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런 유부녀가 될 줄은 몰랐지만, 자꾸만 남편 얘기를 하게 된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빼놓고는 이야기가 잘 안되어서.. 긁적..)


일요일 오후, 화분에 물을 주는 남편한테 나는 큰 소리로 시를 읽어 주었다. 


처음 여자랑 잤다

이우성



나는 감각을 내려놓고

기억 안 할 거야


우리 집에선 파출부조차 하얀색을 입어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

머리 위에 화산재 같은 사과가 있는

나는

많아

반했니 

너도 사과 먹을래 

나는 

많다고 


도착하고 떨어지고 


남편이 물었다. "끝이에요?" "응 끝이에요. 웃겨. 아주 왕자님인가 봐." 나는 낄낄 웃은 다음, 시를 다시 한번 읽어준다. 그러고는 "아, 생각나는 시가 있어요." 하고 방에 들어가 아끼는, 사랑하는, 좋아하는, 손때 묻은 어떤 시집을 가지고 나온다. "뒤죽박죽으로 쓰려면 이렇게 써야지!" 하고 운을 뗀 다음에 천천히, 읽어준다.


푸른색 Reminiscence

진은영


진희영 생일             3월 15일

윤정숙 결혼 기념일   3월 16일

진은영 생일             3월 17일

 

그러니까 동생이 출생하고 나서

엄마가 결혼하고

나 태어나게 되었지


다트 화살을 힘껏 던지면

시간의 오색판이 빙그르르 돌아간다


시를 쓰고 나서 혁명에 실패하고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혁명에 실패하고 나서 한 남자를 사랑한 후

시를 쓰게 되었는지


추억은

커다란 뚜껑이 달린 푸른색 쓰레기통

열어보지 않으면, 산뜻하다

모든 것이 푹푹 썩어가도


읽기를 마치고 의기양양한 얼굴로(대체 왜?) 서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이 웃는다. 좋은 시네요, 응, 좋은 시예요. 하지만 이 젊은 미남? 시인도 재밌는 사람인가 봐. 자기에 대해서도 썼어. 


이우성

이우성

 



금요일 밤인데 외롭지가 않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집에 있는 게 부끄러울 때도 있다

줄넘기를 하러 갈까

바닥으로 떨어진 몸을 다시 띄우는 순간엔 왠지 더 잘생겨지는 것 같다

얼굴은 이만하면 됐지만 어제는 애인이 떠났다

나는 원래 애인이 별로 안 좋았는데 싫은 티는 안 냈다

애인이 없으면 잘못 사는 것 같다

야한 동영상을 다운 받는 동안 시를 쓴다

불경한 마음이 자꾸 앞선다 근데 왜 내가 뭐

그래도 서른 한 살인데

머릿속에선 이렇게 되뇌지만 나는 인정 못 하겠다

열 시도 안 됐는데 야동을 본다 

금방 끈다

그래도 서른 한 살인데

침대에 눕는다

잔다 잔다 잔다

책을 읽다가 다시 모니터 앞으로 온다

그래도 시인인데

애인이랑 통화하느라 못 쓴 시는 써야지

애인이랑 모텔 가느라 못 쓴 시는 써야지

야동 보느라 회사 가느라 못 쓴 시는 써야지

만두 먹어라 어른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다행히 오늘은 바지를 입고 있다


깔깔 웃었다. 이 사람 재밌는 사람이네. 사실 대부분의 시들은 의미가 알쏭달쏭하다. 그런데 그게,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만들거나 우울한 포즈를 잡는 그런 '현대시'가 아니라, 시를 다 쓴 다음 몇 군데를 지우거나 몇 줄을 오려서 딴데 붙이거나 해서 암호를 만드는 것 같다. 그런 작업 속에 과장된 자의식(어머 나 막 이런 말 쓴다)을 일부러 보여 줘서, 시와 시인 사이, 시와 독자 사이, 시인과 독자 사이에 얼마간의 거리를 두는 모양이다. 나는 그런 시들은 애써 해석하지 않는 쿨한 독자이기 때문에(뭐?) 웃으면서 책장을 넘긴다. 그리고 이렇게 슬쩍, 약간은 신세한탄을 하는 시(깔깔), 개나리를 가리키면서 자꾸만 진달래라고 하는 네 살 조카에게 벚꽃을 가리키며 목련! 하고 가르쳐주는 시(언어가 뭐라고. 시가 뭐라고.)를 소리 내어 읽어 본다. 더위가 조금은 가신다. 











