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그림자 - 멕시코 한 혁명가로부터 온 편지
마르코스 지음, 윤길순 옮김 / 삼인 / 1999년 3월
평점 :
품절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를 읽은 뒤, 이 책을 더 밀쳐두면 안 되겠다 싶어 집어 들었습니다. [분노의 그림자]는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대표로 쓴,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jercito Zapatista de Liberacion Nacional)의 성명서(혹은 편지)들을 묶은 책입니다. 이 책에는 1994년 1월 1일 0시 몇 분에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의 중심 도시인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를 점령하고 라칸도나 밀림의 선언을 발표한 때부터, 다시 밀림으로 돌아가서 정부와 대화하고, 정부의 미봉책을 거부하고, 그해 8월에 ‘전국민주주의대표자회의’를 연 때까지, 현존하는 혁명 세력인 사파티스타가 사태의 진전에 따라 그때그때 발표한 견해, 주장, 호소, 그리고 사파티스타 해방군의 본질과 성격을 드러내고자 하는 글,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기발한 상상력이 빛나는 추신과 ‘편지 형식을 빌린’ 우화가 들어 있습니다. 또 사파티스타에 편지를 보내온 어린이들에게 쓴 답장도 있습니다.

이 책은, 낯설었습니다. 우선 멕시코의 역사가 낯설었고, 땅도, 사람들도 낯설었어요. 책에 등장하는 장소가 어디인가 보려고 애용하는 지도책, 고교 지리부도를 찾았는데, 지리부도는 멕시코란 나라를 온전한 지도로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남아메리카에 조금, 북아메리카에 많이 걸쳐서, 적어도 우리 지리부도에서 멕시코는 양 대륙으로 분단된 나라입니다. 

이때까지 마야족, 이라고 하면 16세기에 에스파냐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 문명만이 떠올랐지요. 마야족은 역사의 갈피로 사라진, 전설과 느낌이 비슷한 이름이었습니다, 제게. 마야족이 버젓이 현존하며, 정복자들의 압박과 착취를 버티며 견디며 혁명을 모색해왔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니, 정말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전 아는 게 없군요.

1994년 1월이라면, 제가 첫 직장에서 6개월째 적응하려 애쓰던 때로군요. 제가 이 사회에서 존재 방식을 찾으려고 작고도 사소한 전쟁을 벌이던 때, 지구 반대편에서는 역시 자신들의 존재 방식을 찾으려고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고 싸우고 꿈꾸고 있었군요. 인터넷이란 말이 있는지도 몰랐던 때, TV 뉴스도 못 보고 곯아떨어지던 때였네요.

이 책에 실린 성명서 하나하나는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에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왜 일어났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담았기 때문에, 쉽게 읽어 넘길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사파티스타도 인터넷으로 글을 발표할 수 없었기에, ‘혁명적 원주민비밀위원회 총사령부(Revolutionary Indigenous Clandestine Committee-General Command, CCRI-CG)’의 지침에 따라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문학적 재능을 발휘해 성명서를 쓰면, 비밀리에 사람들이 밤에 산길과 숲길을 걸으며 손에서 손으로 전한 끝에 신문사에 이 성명서가 전달되었습니다.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파티스타는 글 하나하나에 모든 것을 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기존 멕시코 체제와 사파티스타가 총으로, 글로 싸우던 그때 그 현장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지금 읽는 편지에서 마르코스가 비교적 태평하게 농담을 던졌다 하더라도, 바로 이어지는 다음 글에서 긴박한 결의를 호소할 수도 있습니다. 싸움을 뒤따라가는 여정, 그래서 누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문장이 난해하거나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에스파냐어로 “동무” “동지”에 해당하는 compañero를 굳이 “콤파녜로”라 하고, 농장 노동자라고 볼 수 있는 campesino를 “캄페시노”라 한 것이 아무래도 낯선 느낌을 더 부추긴 듯합니다.

혁명을 일으키고 성공하고자 하는 세력이라면 권력 장악을 그 목표로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들은 “모두에게 모든 것을, 우리에게는 아무것도!”라고 외친답니다.

