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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유성룡이 보고 겪은 참혹한 임진왜란
김기택 옮김, 임홍빈 해설, 이부록 그림, 유성룡 원작 / 알마 / 2015년 1월
평점 :
- 책의 장점
1. 페이지 넘김이 좋았다
2. 고서 느낌을 주는 빨간색, 연두색, 하늘색 페이지 색감도 마음에 들었다
3. 삽화가 조금 기괴했는데, 의외로 전쟁으로 혼란스러웠을 당시 상황을 상상하기에 좋았다.
4. 임홍빈의 해설로 더욱더 구체적인 당시 상황과 결과를 알 수 있어 좋았다.
책의 초반부터 답답한 상황이 연이어 발생한다. 전쟁의 기미를 감지했으면서도 실책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엔 인용하고 싶은 문장도 표시하기 싫을 정도였다.
임진왜란 초기 신립의 방어 전략의 실패로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명장으로 불리던 신립은 일본군을 너무 얕잡아 보았고, 지형지세를 활용하기보다 자신의 강점으로 역할했던 기병을 과신하였다. 류성룡의 지적처럼 꾀를 부려 적을 효과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쓸데없는 정면승부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에서도 신립이 단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게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데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전쟁이 삽시간에 걷잡을 수 없게 되고, 한양을 비롯한 경기도가 유린되어버린 결과를 초래한 신립의 단금대 방어전략은 너무나도 아쉽다. 이우혁의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차라리 귀신 탓에 신립이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믿고 싶을 정도였다.
징비록의 대부분의 내용은 이처럼 상황마다 지휘관 혹은 책임자들의 안타까운 결정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마을이나 성을 버리고 제일 먼저 도주하는 관리의 모습, 적의 기세에 눌려 싸워보지 않은 채 무기를 모두 강물에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 주요 길목의 방어 요지에 아무런 저항없이 무혈입성하는 일본군,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거나 전란을 기회로 반란을 일으키는 모습 등 매일매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해정창에서 명천의 절간 노예 정말수와 회령의 토관진무로 있던 국경인, 경성의 관노 국세필 등이 작당해 한꺼번에 반란을 일으키고 일본군과 내통하더니, 7월 23일 회령에 머물고 있던 두 왕자를 붙잡아 가토의 제2군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런 난리속에서도 저런 반란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관군의 거듭되는 패전소식과 임금의 피란 등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단연 백성들이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등장한 전국 각지의 의병이 아니었으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조선에서는 비격진천뢰라는 무기로 일본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는 장면에서는 짧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예전에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비격진천뢰 특별전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시간을 두고 폭파하는 특성 탓에 성안에 떨어진 비격진천뢰를 보고 신기해 몰려들었던 일본군이 이내 폭탄이 터지자마자 혼비백산한다는 대목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순신. 이 장군이 아니었다면 정말 전란은 손쉽게 일본이 원하는대로 끝났을 것이다. 일본의 간사한 농간으로 이순신이 체포되어 압송된 점과 이후 원균이 맡은 조선 수군이 정유재란으로 다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에 크게 괴멸한 대목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만약 그때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정유재란도 훨씬 일찍 끝났을 것이다.
조선에 원군으로 들어온 명나라 장수들도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일본군의 숫자를 전쟁 초기부터 일찍 줄일 수 있었을 테고 정유재란이 일어날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을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전쟁이 필요이상으로 장기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임홍빈은 해설에서 박종화의 소설 <임진왜란>을 소개하고 있는데, 박종화는 임진왜란과 6.25 전쟁의 슬픈 닮은 꼴을 설명하고 있다. 마치 역사는 반복되다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우리나라에서는 끔찍한 전란이 수백년의 기간을 두고 비슷한 양상으로 또다시 일어났던 것이다.
남경태는 <종횡무진 한국사>에서 임진왜란의 종결문제를 놓고 일본군과 교섭하는 주체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였다는 점과 6.25 전쟁의 정전 협정 주체로 남한의 대표가 나설 수 없었던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인데도 직접 교섭 현장에 나설 수 없었던 사실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 강대국(명나라와 미국)의 도움을 받은 점, 주체적으로 협상을 이끌어 나가거나 전쟁을 종결시킬 힘이 없었다는 사실들 말이다.
사실 한국사를 공부하다보면 이런 안타까운 지점이 한둘이 아니다. 잦은 전란으로 불타없어진 문화재가 너무 많아서 '현재는 전하고 있지 않다'라는 식의 서술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제부터라도 달라져야할 것 같다.
