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시인 20주기를 찾은 특별한 문상객들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은 그의 '유령'을 사랑한 것이겠지만, 20살이나 먹은 나이 든 유령이 지금도 사랑을 잔뜩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재미있었다."

  

--> 아무리 유령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갓 스무살 된 유령에게 나이들었다고 할 수 있는가. 스무살이면 한참 날아다닐(!) 때다. 승주나무님은 유령차별주의자인가? 이 글은 승주나무님의 마지막 문장에 불만을 품고 쓰기 시작했다고 과격하게 쓰고 싶지만, 사실은 인기가 많은 승주나무님의 글을 트랙백하면 뭔가 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음흉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아니, 그게 다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날 이런 일이 있었다. 선배언니(달님)와 함께 ‘기형도의 시 읽는 밤’ 행사에 갔다가 예상했던 대로 감동에 만취해 거의 뛰다시피 홍대 앞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그만... 그래 한번은 그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 홍대 삼거리포차 앞의 수입CD가게 Record Forum이, 언젠가 한번은 내 주머니를 털 줄 알았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음량 우아한 음폭 낯선 선곡 무심한 디스플레이로,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내 주머니에서 거금을 꺼내가는 날이, 한번은 올 줄 알았다. 그날이 그날이었다. 게다가 내가 예술적 흥취에 푹 젖어있다는 걸 이용해 마침 탱고(그렇다, 탱고!)를 틀어놓는 놀라운 감각. 못 들은척하고 앞만 똑바로 보며 지나가려는데 (실제로 모퉁이를 도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아악, 왜, 신호가 안 바뀌는 거야! 길을 건너야 되는데! 왜! 왜! 이를 꼭 물고 달님에게 “언니 추워?” 하고 돌아보는데, 달님, 안 보인다. 달님, 레코드 가게 앞에서 입 벌리고 서 있다. 나는 포기하고 가게의 문을 열었다. 주인아저씨는 우리를 본 체 만 체다.  

 “저, 지금 나오는 음악이....(제발 이건 파는 거 아니라고 말해줘요)” “ (진열된 씨디 하나를 가리키며 무심하게) 이겁니다.” “에스테반.. 음, 모.. 음, 모르..음, 이건 뭐 이렇게 무식해서 원(난 무식하니까 음반은 살 수 없겠어요)...” “아, 못 읽는 분들이 대부분이에요. 읽는 게 중요한가요?” “ (당했다!) 그런데 이 음반은 끝까지 이렇게 좋은가요?” “어유 좋죠. 그러니까 그렇게 비싸죠. (크햑 33900원!) 안 사셔도 되니까 끝까지 들어보세요.” ... 고단수다. 봄, 밤인데. 밖에 비 오는데. 나 방금 시 읽다 왔는데. 난 몰라, 나는 울면서 지갑에서 돈을 꺼내면서 “현금영수증 끊어 주세요” 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다 문득, 기형도의 시 읽는 밤 행사에 다녀와서 후기를 잘 쓴 한 명한테 4만원 적립금을 준다고 한 게 생각났다! 오냐 어디 팔 걷어붙이고 써보자, 그 4만원은 내 거다, 그걸로 CD값 충당해야지, 누가 쓰기만 해봐라, 하고 별렀다. 그런데 승주나무님이 이렇게 잘 쓴 걸 보니까(심지어 사진까지 잘 찍으셨네!) 4만원은 날아갔구나, 에라, 그럼 나 내 맘대로 쓸래, 하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엉뚱한 결론. (응?) 그래서 나는 뵌 적도 없는 승주나무님 서재에서 드러눕는 심정으로 난생처음 트랙백을 해본다. 이렇게 멋진 후기라니, 나는 타의에 의해 겸손해졌다. 낭패로다!



이제는 분한 마음을 누르고 편하게 쓰련다.  

