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7. 4

 

원제가 千と千尋の神隱し라고 하길래, 千은 '센'이고, '千尋'은 치히로,

그럼 '神隱し'는 뭐야? 싶었지요. '행방불명'이라면 일본에서도 같은 한자어를

쓸 텐데 말이에요.

 

가미가쿠시(神隱し)란  어린아이가 사라진 걸 가리키는 말이래요.

그런데 일본에선 산신이나 텐구(天狗)란 괴물이 이런 일을 잘 저지른다고

생각한대요. 그러니까 가미가쿠시란 그 한자대로 '귀신이 숨겼다'는 뜻이지요.

텐구는 얼굴이 빨갛고 코가 높은 괴물이라는데,

생각해 보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마녀 유바바가

얼굴이 빨갛고 코가 높게 생겼네요. '서양의 마귀할멈'처럼 생겼잖아요.

어린아이가 신들의 세계에 잠깐 다녀오는 일,

<이웃의 토토로>에서도 메이가 그러잖아요?


그런 경우를 뜻하는 말이 우리말에 있나... 없는 것 같아요.

어린아이가 없어졌다, 하면 유괴, 실종, (말 그대로) 행방불명, 뭐 이런

살벌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그런 말이 왜 우리말엔 없을까, 생각하다가

그런 말이 어떻게 일본말엔 있을까 도리어 궁금해졌어요.

어린아이가 잠시 없어지는 일...은 있지요. 놀러 가서 길을 잃기도 하고

식구들 모르게 옷장 속에 숨어들어서 잠들어 버리기도 하고.

그런 일을 신이 숨겼다고 생각하다니, 재미있잖아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각본, 감독 작품다운 면모를

보입니다만, 이전에 본 작품들하고 다른 점이 두 가지 눈에 띄었어요.

 

첫째는 치히로라는 여자아이, 다리가 아주 길고 가늘다는 점입니다.

얼굴은 땡그란데... 전의 작품에서는 글쎄, 다리가 긴 편이긴 해도

다른 일본만화에서 보이는 심한 체형 왜곡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동양인 체격을 보기 좋게 잘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치히로의 다리는 유난히 길고 너무 가늘었어요.

요즘 일본 아이들의 체형이 그렇게 바뀌어서 그런 건지.

 

둘째 개인이 구원되는 데 그쳤다는 점.

하야오의 작품뿐 아니라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내놓은 작품은 모두

공동체의 문제 해결을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공동체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결말은 치히로의 가족이 원 상태로 돌아가는 걸로 끝나거든요.

돼지로 변한 다른 사람들은?

그리고 아파트 건설로 삶의 터전을 잃었던 하쿠가

이제 마녀의 제자 노릇을 그만두겠다, 그리고

치히로에게 앞으로 꼭 다시 만날 거라고 약속하긴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될지는 알 수 없어요.

 

뭐, 열 살짜리 여자아이의 가미가쿠시를 소재로 삼은 거니까

그 아이가 부모의 품에 다시 돌아가는 걸로 끝나는 데 그쳤다고도 할 수 있지만.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습니다.

치히로가 부모를 구하기 위해서는 계약에 의해 마녀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치히로는 시험을 받아들입니다. 아기 보우가 시험을 무효로 하려고

힘을 쓰고 있었는데... 규칙은 규칙이다, 이건가요?

글쎄, 전 잘못된 계약에 의한 일방적인 규칙은 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

아니면, 그들의 세계에는 그들 나름의 규칙이 있고

우리는 그걸 존중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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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05-19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가와카미 히로미라는 일본 작가가 쓴 소설집 [뱀을 밟다]에도 가미가쿠시를 소재로 삼은 <사라지다>란 단편이 있습니다. 사뭇 다른 환상을 다룬 소설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