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감옥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적 우리 집엔, 한옥 마루에 어울리지 않게 소파와 탁자가 있었다. 나는 소파에 점잖게 앉기보다, 소파와 탁자 사이 비좁은 공간에 누워 책 읽기를 좋아했다. 처음엔 소파에 앉았다가, 그다음엔 소파에 누워 등받이에 발을 올렸다가(그러니까 소파에 거꾸로 앉은 셈이다), 결국은 소파 아래로 내려와 마루에 엎드리다가 배를 깔고 눕다가 모로 눕다가... 알고 보니 어린 아이들은 모두 좁은 공간(책상 아래 같은)에 파고드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그림책을 벌리고 마치 집처럼 세우며 놀기도 했는데, 그렇게 새로 “공간”을 만들며, 또 찾으면서, 나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이 책에 실린 미하엘 엔데의 환상 소설 여덟 편을 읽노라니, 놀라운 공간 마술 쇼를 퍼레이드로 보는 기분이 든다. 눈앞에 빤히 보이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공간, 분명 두툼하니 부피가 느껴지는데 실은 종잇장처럼 얇은 공간. 세계는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고, 그러나 가다 보면 문득 기적의 장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체험한 사람들도 그 기억을 물어보면 이야기는 다 각각이다. 그렇다면 그 시간과 공간은 하나가 아니라 그 사람들 수만큼 존재하는 게 아닌가. 눈앞에 빤히 보이는 게 진실이라는 믿음은, 사실은 착각?!

첫 번째 이야기 “긴 여행의 목표”는 여덟 편 중에서 가장 길다. 92쪽에 걸쳐 펼쳐지는 이 이야기의 허무와 공포에 질릴 듯하다가, 다음에 이어진 3부작 공간 마술 “보르메오 콜미의 통로” “교외의 집” “조금 작지만 괜찮아”에서 숨통이 트였다.

두 번째로 긴 작품 “미스라임의 동굴”은 다른 일곱 편과 좀 색깔이 다르다. ‘안락한 체제라는 전체주의’란 말이 떠오르기도 하고, 영화 <큐브>의 결말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 뒤를 이은 “여행가 막스 무토의 비망록”에 나오는 ‘완벽한 도시’ 첸트룸과 미스라임의 동굴은 얼마나 다른 공간일까?

“자유의 감옥”은 선과 악을 공유하는 신의 모순과, 전적인 자유란 곧 감옥이라는 모순을 도식화해서 보여준다.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모 아니면 도,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 문을 열었을 텐데.) ‘안전하다는 믿음’이 자유로운 선택의 전제라면,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질문을 남긴다.

마지막 작품 “길잡이의 전설”을 읽고, 옮긴이의 해설을 보니, 작가 미하엘 엔데는 1995년 세상을 떠났고, 이 책은 1992년 발표되었다. 그렇담 “길잡이의 전설”이 작가의 마지막 작품일까? 모르는 일이지만, 왠지 작가가 마지막으로 희망과 위로를 전하려 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의 감옥 - All Age Classics | 원제 Das Gefa"ngnis der Freiheit (1992)  
미하엘 엔데 Michael Ende (지은이), 이병서 (옮긴이) | 보물창고,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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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6-25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앞에 빤히 보이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공간.
그런 게 저마다에게 하나씩 있지요.
당장 읽어보고 싶게 리뷰 쓰셨네요.^^

숨은아이 2005-06-25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히히, 감사!

히나 2005-06-26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시간과 공간은 하나가 아니라 그 사람들 수만큼 존재하는 게 아닌가.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보관함에 담아요. ^^

숨은아이 2005-06-26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드롭님/그 말은 "보르메오 콜미의 통로" 앞부분에 나오는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표현은 바꿨지만) 쓴 거랍니다. :-)

balmas 2005-06-26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꼭 사고 싶게 리뷰를 쓰시네요. ^_____________^
사실 저도 어렸을 때 좁은 곳에 들어가기를 상당히 좋아했다죠.
가령 진공관 TV 밑이라든가 ... ㅋㅋ

숨은아이 2005-06-26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꼭 사고 싶으시다구요? 정말요? ^_^ 근데 TV 밑은 너무 좁지 않나요? ㅎㅎ

내가없는 이 안 2005-06-2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사실 지난번에 이 리뷰 봤는데요, 새벽에 5시가 되는 바람에 못 달았거든요.
전 이 책 아직 못 봤는데, 님 리뷰 보면서 더는 미룰 수 없는걸요. ^^
게다가 님 '큐브' 얘기까지 거론하시니... 그 영화 정말 소름이 돋았거든요.
지금 로알드 달의 책을 읽는데 같은 동화를 썼더라도 두 사람, 참 다르네요.
물론 둘 다 거장 소리 들을 만하구요.
그런데 공간 찾아 들어가는 습관이 님 닉네임과 너무 잘 맞네요. ^^

숨은아이 2005-06-27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주로 새벽에 거동하시는 이안님... ^^ 전 지금도 방에 콕 박혀 집 밖의 사람들에게는 없는 척 살금살금 꼼지락거리는 거 좋아한답니다. 후후.

플레져 2005-06-28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파와 탁자사이처럼 저는 피아노와 피아노 의자사이를 좋아했어요. 피아노 건반이 지붕 같아서 아주~ 흡족한 어둠의 자식으로 돌변할 수 있었죠. ㅎ
시간과 공간이 사람 수만큼 존재한다니... 엔데스러우십니다 ^^ (엔데를 읽어본 적 없는데도...이런 말을 하다니하다니...^^;;;)
백번째 리뷰, 구매욕을 끌어당기는 리뷰, 참 좋습니다...

숨은아이 2005-06-28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아하 피아노는 그렇겠군요. 백 번째... 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중 밑줄긋기가 꽤 끼어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