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고요 문학과지성 시인선 312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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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을 만큼

사진은 계속 웃고 있더구나, 이 드러낸 채.
그동안 지탱해준 내장 더 애먹이지 말고
예순 몇 해 같이 살아준 몸의 진 더 빼지 말고
슬쩍 내뺐구나! 생각을 이 한 곳으로 몰며
아들 또래들이 정신없이 고스톱 치며 살아 있는 방을 건너
빈소를 나왔다.
이팝나무가 문등(門燈)을 뒤로하고 앞을 막았다
온 가지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을 수 없을 만큼 하얀 밥풀을 가득 달고.
‘이것 더 먹고 가라!’
이거였니,
감각들이 온몸에서 썰물처럼 빠질 때
네 마지막으로 느끼고 본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동체(胴體) 부듯 욕정이 치밀었다.

나무 앞에서 멈칫하는 사이
너는 환한 어둑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떤 모습으로든 우울한 날이 있듯이 어떤 자세로든 이제 인생의 황혼녘을 준비할 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황혼으로 비유된 늙음의 시간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인생은 공평하다고 주장한다. 사뭇 진지해 보이는 이 주장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거짓에도 불구하고 나이들어 죽어가는 모든 인간에게 느끼는 연민은 다를 수가 없다. 하얀 쌀밥을 닮은 이팝나무를 보고 느낀 욕정의 끄트머리. 그 환한 어둑발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다. 정년을 마친 노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의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간다. 사물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공명은 소리가 아니라 침묵이다. 한발 더 다가갈수록 소리와 의미 사이의 긴장은 풀어지고 무화된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순간에 침묵보다 더 큰 소리로 내면의 풍경소리 울린다. 그 울림이 실어증의 원인이 되고 침묵의 극치라는 증상으로 나타난다.

실어증은 침묵의 한 극치이니

아 이 빈자리!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누구’가
의자 하나 달랑 남기고 사라지고
오랜만에 만나 사람이
그 ‘누구’와 무척 가깝지 않았어요? 물을 때
느낌만 남는 자리.
목구멍에 잠시나마 머물게 할 무엇이 나타나지 않는....
나름대로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공터만 있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설명이 불가능한 순간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소리로 표현되지 않는 침묵으로 전달되는 소리.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는 시인의 몫이다. 황동규 시의 편력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이렇게 마무리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이 또 다른 시작인지. 외로움보다 즉물적인 ‘홀로움’을 내세운 이 작품이 그를 대변한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시인의 모습에서 나이를 읽어내기 보다 세상속에 풍경처럼 펼쳐진 사물들의 모습과 맑고 조용한 시선들이 만나는 명징한 소리를 읽어낼 수 있다면 <꽃의 고요>는 비로소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

홀로움

시작이 있을 뿐 끝이 따로 없는 것을
꿈이라 불렀던가?

작은 강물
언제 바다에 닿았는지
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
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끝이 따로 없는.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너무 더디게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지독한 반어가 독자들을 화자와 동일시한다. 봄이 짧다는 진술을 이해하는 독자나 느껴본 적도 경험할 겨를도 없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짧은 생에 대한 담담한 목소리가 오히려 슬프게 들린다. 그래서 ‘더딘 슬픔’이 무섭도록 빠른, 혹은 찰나와 같은 순간적인 슬픔으로 전달된다. 꽃이 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꽃이 ‘고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사는 것이 슬프다. 침묵하는 꽃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현실이 너무 차가운지도 모른다.

더딘 슬픔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처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06032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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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당신?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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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은 그렇게 속삭이고는 그녀의 이마를 만져주었다. 어디선가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구두 뒤축이 닳을 거야. 그녀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기다란 그림자가 그녀 앞에 섰다.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당신인가요?

  나는 소설의 경우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물에 대한 시선에는 편견이 숨어 있다는 전제를 인정한다면 편견이 아닐지도 모른다. 남성과 여성의 소설은 작가를 몰라도 구별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그 형식과 내용이 달라서가 아니라 문체와 감성의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 ‘여류 작가’라는 희소성이나 차별적 시선 혹은 한정된 영역의 특별한 대우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분명했다.

