삶을 꿈꾼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담아낼 수 있는 영화라는 매체는 2차원의 어두운 벽면에 4차원의 공간을 환상적 이미지로 가득 채운다. 과학기술 발달로 인해 가장 극적인 예술장르가 탄생했고 우리는 그 지극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영상 매체는 감각적으로 우리의 상상을 실현해 주고 그 상상이 때론 현실이 되기도 한다. 어두컴컴한 극장을 찾아 현실 밖으로 여행을 떠나는 관객들은 반드시 현실로 돌아와 안도하며 꿈과 현실 사이를 걸어간다.

 

그렇다면 영화의 본질은 무엇일까.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다. 영화의 바탕이 되는 시나리오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무엇이 우리를 영화로 이끄는지 궁금하다면 시나리오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로버트 맥키의 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는 우리에게 이 궁금증을 완벽하게 해소시켜 준다. 원제 ‘STORY’가 말해주듯이 시나리오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이야기를 말한다. 하지만 소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언어를 본질로 하는 소설과 달리 시나리오의 본질은 이미지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하는 시나리오는 어떻게 상상하게 할 것인가의 고민에서 시작하는 소설과 다른 방식의 글쓰기가 필요하다.

 

이 책은 시나리오를 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나리오 작가와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영화같은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려는 모든 것은 인간의 삶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바탕을 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영화에 담겨 있다. 결국 시나리오는 인간의 삶과 꿈의 경계를 허물고 이야기의 기능을 극대화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주인공의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 이로 인해 주인공의 마음속에는 깨진 삶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의식적, 무의식적 욕망이 일어나고 주인공은 자신을 방해하는 모든 적대적인 힘들(내적, 개인적, 초개인적)에 맞서가면서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추구해 나가게 된다. 주인공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을 간단히 일컬어 이야기라 한다. - 290

 

시나리오와 글쓰기

 

시나리오 쓰기의 기본을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는 말로 요약할 순 없지만 이 책은 시나리오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이론과 실제를 정교하게 보여주고 있다. 피상적으로 인물의 대사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특성을 깊이 고민하며 이 책을 읽어나간다면 시나리오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시나리오를 쓴다는 행위는 보여주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체 419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지만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글 솜씨가 이 책의 명성을 증명한다. 책 전체를 일관되게 이끌어 가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영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이야기의 구성요소와 이야기 구성의 원칙 그리고 작가의 실제 작업 과정을 다양한 실제 사례를 통해 보여주기 때문에 이론과 실제가 정확하게 이해된다.

 

시나리오를 쓴다는 행위는 글을 쓰는 행위에 바탕을 둔다. 다만 언어의 힘과 기능보다 이야기의 구성과 이미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특성이 일반적인 서사 문학과 다를 뿐이다. 120분을 기준으로 정교한 흐름과 구성이 각각의 등장인물과 사건과 배경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관객을 울고 울릴 수 있다. 정밀하게 계산된 도발적 사건들이 어떤 장면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전체 상영 시간 안에서 어떻게 배치되느냐의 문제는 관객의 몰입도와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한다. 좋은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기막힌 상상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고유한 글쓰기의 체계를 익히는 일이다.

 

이야기는 삶의 은유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사람은 물론이고 창조적 상상력과 장르에 맞는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그 풍부한 비유와 상징으로 다가간다. 매체의 특성을 고려한 시나리오는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이야기가 가진 특징을 통해 시나리오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는 글쓰기의 기본자세를 배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다 재미있고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도 익히게 된다. 고전으로 꼽히는 영화들과 인상 깊게 본 영화들의 특징을 시나리오의 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화를 통해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여전히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성공(?)하는 영화는 많지 않다. 바꿔 말하면 기막힌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이 책은 시나리오를 위한 책이지만 우리들 삶의 일부인 이야기에 관한 책으로 읽을 수도 있다. 좀 더 재미있고 좀 더 감동적인 이야기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책이다.

