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윤대녕 지음 / 중앙일보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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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5. 28

 

윤대녕,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1995


지금은 절판되었습니다. 중앙일보사에서 1995년에 나왔는데,
중앙일보의 출판 담당 부서는 1997년 중앙M&B라는 이름으로
독립적인 계열사로서 갈라져 나왔지요.

이 책,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는 소설을 특별히 좋아하거나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며칠 전 우연히 집안의 서랍을 뒤지다가, 오래 전에 이 책을
읽고 쓴 글을 발견했습니다. 예전에 썼던 글은 모두 5.25인치짜리
디스켓에 들어 있어 지금 볼 방법이 없거나,
예전에 한번 노트북 하드를 날렸을 때 모두 날아가 버려
가진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글은 종이에 출력해 놓았네요. 그래서 기념으로
그냥 한번 소개합니다.


<'거기'와 함께 '여기' 살기>

이 소설은 한 남자의 자아 찾기 여행기이다. 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과거'를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제안이다.

"오랫동안 나에 대해 타인처럼 살았"던 '나'란 남자,
그가 자신에 대해 타인처럼 살았던 이유가 별거 중인
아내 때문인지(아내는 자신의 존재를 불안하게 여긴
나머지 스스로 불행해졌으며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든다)는 확실치 않다. 아마 아니리라.
그가 별거하고 직장을 그만둔 것은 계기에 불과하리라.
그는 그 전에 과거를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던 아내와 결혼했다.

그가 어느 순간부터 과거의 인물이 보내 오는
무차별 암시를 통해 과거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거를 찾음으로써 유진에게서 벗어나
선주와 진정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선주가 "낯설고 추운 곳"으로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유진의 허깨비가 아니라
선주 자신이 되었다. 선주가 갔던 "낯설고 추운 곳"은
유진의 백조 자리가 아니었을까?

'나'는 '거기'를 잃고 살았기에 '여기'에서
실존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부유(浮遊)해 왔지만
'여기'에 있는 '거기'를 찾은 뒤
'거기'에 있는 '여기'에 묶여 버린 E의 굴레를
떨쳐 버렸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왜, 어떻게 해서
유진과 희배를 잃었을까? '나'는 유진이 죽은 뒤
정신병원에 갔다 오고 나서 유진과 희배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 유진은 실존의 무의미함을 전도하는
전도사였다. 그녀는 시간의 반대편에 가고 싶어했다.
'나'는 실존의 무의미함을 몸서리 쳐지게 체험한 뒤
자기 보호 본능에 의해 그 기억을 잃었을 것이다.
실존이 다름아닌 실존 그 자체임을 깨닫기 위해
그는 오랜 시간을 돌아온 셈이다.

때로 나(소설 속의 '나' 남형섭이 아니라
이 글을 쓰는 나)는 스스로 역사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잊는다. 내가 존재하고 이 순간을 살아가기까지
각종 행위와 관계가 있어 왔다. 사람들은 모두,
아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역사를 가진다.
그런데 때로 자신을 단지 중력에 묶인 물리적 존재로
인식할 때가 있다.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운
물질 - 그런 물질이 실제로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렇게 느낀다.

또 때로는 그런 느낌마저 없이 자동 인형처럼
반사적인 동작만 한다. 아침에 눈 뜨고 밥 먹고
세수하고 걷고 전철 타고 일하고 다시 걷고 전철 타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우연히 몇 달 전의 나,
1년 전의 나, 3년 전의 나, 10년 전의 내가 했던
말과 행동, 맺었던 관계를 깨닫고 퍼뜩 놀란다.
나는 어쩌면 그렇게 '자신에 대해 타인처럼' 살았을까.

반대로 예전의 기억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다. 그냥 거리를 지나다가도 전에 내가 했던
말이 생각나 얼굴을 찡그리고 입술을 깨물기도
한다. 과거를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중학교 때 국민학교 시절을 돌아보기도
싫어했고 고등학교 때는 중학교 때를,
대학교 때는 고등학교 때를 회상하기 싫어했다.
꿈에서 예전의 기억을 왜곡된 형태로 보기도 한다.

과거는 완전히 단절된 듯싶다가도 자꾸자꾸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상황으로, 내 태도와 행동으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과거를 바라보는 방법은?

