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부대
미국 내 아시안 혐오
일베
신천지
윤석열
진중권

사랑할 때는 보통 동맹을 구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우리는 같은 대상을 사랑하는 자를 흔히 경쟁자나 불법침입자로 여긴다. 그러나증오할 때는 예외 없이 동맹을 찾는다.
우리가 자기를 부당하게 취급한 자에게 불만을 품고 복수를 꿈꿀때 우리 편을 들어줄 사람을 찾는 것은 정당하며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의아한 것은, 우리의 증오가 눈에 보이는 불만에서 온 것이 아니어서정당성이 떨어질 때 동맹을 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욱더 강해진다는점이다. 우리가 자신과 같은 증오를 품은 사람들과 힘을 합치게 만드는것은 주로 비이성적 증오이며, 매우 효과적인 단결의 매개체가 되는 것도 이 증오다.
이러한 비이성적 증오는 언제 생겨나며, 어떻게 사람들을 뭉치게하는가? 증오는 우리의 부적합함, 쓸모없음, 죄의식, 그밖의 결함을자각하지 못하게 억누르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표현이다. 여기서 자기경멸이 타인에 대한 증오로 변질되며, 이 변질을 숨기기 위해 매우 단호하고 집요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물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우리와 같은 증오를 느끼는 타인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찾는 것이 되겠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보다자기가 우월하다고 느끼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얕보고 심지어는 동정도하지만, 증오하지는 않는다. 불만과 증오의 관계가 단순하고 직접적이지 않다는 것은 증오가 늘 자신을 부당하게 대한 사람을 향하는 것은아니라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데, 정작 증오는 엉뚱한 사람이나 집단에게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기경멸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부정하고 터무니없는 죄악적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 탓이며 자기가 저지른 과오임을 입증하는 진실에 대항하여 도덕적 증오심을 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국제 사회에서 다른 국가나 민족을 잘 증오하지 못하는데, 어떤 외국인을 보아도 자신이 우월하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에게는외국인에 대한 반감보다 (후버나 루스벨트 같은) 동포 미국인에 대한 증오가 더 신랄하다. 외국인 혐오증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 뒤처진 남부에서 심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미국인들이 사력을 다해 외국인을 혐오하기 시작한다면, 미국적 삶의 방식에 자신감을 잃었다는 신호가 될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어떤 꽉 짜인 전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개인이 누릴 이익을 포기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책임에서도 벗어나는 일이다. 개인의 판단력에 동반되는 두려움과 망설임, 의심과 막연한 체면의식에서 해방된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잔인하고 무자비해질 수 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개인이 대중운동의 조직성 속에서독자성을 잃게 되면 새로운 자유가 생긴다. 수치심과 회한 없이 증오하고 겁박하고 거짓말하고 고문하고 살해하고 배신할 자유가 그것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는 대중운동의 매력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욕될 권리"를 발견하는데, 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이는거부할 수 없이 매혹적이다.

전도 충동은 오히려 심각한 불안의 표출인 듯하다. 중심에 있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은 절박한 느낌이 표출되는 것이다. 전도 충동은 자신이 이미 가진 무언가를 세계에 주고자 하는 충동이라기보다는 아직 찾지 못한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열정에 가깝다.
그것은 자신이 숭배하는 절대 진리가 과연 오직 하나뿐인 진리임을 궁극적으로 논박할 수 없도록 표명하는 행위이다. 전도에 나선 광신자는타인을 개종 혹은 전향시킬 때 스스로의 믿음도 강해진다. 정당성이 쉽사리 문제시되는 신조일수록 강한 전도 욕구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터무니없고 명백히 비논리적인 독단을 언명하지 않는 운동이 "사람을 얻지 못하면 세계를 파괴하려 드는" 광적인 충동에 사로잡힐 것 같지는않다. 또한 신앙고백 내용과 실상이 크게 어긋나는, 말하자면 죄의식이 강한 운동일수록 자신들의 믿음을 타인에게 더 열렬히 강요한다.

신념은 사람이 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영혼을 조직하고 단련시킨다. 자신이 오직 하나뿐인 진리를 간직했다고 믿는 것. 자신의 공평무사한 정당함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 것. 신이 되었건 운명이 되었건역사의 법칙이 되었건 아무튼 어떤 미지의 힘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는 것. 자신의 적수가 악의 화신이어서 박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 것. 자기를 버리고 임무에 헌신하는 삶에 환희를 느끼는 것. 이 모든 것이 어떤 분야에서든 무정하고 단호한 행동을 취하게 만들 귀한 자질이다.

광신자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대부분은 창조적이지 못한 지식층에서 나온다. 지식인 계층을 나누는 가장 중대한 기준은 창조적인 작업에서 성취감을 얻는 지식인과 그렇지 못한 지식인이다. 창조적인 지식인은 현 체제를 아무리 통렬하게 비판하고 비웃건 간에 실상은 현재에 애착을 갖고 있다. 그의 열정은 개혁이지 파괴가 아니다. 대중운동이 자신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할 때면, 그것을 온건한 일로 바꾸어놓는다.
그가 주도하는 개혁은 표면적이며, 상황은 급정거 없이 흘러간다. 그러나 그런 발전 단계가 가능한 것은 대중의 무정부적 활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때뿐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구질서가 저항 없이항하거나 아니면 혼돈이 격발하는 순간 지식인이 힘 있는 행동가와 결탁해야 한다. 구질서와의 투쟁이 가혹하고 혼란스럽고 오로지 극도의단결과 자기희생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때, 창조적인 지식인은 대개 옆으로 밀려나고 창조적이지 못한 지식인-영원한 부적응자와 현재를 광적으로 증오하는 사람들이 상황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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