 

기형도 시인이 살아있었다면 분명히 시를 몇 편이고 썼을 날씨였다. 찬바람이 불었고, 비가 왔다. 나는 여럿이 모이기로 (술을 마시기로) 한 날 비가 오면 일단 기분이 좋다. 그런 날은 몇 해가 지나고도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니까. 그렇게 찾아간 이리까페가 어둡고도 따뜻한 곳이어서 좋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 자리에 꼭 가고 싶었던 실제 이유-진은영 시인을 멀리서나마 만난 게 특히 좋았다. 함성호 시인이 딱딱한 말투로 전하는 ‘노련해져가는 일에 대한 걱정’이 듣기 좋았다. 소설가 성석제의 ‘노안을 배려치 않는 유인물’에 대한 일갈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죄송)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은 그대로 훔쳐 오고 싶었다. 성기완 시인과 동료 밴드가 「가수는 입을 다무네」를 부를 때, 기형도가 죽은 시인이 아니란 걸 확인해서, 나는 안심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입 속의 검은 잎』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들과 섞여 일하고 싸우고 술마시고 떠들고 내일을 걱정하며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음껏 고독하고 싶어서 외롭고 싶어서 읽는 시집이었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 모든 길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충고)라거나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 기적적이었다' (오래된 書籍)거나 하는 노골적인 환멸과 슬픔, 체념이 참 신기하게도 오히려 내일 출근하는 힘이 되곤 했다. 내 그림자는 이 시집이 대신해주었다. 그가 나대신 우울했다. 그가 나대신 울었고 절규했다. 그래서 나는 다음날이면 또 환하게 웃었다. 무례한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 안에서 고집스럽게 '사람들의 쾌락은 왜 같은 종류인가'(나쁘게 말하다)는 구절을 펴 읽던 어린 날의 네꼬를, 나는 오래간만에 떠올려보았다. 울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울었으니 다시 내가 웃을 차례라고 생각했다. 한 시인이 죽었고 우리는 모여서 행복했다. 이래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할 정도로.

 

*

이벤트’에 응모하는 일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신청하면서 확인한 간절함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다른 분들의 진한 사연에 비하면 나의 응모 댓글은 투박하기 그지없었는데(“어떤 이벤트에 이토록 간절하게 가고 싶었던 적이 없어요”), 오로지 플래티넘 회원이란 거 하나로 날 뽑아준 알라딘과 문학과지성사에 감사를. 특히 달님의 표현에 의하면 ‘20년 전에 죽은 시인을 이렇게 모던한 방식으로 추모하는’ 문학과지성사의 탁월한 감각에, 각별한 질투를. 

 

 
 

 

 

P. S.  4만원은 날아가고 CD만 남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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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네꼬 님과 이벤트 후기 쓰시는 분에게 사과하며...
    from 승주나무의 책가지 2009-03-12 11:03 
    그냥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글을 잘 써서 그런다는 게 아니라, 후기를 진솔하게 구체적으로 남겨야 나중에 그걸 보고 나서도 후회가 덜 하거든요. 예전에 시를 쓴 적이 있는데 시를 쓴 다음에는 절대 다시 그 시를 보지 않고 일주일 정도 지나고 나서 보는 연습을 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그 시를 보면 감정은 누그러지고 시에 대해서 냉정하게 볼 수 있게 되더라구요. 일주일 후에도 살아남는 시는 단 하나도 없었죠. 다른
 
 
Mephistopheles 2009-03-09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누가봐도 승주나무님 후기에 대한 견제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밖에......(영화리뷰로 도전해보세요. 내용 필요없고 무조건 많이 쓰는 사람이 장땡입니다..수근수근 거기다가 1등에겐 무려 30만원의 적립금이..!!)

네꼬 2009-03-09 17:44   좋아요 0 | URL
메피님 오해예요, 오해(손사래). ㅎㅎ 아, 저는 이를 갈며 겸손해져서 차마 이걸 그 게시판에는 못 올렸습니다. (항복의 의미랄까?) 하하 근데 메피님의 '무조건 많이 쓰는 사람이 장땡'에서 그만 푸하핫 웃었어요. ㅎㅎ (뭣이? 30만원!!!)