윤대녕은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순환선이 아니라
나선형 궤도를 보여 주었다. 과거를 바라보는 방법은
내려다보는 것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이되
양과 질에서 다르다. 소설 속의 '나'는 과거를 잃고
자신에 대해 타인처럼 삶으로써 궤도를 이탈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소설의 내용에 공감하면서도
이 소설을 이루는 구성 요소에 나는 불만이 많다.

우선 주인공의 '드라이'하고 '쿨'한 태도와
예술 취미에서 서투른 무라카미 하루키 냄새가 난다.
작가가 들으면 몹시 섭섭하겠지만 할 수 없다.
'상실감이 충일한' 무라카미 하루키에 비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유물론적이고 실존적이다.
유물론적이고 실존적인 건 좋은데 잠시 일탈하여
허무해졌다. 아니, 그것까지 좋은데 왜 선천적으로
'드라이'하고 '쿨'한 듯한 흉내를 내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별거중인 '나'는 선주에게 이런 말을
다 한다.

"그러니까 서둘러 결혼하라니까. 혼자서 마음을
조율하며 살기엔 이미 나이가 차버린 거야.
평형감각을 잃지 않고 살려면 우선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야 해."

갑자기 웬 고리타분한 결혼관?

그리고 '~고 있었다'는 어미를 비롯해서
일본어를 번역한 듯한 어투가 소설 전체에 넘쳐난다.

"그러나 입이 미어져라 국수를 밀어넣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녀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무언가 견디질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저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본문 77쪽)"는 식이다. '국수를 밀어넣는'
'못하기' '저런다는' '깨달았다'고 하면 될 것을.

조사 '의'가 필요없는 부분에서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살아 있는 것들과 다시 만나게 되고
시간과 박자를 맞춰 또 미래로의 여행을 계속하는
거야......(본문 141쪽)" 그냥 '미래로 여행을
계속하는 거야'라고 하면 되는데.

작가란 '말'을 가지고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인데
자신이 도구로 쓰는 '말'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단지 문법에만 맞으면
우리말이 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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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7. 4

 

원제가 千と千尋の神隱し라고 하길래, 千은 '센'이고, '千尋'은 치히로,

그럼 '神隱し'는 뭐야? 싶었지요. '행방불명'이라면 일본에서도 같은 한자어를

쓸 텐데 말이에요.

 

가미가쿠시(神隱し)란  어린아이가 사라진 걸 가리키는 말이래요.

그런데 일본에선 산신이나 텐구(天狗)란 괴물이 이런 일을 잘 저지른다고

생각한대요. 그러니까 가미가쿠시란 그 한자대로 '귀신이 숨겼다'는 뜻이지요.

텐구는 얼굴이 빨갛고 코가 높은 괴물이라는데,

생각해 보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마녀 유바바가

얼굴이 빨갛고 코가 높게 생겼네요. '서양의 마귀할멈'처럼 생겼잖아요.

어린아이가 신들의 세계에 잠깐 다녀오는 일,

<이웃의 토토로>에서도 메이가 그러잖아요?


그런 경우를 뜻하는 말이 우리말에 있나... 없는 것 같아요.

어린아이가 없어졌다, 하면 유괴, 실종, (말 그대로) 행방불명, 뭐 이런

살벌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그런 말이 왜 우리말엔 없을까, 생각하다가

그런 말이 어떻게 일본말엔 있을까 도리어 궁금해졌어요.

어린아이가 잠시 없어지는 일...은 있지요. 놀러 가서 길을 잃기도 하고

식구들 모르게 옷장 속에 숨어들어서 잠들어 버리기도 하고.

그런 일을 신이 숨겼다고 생각하다니, 재미있잖아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각본, 감독 작품다운 면모를

보입니다만, 이전에 본 작품들하고 다른 점이 두 가지 눈에 띄었어요.

 

첫째는 치히로라는 여자아이, 다리가 아주 길고 가늘다는 점입니다.

얼굴은 땡그란데... 전의 작품에서는 글쎄, 다리가 긴 편이긴 해도

다른 일본만화에서 보이는 심한 체형 왜곡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동양인 체격을 보기 좋게 잘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치히로의 다리는 유난히 길고 너무 가늘었어요.

요즘 일본 아이들의 체형이 그렇게 바뀌어서 그런 건지.

 

둘째 개인이 구원되는 데 그쳤다는 점.

하야오의 작품뿐 아니라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내놓은 작품은 모두

공동체의 문제 해결을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공동체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결말은 치히로의 가족이 원 상태로 돌아가는 걸로 끝나거든요.