 

한 줄 한 줄, 한 장 한 장, 한 시간 한 시간 날마다 글을 써라. 항상 이 책을 가까이에 둬라. 타고난 재능만큼이나 이 책의 원칙들이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이 책에서 배운 것을 지침으로 삼아라. 겁이 나더라도 감행하라. 다른 무엇보다 상상력과 기술보다도 더 세상이 작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용기다. 거부, 비웃음, 실패를 무릅쓸 수 있는 용기다. 의미 있고 아름답게 씌어진 이야기를 찾아 모험하면서 신중하게 탐구하되 대담하게 글을 써라. 그러면 저 우화의 주인공처럼 세상을 눈부시게 할 춤을 추게 될 것이다. - 591

 

 

20111209-1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 번째 원리는 도서관태곳적부터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세계의 미래 역시 영원하리라는 것을 곧바로 추리할 수 있다.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라면 그 누구도 그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불완전한 사서인 인간은 우연이나 개구쟁이 조물주의 작품일지도 모른다. - ‘바벨의 도서관’, 99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 사이에는 독서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즐겁지 않은 책읽기는 고통이지만 자극과 도전이 필요한 책도 있다. 조금 어렵고 난해한 책의 경우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손대지 않기 시작하면 자기계발서와 감성적인 에세이 그리고 재미있는 소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소설도 그 층위가 다양하기 때문에 쉽게 이해되지 않고 문장이 만만치 않으며 사건과 갈등이 중심이 아닌 경우이다. 흔히 고전의 경우에 그런 소설을 만나기 쉽다.

 

보르헤스의 픽션들이 이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열일곱편의 단편이 어느 하나 만만치 않다. 쉽고 재밌는 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읽을 이유가 없고 그의 명성 때문에 읽는 것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좋은 방법 중 하나가 해설을 먼저 읽는 방법이다. 시나 소설의 경우 평론가의 해설이 더 난해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을 옮긴 송병선의 해설은 스포일러가 없고 보르헤스 문학이 가진 장점과 소설의 의미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문학 세계를 알기 쉽게 정리해 놓았다.

 

20세기의 명민한 사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기호학, 해체주의,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등 다양한 현대 사상의 선구자라고 평가받는 이유를 이 한 권의 소설로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70년 전에 남미 작가가 쓴 소설들이 어떤 내용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한 독자라면 천천히 음미할 필요가 있는 책이다.

 

환상문학이라고 명명되는 보르헤스의 소설들은 일반적인 소설의 문법과 거리가 멀다. 현실에 존재하는 작가와 철학자가 등장하지만 허구의 인물과 책들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다. 주목할 만한 사건은 보이지 않고 갈등은 찾아보기 힘들다. 풍부한 부사와 형용사의 사용으로 수식어를 꾸며주지만 피수식어의 의미는 오히려 모호하다. 표현과 문장을 알기 쉽게 풀어내지 못한 번역가의 고민을 해설에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만만치 않은 집중력과 기초적인 배경지식이 요구되는 소설이다.

 

어떤 작품을 하나의 구조적 틀 안에서 이해하려는 방법은 이 소설에서 무의미해 보인다. 현실과 소설의 내용이 중첩되고 곳곳에 허구적 인물과 사건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때때로 길을 잃고 헤매거나 걸어온 길을 잊기 쉽다. 소설에 등장하는 쇼펜하우어와 칸트 그리고 보르헤스의 동료 작가와 들어본 적도 없는 작품들은 소설을 읽는 동안 그 진위 여부를 의심해야 한다. 소설 자체가 허구라는 순진한 믿음을 넘어 작가는 무한한 세계를 담은 절대적인 한 권의 책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천국이라는 곳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 도서관과 닮았을 것이라는 말을 한 보르헤스는 주목할 만한 소설가가 아니라 현실과 초현실의 세계를 넘나드는 사상가로 보는 편이 적당할 듯 싶다. 그렇다면 보르헤스의 문학이 아니라 수단이 되는 셈이다.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틀을 제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볼 순 없지만 보르헤스는 인간의 상상력과 현실에서 불가능한 환상을 통해 세계 자체의 의미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지 고민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의 작가와 영화감독 그리고 미국의 많은 작가들에게 수용되면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 그의 문학은 세계 고전이 되었다. 그것은 새로움에 대한 혹은 낯선 세계에 대한 환호였을지도 모르고 현실에 숨어있는 환상에 대한 호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위대한 문학도 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작가도 소설도 결국 인간의 삶과 사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현실적 잣대를 들이대자는 말이 아니라 70~80년대에 우리가 보르헤스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엘리트문학으로 치부한 데는 그만한 이유도 숨어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문학을 보는 내적 기준에 따라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고 외적인 관점과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소설은 읽는 사람에 따라서도 조금씩 다르게 해석된다. 문학에 절대반지는 없다. 보르헤스의 소설도 세간의 평가와 무관하게 읽는 사람 나름의 방식대로 읽어도 좋다. 그 의미와 감동은 각자의 몫이 아닐까 싶다.