  80년대 이후 서영은, 최윤, 김채원, 은희경, 신경숙, 권지예, 김인숙, 전경린 등 문학적 성과면에서 ‘여류’라는 이름을 털어버린 것은 오래된 일이다. 다만 한계라고 명명하기엔 어색한 감이 있지만 특징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수많은 평론가와 문학 연구자들이 쏟아낸 이야기를 반복할 생각은 없다. 이제 그것을 벗어날 필요와 가능성을 가진 작가를 발견한 듯한 개인적 느낌 때문에 떠오른 생각이다. 윤성희의 <거기, 당신?>은 성격이 분명하다. 소설의 주인공들의 성격이 뚜렷한 특징을 보여준다. 게다가 작가가 시도한(?) 문체와 스타일은 나를 사로잡았다. 엉뚱한 상상이지만 내가 소설을 썼다면 이런 식의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소설의 인물을 살펴보자. 현실에 있을법한 개연성 있는 허구라는 기본적인 소설의 정의에서 벗어났다고 할 순 없지만 윤성희가 만들어낸 소설의 인물들은 전형적인 인물로 볼 수는 없다. 이럴 경우 독자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째, 나와 다른 상황과 감정과 생활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거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가 없다. 둘째, 색다르고 특이한 경험으로 대리 경험의 극대화를 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번째의 경우 화려하고 잘나가는 주인공이 아니므로 선망의 대상으로 볼 수 없다. 현실 원칙을 벗어나 쾌락원칙에 충실한 인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현실의 이상이 변형된 형태로 투영된 대상으로서의 주인공이 아니라면 독자들은 불편해하거나 호기심으로 그칠 뿐 절대적인 공감과 깊은 감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단점은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은 소설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어 보이고 적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일상에서 중심에 서 있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단순한 호기심과 재미를 넘어 치열하고 섬세함이 독자를 몰입하게 한다. 보물지도를 찾으러 떠나거나 어린시절 암산왕이었거나 간에 현실에서 그들은 지루하고 흑백영화처럼 특징없는, 오히려 비참하고 어려운 생활속에 함몰되어 있다. 탈출구도 비상구도 없어 보인다. 그들을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는 뭔가? 작가의 의도보다 독자의 반응은 어떠한가?

  다음은 윤성희 문장의 특징이다. 그것을 문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윤성희 소설의 특징이라고 크게 말할 수도 있다. 헤밍웨이의 문체가 대표적인 간결한 단문이다. 그녀의 소설이 그렇다. 비슷한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헤밍웨이를 떠올렸다. 일단 길이가 짧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결코 화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담백해서 가끔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가 두 번 이상 반복되는 복문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고의 흐름과 맥락이 끊길 염려가 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숨가쁘게 다음 문장의 주어에 매달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작가의 의도가 어떠하든 독자는 바쁘다. 평소의 패턴대로 문장을 읽어나가려는 습관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설에 몰입하게 하는 힘이 문체에만 있지만은 않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비약과 생략은 윤성희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으로 읽힌다. 나에겐 그렇다. 생략된 문장 사이의 연결고리와 접점은 물론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음 장면과 상황을 보여준다.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때때로 힘겹다. 집중하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고 작가가 원하는, 혹은 독자가 상상한 것을 전부 채우지 못한다.

  건조한 웃음과 아이러니가 결코 의도되거나 계획되지 않았다고 할 순 없지만,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감정과 비애가 철저하게 배제된 채 마른 모래 바람처럼 서걱이는 웃음은 뒷맛이 개운치 않다. 그래서 더 오래 여운이 남는다. 의도된 냉소와 철저한 감정의 절제는 윤성희 소설의 핵이다. 독자의 입맛이 아니라 작가의 성향과 의도에 충실한 소설이라는 느낌이다. 그것이 거부감없이 흡입될 수 있는 것은 낯 상황과 인물 그리고 문장 사이를 흐르는 긴장감이다. 쉽게 그 유혹을 떨칠 수가 없다. 긴장감이 유혹이라니? 누가 누구를 유혹하는가.