돼지로 변한 다른 사람들은?

그리고 아파트 건설로 삶의 터전을 잃었던 하쿠가

이제 마녀의 제자 노릇을 그만두겠다, 그리고

치히로에게 앞으로 꼭 다시 만날 거라고 약속하긴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될지는 알 수 없어요.

 

뭐, 열 살짜리 여자아이의 가미가쿠시를 소재로 삼은 거니까

그 아이가 부모의 품에 다시 돌아가는 걸로 끝나는 데 그쳤다고도 할 수 있지만.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습니다.

치히로가 부모를 구하기 위해서는 계약에 의해 마녀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치히로는 시험을 받아들입니다. 아기 보우가 시험을 무효로 하려고

힘을 쓰고 있었는데... 규칙은 규칙이다, 이건가요?

글쎄, 전 잘못된 계약에 의한 일방적인 규칙은 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

아니면, 그들의 세계에는 그들 나름의 규칙이 있고

우리는 그걸 존중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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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05-19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가와카미 히로미라는 일본 작가가 쓴 소설집 [뱀을 밟다]에도 가미가쿠시를 소재로 삼은 <사라지다>란 단편이 있습니다. 사뭇 다른 환상을 다룬 소설이지만.
 
캔디 캔디 애장판 1 - 흑백
미즈키 쿄오코 글, 이가라시 유미코 그림 / 하이북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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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5. 20

 

이가라시 유미코, <캔디 캔디>, 전 9권, 하이북스


이 만화를 모르는 사람도 있기는 있겠지요, <캔디 캔디>.
텔레비전 만화영화로도 만들어져, 그 만화는 안 봤더라도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는 주제가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 만화.

일본에선 고단샤(講談社)라는 출판사에서 1975~1977년에 출간했다는데,
고단샤는 꽤 역사도 깊지만 지금도 갖가지 책을 다 내는
아주 큰 출판사지요.

제가 국민학교 다닐 적에, 그러니까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
최초로 소장한 만화책이었지요.
그때 표지에는 한글로 "캔디♡캔디"라고, 가운데 하트가 있었어요. ^^;

국민학교 5학년인가 6학년 때쯤에,
매일이다시피 가는 동네 서점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추리소설 따위를 한 권씩 살 수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 나를 데리고 가서 책을 사 주었는지
아니면 내가 돈을 들고 가서 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좁은 서점의 서가 앞에서 이 책 저 책 한참 들여다보곤 했던 기억으로
보아 어른이 따라오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9권짜리로 출간된 만화 <캔디 캔디>도
그렇게 한 권씩 사서 모았더랬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에게 빌려주다 보니, 한 권 한 권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요. 오호, 통재라~
만화책으로 먼저 캔디를 본 저는, 그 후 텔레비전에서
만화영화로 할 때는 별로 잘 보지 않았습니다.
책으로 먼저 보고 난 다음에는 영화가 재미없기 일쑤이니까요. ^^;
그리고 왠지 만화영화 속 캔디의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들었답니다.

그리고 10년쯤 뒤... 대학 3학년 때이던가요,
과외를 가르치던 아이에게 캔디 만화책을 빌릴 수 있었어요.
저녁 8시쯤부터 보기 시작해서 새벽 4시까지,
펑펑 울면서 다 보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지, 국민학교 땐 캔디를 재미있다고만 생각했지
보고 울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대학 때 보니까,
캔디라는 여자아이의 힘든 삶, 그 꿋꿋한 자세에
눈물이 줄줄 흐르지 뭡니까.
저, 책이나 영화 보고 잘 안 웁니다.

그 후 텔레비전의 어느 주말 프로그램에서,
홍경인이 여장을 하고 캔디로 분해 짤막한 코믹 드라마를 연기했는데,
그때 캔디가 어려운 상황에서 눈물만 훌쩍이고
남자들의 도움을 받아 곤경에서 벗어나는 여자아이로 그려져
화가 났더랬습니다.

캔디는 "울면 안 돼" 하고 다짐하는 아이입니다.
남에게, 특히 남자에게 의지해서 살 수도 있었는데,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 열심히 생활하는 여자입니다.

