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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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에 발표된 작품인데 (모든 통찰력을 갖춘 책이 그러하듯) 지금 상황에 접목해도 잘 맞는다. 그간 이해 못한 단체나 사람들의 심리를 일그람은 더 이해할 수 있게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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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부대
미국 내 아시안 혐오
일베
신천지
윤석열
진중권

사랑할 때는 보통 동맹을 구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우리는 같은 대상을 사랑하는 자를 흔히 경쟁자나 불법침입자로 여긴다. 그러나증오할 때는 예외 없이 동맹을 찾는다.
우리가 자기를 부당하게 취급한 자에게 불만을 품고 복수를 꿈꿀때 우리 편을 들어줄 사람을 찾는 것은 정당하며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의아한 것은, 우리의 증오가 눈에 보이는 불만에서 온 것이 아니어서정당성이 떨어질 때 동맹을 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욱더 강해진다는점이다. 우리가 자신과 같은 증오를 품은 사람들과 힘을 합치게 만드는것은 주로 비이성적 증오이며, 매우 효과적인 단결의 매개체가 되는 것도 이 증오다.
이러한 비이성적 증오는 언제 생겨나며, 어떻게 사람들을 뭉치게하는가? 증오는 우리의 부적합함, 쓸모없음, 죄의식, 그밖의 결함을자각하지 못하게 억누르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표현이다. 여기서 자기경멸이 타인에 대한 증오로 변질되며, 이 변질을 숨기기 위해 매우 단호하고 집요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물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우리와 같은 증오를 느끼는 타인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찾는 것이 되겠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보다자기가 우월하다고 느끼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얕보고 심지어는 동정도하지만, 증오하지는 않는다. 불만과 증오의 관계가 단순하고 직접적이지 않다는 것은 증오가 늘 자신을 부당하게 대한 사람을 향하는 것은아니라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데, 정작 증오는 엉뚱한 사람이나 집단에게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기경멸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부정하고 터무니없는 죄악적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 탓이며 자기가 저지른 과오임을 입증하는 진실에 대항하여 도덕적 증오심을 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국제 사회에서 다른 국가나 민족을 잘 증오하지 못하는데, 어떤 외국인을 보아도 자신이 우월하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에게는외국인에 대한 반감보다 (후버나 루스벨트 같은) 동포 미국인에 대한 증오가 더 신랄하다. 외국인 혐오증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 뒤처진 남부에서 심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미국인들이 사력을 다해 외국인을 혐오하기 시작한다면, 미국적 삶의 방식에 자신감을 잃었다는 신호가 될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어떤 꽉 짜인 전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개인이 누릴 이익을 포기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책임에서도 벗어나는 일이다. 개인의 판단력에 동반되는 두려움과 망설임, 의심과 막연한 체면의식에서 해방된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잔인하고 무자비해질 수 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개인이 대중운동의 조직성 속에서독자성을 잃게 되면 새로운 자유가 생긴다. 수치심과 회한 없이 증오하고 겁박하고 거짓말하고 고문하고 살해하고 배신할 자유가 그것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는 대중운동의 매력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욕될 권리"를 발견하는데, 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이는거부할 수 없이 매혹적이다.

전도 충동은 오히려 심각한 불안의 표출인 듯하다. 중심에 있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은 절박한 느낌이 표출되는 것이다. 전도 충동은 자신이 이미 가진 무언가를 세계에 주고자 하는 충동이라기보다는 아직 찾지 못한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열정에 가깝다.
그것은 자신이 숭배하는 절대 진리가 과연 오직 하나뿐인 진리임을 궁극적으로 논박할 수 없도록 표명하는 행위이다. 전도에 나선 광신자는타인을 개종 혹은 전향시킬 때 스스로의 믿음도 강해진다. 정당성이 쉽사리 문제시되는 신조일수록 강한 전도 욕구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터무니없고 명백히 비논리적인 독단을 언명하지 않는 운동이 "사람을 얻지 못하면 세계를 파괴하려 드는" 광적인 충동에 사로잡힐 것 같지는않다. 또한 신앙고백 내용과 실상이 크게 어긋나는, 말하자면 죄의식이 강한 운동일수록 자신들의 믿음을 타인에게 더 열렬히 강요한다.