  다양한 소설 전달 방식은 전달 내용과 형식과는 또 다른 방식의 재미와 즐거움, 사유 방식을 통해 지적 유희를 가능케 한다. 소설의 스토리만 보는 독자는 없겠지만, 또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지만 색다른 맛과 분위기를 찾는 미식가처럼 윤성희 소설을 더 읽어야겠다는 강한 이끌림이 <거기, 당신?>이 내게 준 느낌이다. 훌륭한 소설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이겠지만 주관적, 개인적 취향에 꼭 맞는 소설이었다. 내용과 형식보다 감정이 배제된 건조한 모래바람이 먼저 불어오는 독특한 윤성희의 소설에 호감을 갖게 됐다. 대중성과 문학성에 대한 지루한 논쟁은 제쳐두고 일단 읽어보면 색다른 소설적 상상력과 만나게 된다.

  말을 아끼는 태도와 응축된 언어의 힘을 보여주는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는 ‘거기’에 ‘당신’은 누구냐고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060327-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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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창비시선 258
이승희 지음 / 창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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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와 시의 상관성에 대해 한번 쯤 생각해 보았다면, 등단 시기와 첫 시집의 의미를 고민해 보았다면 우리는 시집을 읽어 나가면서 참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고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른 시인들과 시들과 비교하면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지 시에 대한 일종의 편견인지 모른다. 다만 새롭고 신선한, 혹은 낯설고 독특한 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시집을 펴낼 수 시인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한 권의 시집을 대할 때 절대적인 기준과 눈높이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희의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는 시집은 첫 시집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완숙하고 노련하며 안전하다. 97년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해서 99년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65년생 시인의 첫 시집으로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보인다. 시를 대하는 태도나 언어의 사용에 대해서 신인으로 볼 수 없고 나이와 연륜에서 묻어나는 사물에 대한 시선과 깊이가 다작과는 거리가 먼 시인임을 눈치 챌 수 있다. 잔잔하게 응시하는 통찰력과 사유의 깊이가 마음에 닿는다. 기약할 수 없는 두 번째 시집도 읽어보고 싶다.

돌멩이를 쥐고

  둥근 돌이 싫습니다. 그 둥글다는 게, 그 순딩이 같은 모습이 죽이고 싶도록 싫었습니다. 깨트려버리고서야 알았습니다. 둥근 돌 속에 감추어진 그 각진 세월이 파랗게 날 세우고 있던 것을, 무덤 같기만 하던 그 속에 정말로 살아 있던 것은 시뻘건 불을 피워 올리고도 남을 분노라는 것을.
  둥근 것들은 다 그렇게 제 속으로만 날카로운 각을 세우나봅니다.


  이 시집은 4부로 구성되어 1부에서는 과거의 기억에 대한, 혹은 삶의 지난했던 추억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가난과 유년 시절의 결핍이 주축을 이룬다. 누님을 기억하는 시편들에 나타난 그의 삶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쓸쓸하고 외로웠을 화자의 모습은 자연의 대상을 통해 투영된다. 그것은 성장한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시집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시인은 그 외로움 안에서 혼자 놀았고, 그것이 쓸쓸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깨달았을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오랜 시간을 거쳤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돌멩이 연작들은 가슴 속에 아프게 닿는다. 둥근 돌 속에 내재한 ‘날카로운 각’을 들여다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다.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얼마나 배고픈지 볼이 옴폭 파여 있는, 심연을 알 수 없는 밥그릇 같은 모습으로 밤새 달그락 달그락거대는 달

  밥 먹듯이 이력서를 쓰는 시절에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서 시인의 문제는 실존적이다. 저녁을 굶은 화자의 이력서는 달에게 보내는 연서와는 무관하게 냉혹한 현실과 과거의 한 때를 떠올리는 변하지 않는 증거가 된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은 있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결핍과 부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 과정을 통해 결국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인간과 삶’의 문제로 돌아온다. 이승희가 생각하는 사랑은,

사랑은

  스며드는 거라잖아.
  나무뿌리로, 잎사귀로, 그리하여 기진맥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른 입맞춤.

