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시추에이션이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해서, 주방에서 아내가 혼자 긴피라를 만들 때의 백뮤직으로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어울리지 않는다. <스카이 파일럿>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때는 뭐니 뭐니 해도 닐 영이다. 딱 어울리는 음악이 깔리면 작업도 순조롭고 노동의욕도 솟아오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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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생각났는데 세상에는 종종 ‘후렴이 없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얼핏 옳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전개에 깊이가 없다고 할까, 미로 속으로 들어가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그런 사람과만나 얘기를 나누면 여지없이 녹초가 되고 피로도 의외로 오래간다.

도쿄에 있는 이탈리안 식당의파스타도 꽤 수준은 높다. 다른나라 음식인데 맛있게 잘도 만들었네, 하고 곧잘 감탄한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로 돌아가 아무 식당에서나 "아, 맛있어"
하면서 먹었던 이탈리안 파스타의 ‘새삼 절감하는‘ 맛은 역시 찾을수 없다. 음식이란 결국 ‘공기 포함인 것 같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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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사람들이 환경에 의하여, 또는 자기 의지에 의하여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예전에는 나도 그렇게 믿었지만). 작가의 자질은 타고나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자질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조금씩은 문필가나 소설가의 재능을 갖고 있으며, 그 재능은 더욱 갈고 닦아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책을 쓴다는 것부터가 시간 낭비일 것이다.

    2024-04-08 17:45:10
  • 글 쓰기에 대한 책에는 대개 헛소리가 가득하다. 그래서 이 책은 오히려 짧다. 나를 포함하여 소설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그리 잘 알지 못한다. 소설이 훌륭하거나 형편없다면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책이 짧을수록 헛소리도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2024-04-08 17:43:49
  • 우리는 작가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느냐고 묻는 일은 절대로 없다. 자기 자신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2024-04-08 17:42:44

소설가가 해야 할 일은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막상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쓸 때는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해라. 그리고 원고를 고칠 때는 그 이야기와 무관한 것들을 찾아 없애는 것이 제일 중요해.”


  내가 처음으로 두 건의 기사를 제출하던 그날, 굴드는 그 밖에도 흥미로운 조언을 해주었다. 글을 쓸 때는 문을 닫을 것, 글을 고칠 때는 문을 열어둘 것.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나 자신만을 위한 글이지만 곧 바깥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뜻이었다. 일단 자기가 할 이야기의 내용을 알고 그것을 올바르게 ─ 어쨌든 자기 능력껏 올바르게 ─ 써놓으면 그때부터는 읽는 사람들의 몫이다. 비판도 그들의 몫이다. 

역시 좋은 글이란 사람을 취하게 하는 동시에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바위처럼 침착한 사람들도 미친 듯이 성교에 몰두할 수 있다면 ─ 적어도 성교 중에는 정말 얼이 빠져버린다면 ─ 글쟁이들이 제정신을 유지하면서 살짝 돌아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글쓰기는 외로운 작업이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굳이 믿는다고 떠들지 않아도 좋다. 대개는 그냥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가 그렇듯이 작가도 처음에는 등장 인물에 대하여 그릇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이에 버금가는 깨달음은, 정서적으로 또는 상상력의 측면에서 까다롭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작품을 중단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때로는 쓰기 싫어도 계속 써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형편없는 작품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좋은 작품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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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4-04-1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자기가 알려준 일기 (?) 가끔씩 읽어. 거기다 댓글을 달아도 되는지 몰라서 그냥 읽고만 오는데 넘 좋더라. 자기 올린 거 보면서 먹고 싶은게 많아져서 문제지만. 제주도도 넘 가고 싶어지고.ㅎㅎㅎㅎㅎㅎ 하린이는 예상대로 멋진 어른이 되어 흐믓하고. 하린이 음악은 어렵지만.^^;; 암튼 오늘 나도 뭔 바람이 불어서 알라딘 왔다가 손녀 사진 하나 올렸어. ㅋㅋ 할머니 같은 짓을 하고 있지.^^;;

치니 2024-04-14 19:24   좋아요 1 | URL
앗 통계를 가끔 보면 글 하나에 읽은 회수가 열 번도 안 되게 나오는데 그중에 언니가 있었군요! 😂
잊지 않고 들러주셔서 고마워요 🙏🏼 만날 그렇고 그런 일기라 ㅎㅎ 그야말로 기록 차원에서 적는 거지만 블로그에 적는 건 기본적으로는 교류를 원하는 맘을 깔고 적는 거라, 언제든지 편하게 댓글 주시면 저야 기쁘죠! 😍
언젠가 제주도 오셔서 함께 맛난 거 먹으면 참 좋겠다 싶네요 😊
 















