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한 번의 방송분이 더 남은 <무한도전> 프로레슬링 에피소드는 나처럼 오랫동안 이 프로그램을 보고 사랑해온 팬들에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을 주었다. 연기자들을 혹사시키다시피 하는 김태호 PD가 너무한다는 생각도 적지 않았지만,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하고 있다가 아 그럼 그렇지 하고 (이번에도)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평균 이하 남자들'의 무모한 도전들이 쌓이는 동안 시청자들이 그들에게 정들게 하고 연기자들을 성장시키고 마침내 쇼의 제작자와 시청자 경계를 지운다는 것은, 이론 또는 이상으로는 가능한 시나리오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이루어내는 것은 다른 얘기다. 옛날에 릴케는 로댕의 작품들을 찬양하면서, 조각을 할 때도 저울이나 무기를 만들 때처럼, 외관을 통한 효과를 중시하는 것보다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무한도전>은 잘 만들었기 때문에 좋은 프로그램이다. 매체와 장르를 떠나 '잘 만든' 프로그램은 이렇게 어떤 대작 예술영화처럼 감동을 준다. 그것은 (텐아시아 강명석 기자의 표현대로) 5년간 지켜보아온 팬들만이 알 수 있는 기적이기도 하다.   

그러면 김태호 PD는 어떻게 이렇게 쇼 프로그램을 잘 만들었나? 나는 무엇보다 그가 자기만의 말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연기자와 스탭들을 다독이고 설득하고 믿고 기다리는 것을 포함해서 시청자들이 때로 오해하고 멀어지고 돌아오도록 기다리면서, 실없는 게임과 인내를 요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병행하면서, 실패한 에피소드를 스스로 희화화 하고 자랑스러운 순간에는 마음껏 뽐내면서, TV라는 매체를 자신에게 제일 좋은 방식으로 이용해서 '쇼'로서 '쇼'를 말했다. 지난주, 음악도 조명도 없는 무대 밖에서 연기자들이 토하고 쓰러지고 실려갈 때, 영문을 짐작도 못하는 관객들은 무대의 화려한 쇼에 기뻐하며 함성을 질렀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오른 연기자가 악역을 수행할 때,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관객들은 악의 없이 그러나 마음놓고 야유를 퍼부었다. 뚱보라고 놀림 받는 두 덩치-그것도 곧잘 구설수에 오르는 한 사람과 개성 없다고 무시당하는 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흥분한 관객들이 기다리는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는 뒷모습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던가. 이 시대 광대들에 대한 솔직한 보고서이자 경외에 가까운 찬사. TV 프로그램 PD만의 말하기 방식이었다. 이 천재 혹은 악마 연출자에게 나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는 자기만의 말하는 방법이 있는 건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생각하면서 소고기 감자국을 끓이다가 (응?) <배철수의 음악 캠프>에 게스트로 나온 작가 미치 앨봄의 말하는 방식에 또 무척 감명을 받았다. 배철수 아저씨는 미치 앨봄의 이야기를 듣다 말고 "근데 이상하게 오늘은 제가 영어가 들리네요"라고 말했다. 이 현명하고 사려 깊은 작가는 정말 쉬운 단어로, 복잡하지 않은 문장으로, 돌리지 않은 표현으로 조곤조곤 자기 생각을 말했다. 아주 좋은 말하기 방법이었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말의 내용만큼이나 말하는 방법이 중요하구나. 쓰느니 보도자료, 쓰느니 광고 카피, 쓰느니 메일이라 글쓰기에 부쩍 의기소침해졌던 네꼬 씨는 기운을 내서 내 식대로 말하고 글쓰기를 속개하기로 마음 먹었다. 네꼬 씨 식의 글쓰기란 대체로 실없는 농담에 가깝고 억지스러운 비유와 과장이 난무한 것이지만 적어도 솔직하긴 한 것. 이런 생각을 하게 해준 많은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천년만의 페이퍼(이것봐 또 과장)를 마무리 짓느라, 오늘 적어두려고 했던 몇 권의 책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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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0-09-07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 이게 얼마만인가요, 우리 네꼬씨! 이렇게 몽글몽글 예쁘고 다정한 글을 내주려고 그리 오래 묵혀두셨나요! 책 이야기 페이퍼도 어여 내놔봐요. 우리 같이 나눠요.^^