다락방 2009-03-09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음악이 들리면 당장 들어가서 그 곡을 물어보고 사는건 나도 잘 하는 짓
그렇지만 시를 제대로 느끼는 건 내가 잘 하지 못하는 짓

그래서 네꼬님이 부러워요. 나는 심지어 네꼬님의 전공까지 부러워요. 난 뭐하고 산거야 대체 ㅜㅡ

네꼬 2009-03-09 17:45   좋아요 0 | URL
좋은 음악을 당장 사버리는 건 전 그닥 잘 못하는 짓.
시를 느끼는 건 언제나 잘 못하는 짓 ㅠ_ㅠ
전공과 관련해서는 뭐든지 못하는 짓 ㅠㅠ ㅠㅠ ㅠㅠ ㅠㅠ ㅠㅠ
"난 뭐하고 산 거야 대체!" 하는 탄식은 요즘 내가 잘 하는 짓
ㅠㅠ ㅠㅠ ㅠㅠ ㅠㅠ ㅠㅠ ㅠㅠ ㅠㅠ ㅠㅠ ㅠㅠ

하이드 2009-03-09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위기가 무슨 밥집에서 연주하는 것 같지만, 이 곡이 제일 좋으니깐, 조공짤로- 바치고 갑니다. 넙죽- 이런 음악이 길거리에서 나오면, 발이 안 떨어질만해요. 아- 방구석에서 들어도, 그냥 막 녹는걸요.


네꼬 2009-03-09 17:56   좋아요 0 | URL
으악, 하이드님, 안돼요, 안돼. 이러시면... (귀를 꽉 ㅠㅠ)

순오기 2009-03-09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이벤트에도 이토록 간절하게 가고 싶었던 적이 없어요, 수첩에 적어두고 써먹어야겠어요.ㅋㅋ 기형도 시인, 사랑받을 만한 유령(?)이죠.^^

네꼬 2009-03-10 10:05   좋아요 0 | URL
오, 요런 노골적인 부탁의 말이 통하기도 할까요? ^^ 순오기님은 이제 이벤트 응모하지 마세요. 흥, 만날 다 되고 심지어 독후감도 잘 써서 상금 받으시고 ㅠㅠ (쓰다 보니 울컥하네 ㅎㅎ) 기형도 유령님, 그럼 사랑스러우신 거? ㅎㅎ

순오기 2009-03-10 22:01   좋아요 0 | URL
하하하~ 어쩌다 운이 좋았지요~ ^^
우리 민경이 왈,
"우리 용포쌤, 잘 계신가요?"ㅋㅋㅋ
우리 용포샘이랍니다. 전해주세요~~~ ^^

네꼬 2009-03-11 17:53   좋아요 0 | URL
용포샘이 누구시더라? ㅎㅎ (자자 안부는 직접, 관심은 저에게만! 하하)

니나 2009-03-09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형도와 비와 탱고와 이리까페라니요. 알콜까지 홀랑 털어넣으셨을테니 부러워서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댜댜댜댜댜댜댜댜댜댜댜댜.

네꼬 2009-03-10 10:07   좋아요 0 | URL
니나님, 안녕하세요? 저는 그렇게 댜댜댜댜댜댜댜댜댜댜댜 떨면서 지갑에서 돈을 꺼냈답니다. 기형도, 비, 탱고, 이리까페는 어딘가 살짝 어긋나는 듯하면서도 말하자면 또 뭐 잘 들어맞기도 하고 그렇지요. 왜냐, 어긋나는 부분은 알콜이 묶어주니까요. 하하하.