EZLN은 어떤 공화국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EZLN이 추구하는 것은 어떤 당의 승리도 아닙니다. 우리는 국민이 자신들에게 가장 잘 맞는 사람을 선출할 수 있고, 그래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이러한 결정이 모든 멕시코 인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존중과 이해를 받을 수 있는 정의와 자유, 민주주의를 추구합니다. -104쪽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하나밖에 없는 진정한 역사의 전위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직한 멕시코 인이 모두 우리 사파티스타의 기치 아래 일치단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깃발을 내걸고 있을 뿐입니다.”(131쪽)고 합니다. 대동단결 운운하며 주도권 다툼에 골몰하는 한국의 운동권을 봐왔기에, 이 글에서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마르코스는 사파티스타의 확성기가 되기를 기꺼이 자처한 자그마한 지방 신문 [엘 티엠포(El Tiempo)](영어식으로 쓰자면 The Times가 되겠습니다)에, “[티엠포]가 진정 영웅인 것은 ...(중략)... 여러분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지금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만)에게 목소리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목소리가 없었던 사람들, 그래서 성명서는 곧잘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해 여러분에게 삼가 편지를 드립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원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 운동을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외국 세력의 사주를 받았다느니 혹은 그들을 “형성중에 있는 정치 세력으로 인정한다”느니 하며 분석하고 비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외치면, 무엇을 외치는지 외치는 이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아보고 이해하려 하기보다, 멀찍이 물러서서 분석하고 이건 어느어느 세력과 어느어느 주의의 영향을 받아 어찌어찌한 성격을 띤다는 둥 딱지를 붙이는 사람들. 그 속에 내가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35쪽 프롤로그 첫머리가 참 재미있습니다.

EZLN의 성명서와 편지를 출판하려는 뜻이 있으며, 각 출판물에 대한 프롤로그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거나 단독으로 게재할 수 있는 이런저런 종류의 글을 요청한 바 있는, 크고 작은 출판사들을 비롯하여 주변부 출판사와 해적 출판사, 또 불법 출판사 등에게.

남동부 멕시코 산악 지대의 EZLN 총사령부에서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나는 __________(주 : 이런 독점적인 머리말을 써 달라고 요청했던 크고 작은 출판사를 비롯하여 주변부 출판사와 해적 출판사 및 불법 출판사 등의 이름으로 이 빈칸을 채우시오)가 EZLN의 성명서와 편지 및 기타 문건 들을 엮어 출판할 예정인 책에, 일종의 프롤로그나 머리말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불법 출판사란 아마 독재 정부의 감시를 피해 지하에서 출판물을 만드는 곳을 말하겠지. 그러나 “해적 출판사”까지 언급하다니, 배타적 저작재산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뜻이군요.

사파티스타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제 1994년, 그 후의 사파티스타를 만나러 다음 책,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해냄, 2002도 읽어야지요.

참, 마리아나 모겔에게 보낸 딱정벌레 두리토 이야기는 언젠가 그림책으로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그림자 -멕시코 한 혁명가로부터 온 편지, 삼인, 1999
영어판 제목 : SHADOW OF TENDER FUTY,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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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 2005-05-25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때 숨은아이님이 마르코스의 책을 가지고 있던 게 생각나네요.. 어떤 책이었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balmas 2005-05-25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들어갑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5-05-25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정말 독특한 책인데요. 저도 이거 사볼래요! 님 리뷰는 워낙 조목조목해서 들여다보기 없어도 꼼꼼히만 읽으면 대충 감이 잡혀요. 저도 추천 들어가요. ^^

돌바람 2005-05-25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네요. 멕시코에 대해선 진짜 전무하지요. 추천하고, 다음번에 살 겝니다.

숨은아이 2005-05-25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드롭님/바로 이 책이었어요. ^^ 이제야 리뷰를 쓰다니, 참 오래도 걸렸죠?
발마스님/고맙슴다~~
이안님/주저리주저리 길게 늘어놓기만 한 글을 늘 칭찬해주셔서 고마워요.
스토니윈드님/고맙습니다. 모르는 인명 지명이 잔뜩 나오는데, 그냥 건너뛰어도 지장 없답니다. 다만 모렐로스, 게레로가 멕시코 독립운동가의 이름이라는 거, 멕시코 헌법 제27조와 제4조 같은 건 검색포털에서 검색하면 대충 알 수 있어요.
따우님/못 읽었다고 우울하시다니, 그럼 전 서재생활 하면서 진작 우울증 걸렸게요. ^^

로드무비 2005-05-25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숨은아이님 리뷰로 만족할래요.
추천은 당연하겠죠?^^

숨은아이 2005-05-25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헤헷, 고마워요. 밑줄 그은 것도 좀 읽어주시면 더 고맙겠슴니다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