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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들은 - 아이오와 일기
최승자 지음 / 세계사 / 1995년 4월
평점 :
절판
1998년 3월 25일에 쓴 독후감이니, 오래돼도 너무 오래됐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아직도 검색되는 게 신기해서 옮겨봅니다. 폴 오스터라는 이름을 처음 가르쳐준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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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들은 - 아이오와 일기
최승자, 세계사(1995)
값 : 6000원
이 책은 시인 최승자가 1994년 8월말부터 1995년 1월 중순까지 미국에 머물렀을 때의 일기다. 아이오와시티의 아이오와대학에서 주최하는 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에 참가하기 위해 우리 나라를 떠나던 날부터 그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동안, 또 나중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달을 머무르는 동안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적은 글이다.
남의 일기를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독자를 예상하고 쓴 글이 아니기에, 쓴 사람만 아는 깊은 뜻이 행간 곳곳에 숨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글을 쓴 사람이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감각으로 이해한 대로만 (객관적인 시각을 가장하지 않고) 하는 이야기라서, 읽는 사람은 글 속의 '나'를 잘 알지 못하면서도 글을 읽는 동안은 '나'의 눈과 귀로만 글 속의 세계를 보고 들어야 한다. 그런데 글 속의 세계는 바로 읽는 이가 사는 세계와 같은 실제 세상이기에, 읽는 이는 글쓴이가 아닌 바로 자신의 시각을 아예 놓쳐 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남의 일기를 읽는 일이란 두 사람의 시각을 경유하는 일이다.
두서가 없는 점도 일기의 특징이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편하게 쓰는 글인 데다, 특별한 사건이 있다 해도 똑 부러지게 결말이 나지 않은 채 다음날로 넘어가 버릴 수도 있다. 그런 글을 앞에 두고 동시에 두 사람(글쓴이와 글 읽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니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런데도 남의 일기를 읽는 일은 참 매력 있다. 남의 속내를 들여다보기...
나 아닌 사람은 누구나 타인이고 나는 나조차 잘 모르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읽고, 그 사고방식을 아주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건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일까 아니면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욕망에서 나오는 습성일까.(아니면 그저 엿보기의 쾌감? - 2004. 7. 22에 덧붙임.) 어쨌든 이 책 자체가 최승자라는 시인이 자기 정체성을 새로이 매기는 과정을 보여 주는 건 사실이다. 글쓴이는 책의 들머리,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아마도 이 책으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다름아닌 나 자신일 것이다. 내가 몹시도 지치고 피곤해질 때, 작으나마 내가 새로 배운 것들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 이 일기에 나오는, 필경은 아마도 내 눈에만 보일, 꿈틀거리며 새로 태어나려 애쓰는 내 자신의 모습이 내게 힘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새로 배운 것은 아마 이 책 266쪽에 나오는 이 대목이리라.
"나는 프로그램화된 사회에서 살아왔다. ... 나는 이 프로그래밍에 더 이상 적응하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프로그램화되지 않겠다."
글쓴이가 미국이란 나라에서, 아이오와시티라는 작은 대학 도시에서 뭐 대단히 좋은 점을 보고 그 동안의 자기 인생을 부정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니는 서른몇 해 동안 자신을 규정해 온 사회를 벗어나 다른 사회에서 온, 전 세계에서 온 작가들을 만났고 그 가운데서 고독하게 일기를 썼다. 만남. 다른 세상을 만나는 일.
그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바라티라는 작가의 집에 묵다가 바라티의 친구라는 사람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한참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썼다.
"미국에서는 친구 만들기가 아주 쉽다. 한국에서였다면 이런 유의 대화라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었을 거다. 안면도 없는 사람들끼리, 그것도 얼굴도 모르면서, 전화로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는 건. 한국에서라면 주책맞은 여자, 아니 정신나간 여자 축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아마 전화를 끊고서, 아니 내가 왜 그렇게 씨알머리없는 짓을 했을까 하는 자기 반성의 과정을 거쳐야 했겠지? 그런데 그게 실은 자기가 하는 반성이 아니라는 것, 그건 어떤 권위, 혹은 어떤 파워를 독점하기 위해, 자기가 독점하려 한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 이게 더 큰 문제다. 그걸 의식조차 못 하고 있다는 게 - 어떤 프로그래머들이 설치해 놓은 소프트웨어에 의해서 내가 그렇게 반성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반성하는 게 아니라 반성당하는 것이라는 사실, 끔찍한 사실."(269쪽)
그니는 가만히 앉아서 이런 결론을 내린 게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나 자신으로 꽉 차 있어서 나 외부의 것에는 흥미를 느낄 여유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를 꽉 채우고 있는 그 나 자신은 죽음처럼 송장처럼 내 내부에 누워 있기만 한다. 이 내 내부의 송장을 어서 치워 버리지 않으면 나는 언제나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일어나 문을 열고 나로부
터 나가 다오."(236쪽)
나 자신에게 "나로부터 나가 다오" 하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어느 노래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 그런데도 아직 꽉 차진 못해서 허기를 느낀다. 하지만 그러다가는 평소 밥 먹을 때처럼, 과식하는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먹어 대다 나중에 배불러 죽겠다 소리를 하게 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이 책의 129쪽에 인용된 글을 옮긴다. 글쓴이가 '식상할 만큼 너무도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라고 한 글인데, 무식한 나는 처음 봤다. ^_^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misfortune처럼 작용하는,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이의 죽음처럼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마치 자살 직전에 있는 것처럼 혹은 사람이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숲에서 길 잃은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그런 책이다. 책이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 구실을 해야 한다." - 프란츠 카프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