 

바로 그때 비오이 카사레스는 우크바르의 어느 이교도 지도자가 거울과 성교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12

 

 

20111207-1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귀환 1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식의 조각들과 재구성

활자가 대중화되기 전, 농경사회에서는 세월과 경험이 쌓일수록 지혜를 얻었다. 노인들은 존경의 대상이었고 그들의 노하우는 다음 세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식이었다. 인쇄술과 매체의 발달은 지식의 대중화 시대를 이끌었고 이제는 네트워크 세상이 되었다. 정보는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지식은 매순간 새로워진다. 실용성이 없거나 효율적이지 못한 모든 것들은 죄악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자본과 경쟁의 논리가 결합되면 금상첨화다. 그렇다면 21세기에 지식과 정보는 무엇을 말하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철학이 부재한 시대는 없었다. 다만 철학적 고민이 점차 사라지고 있을 뿐. 우연히 『철학, 삶을 만나다』를 읽으면서 탄탄한 문장과 사유의 깊이에 깊이 공감하며 강신주라는 이름을 기억했었다. 이후 어느 순간 가장 대중적인 작가가 되어버렸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보면서 그가 대중적인 철학자가 되었음을 많은 독자들이 확인했을 것이다. 이후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과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 김용규, 김용석, 탁석산, 강유원 이후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로 강신주의 이름을 새기게 된다.

새로운 생각과 삶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때 우리는 ‘철학자’가 쓴 책을 찾는다. ‘철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가 필요한 것이다. 이제는 잡다한 교양과 지식의 조각들을 섭취하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은 없다. 책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한 매체와 방법들이 터치하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지식과 정보를 선별하고 분석과 해석을 통해 재구성할 수 있는 종합적 사고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산다는 것에 대한 오래된 질문 때문이다. 나는 왜 태어났으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질문이 필요한 사람이 철학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그러나 이 말은 특정인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 즉, 철학적 삶은 먹고 사는 것 이전의 문제라는 뜻이다. 철학자의 책이 잘 팔린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이 살기 어려워졌다는 의미이다.

제자백가의 귀환

강신주의 새 책 『철학의 시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성찰하고 삶의 의미를 고민하기 위한 책이다.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라는 어지러운 부제를 달고 있는 수천 년 전 중국의 고대역사를 뒤적이는 이 책이 현재적 삶의 유용성을 말하고 있다고 하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하다. 앞서 언급한대로 까마득한 옛날 상나라와 주나라의 이야기를 더듬어 춘추전국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당대의 사회와 사람들의 고민이 지금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삶의 질은 나날이 발전하지만 행복도 그러한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와 삶의 형태도 그만큼 발전했는가. 이 책은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출발하자고 꼬득이는 ‘제자백가의 귀환’ 시리즈의 총론에 해당한다.

