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윤대녕 지음 / 중앙일보사 / 1997년 3월
평점 :
품절


2002. 5. 28

 

윤대녕,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1995


지금은 절판되었습니다. 중앙일보사에서 1995년에 나왔는데,
중앙일보의 출판 담당 부서는 1997년 중앙M&B라는 이름으로
독립적인 계열사로서 갈라져 나왔지요.

이 책,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는 소설을 특별히 좋아하거나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며칠 전 우연히 집안의 서랍을 뒤지다가, 오래 전에 이 책을
읽고 쓴 글을 발견했습니다. 예전에 썼던 글은 모두 5.25인치짜리
디스켓에 들어 있어 지금 볼 방법이 없거나,
예전에 한번 노트북 하드를 날렸을 때 모두 날아가 버려
가진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글은 종이에 출력해 놓았네요. 그래서 기념으로
그냥 한번 소개합니다.


<'거기'와 함께 '여기' 살기>

이 소설은 한 남자의 자아 찾기 여행기이다. 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과거'를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제안이다.

"오랫동안 나에 대해 타인처럼 살았"던 '나'란 남자,
그가 자신에 대해 타인처럼 살았던 이유가 별거 중인
아내 때문인지(아내는 자신의 존재를 불안하게 여긴
나머지 스스로 불행해졌으며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든다)는 확실치 않다. 아마 아니리라.
그가 별거하고 직장을 그만둔 것은 계기에 불과하리라.
그는 그 전에 과거를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던 아내와 결혼했다.

그가 어느 순간부터 과거의 인물이 보내 오는
무차별 암시를 통해 과거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거를 찾음으로써 유진에게서 벗어나
선주와 진정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선주가 "낯설고 추운 곳"으로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유진의 허깨비가 아니라
선주 자신이 되었다. 선주가 갔던 "낯설고 추운 곳"은
유진의 백조 자리가 아니었을까?

'나'는 '거기'를 잃고 살았기에 '여기'에서
실존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부유(浮遊)해 왔지만
'여기'에 있는 '거기'를 찾은 뒤
'거기'에 있는 '여기'에 묶여 버린 E의 굴레를
떨쳐 버렸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왜, 어떻게 해서
유진과 희배를 잃었을까? '나'는 유진이 죽은 뒤
정신병원에 갔다 오고 나서 유진과 희배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 유진은 실존의 무의미함을 전도하는
전도사였다. 그녀는 시간의 반대편에 가고 싶어했다.
'나'는 실존의 무의미함을 몸서리 쳐지게 체험한 뒤
자기 보호 본능에 의해 그 기억을 잃었을 것이다.
실존이 다름아닌 실존 그 자체임을 깨닫기 위해
그는 오랜 시간을 돌아온 셈이다.

때로 나(소설 속의 '나' 남형섭이 아니라
이 글을 쓰는 나)는 스스로 역사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잊는다. 내가 존재하고 이 순간을 살아가기까지
각종 행위와 관계가 있어 왔다. 사람들은 모두,
아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역사를 가진다.
그런데 때로 자신을 단지 중력에 묶인 물리적 존재로
인식할 때가 있다.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운
물질 - 그런 물질이 실제로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렇게 느낀다.

또 때로는 그런 느낌마저 없이 자동 인형처럼
반사적인 동작만 한다. 아침에 눈 뜨고 밥 먹고
세수하고 걷고 전철 타고 일하고 다시 걷고 전철 타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우연히 몇 달 전의 나,
1년 전의 나, 3년 전의 나, 10년 전의 내가 했던
말과 행동, 맺었던 관계를 깨닫고 퍼뜩 놀란다.
나는 어쩌면 그렇게 '자신에 대해 타인처럼' 살았을까.

반대로 예전의 기억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다. 그냥 거리를 지나다가도 전에 내가 했던
말이 생각나 얼굴을 찡그리고 입술을 깨물기도
한다. 과거를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중학교 때 국민학교 시절을 돌아보기도
싫어했고 고등학교 때는 중학교 때를,
대학교 때는 고등학교 때를 회상하기 싫어했다.
꿈에서 예전의 기억을 왜곡된 형태로 보기도 한다.

과거는 완전히 단절된 듯싶다가도 자꾸자꾸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상황으로, 내 태도와 행동으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과거를 바라보는 방법은?

윤대녕은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순환선이 아니라
나선형 궤도를 보여 주었다. 과거를 바라보는 방법은
내려다보는 것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이되
양과 질에서 다르다. 소설 속의 '나'는 과거를 잃고
자신에 대해 타인처럼 삶으로써 궤도를 이탈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소설의 내용에 공감하면서도
이 소설을 이루는 구성 요소에 나는 불만이 많다.

우선 주인공의 '드라이'하고 '쿨'한 태도와
예술 취미에서 서투른 무라카미 하루키 냄새가 난다.
작가가 들으면 몹시 섭섭하겠지만 할 수 없다.
'상실감이 충일한' 무라카미 하루키에 비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유물론적이고 실존적이다.
유물론적이고 실존적인 건 좋은데 잠시 일탈하여
허무해졌다. 아니, 그것까지 좋은데 왜 선천적으로
'드라이'하고 '쿨'한 듯한 흉내를 내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별거중인 '나'는 선주에게 이런 말을
다 한다.

"그러니까 서둘러 결혼하라니까. 혼자서 마음을
조율하며 살기엔 이미 나이가 차버린 거야.
평형감각을 잃지 않고 살려면 우선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야 해."

갑자기 웬 고리타분한 결혼관?

그리고 '~고 있었다'는 어미를 비롯해서
일본어를 번역한 듯한 어투가 소설 전체에 넘쳐난다.

"그러나 입이 미어져라 국수를 밀어넣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녀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무언가 견디질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저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본문 77쪽)"는 식이다. '국수를 밀어넣는'
'못하기' '저런다는' '깨달았다'고 하면 될 것을.

조사 '의'가 필요없는 부분에서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살아 있는 것들과 다시 만나게 되고
시간과 박자를 맞춰 또 미래로의 여행을 계속하는
거야......(본문 141쪽)" 그냥 '미래로 여행을
계속하는 거야'라고 하면 되는데.

작가란 '말'을 가지고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인데
자신이 도구로 쓰는 '말'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단지 문법에만 맞으면
우리말이 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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