신념은 사람이 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영혼을 조직하고 단련시킨다. 자신이 오직 하나뿐인 진리를 간직했다고 믿는 것. 자신의 공평무사한 정당함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 것. 신이 되었건 운명이 되었건역사의 법칙이 되었건 아무튼 어떤 미지의 힘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는 것. 자신의 적수가 악의 화신이어서 박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 것. 자기를 버리고 임무에 헌신하는 삶에 환희를 느끼는 것. 이 모든 것이 어떤 분야에서든 무정하고 단호한 행동을 취하게 만들 귀한 자질이다.

광신자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대부분은 창조적이지 못한 지식층에서 나온다. 지식인 계층을 나누는 가장 중대한 기준은 창조적인 작업에서 성취감을 얻는 지식인과 그렇지 못한 지식인이다. 창조적인 지식인은 현 체제를 아무리 통렬하게 비판하고 비웃건 간에 실상은 현재에 애착을 갖고 있다. 그의 열정은 개혁이지 파괴가 아니다. 대중운동이 자신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할 때면, 그것을 온건한 일로 바꾸어놓는다.
그가 주도하는 개혁은 표면적이며, 상황은 급정거 없이 흘러간다. 그러나 그런 발전 단계가 가능한 것은 대중의 무정부적 활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때뿐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구질서가 저항 없이항하거나 아니면 혼돈이 격발하는 순간 지식인이 힘 있는 행동가와 결탁해야 한다. 구질서와의 투쟁이 가혹하고 혼란스럽고 오로지 극도의단결과 자기희생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때, 창조적인 지식인은 대개 옆으로 밀려나고 창조적이지 못한 지식인-영원한 부적응자와 현재를 광적으로 증오하는 사람들이 상황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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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비하하는 기질, 몽상에빠지는 습성, 습관적인 증오심, 남 하는 대로 따라하려는 경향, 현혹되기 쉬운 경향,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려는 경향을 비롯하여 극심한 좌절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다양한 현상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단결의 동인이자 무모함을 부추기는 배우다.

죽음과 죽임이라는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빠질 수 없는 연극적 요소는 특히 군대의 경우에 명백하다. 군대의 제복, 깃발, 기장, 행진, 음악, 복잡한 예법, 제식 등은 군인들이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생과 사를 넘나드는 불가항력적 현실을 가리기 위해서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논할 때 전장(theatre of war), 전투 무대(battle scenes)라고들 말한다. 전투가 벌어지면 군 지휘자들은 한결같이 병사들에게 전 세계의 이목이 귀군들에게 집중돼 있다. 조국 선열들이 제군을 지켜보고 있다. 우리의 후손이 제군의 이야기를 듣게 될것이다. 같은 말로 사기를 북돋운다. 위대한 장군이라면 연설로 경천동지할 줄 안다.
영광은 하나의 연극적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청중을 뚜렷이 의식하지 않는다면 영광을 위해 싸울 일도 없다.

쾌적한 생활은 근본적 변화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상식, 실용적 관점이라고 부르는 것에 매달린다. 아닌 게 아니라, 이는 현재 상태에 이골이 날 만큼 익숙한 태도를 일컫는 이름일뿐이다. 쾌적하고 안전한 생활이 얼마나 확고한지, 현재의 상태와 다른현실이 설사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해도 막연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듯 혼란이 일어났을 때 정작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 매달리며 몽상가처럼 구는 것은 이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반면에 현재를 거부하고 오로지 앞으로 일어날 일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사람들에게는 다가오는 위험의 싹이나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자신에게 유리한 점 따위를 간파할 능력이 있다. 따라서 좌절한 개인과맹신자가 현상유지를 바랄 이유가 있는 사람들보다 뛰어난 예언자가된다. "미래가 요구하는 해결의 실마리는 영혼이 섬세한 사람들보다는광신자가 쥐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대중운동의 현재를 비하하는 태도가 좌절한 사람들의 성향을 강화하는 것은 분명하다. 좌절한 사람들은 현재에 관해서라면 좋은 것까지도 깡그리 헐뜯곤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서 엄청나게 즐거워한다는 사실이다. 불만을 표출하는 것만으로는 그런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아니, 있다. 이 시대가 얼마나 저열하고 천박한지 장황하게 떠듦으로써 패배감과 소외감을 달래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우리 인생만 엉망이 아니다. 이 시대에는 아무리 행복하고 성공해봤자다 하찮고 허튼 인생이다. 좌절한 사람들은 이렇듯 현재를 비하함으로써 막연하게 평등 의식을 얻는다.

