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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당신?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평점 :
바람은 그렇게 속삭이고는 그녀의 이마를 만져주었다. 어디선가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구두 뒤축이 닳을 거야. 그녀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기다란 그림자가 그녀 앞에 섰다.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당신인가요?
나는 소설의 경우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물에 대한 시선에는 편견이 숨어 있다는 전제를 인정한다면 편견이 아닐지도 모른다. 남성과 여성의 소설은 작가를 몰라도 구별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그 형식과 내용이 달라서가 아니라 문체와 감성의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 ‘여류 작가’라는 희소성이나 차별적 시선 혹은 한정된 영역의 특별한 대우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분명했다.
80년대 이후 서영은, 최윤, 김채원, 은희경, 신경숙, 권지예, 김인숙, 전경린 등 문학적 성과면에서 ‘여류’라는 이름을 털어버린 것은 오래된 일이다. 다만 한계라고 명명하기엔 어색한 감이 있지만 특징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수많은 평론가와 문학 연구자들이 쏟아낸 이야기를 반복할 생각은 없다. 이제 그것을 벗어날 필요와 가능성을 가진 작가를 발견한 듯한 개인적 느낌 때문에 떠오른 생각이다. 윤성희의 <거기, 당신?>은 성격이 분명하다. 소설의 주인공들의 성격이 뚜렷한 특징을 보여준다. 게다가 작가가 시도한(?) 문체와 스타일은 나를 사로잡았다. 엉뚱한 상상이지만 내가 소설을 썼다면 이런 식의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소설의 인물을 살펴보자. 현실에 있을법한 개연성 있는 허구라는 기본적인 소설의 정의에서 벗어났다고 할 순 없지만 윤성희가 만들어낸 소설의 인물들은 전형적인 인물로 볼 수는 없다. 이럴 경우 독자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째, 나와 다른 상황과 감정과 생활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거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가 없다. 둘째, 색다르고 특이한 경험으로 대리 경험의 극대화를 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번째의 경우 화려하고 잘나가는 주인공이 아니므로 선망의 대상으로 볼 수 없다. 현실 원칙을 벗어나 쾌락원칙에 충실한 인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현실의 이상이 변형된 형태로 투영된 대상으로서의 주인공이 아니라면 독자들은 불편해하거나 호기심으로 그칠 뿐 절대적인 공감과 깊은 감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단점은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은 소설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어 보이고 적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일상에서 중심에 서 있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단순한 호기심과 재미를 넘어 치열하고 섬세함이 독자를 몰입하게 한다. 보물지도를 찾으러 떠나거나 어린시절 암산왕이었거나 간에 현실에서 그들은 지루하고 흑백영화처럼 특징없는, 오히려 비참하고 어려운 생활속에 함몰되어 있다. 탈출구도 비상구도 없어 보인다. 그들을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는 뭔가? 작가의 의도보다 독자의 반응은 어떠한가?
다음은 윤성희 문장의 특징이다. 그것을 문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윤성희 소설의 특징이라고 크게 말할 수도 있다. 헤밍웨이의 문체가 대표적인 간결한 단문이다. 그녀의 소설이 그렇다. 비슷한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헤밍웨이를 떠올렸다. 일단 길이가 짧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결코 화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담백해서 가끔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가 두 번 이상 반복되는 복문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고의 흐름과 맥락이 끊길 염려가 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숨가쁘게 다음 문장의 주어에 매달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작가의 의도가 어떠하든 독자는 바쁘다. 평소의 패턴대로 문장을 읽어나가려는 습관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설에 몰입하게 하는 힘이 문체에만 있지만은 않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비약과 생략은 윤성희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으로 읽힌다. 나에겐 그렇다. 생략된 문장 사이의 연결고리와 접점은 물론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음 장면과 상황을 보여준다.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때때로 힘겹다. 집중하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고 작가가 원하는, 혹은 독자가 상상한 것을 전부 채우지 못한다.
건조한 웃음과 아이러니가 결코 의도되거나 계획되지 않았다고 할 순 없지만,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감정과 비애가 철저하게 배제된 채 마른 모래 바람처럼 서걱이는 웃음은 뒷맛이 개운치 않다. 그래서 더 오래 여운이 남는다. 의도된 냉소와 철저한 감정의 절제는 윤성희 소설의 핵이다. 독자의 입맛이 아니라 작가의 성향과 의도에 충실한 소설이라는 느낌이다. 그것이 거부감없이 흡입될 수 있는 것은 낯 상황과 인물 그리고 문장 사이를 흐르는 긴장감이다. 쉽게 그 유혹을 떨칠 수가 없다. 긴장감이 유혹이라니? 누가 누구를 유혹하는가.
다양한 소설 전달 방식은 전달 내용과 형식과는 또 다른 방식의 재미와 즐거움, 사유 방식을 통해 지적 유희를 가능케 한다. 소설의 스토리만 보는 독자는 없겠지만, 또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지만 색다른 맛과 분위기를 찾는 미식가처럼 윤성희 소설을 더 읽어야겠다는 강한 이끌림이 <거기, 당신?>이 내게 준 느낌이다. 훌륭한 소설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이겠지만 주관적, 개인적 취향에 꼭 맞는 소설이었다. 내용과 형식보다 감정이 배제된 건조한 모래바람이 먼저 불어오는 독특한 윤성희의 소설에 호감을 갖게 됐다. 대중성과 문학성에 대한 지루한 논쟁은 제쳐두고 일단 읽어보면 색다른 소설적 상상력과 만나게 된다.
말을 아끼는 태도와 응축된 언어의 힘을 보여주는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는 ‘거기’에 ‘당신’은 누구냐고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060327-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