이처럼 ‘언어로서 음악’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어디를 잘라도 미려하게 다듬어낸 사운드가 들리도록 완성하면 말(기호)로서 음악을 재현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사운드와 언어가 늘 양립하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음악은 자국 중심 문화의 세계화를 도모하기에 적절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에 이르러 수많은 민족이 독립 국가가 되기를 희구하며, 자신들의 국민적 정체성이 담긴 음악을 지니고자 열망하게 된다. 베버나 베르디나 쇼팽 같은 국민악파 작곡가들이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 그리고 국민음악은 민족을 결집하는 정체성의 핵인 동시에 그 민족문화를 국경을 넘어 보편화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었다. 이에 가장 성공한 나라가 독일이었던 셈이지만, 자국의 음악을 세계 기준으로 유통할 때의 표어가 ‘음악은 말이 아니다/국경을 초월한다’였을 가능성은, 이것이 잠재의식 아래에 있었다 하더라도 상당히 높이 작용했을 수 있다. 사실은 그 문화에 밝아야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인 음악을, 자국 중심성은 숨긴 채 ‘국경을 초월한다’라고 내세워 세계에 전파한 것이다. 

예를 들면, 쇼팽의 음악을 ‘폴란드의 영혼’이라 칭하며 폴란드인 이외에는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은연중에 암시한다. 반면, 그것을 ‘국경을 초월하는 언어’라고 믿는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나 아르헨티나인에게 연주하게 하고, 또 ‘세계 언어로서 쇼팽 음악’의 중심지인 바르샤바의 쇼팽 콩쿠르에 참배토록 한다. 바로 이런 행위에 ‘국경을 초월하는 음악’ 이데올로기의 이중성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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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음악 전문용어로 여겨지는 말 대부분이 원래 기술 언어적인 기능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스타카토’는 ‘벗겨내다, 잘게 찢다(staccare)’라는 동사에서, ‘레가토’는 ‘묶다, 매듭짓다(legare)’라는 동사에서 각각 유래한다. 밀가루 반죽을 잘게 뜯어 파스타로 만드는 이미지를 전자에, 혹은 구슬을 꿰어 연결해나가는 모습을 후자에 각각 겹쳐봐도 재미있을 것이다. 속도를 가리키는 라르고나 안단테, 비바체 같은 용어도 마찬가지이다. 이탈리아에서 택시를 타고 ‘더 빨리!’라고 말할 생각으로 ‘알레그로!’를 외쳤더니, 운전사가 히죽 웃으며 ‘제대로 알레그로로 달리고 있소’라고 맞받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즉 알레그로는 ‘명랑하게, 쾌적하게’라는 뜻인데, 여기서 변형되어 ‘들떠 있는, 칠칠치 못한, 품행이 바르지 않은’ 등등의 뉘앙스로 쓰이기도 한다(거리의 여자를 donna allegra라고 한다). 그래서 알레그로는 ‘들떠 있는’ 것이지 결코 ‘서두르는’ 느낌은 아니다. 긴박하게 숨이 차듯 ‘빠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프레스토’이다. 정말 급히 서두른다면 ‘프레스토!’라고 말해야 했다.

“그 용솟음이 작곡자인 당사자에게도 제대로 통제되지 않은 채 파이프의 누수처럼 여기저기로 제멋대로 분출되어 소나타라는 시스템의 통합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즉 ‘정신’이라는 주어가 ‘분출된다’라는 술어를 공통분모로 해서, ‘파이프의 누수’로 변환되는 것이다. 더욱이 무라카미는 시적 향기라고는 전혀 없는 일상적이고 즉물적인 비유를 한 번 거친 다음, 슈베르트의 음악에 숨어 있는, 그야말로 ‘정신’의 퇴폐와 광기로 단숨에 다가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말하면, D장조 소나타는 그야말로 그런 체면이고 뭐고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세상의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독자적인 보편성을 획득한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이 작품에는 내가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에 이끌리는 이유가 가장 순수한 형태로 응축되어 있다. 혹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확산되어 있다는 기분이 든다.”

이것을 내 나름대로 바꾸어 말하면, 슈베르트는 특히 장대한 곡을 쓰려 할 때 때때로 ‘이성을 잃는다’. 이것저것 하는 사이에 자신도 뭘 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음악은 거의 전부 19세기 서양이 만들어낸 어법에 따르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음악은 국경을 초월한다’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음악에도 어학 학습이 필요하다. 사운드로서 음악은 글로벌하지만 언어로서 음악은 로컬이다. 

느끼고 아는 것은 말로 하기 어렵고,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느끼기 어렵다. 여기에 음악을 이해하는 독특한 어려움이 있다.

이 모순은 사운드이자 언어라는 음악의 이중성에 기인한다. 앞 장에서도 인용했듯이 한슬리크는 “아마추어는 음악에서 가장 많이 ‘느끼고’, 교육받은 예술가는 가장 적게 ‘느낀다’”라고 했다. 그리고 느끼기는 쉬우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사운드로서 음악’이고, 말로 명확하게 지적할 수 있으나 예비지식 없이는 느끼기 어려운 것이 바로 ‘언어로서 음악’이다. 음악은 느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언어적 구조를 띤, 즉 읽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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