대중운동이 벅찬 것, 불가능한 것을 옹호하는 것도 좌절한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다. 평범한 일상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은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위장하는 장치다. 가능한 것을 시도하다 실패한다면 순전히 자기 잘못이지만,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다 실패하면 그 임무가 막대한 탓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는 편이 가능한 것을 시도할 때보다 신뢰를 잃을 위험이 적다. 그렇기에 평범한 일상에서의 실패가 종종 과도한 담대함을 낳기도 한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머리로 이해한 강령은 그 위력이 삭감되게 마련이다. 무언가를 이해하면, 그것은 마치 우리 안에서 시작된 것처럼느껴지기 마련이다.

너무 쉽게 믿는 경향의 특이한 점은 사기 치는 경향과 결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잘 믿는 사람이 거짓말도 잘한다는 속성은 어린이한테서만 나타나는 성질이 아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혹은 보지 않으려는 태도는 남의 말에 잘 속는 순진한 기질과 야바위 기질을 동시에 조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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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적 부적응자 가운데 가장 돌이킬 수 없이 좌절한ㅡ따라서 가장독을 품은ㅡ자는 창조 활동을 향한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글쓰기, 그림, 작곡 따위를 시도했으나 가차없이 실패한 사람들, 신나는 창조성을 맛본 뒤 자기 안의 창조성이 메말랐음을 느끼고앞으로 절대 다시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생산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깨달은 사람들, 두 부류 모두 절망적인 열정에 사로잡힌다. 부와 명예도, 권력도, 나아가서는 다른 분야에서 쌓은 기념비적인 업적조차도그들의 갈망을 채워주지 못한다. 온 열정을 다해 어떤 숭고한 대의에헌신한다고 해서 반드시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채워지지 못한갈망은 없어지지 않으며, 바로 이 사람들이 숭고한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가장 강경한 과격파가 될 수 있다.‘

애국심이 건달들의 마지막 피신처라는 냉소적인 주장은 비난만은아니다. 광적인 애국심은 종교적 열광이나 광신적 혁명운동과 마찬가지로 죄의식의 피신처 구실을 종종 한다. 이상하게도 피해자와 가해자, 범죄자와 범죄의 희생자가 똑같이 얼룩진 인생의 돌파구를 대중운동에서 찾는다. 후회와 불만은 사람들을 같은 방향으로 달리게 만드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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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어떤 대중운동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강령이나 사업에 준비된 것이 아니라 어떤 효과적인 운동이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히틀러 이전 독일의 불안한 젊은이들은 흔히 동전 던지기로 공산당에 가입할 것이냐 나치에 가입할 것이냐를정했다. 제정 러시아의 인구 과밀 지구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유대집단은 혁명과 시온주의, 어느 쪽으로든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회의 쓰레기 같은 존재와 불평분자가 없는 나라는 질서정연하고 점잖고평화롭고 쾌적하지만, 새로운 변화의 씨앗이 없는 셈이다.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달갑지 않은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 대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신세계를 건설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다. 오로지 그들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다.

불만은 비참함이 견딜만할 때, 상황이 개선되어 어떤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시점에 최고조에 이르는 것으로보인다. 불평불만은 문제가 시정될 수 있을 것 같을 때 가장 신랄하다.

인생을 허비하고 망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유보다 평등과 우애를 더 갈망한다. 그런 사람이 자유를 부르짖는다면, 그것은 평등과획일성을 세우기 위한 자유일 뿐이다. 평등에 열광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익명성에 열광하는 것이다. 즉, 옷 한 벌을 구성하는 많은 실 가운데 한 가닥이 되는 것, 다른 것들과 구분되지 않는 한 가닥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지 않아 자신의 열등함도 드러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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