네꼬 2010-09-07 22:58   좋아요 0 | URL
앗 마노아님 안녕하세요? 악수 흔들흔들. 디제이 디오씨 새 앨범 듣다가 이승환 목소리 나올 때면 마노아님 떠올라요. (응? 뭔지 아시죠?^^) 반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어흑 왜 눈물이.)

moonnight 2010-09-07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고기 감자국 먹고 싶어요. ㅠ_ㅠ;(네꼬님의 감동적인 페이퍼를 읽고서는 겨우 이런 댓글을 ;;;;)

무한도전은 보지 않는데, 네꼬님의 칭찬을 받는 프로그램이라니 관심갑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미치 앨봄 작가가 나왔었군요. 아쉽네요. 놓쳤어요. 퇴근길에 주로 듣는데 요즘 꽂힌 음악이 있어서 그것만 주구장창 듣다보니 ;;;

'오늘 적어두려 했던 몇 권의 책에 대한 이야기. ' 잔뜩 기대합니다. ^^

네꼬 2010-09-07 23:01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 안녕하세요? 저 소고기 감자국 완전 성공했어요. 감자 참기름에 볶다가 소고기 넣고 또 볶다가 멸치다시마 국물 부어서 푹 끓이고 파 마늘 넣고 국간장. 그만 마음이 급해 고기 핏물을 안 빼고 볶았더니 나중에 아까운 국물 걷어내야 되었지만.... 응? 옆으로 샜네요. 근데 저, 저도 또 먹고 싶어요. (뭐니. ㅠㅠ)

어제 미치 앨봄 분은 저도 뜻밖에 듣게 됐고, 참 좋았어요. 마음 잘 가다듬고(?) 책 얘기 많이 할게요 :)

순오기 2010-09-08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을 준비하는 시간이라 직접 보지는 않고 아이들한테 말만 들었어요.
정형돈이 토했다고... 피디의 의도까지 알아채는 네꼬님의 글에 감동 먹었어요.
쇠고기 무국을 정말 좋아하나 봐요.
나는 잘하지 않는 메뉴인데, 불쑥 따라 하고 싶어졌어요.^^
맛난 쇠고기 무국 드시고 책이야기 페이퍼도 어여 올려주세요.

네꼬 2010-09-07 23:36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안녕하셨어요? (공손 꾸벅) 아니 근데 이번 에피소드는 저처럼 오래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금방 알아챌 수 있었을 거예요. 태호신의 손길을요. 소고기 무국도 좋지만 소고기 감자국도 좋아요. 소고기가 좋아요;; 아시죠?

순오기 2010-09-08 21:29   좋아요 0 | URL
내일 소고기 감자국 끓여야겠어요.
요새 무값도 엄청 비싸고, 채소값이 장난 아니게 비싸요.ㅜㅜ
야채실에 감자와 당근, 대파와 마늘만 초큼 남았어요.ㅋㅋ

네꼬 2010-09-09 23:12   좋아요 0 | URL
저도 주말에 애호박이 한 개에 3천원 하는 거 보고 눈을 믿지 못했어요. (정말이지 혹시 3백원? 하고 다시 보았다니까요.) 저야 아직 식구가 많지 않지만, 엄마들 정말 한숨 나오실 것 같아요. ㅠㅠ

paviana 2010-09-07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퇴근길에 항상 배철수아저씨를 듣는데,어제는 그거 끝난 담에 퇴근하느라 못 들었네요. 나도 들었으면 막 아는체 하면서 네꼬님을 꽉 안아 드렸을텐데요.

나도 소고기 감자국보다 소고기가 좋아요.히히

네꼬 2010-09-08 00:01   좋아요 0 | URL
어, 파비님, 부끄럽게. 히히.

참, 반가워요, 파비님. 좋다고 막 인사도 안 했네.