예쁜 남자들이 포진한 만화, 그들 모두의 사랑을 받는 캔디,
이런 도식적인 구도가 분명하긴 하지만,
이른바 '사랑'이 중요한 갈등 구조이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동력이 되긴 하지만,
누구와 누구와 맺어지는 데 이 만화책의 종결이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도, 인생도 스스로 선택하는 캔디.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났을 때
이른바 '애장판'이라 하여 두꺼운 네 권으로 묶여
<캔디 캔디>가 팔리는 것을 종로 지하상가에서 보고, 샀습니다.
아마 해적판으로 이런 저런 수상한 출판사 몇 군데에서 나온 모양인데,
읽다 보면 중간 중간 몇 장씩 건너뛴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인쇄도, 제대로 된 필름을 가지고 한 게 아니라
만화책을 복사하다시피 해서 그림이 군데군데 뭉개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이렇게 산 네 권짜리 '애장판' 캔디를 보고,
두 번째로 펑펑 울었습니다.
다 아는 내용인데도 그렇게 눈물이 나다니.

그리고 올해 초에, 마침내 <캔디 캔디>가 다시 9권짜리로
나온 것을 알았습니다. 판권을 보니 2001년 3월 출간했더군요.
지난달 9권 전집을 샀는데, 사무실 직원들이 모두 돌려 보고는,
마지막으로 제 손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지난주 토요일에 붙잡고 읽었답니다.

이제 나이 들어 마음이 메말라, 울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세 번째.

그런데 울면서도 예전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어요.
이 만화는 배경을 모두 미국이니 영국으로 삼고,
등장 인물 역시 모두 미국이나 유럽의 백인이지만,
등장인물들의 관계나 사고방식이 모두 철저히 일본식이라는 겁니다.

사실 미국이 배경인데도 흑인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부터 그렇지요.
만화 종반에 1차 세계대전(1914~1917)이 터지는 것으로 보아
캔디는 1899년쯤 태어나 1910년대를 살아가는데,
1860년대 전반 미국 내전(이른바 남북전쟁, American Civil War를 왜
남북전쟁이라고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남북전쟁은
6.25 아닌가?) 이후 흑인들은 농촌에서는 농장 노동자로,
도시에서는 공장 노동자로 사회의 하층 계급을 형성했지요.

이건 앵글로색슨계 백인을 동경하는 자세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당주의 뜻에 좌지우지되는 대가족...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 일본의 법률은 가족을 호주제로 묶어 놓아,
호주(그러니까 집안의 주인) 아래에 모든 가족이 법적으로나
관습적으로 종속되었습니다.
그런 일본식 호주제가 일제 강점기에 우리 나라에 들어왔고,
일본은 패전 후 그 법률을 고쳤는데,
오로지 남한에서만 아직 호주제가 그 위세를 떨치고 있지요.
그리고 호주제 폐지가 논의될 때면
전국의 유림이 들고 일어나 우리 고유의 문화를 없애려 한다고
벌떼같이 떠들어대니, 통탄할 일입니다.

아무튼, 아드레이 집안은 윌리엄 '할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모든 일이 좌지우지됩니다. 이 윌리엄이 전면에 나서지
않을 때면 이인자, 에르로이 할머니가 집안을 휘두릅니다.
캔디에게 쏟아지는 다른 가족의 횡포를 막아 주는 건
바로 윌리엄의 이른바 '변덕'이지만,
그리고 윌리엄은 이러한 가부장의 지위에서 벗어나려
애쓴 자유주의자로 그려지지만,
결국 윌리엄은 대가족의 가부장으로서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모두, 윌리엄의 명령에 꼼짝도 못합니다.

사유제 질서 속에서 어느 나라나
상류층은 가부장제의 질서를 유지한다지만,
이런 극단적인 가부장주의는 극히 일본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의 일본은 법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렇지도 않지만,
아직도 일본 영화를 보면 일본 가정 속 여자의 지위는
여전한 느낌입니다. 뭐, 영화는 현실을 반영할 뿐
진실 그 자체는 아닐지 모르지만 말이지요.

그러나 만화 속 등장인물의 말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캔디는 왈가닥처럼 굴 때는 다른 남자 친구들에게
반말투로 말하지만, 진지한 자세를 보일 때는
존대말투를 씁니다. 일본어를 잘은 모르지만,
일본어에는 여자 말투와 남자 말투가 따로 있어서,
여자 말투는 공손한 존대말투로 번역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왈가닥인 캔디도 성실하고 진지할 때는 여자 말투를 쓴다는 것...