혼탁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를 특정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 근대사, 아니 최근 200여 년간의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춘추전국시대를 능가하지 않겠는가. 더 빨리 변하고 더 높이 오르기 위해 경쟁하고 더 멀리 날아가는 속도의 시대는 지금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가속되지 않을까. 이 책은 파편처럼 조각조각 여기저기서 읽고 보고 들었던 이야기들을 정리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개별 독자의 배경지식과 앎의 범위에 따라 모든 책은 제각각 다른 소리를 내고 색다른 의미를 가지겠지만 ‘춘추전국시대’는 어떤 시대였으며 ‘제자백가’는 어떤 사람들인지 차근차근 알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매우 소중한 시리즈가 될 것 같다. 물론 총론에 해당되는 이 책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중국 고대사의 낯선 풍경들과 『주역』, 『춘추』, 『시경』 들여다보기 그리고 제자백가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로 나뉘어 역사와 철학자의 짬짜면을 먹는 듯싶다. 전체 12권으로 구성되어 2권『관중과 공자』가 나와 있는 상태다. 총론으로 끝낼 것인가, 선별적으로 읽을 것인가, 전체를 살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이 책을 읽으면서 해도 늦지 않다. 대중적인 글쓰기의 힘과 동양중국 철학에 대한 깊이가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즐겁게 해 나갈 듯 몸을 푸는 강신주의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손은 이미 2권을 주문하기 위해 마우스를 잡으러 간다.

중국 고대사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보면 ‘야만의 역사’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난혼에서 모계사회를 거쳐 가부장제로 이행하는 과정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잔혹함과 형벌 제도 때문이다.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에도 언급된 바 있지만 인간을 주체가 아닌 객체로 보는 관점은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다. 기원전 수천 년 전이기 때문이 아니고 21세기이기 때문도 아니다. 전쟁과 평화, 지배와 피지배, 승자와 패자, 가진자와 없는자 ……. 이분법적 구도로 세상을 구별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자를 구성하는 유전자에 내포되어 있는 것 같은 야만성이 문득 궁금해진다. 아니, 최소한 공자와 맹자를 잘못 이해하거나 주나라가 민본정치를 펼쳤다는 잘못된 믿음과 지식은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공자가 아니라 관중부터 만나러 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제국의 복잡했던 정치적 상황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제자백가에 대한 당시 지성계의 이해가 얼마나 정치적 조건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당시 도가와 유가 사이의 선택의 문제는 단순히 철학적 경향을 정하는 문제를 넘어서 정치적 생명을 건 중차대한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 248쪽


20111205-1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치 시대의 일상사 - 순응, 저항, 인종주의,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일상사는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는가

도대체 일상사는 무엇을 다루는가? 이 물음을 염두에 두고 포이케르트는 일상사는 새로운 영역이라기보다 “새로운 전망”이라고 말한다. 전망, Perspective, 원근법, 즉 새로운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바로 “아래로부터의 역사(Geschichte von unten)”를 추구한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 400쪽

최근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일었던 교과서 문제는 많은 것은 시사한다. 정권의 부침에 따라 좌우되는 교육현실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니 자괴감을 가질 것도 없다.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차이보다 일제 식민지에 대한 관점, 이승만에 대한 평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시선이 당황스럽다.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쉼 없이 굴러가고 인간의 삶과 더불어 그 평가의 잣대로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고정된 관점이나 실체적 진실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라는 것은 최소한의 합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자명한 사실 확인과 그 사실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풍부한 논의가 가능해야 역사는 살아 숨을 쉬게 된다. 박제된 역사는 빛을 잃기 마련이고 권력을 가진자들의 해석과 관점은 언제나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변증법적 관점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시선으로 현재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일은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며 미래를 위한 이정표이다.

개인의 자발적인 노력과 관심이 아니라면 거시적 안목으로 역사를 접근할 수밖에 없다. 왕조 중심, 정치와 권력 투쟁 중심의 역사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조금 다른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미시적인 관점으로 시대를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하지만 일상사는 특정 시대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모습을 통해 보이지 않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정치와 권력, 계급과 자본의 정점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시선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일상사는 연대기식으로 서술되는 역사보다 살아 숨쉬는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며 사람 냄새나는 역사로 읽힌다.