다락방 2010-09-08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나타나서 이런 글이라니! 정말 네꼬님은 내가 좋아하기에 1프로도 부족함이 없는 여자사람이에요. 네꼬님을 좋아하길 잘했어요. 아 막 멋지고 막 ㅠㅠ

네꼬 2010-09-08 09:11   좋아요 0 | URL
다락님! (얼레리꼴레리.. 하하, 나 아침에도 문득 생각났잖아요=_=) 다락님이 웬디님과 커플이 됐다 차였다 하는 걸 알면서도, 그 많은 사람들에게 애정을 고백하고 공수받고 하는 줄 알면서도, 어머 또 이렇게 좋아라. 하핫.

비로그인 2010-09-08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궁~~이렇게 사랑스러우면서 이쁜 글은 참~~~

네꼬 2010-09-08 09:12   좋아요 0 | URL
마기님 안녕하셨어요? (^^) 다층 차원의 격려로 듣겠습니다;; 핫. 핫.

레와 2010-09-08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칭 평균이하라고 했던 그들이 이젠 평균이상 그 이상이에요.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한도전도 날 울리고, 네꼬님 페이퍼도 날 울리고 (감동의 눈물 ㅠ_ㅠ)

네꼬 2010-09-08 09:14   좋아요 0 | URL
레와님! 저 페이퍼에 그 말 썼다가 지웠거든요. 이제는 평균 이상이 되었단 말요. 역시 아시는구나! 아 반가워 반가워라. 무한도전 보고 우는 레와님이 한층 더 한층 더 가깝게 느껴져요.

치니 2010-09-08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나도나도!!! 난 지난 토요일 회에서도 울었고 그 전 회에서도 울었고, 다른 사람들은 멀쩡한데 나만 왜 무한도전 보면서 자꾸 울지, 억울하고 서러웠는데 강명석 기자 글을 어제 읽고서 무한한 공감과 위로를 받았답니다.
네꼬님도 그랬다는 걸 아는 이 순간, 또 얼마나 기쁘고 뿌듯(ㅋㅋ 이게 무빠들의 공통점)한 지요.
암턴 맞아요, 네꼬식의 글쓰기는 속개되어야 했지요, 진작에! 아유 좋아라.

네꼬 2010-09-09 22:58   좋아요 0 | URL
아아아아아 여기도 반가운 분! 네, 저도 아니 내가 왜 자꾸 우냐 하고 있었어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악전고투가 흔한 '쇼'의 하나로 보이겠지만 우리처럼(네, 우리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알게 모르게 그들을 친구처럼 여기게 된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스러운 표정들이 예사로 보아지지 않지요. 어휴 나도 참 뿌듯해라. 헤헤. 치니님 나도 좋아요. 무한도전도, 치니님도!

같은하늘 2010-09-09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선물을 받은후 가끔 들려도 새로운 소식이 없어 궁금했는데...
이렇게 사랑스러운 글을 남기셨군요.^^
TV를 보았다면 더 깊은 느낌이 있었을텐데...

네꼬 2010-09-09 23:00   좋아요 0 | URL
같은하늘님 안녕하셨어요? 하핫 책, 좋으시죠? (일찍도...) 무한도전은 오랫동안 본 사람들에게 더 좋은 프로그램이 되어버렸지만(어쩐지 으쓱) 당분간은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꾸려갈 거라고 하니, 어떻게, 한번 믿어보심이...(태호신의 품으로~)

세실 2010-09-10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참으로 섬세하고, 세심하신 네꼬님^*^
님의 글로 인해 그냥 스쳤던 무한도전을 꼼꼼히 챙겨봐야 겠다는 생각 들어요.
소고기 감자국도 있군요^*^

네꼬 2010-09-15 23:37   좋아요 0 | URL
세실님 안녕하세요?
보통 소고기 무국을 많이 먹는데, 감자국으로 끓이면 아침에 밥 없이 국만 먹어도 든든해요. (배불리먹자주의자 1인)

노이에자이트 2010-09-10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뭐하시다가...오랜만에 오셨네요.

네꼬 2010-09-15 23:37   좋아요 0 | URL
노자님 안녕하세요? 그간은.... 게을렀어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