  그게 아니면
  속으로만 꽃 피는 무화과처럼
  당신 몸속으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그것도 아니면
  꽃잎 위에 새겨진 무늬를 따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당신 가슴이 안쪽으로부터 데워지길 기다려 당신의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또 그것도 아니라면
  알전구 방방마다 피워놓고
  팔베개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라고?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먹는 일이야
  뾰족한 돌과 반달 모양의 뼈로 만든 칼 하나를
  당신의 가슴에 깊숙이 박아놓는 일이지
  붉고 깊게 파인 눈으로
  당신을 삼키는 일.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

  사랑은 무엇이다. 무엇이다에 해당하는 서술어는 각자 채울 일이다. 시인의 말보다 앞서 가지 않았다면 찬찬히 읽어보면 된다. 동의할 수 있다면, 공감할 수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면 그뿐이다. 개인적 경험에서 촉발된 언어의 생동감은 쉽게 내면화되지 못한다. 사람과 생에 대해 존재론적 결핍과 열정의 부재에 대해 허무한 시선을 던지는 시인은 이제 어떤 시를 쓰게 될 것인지. 세상에 대한, 혹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도 뚜렷한 성찰도 끝나지 않은 듯한 시인의 이야기들이 궁금하다.

내가 바라보는

처마 밑에 버려진 캔맥주
깡통, 비 오는 날이면
밤새 목?소리로
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
맑게 울고 있다니.
버려진 감자 한 알
감나무 아래에서 반쯤
썩어 곰팡이 피우다가
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
어느날, 그 자리에서 흰 꽃을 피웠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


  세상을 끌어가는 힘이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라고 동의할 수 없지만 모든 감정과 과정에 논리와 이성이 개입하거나 인과법칙에 따라 변해가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어쩌면 ‘그냥’ 흘러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유를 말하기 어려운 모든 순간에 ‘그냥!’이라고 외치는 어린아이의 절규가 내 것일 수도 있다. 답답하고 불가해한 현실을 견뎌내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냥 살아 보는 것이다. 삶에 이유를 달지 말라. 그냥 살아 보자.


그냥

  그냥
  이라는 말 속에는 진짜 그냥이 산다. 아니면 그냥이라는 말로 덮어두고픈 온갖 이유들이 한순간 잠들어 있다. 그것들 중 일부는 잠을 털고 일어나거나 아니면 영원히 그 잠 속에서 생을 마쳐갈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냥 속에는 그냥이 산다는 말은 맞다. 그냥의 집은 참 쓸쓸하겠다. 그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술처럼 그렇게.
  그냥이라는 말 속에는 진짜로 그냥이 산다. 깊은 산그림자 같은, 속을 알 수 없는 어둔 강물 혹은 그 강물 위를 떠가는 나뭇잎사귀 같은 것들이 다 그냥이다. 그래서 난 그냥이 좋다. 그냥 그것들이 좋다. 그냥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들의 물살이 가슴에 닿는 느낌이 좋다. 그냥 속에 살아가는 당신을 만나는 일처럼.



06040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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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의 속살 - '모국어의 속살'에 도달한 시인 50인이 보여주는 풍경들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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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 이성복, ‘연애에 대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중에서

  지금까지도 가슴에 깊이 박혀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는 고종석의 고백이 가슴을 덥혀준다. ‘내 나이에 좀 주착스럽’다고 말하는 그의 멋쩍은 표정을 상상하는 일은 잔잔한 미소를 만들어 낸다. 시는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비실용적인 장르 중의 하나이다. 어디에도 써먹을 데 없는,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시詩’를 읽어주는 남자 고종석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는 서문에서 시는 사람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라고 말한다. 이것이 시를 읽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의 동의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을 펼쳐든 독자들의 기본적 관심을 전제로 한다면 그의 유혹(?)을 쉽게 떨치지 못할 것이다. 시는 실용적이진 않지만 인간이라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런 예술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모국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축복을 우리는 충분히 즐기며 살아가지 못한다. 눈에 비춰지는 감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아름다움은 1차적이지만 영혼에 투영되는 사유의 즐거움은 언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시는 그 한 복판에 우뚝 서서 홀로 외롭다. 그 성스러움과 상스러움의 가장 자리에서 우리는 주변과 경계만을 기웃거려도 나의 즐거움이 사라지진 않는다. 산책과 명상 그리고 독서로 가득한 삶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한 권 읽어 보라. 우리말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의 진경을 보여주는 50권의 시집은 고종석의 주관적 판단으로 넘겨버리기엔 그 부피와 중량이 만만찮다.