안소니, 테리, 스테아, 아치는 모두 캔디의 친구인데,
특히 사랑을 느끼는 상대인 안소니와 테리에게 말할 때
캔디는 존대말을 씁니다. 안소니와 테리는 반말을 쓰고!
허허...

그리고 애니나 스잔나는 얌전하고 여자다운 성격이면서
남자에게 접근할 때는 참으로 노골적입니다.
겉으로 활발해 보이는 여자가 도리어 연애 감정에는
솔직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내성적이라 잘 나서지도 못하는 여자가
그토록 적극적이라는 데 일본 여자들의 성격을 떠올립게 됩니다.
얌전한 애니와 스잔나가 그런데,
적극적인 악녀 이라이자가 안소니나 테리를 대하는 태도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우리 나라 작가가 지은 만화라면 이렇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가끔, 상황 연출이 치밀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를테면 멕시코 농장에 팔려 간 캔디가
아드레이 가문의 양녀가 되어 돌아왔을 때,
그 사실을 미리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캔디를 보고 안소니, 스테아, 아치는 매우
놀라면서도 반가워하는데,
다음 순간 바로 이 세 사람이 미리 준비된 캔디의 방으로
캔디를 안내합니다. -.-
(소설을 각색하면서 줄거리를 과감히 축약하느라 그렇게 된지도.)

또 종반부에서 데이지라는 잠깐 나오는 여자가 닐에게
"오페라를 보고 콘서트에 간 다음에 미술관을 관람하고 싶다"고 말하는데,
오페라는 보통 저녁 7시, 8시에 시작해서 두 시간 정도 하는데,
그럼 오페라가 끝난 밤 9시, 10시에 시작하는 콘서트는 뭐며,
그 콘서트가 끝나는 밤 11시, 12시까지 문을 여는 미술관이
어디 있다는 말인지!

만화를 읽는 내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그런 저런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도 <캔디 캔디>가 다시 없을 명작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이 만화는 미즈키 교코라는 작가의 소설을 각색한 것이라는데,
1998년인가 원작자 미즈키 교코와 만화가 이가라시 유미코가
캐릭터 저작권을 놓고 소송을 벌였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미즈키 교코는 인물 캐릭터가 소설 속 묘사에 근거한 만큼
자기도 권리를 갖는다는 주장이고,
이가라시 유미코는 인물의 외모 등이 기본적으로 소설에
묘사되었다 해도 그걸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한 것은
만화 작가의 독창적인 상상력이라고 주장한다는 이야기였어요.

"원작자 측의 얘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1995년에
'작품을 이용할 경우에는 쌍방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작년에 만화가 측에서 단독으로 도쿄도내에 스티커 사진기를 설치했으며
홍콩에서의 단행본 출판 계약을 맺은 사실이 발각되었다.
또한 복제 원판도 판매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모두 원작자의 허가가 없었던 것으로
약 150만엔의 손해배상 등을 요구하여 도쿄법원에 제소했다."
- DSD Today News World, 1998. 12. 4

이 재판의 결과는 알 수 없는데,
azn4.n4.co.kr에 2000. 4. 25자로 올라온 소식은 아래와 같습니다.

"작년 10월 「캔디♥캔디」의 유명 만화가 이가라시 유미코가
자신이 그린 「캔디♥캔디」 캐릭터를 무단으로 배포 및 판매했다는 이유로
원작자 미즈키 쿄코를 고소하여 화제가 되었던 사건의 결과가 3월 17일 발표되었다.

판결의 내용은 미즈키 쿄코가「캔디♥캔디」의 원작자로서
원작에 대한 저작권은 갖고 있지만 이가라시 유미코가 창조한 캐릭터에 대한
저작권은 가질수 없으니 향후로는 「캔디♥캔디」의 캐릭터를
무단 판매하는 행위를 금한다는 것.

그러나 이번 판결에 대해 원작자 미즈키 쿄코는
"원작자는 스토리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에 대한 컨셉트도 제공하기 때문에
당연히 캐릭터에 대한 저작권을 행사할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
3월 30일 도쿄 근교에서 항의 시위를 펼쳐 주목을 끌었다."

흠... 그런데 이 두 작가의 나이는 대체 어느 정도 되었을까요?
책에 태어난 해는 밝히지 않고 생일과 별자리만 나와 있네요.
이가라시 유미코는 1970년에 데뷔했다,
미즈키 교코는 열여덟 살 때 주니어 소설 신인상을 수상해 데뷔했다,
이 정도만. 별자리는 왜 알려 주는 거지?