수백년 전에 징비록이 쓰여졌지만, 한일 강제 합병이나 6.25전쟁 등의 수난은 발생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변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내 대답은 '그렇다'였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책을 '덜' 읽었던 것 아닐까? '과거의 교훈'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면서 실천에 옮기지 않아서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건 아닐까? 그러기 때문에 이런 책은 계속 쓰여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 같은 독자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루는 여러 명나라 장수들이 식량이 다 떨어졌다는 핑계를 대고 이여송에게 명나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이여송은 화가나서 나와 호조판서 이성중, 경기좌도 감사 이정형을 불러 뜰 아래 무릎을 꿇게 하고는 큰소리로 꾸짖으며 군법에 따라 벌을 내리려고 했다. 나는 여러 번 잘못했다고 말했다. 나라가 이 모양이 되어 명나라군 앞에 무릎 꿇고 빌어야 하는 신세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 P134
일본군의 꾀에 속아 이순신을 가두다 - P159
진린은 우리 임금께 글을 올려 이렇게 말했다. "이순신은 천하를 다스릴 만한 뛰어난 재주와 무너진 하늘을 메울 만한 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토록 이순신을 크게 칭찬한 것은 그만큼 진린이 이순신에게 진심으로 감탄하고 그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 P176
이순신은 몸소 적의 총과 화살을 무릅쓰고 힘을 다해 싸웠는데, 날아오는 총알이 그의 가슴에 맞아 등 뒤로 빠져나갔다. 이에 이순신을 옆에서 모시던 군사들이 부축해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 P183
그러나 신립과 이일은 훈련되지 못한 오합지졸 병사들을 데리고 요새와 다를 바 없이 험준한 지형지물을 벗어나 평탄한 들판에서 병력이나 무기 면에서 월등하게 우세한 적과 맞서 싸워 승부를 겨루었으니, 참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내가 앞서 본문에 이 내용을 낱낱이 기록해 두었으면서도 이제 모처럼 거듭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까닭은 후손들에게 새삼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서다. - P203
신립의 부대는 요새인 문경새재 방어를 포기하고 물기가 많은 습지대인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다. 북방에서 기마전술로 효과를 봤던 신립의 판단 착오로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 공격에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참패한다. - P242
전란의 불길 속에서 견디다 못해 악에 받친 백성들은 방방곡곡에서 구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의병의 이름으로 떨쳐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부와 관군이 생존권을 지켜주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스스로 무장해 고향 땅을 지키고 나아가 왜적을 물리쳐 나라의 위기를 극복해야겠다는 사명감을 불태우게 된 것이다. - P253
4월 13일, 부산에 일본군이 대거 상륙하자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경상우수사 박홍은 해군기지를 버리고 내륙으로 도망쳤다. 우수사 원균 역시 함선 70여 척을 스스로 바닷속에 가라앉혀 없애고 수군 병력을 죄다 해산시킨 다음, 몇몇 장수들만 데리고 남해도 쪽으로 달아나 결국 경상좌우도 수군은 자멸한 상태였다. - P262
이제부터는 "내 목숨을 남더러 지켜달라고 떠맡기는 자의 비애"를 이야기할 참이다. 그 또한 서글프기 이를 데 없는 일이라 하겠다. - P272
의병장 정문부는 가토의 제2군을 함경도에서 몰아낸 뒤 반란 주동자들을 모조리 찾아내 처단하고 함경도 일대를 완전히 되찾았다. - P276
진주 부근 (중략) 명나라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진주성을 구원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서도 7만 명이나 되는 왜적의 엄청난 군세에 압도되어, 고작 구례까지만 부대를 전진시킨 채 요지부동으로 상황이 돌아가는 추세만 지켜볼 따름이었다. (중략) 진주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그 전해 싸움에서 김시민 부대에 당한 패전의 분풀이로 6만여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도요토미의 특명대로 진주성을 초토화시켜 앙갚음을 했다. - P283
1597년 2월 26일, 간첩 요시라의 교모한 모략에 넘어간 경상우도 병마사 김응서의 보고에 따라, 조정은 작전 기회를 놓쳤다는 죄목으로 이순신을 파면하고 체포해 한성으로 압송한다. 그 후임에는 충청도 병마사로 전출되어 지상에서 육군을 지휘하던 원균을 불러들여 임명했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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