  <모국어의 속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시집 한 권, 한 권의 서평에 가까운 가벼운 내용으로 가득하다. 길이 않은 글 속에 한 시인의 특징과 시세계를 적확하게 짚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래 벼려온 우리 말에 대한 애정과 감각들이 살아 숨쉬는 글을 만들어 내는 일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는가. 고종속의 <모국의 소살>은 현대시 100년을 돌아보는 기념비적인 대작도 아니고 대표작가의 대표작품을 섭렵하는 어설픈 교양주의와 가벼운 문학 특강도 아니다. 이 책이 성공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당연하게도 저자의 시에 대한 안목과 나름의 기준과 분석, 그리고 개성적인 문장에 있다. 고종석 스스로 우리말의 ‘속살’에 대한 활용 능력이 뛰어나다. 부드럽고 단정하면서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말투가 쉽지 않다는 것을 독자는 이내 눈치 챌 것이다.

  시인 공화국의 시민들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염두에 둘 것은 선발 과정이다. 김소월부터 얌전하고 지극히 당연하게 시작하는 것 같지만 김정환, 김영승, 노향림에서부터 오규원, 김지하, 김기택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의 살고 있는 연대와 마을을 짐작하기 어렵다. 그만큼 현대시의 막과 장을 나누지 않고 종횡무진 내키는 대로 또는 마음 가는대로 선별하고 그 시집들을 읽어주고 있다. 어느 한 쪽에 기울어 있거나 치우친 느낌이 없다. 다만 ‘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존재하는 것인가를 살펴야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지만 고종석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이 관문을 통과한 듯 보인다.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역량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개나 소나 시와 관련된 에피소드와 내가 좋아하는 시를 뽑아 책을 내는 것은 출판계의 오랜 장사속이다. 고르는 기준과 안목을 가늠하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 지극히 주관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들이 아니라 그 시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삶에 관심을 갖는 방법은 절대로 옳지 않은 시읽기 방법이다. 시는 그저 아름다운 우리말의 ‘속살’을 훔쳐보는 두근거림이 있어야 한다. 시가 말하는 방식이 항상 우아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기도 하고 공허한 말장난으로 독자들을 우롱하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시인을 욕할 필요는 없다. 시가 전하는, 언어가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의 언저리를 따라갈 뿐이다. 그러다 보면 시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시인들이 말하기 전에 느껴지기도 한다. 그 언어는 머나먼 나라의 외국어가 아니라 일상에서 늘 사용되고 있는 우리말이다. 우리말의 표피와 껍질을 벗겨 낸 속살의 다양한 층위를 맛보고 감상하는 즐거움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허위는 허위를 유포하는 자가
살아있 한 죽는 법이 없다
진실은 진실을 유포하는 자가
죽어도 죽는 법이 없다
- 김남주, ‘공식’, <조국은 하나다>중에서



06042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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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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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삶에 대한 부족한 통찰력 때문이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에 대한대리 경험과 비록 유추의 방법이긴 하지만 타인의 인생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 물론 그 욕망은 단순한 소설 읽기를 통한 재미와 감동을 넘어선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고민과 애정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야트막한 산의 나무의 빛깔이 햇빛에 반짝이는 순간,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내 ‘삶이란 무엇인가’하는 아주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에 부딪힌다. 대략 난감하다. 언제부터였는지, 혹은 언제까지일지도 모르는 이 부질없는 생각과 고민들은 어쩌면 모든 순간들을 견뎌내게 하는 힘이고 현재를 확인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나는 소설을 선택한다.