<뮤직박스>라는 영화가 아우슈비츠에 대한 관심의 출발이었을 것이다. 이후에 <쉰들러리스트>나 <인생은 아름다워>, <파이니스트> 같은 영화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같은 책을 통해 끊없이 재생산 되는 히틀러와 유대인 학살 문제를 들여다보지만 먼 나라의 역사에 대한 피상적인 해석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수백만 명을 학살한 인류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제노사이드(genocide)의 잔혹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근대화 이후 인류의 수적 팽창과 과학 기술의 발달보다도 사회의 계층구조, 계급의 충돌, 감시와 처벌, 규율과 욕망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인공인 나치와 히틀러에게 표를 던지고 그를 추종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불만을 표시하고 저항한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포이케르트의 『나치 시대의 일상사』는 이런 질문들에 답하고 있는 책이다. 대량 학살의 과정과 심리 분석, 유대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아우슈비치의 참상, 집단적 광기에 대한 분석과 해석 등 지금까지 수없이 다루어졌던 방식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책이다. 1982년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과거의 특정 시대와 사건에 대한 해석을 주제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옮긴이의 해설에서 인용한(400쪽) 말은 포이케르트의 『나치 시대의 일상사』가 가진 가장 큰 의미이다. 새로운 영역이 아닌 ‘새로운 전망’을 읽어 냈다면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또한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작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면 카프카의 말대로 이 책은 우리에게 도끼 같은 혹은 찬물 같은 역할을 해 줄 것이다. 한 사회의 피라미드 구조에서 하위 50%를 작은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는다. 노동조합 안에서도 노조위원장이나 노조 간부들은 큰 사람들에 해당한다. 계급과 계층을 막론하고 ‘작은 사람들’에 주목하며 이 책을 읽는다면 과거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실의 모습이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 언제까지 ‘빨갱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둘러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매장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할지 모르지만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지나간 일들에 대한 호기심이나 사실 확인의 문제가 아니다. ‘아래’에 해당하는 ‘작은’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 행동과 실천이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모른다.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역사는 오롯이 그들의 몫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인 포이케르트는 노동자와 청소년의 일상에 주목한다. 비상사태에 처한 ‘일상’은 어떻게 다른 것이며 민족공동체를 내세운 총통과 나치의 주장이 노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특히 ‘청소년’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관한 세밀한 분석이 압권이다.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의 내부 보고서에서부터 저항 세력의 문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인용과 사례를 통해 독자들은 실제 그 시대를 살아냈던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 받을 수 있다. 나치 시대를 바라보는 수많은 관점과 이야기들, 다양한 영화들, 소설들이 널려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지적 호기심이나 타인의 불행에 안도하는 태도로서의 접근이 아니라 우리들의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일상사는 나치 시대의 그것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를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역사는 언제나 우리와 무관한 권력자, 가진자, 승리한 자의 기록일 수는 없다. 우리처럼 ‘작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숨 쉬고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현실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우리의 역사를 만든다. 토인비의 말대로 과거에서 무언가 조금 배울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천천히 나치 시대의 일상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올바른 역사 이해를 위해서는 사회와 정치구조를 겨냥하여 일반화하는 접근 방법과 일상의 모순을 담고 있는 경험을 겨냥하여 개별화하는 접근 방법 모두를 포기할 수 없다. - 93쪽


20111202-1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의 의미와 역할

원론적이고 이론적인 소설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몫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소설은 ‘재미’가 우선이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서사의 힘은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며 의미이다. 재미없는 소설도 있긴 하다. 근대 이후 앙드레 부르통에 의해 ‘초현실주의 선언’이 발표되면서 전통적 가치에 도전하고 굳은 틀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도가 문학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급변하는 사회와 역사적 발전 과정은 항상 새로운 형식과 기발한 상상력을 갈망했으며 그것은 모든 예술에도 통용되는 요구였다. 하지만 여전히 소설은 가장 대중적이고 쉽고 재미있는 갈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소설가들은 항상 낯선 이야기, 새로운 형식을 갈망하며 독자들 또한 미지의 세계를 갈망한다. 익숙한 세계에 대한 재발견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욕망은 상상력으로 채워지고 작가는 독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유혹한다. 인간의 내면적 갈등, 타인과의 관계, 세계와의 충돌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작가는 이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고민의 흔적을 토해내며 독자들과 함께 해결의 실마리를 성찰하게 된다. 결국 이야기는 끝없이 진화하고 발전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가 선행된다면 이 모든 이야기들의 문법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새로움은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넘어서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다.