****

현재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면
9권짜리 <캔디 캔디>는 안 나오고 5권짜리 애장판만 뜨며,
그나마 모두 품절이군요. 아쉽다.-2004.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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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루시의 우리 무당 이야기
황루시 / 풀빛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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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3. 11

황루시 지음, <황루시의 우리 무당 이야기>, 풀빛
2000년 9월 초판 1쇄 발행

표지에 “무속 문화 이해의 길잡이”라는 말이 부제처럼 붙어 있습니다.

저는 무속, 무당, 굿 같은 것하고는 영 상관없이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집에서 굿을 한 번쯤 벌였을 법도 한데,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시골에서 자랐다면 서낭당이나 정월의 마을굿을 보았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나고 자란 수원은 (지금의 수원이나 당시의 서울에 비하면
매우 작은 도시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도시였거든요.
어쩌면 나름대로 새마을운동의 기수(?)였던 아버지의 영향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일례를 들면 고스톱이 있습니다.
또래 친구들을 보면 보통 고스톱을 집에서 어른들 노는 것을 보고 배웠던데,
전 화투라면 할머니가 아버지 몰래 재수떼기 하는 것 정도밖에 본 게 없어
지금도 고스톱을 칠 줄 모릅니다. 아버지께서 질색하셨거든요.

그리고 요즘은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 어린 시절
무속은 타파해야 할 미신으로 교육받았습니다.
게다가 제가 청소년기에 교회를 다녔으니
(보수 기독교계의 배타성을 아시지요?),
무당이나 굿은 절대 가까이할 대상이 아닌 것으로 여겼지요.

하지만 2001년 12월 24일(크리스마스이브로군요),
약속 시간을 기다리느라 들어간 서점에서 이 책을 사 들고 나온 것은,
나이 들면서 막연히 키운 궁금증 때문일 겁니다.
우리 조상들은 세상을, 우주를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였을지,
신과 소통한다는 사람들의 의식 세계는 과연 어떠할지...
일제 통치와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뒤죽박죽된 우리 문화의 원형을 찾으려면
무속은 배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 탐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를 보면서 자연의 힘을 두려워하고
자연 만물의 신성을 믿는 심성이 (일본뿐 아니라)
우리 문화에도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한국신화 탐사”라는 강좌를 듣기 시작한 올 1월에나
책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이 책을 찾아 책장을 넘겼어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옛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우주를, 자신이란 존재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어떻게 세계관과 가치관을 구축했는지 궁금합니다.
그 비밀을 암시적으로든 은유적으로든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신화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 나라의 신화에 관한 책을 슬금슬금 모으고 있는데,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워낙 게을러 무슨 계기가 있어야
비로소 책을 읽는다니까요.
그런데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나라의 신화는 대부분
굿에서 무당이 부르는 무가로 전승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무가에 신화가 나오느냐면,
굿은 여러 신을 모시고 제물을 바치며
여기 모인 사람들을 굽어 살피소서 비는 자리인데
(혹은 슬픈 넋을 무사히 저승으로 데려가서
편안히 쉬게 하소서 하고 비는 자리인데),
신을 모시는 과정에서 그 신의 내력을 죽 읊습니다.
그래서 무당은 이 땅과 하늘, 사람이 처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창세신화),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어떻게 신이 되었는지(제석본풀이 - 당금애기 등),
저승으로 넋을 데려가시는 신이 어떤 신인지(바리공주 등),
우리 마을을 지키는 신(서낭님), 우리 집을 지키는 신(성주신)의 내력 등등,
굿의 목적과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신화를 구연합니다.

신에게 바치는 노래라면 그 신의 내력을 다 읊을 필요가 없을 텐데,
역시 굿은 산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굿판에 모인 사람들에게, 지금 모시는 신은 이러이러한 신이니
믿고 맡겨라 하는 뜻에서 무가를 부르는 셈이니까요.

요즘에는 여러 가지 신화가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으로 나옵니다만, 우리 자랄 적에는 한국에 신화가
단군 신화, 박혁거세, 김알지 이야기 정도밖에 없는 줄 알았지요.
교과서에 있는 건국 신화가 신화의 전부인 줄 알았던 겁니다.
우리 이전 세대는 굿판 구경을 하면서,
또 할머니 무릎에서 신화를 들을 수 있었고,
우리 이후 세대는 그림책, 동화책으로 다 읽을 수 있는데,
억울하게도 우리 세대는 이것도 저것도 얻지 못한 거예요.