다양한 소설가들과 만나는 일은 공허한 울림의 대화보다 농밀한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지나치게 관심과 조명을 받아온 작가 ‘김훈’은 부담스러웠을거라는 짐작을 해 본다. 환갑을 눈 앞에 두고 그의 첫 소설집이 나왔으니 그의 문학적 성과와 무관하게 평범하지는 않은 일이다. 국내의 권위있는 상들을 휩쓸며 문학적 성과를 검증(?) 받은 김훈의 소설집을 읽고 나서야 김훈이 제대로 보인다. 지금까지 김훈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문체만을 즐겼다. 특히 <현의 노래>의 경우 내용과 상관없이 아무 데나 펼쳐들고 읽어도 눈부신 그의 문장과 만나게 된다. 그저 아름다운 문장 속에 빠져들다 보면 내용은 허공을 맴돈다. 정확하고 살아있는 수식과 표현들은 한국어의 또 다른 영역을 보여주는 소설들로 기억될 것이다. 소설가에게 문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김훈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소설집 <강산무진>은 여덟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소설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들은 선명하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에 대한 탐구 정신이다.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든 없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대기업 중역이든 택시기사이든, 복서든 등대 수로직 공무원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가 압권이다. 직업의 속성과 성향을 단순한 관찰만으로 그려내는 방법은 옳지 않다. 그 직업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가 사실 더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김훈은 일단 철저한 취재와 관찰로 직업의 속성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상황과 직종이 가져올 사건들을 내용 속에 기막히게 녹여낸다. ‘머나먼 속세’처럼 링 위에서 권투를 하는 선수의 눈을 통해 1인칭 시점으로 상대방을 읽어내는 내면 서술은 1라운드가 끝나고 2라운드가 이어지듯 불연속적인 소설의 흐름을 보여준다. 복서의 상황이 아니라 그가 걸어온 시간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른 상황과 시간 속에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새롭다.

주인공들은 대개가 중년 이후의 삶을 보여준다. 인생의 저물녘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심리는 서늘하고 쓸쓸하기보다 공허하다. 젊은이의 열정이 보여주는 삶의 활력이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삶의 비애가 주인공들을 통해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 적확한 묘사와 서술에 감정은 배제된 채 ‘개연성 있는 허구’인 소설을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모든 죽음과 이별에 ‘돈’이 개입된다. ‘언니의 폐경’, ‘강산무진’ 등에서 보여주는 죽음은 모두 ‘돈’으로 정리된다. 일상과 현실을 지나치게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그의 방법들이 오히려 불편하다. 환상과 욕망의 실현이 아니라 현실과 구체성의 철저한 보여주기에 충실하다. 김훈의 매력은 문체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미시적 관찰과 정확한 관찰에 있다.

중년 이후의 삶에서 사람들은 인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생활을 보여주고 일상을 이야기한다.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는 우리의 삶을 김훈은 ‘허무’하게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감상도 준엄함 심판도 없다. 인생은 이것이다라는 전언도 없다. 그저 담담하게 삶의 순간들과 지루한 일상과 비루한 죽음과 인간의 본질을 담아낸다. 그것을 담아내는 김훈의 방식은 낯설고 각박하다. 소설들의 결말은 죽음이나 허무에 대한 김훈의 태도를 보여준다. 극적 반전과 긴 여운에 대한 유혹을 이겨낸 냉정하고 단호한 결말이 오히려 긴 울림을 준다.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를 통해 시간과의 대화를 시도했던 김훈이 이제 <강산무진>을 통해 ‘지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분명히 매혹적이거나 아름답지 않다. 생의 단면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담아내는 것이 단편의 미덕이라면 김훈은 장편 뿐만 아니라 단편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그의 단편이 더 읽고 싶다. 다작과는 거리가 먼 작가이기 때문에 기다림에 값하는 그의 다음 작품을 또 기다린다.

걸출한 대가의 탄생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입견을 갖지 않고 김훈을 읽는다면 참 많은 것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다음 작품을 기다릴만한 작가를 갖게 되는 것은 독자에게도 큰 기쁨이다.


06042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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