매일 벌어지는 문제 상황과 반복되는 갈등의 양상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역할이 소설의 몫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작가에게 정답을 요구할 수는 없어도 인간의 삶에 대한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설은 우리들의 이야기,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태어나서 어떻게 살 것이며 인생은 무엇이고 세상은 어떤 곳인가에 대한 요구가 없다면 소설은 의미도 없을뿐더러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런 면에서 정유정의 『7년의 밤』은 다양한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소설에게 혹은 작가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7년의 밤』은 우선 강력한 서사의 힘을 지니고 있다. 추리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사건의 해결과 반전 혹은 결말을 끝까지 파헤치게 만드는 힘있는 소설이라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한 소설이다. 전직 야구선수 출신 사형수 최현수를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사건의 연결고리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사건이 벌어진 후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사실’ 아닌 ‘진실’이 드러나고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은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를 충분하게 선사한다. 게다가 사형수의 아들과 그를 돕는 조력자이자 내부 이야기의 서술자인 승환의 관계, 치과 의사 오영제와 그의 아내와 딸의 관계는 세령호를 중심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갈등의 층위를 만들어내고 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장편소설의 흡인력은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기도 하다.

서사의 힘과 남은 고민들

고양이는 천둥이 치기 전에 뇌에 자극을 느낀다고 한다. 인간의 변연계에도 비슷한 감관이 하나 있다. 재앙의 전조를 감지하면 작동되는 '불안'이라는 이름의 시계. - 정유정, 7년의밤, 18쪽

소설의 가장 고전적 숙제인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질문이 작가의 말의 제목이 되었다. 그것은 이 작품이 소설의 문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현수가 오영제의 딸을 사망에 이르게 한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이 소설은 그 과정과 이후의 사건들을 정밀하게 추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하나의 사건이 앞 선 사건의 결과가 되고 뒤이은 사건의 원인이 되는 구성 때문에 독자의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소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서사의 힘이라는 사실을 웅변하는 듯하다.

표면상으로는 최현수의 이 소설의 중심이지만 그의 아들 서원과 오영제가 그리고 소설가 승환이 이야기의 중심축이다. 서원과 동갑내기 오영제의 딸 세령이나 그의 아내 문하영, 최현수의 아내 강은주는 이야기의 주변에 머물러 있다. 최현수와 안승환 그리고 최서원의 캐릭터는 분명하고 설득력있게 그들의 행동과 사건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문제는 오영제다. 독특한 유형으로 이 소설의 재미를 불어넣는 인물 오영제의 성격과 행동에 설득력 있는 에피소드와 타당한 연결고리가 부족하다. 소설을 읽는 동안 ‘왜’라는 질문을 여러 차례 하게 되는 것은 개별 독자의 이해력 부족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이 소설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아내와 딸에 대한 집착과 폭력을 묘사하는 부분이나 이후의 행동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만한 개연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 작은 아쉬움들을 상쇄할 만한 ‘재미’와 ‘흡인력’만으로도 이 소설은 작가의 오랜 준비와 치밀한 구성, 풍부한 상상력을 빛나게 한다. 스킨스쿠버, 댐의 운영방식, 수사과정 등 전문지식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소설에 현실감을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머지않아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라는 추측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만하다.

인간이 가진 ‘불안’과 ‘공포’ 그리고 내면적인 ‘충동’과 ‘욕망’에 대한 깊은 성찰은 정유정이라는 작가를 주목하게 하는 또 하나의 힘이다. 천명관의 『고래』 이후에 서사의 힘을 유감없이 느끼게 해 준 소설이지만 소설은 드라마의 대본이나 시나리오와 다른 문체과 스타일의 재미까지 갖추어야 한다. 문장과 표현이 빚어내는 분위기 언어가 갖는 보이지 않는 울림까지 보여줄 수 있다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개별 독자의 취향이겠으나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를 그의 스타일대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일 수 있겠다.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총을 가지면 누군가를 쏘게 되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천성이라고. - 정유정, 7년의 밤, 474쪽


20111129-1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