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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여관 - 나혜석.김일엽.이응노를 품은 수덕여관의 기억
임수진 지음 / 이야기나무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1. 나헤석(1896-1948) - 수원 엘리트 명문가에서 태어남. 아버지 나기정은 시흥 군수, 용인 군수. 첩 여럿.
경성 진명여고 졸업
둘째 오빠 나경석 권유로 도쿄 미술학교 서양화부 유화과 입학
최승구와 연애. 이미 조혼. 여주공립보통학교 미술교사로 1년 근무. 최승구 병문안. 25세 죽음 이후 신경쇠약 걸림
<여자계>
단편소설 '경희' 발표
나경석은 교토제구갣학교 법학과 김우영 소개 10살 많음.
31운동 주동으로 감옥. 김우영 만세변호사
1920년 4월 10일 결혼
1921년 유화 70점 개인전
김우영 외교관. 세계일주 1년 8개월
파리에서 최린과 불륜 후 이혼
1935년 10월 소품전 실패
아들 김선 폐렴으로 사망. 수덕사 찾아감. (김일엽 만남. 만공스님은 제자로 삼지 않음)
수덕사 근처 유화와 조각 가르침. 이응노 가르침.
파킨슨병. 중풍 악화.
1948년 공주 마곡사 머물다가 나감. 무연고자 병동 서울시립자제원
2. 김일엽(김원주) 1896-
아버지 목사 김용겸, 개화한 어머니 5남매 중 장녀로 태어남.
구세학교 삼숭보통학교 입학.
어린 동생 12세 사망. 1907년 썻다고 전해지는 <동생의 죽음>은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년 더 빠르다는 겨 ㄴ해가 있어 신체시 또는 신시의 효시로 <동생의 죽음> 꼽음.
1909년 어머니 사망. 1915년 아버지 사망. 다른 동생들도 사망. 20세 고아
22세 유학파 교수 이노익과 결혼. 미국 네브래스카 웨슬리언 대학 졸업. 연희전문학교 화학 교수. 의족인 장애인. 일본 도쿄 영화학교 유학.
허영숙 나혜숙 만남
이광수는 일엽이라는 필명 지어줌.,
나혜석과 <신여자> 창간. 4호만에 폐간.
남편과 이혼. 무종교 상태.
노월 임장화와 자유연애론 정립, 개인주의 설파 <나의 정조관>
<인형의 가> 출간.
백성욱 서양철학 공부 불교계 인사 만남. 출가
하윤실과 재혼. 1933년 출가 결심. 만공스님 문하로 들어감.
1960년 회상록 '어느 수도인의 회상'
불교의 사회화와 대중화에 적극적으로 나섬
'이차돈의 사'
충남 예산군 수덕사 견성암 별실에서 열반.
3. 이응노 1904-1989
흥성군 흥북면 중계리 중틀마을 출생. 가난한 양반가의 5남 1녀 중 넷째
그림그리기 좋아했지만 가족 인정 못 받음.
16세 결혼. 사군자와 산수화 대가인 해강 김규진 문하에 등록하게 됨.
3개월만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아버지 시상식에 참가. 고려미술원에서 연구원으로 수학. 정규익, 나헤석, 김은호 등
전주로 내려가 개척사라는 간판집 열었음. 상업적으로 대성공. 페인트공 40명.
효산 이광렬과 설송 최규상에게 사군자 배움.,
<청죽>이전의 그림은 죽은 그림. 창조성.
그림이란 다른 사람의 작품이나 전통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애써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고암으로 호 변경. 문인 정병조 하사.
일본 유학 결심 1935년
마츠바야시 게이게츠 제자로 들어감. 도쿄 덴코화숙 가와바타미술학교에서 동야화, 혼고연구소에서 서양화 배움
이응노는 요미우리 신문 보급소를 사들여 운영.
수덕여관을 인수해 수리. 현판도 직접 씀.
수덕여관은 원래 비구니들이 거처하던 절간.
고암화숙을 열고 전통회화의 방향 모색하는 단구미술원 조직.
수업료 받지 않음. 창의적 교육 시도.
배정례, 금동원 원석연 이기우
1948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서 초창기 주임교수. 후학양성에 열성적. 장학금.
미술동맹에 이름 올림. 공산주의자 색출 조사에 시달림. 무죄 인정
한국전쟁 대 망함. 공산주의자라는 낙인. 아들 행방불명. 500여 권의 스케치북 사라짐.
<출범><산> 록펠러재단이 구입. 현대미술관에서 소장.
해외로 눈을 돌림.
프랑스 초청장 받음. 최초 프랑스 개인전
독일 주한서독 공사관 리하르트 헤르츠 만남. 독일 전시 추진. 독일 경유해 프랑스로 건너가기. 독일에서 승승장구. 1960년 파리 입성.
파케티 화랑으로부터 전속 계약 약속. 유학생들에게 돈 빌려줌. 송금 금지되자 생활고에 시달림.
시장에서 종이 모음. 추상화 완성.
미국 콜라주 작품 전시.
1964년 파리 세르누쉬 미술관의 협력으로 파리동양미술학교 개설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초대. 명에대상 받음.
동백림 사건 - 북괴의 간첩으로 둔갑. 징역 3년. 1969년 3월 석방운동. 암각화.
간장을 잉크 대신으로 화장지에 데생. 밥알을 매일 조금씩 아꼈다가 헌 신문지에 개어서 조각품도 만들기 시작.
1977년 백건우와 윤정희 납치사건에 연루. 아들 이융세 화백 병역기피자로 낙인. 체포 영장 발부.
1983년 10월 망명. 프랑스 국적.
사군자와 서예롤 출발해 가장 한국적인 것을 세계적인 추상 미술로 만든 그의 작업은 한국화의 지평을 새로 열었다.
1945년 이화여대 미대 1946년 서울대 미대 1949년 홍익대 미대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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