*


늦은 오후 남편과 함께 슬슬 놀러 인사동에 갔다가 인파에 깜짝 놀랐다. 다들 열심히 놀고 있었네! 남편의 바람 대로  책꽂이를 덮어 햇빛도 가리고 장식도 할 천을 찾았지만 실패했다. 나는 길에서 파는 색 모시가 예뻐서 만지작거리다 그만 사버렸다. 그래서 모시 조각보를 만들게 됐다. 세 가지 색깔 천, 두 가지 색깔 실. 원가는 14,000원이지만 완성된 작품의 가격은 알 수 없다고 큰소리를 치자 남편은 착하게 웃으면서 "계약부터 합시다."라고 맞장구쳤다. 집에 와서 곧장 작업을 시작. 어머나 그랬더니 세상에 나 바느질 왜 이렇게 못하니. 내가 봐도 너무 웃겨서 바느질을 계속 할 수가 없다. 나는 꽥하고 남편한테 외쳤다. "여보, 내 손은 레고 손이야! 아니 돼지 손이야!" 그토록 착한 남편조차 "아까 본 건 이것보다 세 배는 촘촘하던데..." 하고 난감해한다. 난 내가 못하는 게 없어서 매력이 없을까 봐 고민했는데, 다행이다. 네꼬 씨의 주말이 잘 갔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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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8-13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또(!) 첫추천이에요!

예쁘다. 네꼬님 예뻐요.

네꼬 2012-08-13 09:08   좋아요 0 | URL
레고 손, 돼지 손 네꼬라도 예뻐해주시겠습니까? 엉터리 조각보는 뒷모습이 더 가관입니다만. =_= 다락님, 안녕? 난 잠들기 직전에 다락님 페이퍼를 읽었죠.

굿바이 2012-08-13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끼는, 사랑하는, 좋아하는, 손때 묻은 어떤 시집"이 저랑 같아요!!! 신나요 ^___^

네꼬 2012-08-13 13:08   좋아요 0 | URL
동지! (덥석)
이 시집이 저랑 굿바이님을 만나게 해주는 암호로군요! 으하핫.

... 2012-08-1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레고손, 왠지 친근하군요 하핫^^;;

네꼬 2012-08-13 13:09   좋아요 0 | URL
발로 하는지 손으로 하는지 알 수 없는 바느질이었어요. 아, 이게 남이 한 거면 내가 얼마나 놀릴까. 아깝다! (응?)

moonnight 2012-08-13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꼬님 너무 사랑스러워요. >.< 화분에 물을 주는 남편에게 큰소리로 시를 읽어주는 새댁아기씨!!! 예쁘다. 정말. ㅠ_ㅠ
조각보 잘 만드셨는걸요. 색깔이 참 좋아요. 요즘 조카아이가 닌자고를 열심히 보고 있는데, 레고손이라고 하시니 굉장히 친근감이. ^^ 하여간에, 저보다는 솜씨가 좋으세요. 저는 발이 손에 붙었다는. -_-;;;;;;;;;;;;;;;;;;

네꼬 2012-08-13 13:11   좋아요 0 | URL
어머나, 문나잇님, 쑥스럽게. (실제로는 늙은 새댁이 부스스한 차림으로... =_= 여기까지 할게요.)
바느질한 부분을 보여드릴까 했다가 그건 너무 자학 같아서 (ㅠㅠ) 예뻐 보이게 했어요. 노란색, 사진보다 더 예쁜데. ^^ 혹시라도 완성을 정말 하게 되면 다시 보여드릴게요. (어제 제가 남편한테 한 첫 마디가 바로 "나 이거 발로 하고 있는 거야?"였어요.)

