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이야기들
발터 벤야민 지음, 파울 클레 그림, 김정아 옮김 / 엘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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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글을 읽으면 자꾸 스페인 국경을 넘지 못해 자살을 결심한 절망과 마주하게 된다. 누구나 그러하듯, 출구 없는 바닥의 서늘한 촉감으로 모골이 송연해진 경험이 떠오른다. 역사에 가정법이 없지만, 그가 미국으로 망명했더라면 어떤 글을 남겼을까. 아니 요절한 천재들의 마지막이 바로 그 순간이어서 비극적으로 찬란해졌을까.

플라뇌르flâneur. 도시의 한가한 산책자이자 날카로운 눈빛으로 파리라는 텍스트를 읽는 사내.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텍스트 안에서 유영하는 여유를 선물한다. ‘재미’의 기준과 종류가 다르니 어떤 책의 재미를 논하는 건 온당치 않다. 아니, 용어의 차이겠으나 어떤 방식으로든 이 책은 벤야민의 텍스트에 곁들여진 파울 클레를 들여다보는 재미를 더했다. 독일의 화가 이름이 갑작스레 현실을 소환하더라도 외면하자. 혹시, 그 혹은 그녀를 떠올리는 순간 모든 걸 망칠 수 있으므로.

꿈꾸는 플라뇌르, 땅과 바다를 지나 놀이와 교육으로 엮인 글들은 파편적 인상을 전한다. 형식과 내용의 자유가 몽환적 상상력과 날 선 감각을 일깨운다. 일상적 반복과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라던 신현림처럼, 경계를 무너뜨리고 틀 밖으로 삐져나올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뭐라 부르든, 그들이 남긴 생각들과 그림, 음악, 건축…… 그것이 인류의 꿈이었고 미래렸다면, 지금-여기는?

상상하는 것과 소유하는 것의 문턱을 이미 넘어서 있는 그리움. 그런 그리움은 이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 뿐이다. 그리운 사람은 이름 속에서 생명을 얻고 몸을 바꾸고 노인이 되고 청년이 된다. 이름 속에 형상 없이 깃든 그는 모든 형상의 피난처다. - 「너무 가까운」,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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