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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ㅣ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1
로버트 맥키 지음, 고영범.이승민 옮김 / 민음인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같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
중학교에 입학하고 사춘기가 찾아왔다. 방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사람들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는 소음에 불과했으며 하루하루의 일상들이 낯설어지던 시절이었다. 토요일 오후, 우연히 집 근처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해바라기>라는 영화를 보았다.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1969)>는 이전에 보았던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쏟아져나왔고 알 수 없는 흐느낌과 응어리진 뭉텅이가 요동치는 바람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전해졌다. 그것은 영화에 대한 감동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불꺼진 극장에 혼자 앉아 있는 사춘기 소년이 감지했던 생의 고통 때문이었을까. 달리는 차장 밖으로 하늘과 맞닿아 지평선을 이루어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의 강렬함 때문이었을까. 그것이 무엇 때문이었든 소피아 로렌의 ‘슬픔’에만 감정이 이입되어버린 토요일 오후의 어느 날.
사람들은 영화 같은 삶을 꿈꾼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담아낼 수 있는 영화라는 매체는 2차원의 어두운 벽면에 4차원의 공간을 환상적 이미지로 가득 채운다. 과학기술 발달로 인해 가장 극적인 예술장르가 탄생했고 우리는 그 지극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영상 매체는 감각적으로 우리의 상상을 실현해 주고 그 상상이 때론 현실이 되기도 한다. 어두컴컴한 극장을 찾아 현실 밖으로 여행을 떠나는 관객들은 반드시 현실로 돌아와 안도하며 꿈과 현실 사이를 걸어간다.
그렇다면 영화의 본질은 무엇일까.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다. 영화의 바탕이 되는 시나리오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무엇이 우리를 영화로 이끄는지 궁금하다면 시나리오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로버트 맥키의 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는 우리에게 이 궁금증을 완벽하게 해소시켜 준다. 원제 ‘STORY’가 말해주듯이 시나리오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이야기를 말한다. 하지만 소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언어를 본질로 하는 소설과 달리 시나리오의 본질은 이미지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하는 시나리오는 어떻게 상상하게 할 것인가의 고민에서 시작하는 소설과 다른 방식의 글쓰기가 필요하다.
이 책은 시나리오를 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나리오 작가와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영화같은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려는 모든 것은 인간의 삶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바탕을 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영화에 담겨 있다. 결국 시나리오는 인간의 삶과 꿈의 경계를 허물고 이야기의 기능을 극대화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주인공의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 이로 인해 주인공의 마음속에는 깨진 삶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의식적, 무의식적 욕망이 일어나고 주인공은 자신을 방해하는 모든 적대적인 힘들(내적, 개인적, 초개인적)에 맞서가면서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추구해 나가게 된다. 주인공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을 간단히 일컬어 이야기라 한다. - 290쪽
시나리오와 글쓰기
시나리오 쓰기의 기본을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는 말로 요약할 순 없지만 이 책은 시나리오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이론과 실제를 정교하게 보여주고 있다. 피상적으로 인물의 대사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특성을 깊이 고민하며 이 책을 읽어나간다면 시나리오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시나리오를 쓴다는 행위는 ‘보여주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체 4부 19장 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지만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글 솜씨가 이 책의 명성을 증명한다. 책 전체를 일관되게 이끌어 가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영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이야기의 구성요소와 이야기 구성의 원칙 그리고 작가의 실제 작업 과정을 다양한 실제 사례를 통해 보여주기 때문에 이론과 실제가 정확하게 이해된다.
시나리오를 ‘쓴다’는 행위는 글을 쓰는 행위에 바탕을 둔다. 다만 언어의 힘과 기능보다 이야기의 구성과 이미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특성이 일반적인 서사 문학과 다를 뿐이다. 120분을 기준으로 정교한 흐름과 구성이 각각의 등장인물과 사건과 배경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관객을 울고 울릴 수 있다. 정밀하게 계산된 도발적 사건들이 어떤 장면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전체 상영 시간 안에서 어떻게 배치되느냐의 문제는 관객의 몰입도와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한다. 좋은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기막힌 상상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고유한 글쓰기의 체계를 익히는 일이다.
이야기는 삶의 은유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사람은 물론이고 창조적 상상력과 장르에 맞는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그 풍부한 비유와 상징으로 다가간다. 매체의 특성을 고려한 시나리오는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이야기가 가진 특징을 통해 시나리오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는 글쓰기의 기본자세를 배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다 재미있고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도 익히게 된다. 고전으로 꼽히는 영화들과 인상 깊게 본 영화들의 특징을 시나리오의 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화를 통해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여전히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성공(?)하는 영화는 많지 않다. 바꿔 말하면 기막힌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이 책은 시나리오를 위한 책이지만 우리들 삶의 일부인 이야기에 관한 책으로 읽을 수도 있다. 좀 더 재미있고 좀 더 감동적인 이야기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책이다.
한 줄 한 줄, 한 장 한 장, 한 시간 한 시간 날마다 글을 써라. 항상 이 책을 가까이에 둬라. 타고난 재능만큼이나 이 책의 원칙들이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이 책에서 배운 것을 지침으로 삼아라. 겁이 나더라도 감행하라. 다른 무엇보다 상상력과 기술보다도 더 세상이 작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용기다. 거부, 비웃음, 실패를 무릅쓸 수 있는 용기다. 의미 있고 아름답게 씌어진 이야기를 찾아 모험하면서 신중하게 탐구하되 대담하게 글을 써라. 그러면 저 우화의 주인공처럼 세상을 눈부시게 할 춤을 추게 될 것이다. - 591쪽
20111209-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