무속을 공부하며 관동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활동하는
이 책의 지은이 황루시(이름이 한자로 縷詩랍니다. 시적이죠?) 선생은
처음에 탈놀음과 같은 우리나라 전통극을 공부하다가
진오기굿(진혼굿이라고 할 수 있다)을 한 번 보고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연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굿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직 굿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제 의견을 말씀드릴 순 없지만,
강의 중에 들은 바로는 외국의 인류학자가 와서
처음 굿을 볼 때도(우리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굿을 보면 그 연극적인 짜임새 때문에 맥락을 다 이해한다고 합니다.
신화를 구연하면서 무당은 그 신화의 화자도 되고 주인공도 되고요
(판소리를 1인 오페라라고 하는 것과 같겠지요),
굿판에서 장고나 제금을 치며 추임새도 넣고 하는 남자
(이들을 ‘양중’이라 한답니다)는 경우에 따라 1인 촌극도 벌인답니다.

황루시 선생은 70년대 중반부터 굿판을 찾아다니고 무당들과 사귀면서,
무속의 문화적, 민속적 의미 외에 무당들 개인의 인생과 고통까지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책은 ‘1. 도봉산 호랑이’에서 대학 시절 도봉산에서 만났던
맑고 착한 아주머니 이야기로 서두를 떼고,

‘2. 내가 만난 무당들’ 편에서는 현존하는 동해안 지방, 제주도,
서울 지역, 평안도 만신(우리나라 무속은 서울 경기 지역과
동해안 지역, 이북, 서해안 지역, 제주도로 그 권역을 나누어
볼 수 있다 합니다. 지역권에 따라 전승되는 무가의 내용과
굿의 형식이 다르다구요. 물론 무당 개개인에 따라서도
조금씩 다르구요)과 그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적고는
‘우리 사회의 아웃사이더’인 무당이란 존재의
사회적 의미와 그 실상을 이야기합니다.

‘3. 굿의 현장’ 편에서는 죽음을 이해하는 넋굿(죽은 이의 한을
위로하고 편안히 저승으로 보내기 위한 굿),
소외된 자의 잔치 조상굿(평소 제사 때 소외되는, 제주는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의 넋까지 강림해 한을 풀고 간다고 합니다.
아들 없이 돌아간 작은할아버지, 객지에서 병사했다는 외가 쪽 오촌아저씨,
혼인 전에 죽은 작은집 딸, 전쟁 중 헤어져
생사도 모른 채 잊고 지낸 큰집 조카 등등),
공동체를 다지는 마을굿(가장 대규모로 잘 전승되는 것이
4-5월의 강릉 단오제라 합니다. 요즘에도 영동 지방을 아우르는
대규모 축제로 이루어진다구요)의 현장을 묘사하고,
그 의미를 짚습니다.

마지막으로 ‘4. 무속의 리얼리즘’에서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일상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공존했던 무속에 대한,
요즘 사람들의 흔한 시선 - 왜곡되고 편향된 - 을 지적하고,
무속의 실제적인 의미를 설명합니다.

자연을 두려워하고, 인간의 문제를 풀기 위해 신과 함께 사람들이
뜻을 모으고,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써 주변 사람들을 널리 배불리 먹이는
자리, 죽은 이나 산 이나 할 이야기 다 하고 울음으로써 한을 푸는 자리가
바로 굿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굿이 어떤 것이다 하고 이야기하려면
아무래도 굿을 한번 봐야겠습니다.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것은,
별스런 존재로 여겼던 ‘무당’을 조금 친근하게 느끼게 되었다는 겁니다.
찌르면 아프고, 욕하면 상처받으며,
‘사제자’라는 힘겨운 운명의 굴레를 힘들여 지고 가는 이들.
흔히 무당이나 점바치를 비웃을 때
“남의 일은 다 안다 하면서 제 죽을 날은 모른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무당이란 존재가 원래, 남의 아픔은 건져 올리면서
자기 아픔은 돌보지 못하는 존재랍니다.
원래부터 그렇게 허락되질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당네 집에 굿할 일이 있으면 스스로 하지 않고,
다른 무당을 불러 굿을 하게 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원해서 무당이 된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세습무당은 보고 자란 문화 때문인지
굿판에서 산 부모의 한 때문인지 정말 그것밖에는 할 수 없어서,
신이 내린 무당은 버티고 버텨봤지만
신을 거부할수록 불행만 닥쳐오고 가족이 죽어나가서.
그래서 무당들은 다른 사람을 욕할 때
“니네 집안에 무당이나 나라” 한답니다.
아프게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손진태 선생이란 분이 1930년에 조사한 김쌍돌이본 창세 무가에서도
신이 저주하는 장면에서
"가문마다 기생 나고,
가문마다 과부 나고,
가문마다 무당 나고,
가문마다 역적 나고,
...
삼천 중에 일천 거사 나너니라" 합니다.