치니 2009-03-10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제가 알라딘이라면 4만원이 뭐에요, 40만원 줄 마음 드는 페이퍼네요. ^-^
이렇게 정성껏, 그리고 이렇게 주최 측의 의도를 이쁘게 고스란히 담아주는 블로거가 몇 있을라구요.
(승주나무님 거는 이제 가서 읽어볼랍니다만 ㅎㅎ 일단은 네꼬님 편)
탱고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네꼬님이 반했다니 들어볼래요. 길을 걷다 들려오는 음악이 좋아서 씨디를 샀다, 라는 짧은 표현으로 대개 넘어갈 사건을 이렇게 소상하고 재미나게 들려주시는 네꼬님은 천상 작가가 되었어야 해요. :)

이리까페 근처에 일본인이 하는 빵가게가 있답니다.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961244) 친구가 알려줬는데 저도 함 가볼라고요, 맛있을 거 같죠? 헤헤.

네꼬 2009-03-10 10:10   좋아요 0 | URL
저는 치니님의 알라딘 마을에 세 들어 살겠어요. 하하. 제가 집세로 40만원을 드리죠! (승주나무님 페이퍼에는 뭐라 댓글을 달아주실지, 저는 안 보겠어요. 흑.) 저도 탱고에 특별한 감흥은 없었어요. 그런데 그날은 좀 심하더라고요. 홍대 삼거리를 지나실 땐 레코드 포럼을 주의하세요. 아주 흉악한 가게예요! 그에 비해 '미루카레'는 아주 다정한 가게군요. 기본적으로 그날 자기가 먹고 싶은 빵을 만든다는 원칙 참 맘에 드네요.♡ 이런 고소한 정보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간만에 빵가게 재습격? 히힛.

또치 2009-03-10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기본적으로 내가 먹고 싶은 빵을 만들어요" 이건 내가 꿈꾸는 가게!! (네꼬씨~ 반죽 준비햇~)
아, 음악에 대한 우울한 추억 하나가 보태지겠군요. 그리고 이 다음날... 나는 네꼬씨에게 멱살을 잡혔죠. The Chieftains 음반을 여태껏 숨기고 있었다면서 ㅠㅠ

네꼬 2009-03-11 17:51   좋아요 0 | URL
ㅎㅎ 멱살 잡아서 쏘리 또치님. (그날의 격한 감정이 다시 한번 떠오르누나)
안 그래도 자기가 먹고 싶은 빵을 만든다는 대목에서 또치님 생각이 났죠. 아, 소보루 먹고 싶다. (응?)

mong 2009-03-11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참 불만이나 항의 이런 단어들도 네꼬님에게 오면
달콤해진다니까...
재주덩어리 네꼬씨~~
(갑자기 빵이 먹고싶어진 몽)

네꼬 2009-03-11 17:52   좋아요 0 | URL
어머 우리 노란 동지 오셨다. (똑똑한 몽님, 방가방가) 나도 지금 소보루 먹고 싶은데. 음, 네꼬씨와 몽님이 소보루를 수북이 쌓아놓고 우유(반드시 우유여야 함)를 마셔가며 냠냠 짭짭 먹는 걸 상상하니 막 좋아요. ㅎㅎ

승주나무 2009-03-12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만에 글을 봤습니다. 여유가 없어서 글을 하나씩 검색해보지도 못했네요. 그 대신 트랙백을 남겼으니 제 진심을 알아주세요^^

네꼬 2009-03-12 11:35   좋아요 0 | URL
승주나무님, 안녕하세요? 제가 불쑥 이렇게 트랙백을 달아서 혼자 재밌다고 놀았네요. ㅎㅎ 진심이 담긴 후기를 읽고 제가 가졌던 사심이 부끄러워서 써본 거예요. 그냥 추천과 댓글로만 남기기엔 아쉽기도 하고, 또 저도 남겨두고 싶어서요. (^^) 저는 아예 그 게시판엔 글을 안 남겼답니다. 이렇게 뵈어서 반갑습니다요.

2009-04-02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06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