레와 2012-08-13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네꼬님 예뻐예뻐! ^^

저도 요즘 조각보나 홈패션(미싱?)에 관심이 가요.
직접 배우면 또 너무 잘할 것 같아서..ㅋㅋㅋㅋ 참고 있어요.ㅋㅋㅋ

다락방 2012-08-13 11:57   좋아요 0 | URL
너무 잘할것 같아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왜이렇게 웃겨요 레와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꼬 2012-08-13 13:12   좋아요 0 | URL
레와님 웃곀ㅋㅋㅋㅋㅋ 잘 참아 보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웃겨 웃겨

치니 2012-08-13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아이고, 네꼬 씨는 왤케 글을 재미나게 씁니까요. ㅎㅎㅎ 시도 좋고 글도 좋고, 심지어 조각보도 이쁘지만! ㅋㅋ 저는 착하디 착한 남편 님 부분에 젤 많이 눈이 가네요. 화분에 물을 주며 아내가 낭송하는 시를 듣는 남편, 조각보를 만들어보겠노라고 큰소리 치는 아내에게 오냐오냐 맞장구를 쳐주는 남편, 아, 눙물이 날 정도로 멋져요.

네꼬 2012-08-13 13:14   좋아요 0 | URL
왜 '조각보' 부분에서 ㅋㅋ 이신 거죠?! 하하하하. 네 고작 네 장 붙였는데 저 모양이니 다 붙이면 어떻게 될지 앞이 캄캄해요. ㅋㅋㅋㅋ 남편은 처음부터 불규칙한 패턴으로 하라고 했는데 나름대로는 정갈하게 하겠다고 고집을.(<-이 부분 쓰면서 저 또 웃었어요. 기가 막혀서.) 착한 남편이 이 댓글 보면 막 부끄러워할 거예요. 좋아할 거예요. 으앙. 보고 싶은 치니님.

프레이야 2012-08-13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레고손!! 전에 조막만한 얼굴 가렸던 그 가녀린 손이 레고손이었던 거에요? ㅎㅎ
그래도 저보다 낫네요. 전 생각조차 안 해본 게 저런 거에요. 조각보 만들기라니요.
그래도 색색깔이 아주 예뻐요:)
예쁜 네꼬님 집에서 풍기는 깨소금 냄새가 여기까지 날아와요~~~

네꼬 2012-08-14 09:15   좋아요 0 | URL
조막만한 얼굴이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 누굴 보신 거예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저는 충동적으로 시작한 조각보를, 어제 술을 먹었는데도 두 장 더 붙이고 잤습니다. 할수록 조금 나아지지만 여전히 웃겨요. 저의 레고 손. ㅠ

하늘바람 2012-08-14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분이 넘 행복해 보여요.
그런데 저 조각보 탐나고 넘 이쁘네요.
나도 하고 싶다

네꼬 2012-08-16 11:4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조각보는 열심히 이어 붙이고 있어요. 언젠가, 완성할 수 있..다면 공개할게요. ㅎㅎ

미남 2012-08-20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여긴 다 미남미녀에 아름다운 공기!

네꼬 2012-08-20 09:22   좋아요 0 | URL
미남미녀만 있으니 공기도 아름다울 수밖에요. 크핫. (그나저나, 설마 혹시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혹시 오신 건가요!)

미남 2012-08-20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더불어, 고맙습니다.

네꼬 2012-08-20 09:16   좋아요 0 | URL
이것 참. 고맙습니다. 그런 말씀 들으니 영광이어요, 미남님! :)

네꼬 2012-08-20 13:28   좋아요 0 | URL
근데 실은 "어머!" 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살짝 아닌 척하고 점잖게 써봤어요.

킁킁 2012-08-21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조각보 사진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크크 웃음이.. 어서 조각보 완성하셔서 세상 모든 레고손과 돼지손에게 용기를 주세요!

네꼬 2012-08-22 09:13   좋아요 0 | URL
킁킁님 안녕하세요? ^^ 조각보 뒤를 보시면 크크 정도가 아닐 거예요.. "레고손도 할 수 있다_조각보 편" 기대해 주세요. 크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