'거사'는 스님을 이야기하는데,
무당이든 스님이든 사제자를 불행한 운명으로 인식했던가 봐요.

무가나 굿에서 쓰는 말을 보면 모르는 말이 많습니다.
제 어휘력도 부족하고,생활이 민속 문화에서 멀어지고,
또 전래 입말보다 문어체 번역어투가 익숙해져버린 탓도 있지요.
요즘엔 학교에서 사투리도 따로 배운다던데,
아~ 우리 세대는 정말 못 배운 게 많습니다...


****

엊그제 케이블TV에서 작년에 발표된 다큐멘터리 영화
<영매-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를 보았습니다.
이 책을 영화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화 속 굿판에서 죽은 이와 산 가족이 만날 땐
저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 200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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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범우사상신서 19
콜린 윌슨 지음 / 범우사 / 1997년 7월
평점 :
품절


2002. 5. 14

 

콜린 윌슨, <아웃사이더>, 범우사


아웃사이더, 주변인, 뭐 이런 말은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
윤리 교과서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아웃사이더The Outsider>(1956)란 이 책, 콜린 윌슨Colin Wilson이란
영국 아저씨(1931년생이라는데, 아직 살아서 활동하는 모양입니다)가
쓴 이 책을 전 처음에 소설인 줄 알았어요.
프랜시스 코폴라라는 미국 영화감독이 만든 <아웃사이더The Outsiders>(1983)란
영화의 원작 소설인 줄 알았다니까요.

코폴라 감독의 영화를 다 해진 비디오(정말 해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태
였지요. 등장하는 배우들 얼굴도 제대로 구별이 안 됐어요)로 본 것도
이 책을 읽은 1998년이었는데,
그 영화가 있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10년도 더 전에 알고 있었답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제가 어릴 적에 이쁜 얼굴로 날렸던 배우들이
모두 그 영화로 뜨기 시작했다고 들었거든요.
고등학교 때 잡지를 보면 맷 딜런이니 로브 로, 랠프 마치오,
톰 크루즈 , 다이안 레인 등등이 나올 때마다
저 영화 제목이 꼭 등장했답니다.

음, 그런데 이 책은... 독특하더군요.
비평서라고 해야 할까, 다양한 문학 작품을 읽고
그것을 비평하는 형태이니 우선 평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지은이가 후기에 적었듯이 '신실존주의'라는 철학을 창안한
철학 책으로 보는 것이 맞겠다 싶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아웃사이더'는 주류에 끼지 못하는 주변인이
아니라, 다수 대중에게서 스스로를 구별하는 철인(哲人)입니다.
자기 자신을 고독하게 응시하는 사람.
그러나 응시하다가 저 혼자 신이 되는 사람이랄까.

불교의 수행법도 결국 스스로를 응시하다가 부처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본래의 자신,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연의 일부, 생명의 하나로 보는 겸손한 자세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뭔가 '특별한 인간' '거인'을
생각하게 합니다. 저는 니체의 철학을 모르지만,
왠지 이것이 극단으로 나아가면 절대 권력자를 숭앙하는
파시즘으로 가리라는... 나치즘의 백색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한 구절 한 구절 뜯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왜 진작 이 책을 알지 못했을까...
읽으면서 안타까워했어요.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것.
그리고 콜린 윌슨이라는 사람, 겨우 25세에 이런 책을 썼단 말이지,
하고... 놀랐지요.

이 책을 읽고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란 영화의 실존 주인공,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1888~1935)란 사람도 알았습니다.
대한극장이 지금처럼 멀티플렉스로 바뀌기 직전에
70mm 대형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면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상영했을 때 가서 봤는데,
이 책을 읽은 뒤라서 느낌이 달랐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범우사에서 1974년에 초판이 나오고,
1994년 2판 7쇄를 찍은 범우사상신서 19권 <아웃사이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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