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형도 시인이 아끼던 수동 타자기로 집자한 <기형도 전집>이라는 글씨체는 이제 기형도의 상징이 되었다. 친필로 똑바로 쓰다가 타자로 된 시를 읽고 시인이 몹시 흐뭇해 했다는 일화를 생각하게 만드는 현수막이다.
20년 만의 제사를 찾은 문상객들
좀 특별한 문상을 다녀왔다. 벌써 20년이나 지난 기형도 시인을 추억하는 <기형도 시를 읽는 밤>에 초대됐다.
이 날은 기형도 시인이 좋아하는 진눈깨비는 아니지만 하루 종일 굵은 비가 내려 자연스럽게 음습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회를 맡은 '대중음악가' 성기완 씨는 "기형도 시인이 홍대 주변에서 서성거리다가 이곳(이리카페)로 들어왔을 것 같은 밤이다."라고 말했다. 3월5일 저녁 인터넷 서점 알라딘(www.aladin.co.kr/)과 기형도 시인의 주요 작품들을 출간한 문학과지성사(www.moonji.com/)가 공동으로 주최한 <기형도 시를 읽는 밤>에는 시인과 동시대, 같은 공간에서 부대꼈던 소설가 성석제, 시인 이문재, 황인숙 씨와 시인의 후배군인 김중혁, 한강(소설가), 함성호, 진은영, 최하연(시인) 등이 애써 준비한 시들을 낭독하며 독자들과 함께 했다. 이 시인, 소설가들은 다른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기형도에게 크고 작은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 기형도의 시 <안개> 일부
이 날 인상적이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먼저 발디딜 틈이 없이 들어차 기형도를 추억하는 독자들이다. 알라딘에서 이날 밤을 위한 티켓 25장(1장당 2명)명을 내놓았을 때 티켓을 얻기 위해 정원의 10배인 250명이 신청을 했다. 저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려주며 기형도 시 읽는 밤에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인터넷에서의 열기를 말해주듯 그날은 자리가 없어서 맨바닥에 앉아서 행사를 즐길 정도로 빽빽했다. 기형도 20주기에 관심을 갖는 취재진은 뒤로 하더라도 시인이 생전에 갖고 싶었던 '독자'들이 20년이 지나도 잊지 않고 찾아와주었기 때문에 사회자도 "기형도 시인이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형도는 생전에 끝내 시집을 독자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사후에야 동료들에 의해서 작품집이 출간되었다) 주인공인 시인은 없고 나머지 사람들이 다 주인공이 되는 특이한 제삿날이라는 인상이었다.
행사에 참여한 문인들은 오늘의 행사를 위해 창작시도 쓰고 작품집도 읽고 했지만 저마다 기형도의 흔적들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 기형도로부터 일부러 도망친 문인도 있었다. 그 사연이 참 다채로웠지만 그들에게 기형도의 '시 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 기형도의 시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일부
▲ 소설을 쓰는 한강은 기형도 시집을 대학 1학년 때 보았을 때 겉이 앙상해 보였는데 내용은 전혀 앙상하지 않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의 시집에는 밑줄이 마구 그어져 있었다. 유일하게 밑줄이 하나도 그어지지 않았지만 기형도 시집 하면 생각난다는 <기억할 만한 지나침>을 낭독했다.
성석제 "'노인의 노안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나라'라고 했을 것이다"
문인들은 기형도 작품 중에서 유난히 흔적을 깊이 남겼던 작품을 낭독했고 이 날을 위해 특히 시를 써오기도 했다. 이 시들은 '샘플링'이라고 하는데, 기형도의 시어를 서캐훑이해서 20주기에 어울리는 새 시를 하나 만든 것이다. 시인, 소설가들이 좋아했던 작품의 목록을 올려 본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한강),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김중혁), 어느 푸른 저녁(성석제), 입 속의 검은 잎(이문재), 그 집 앞(황인숙), 빈집(백현진, 퍼포먼스)
낭독도 낭독이지만 이 날 문상 온 문인들의 재기발랄하고 날카로운 멘트들이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소설가 김중혁은 습작기에 시인에 대한 열망이 강했지만 시를 쓰지 못해 소설을 쓰게 됐으며 소설 속에 그 열패감이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소설가로서 이 자리에 초대된 것은 자신이 유일하며(성석제는 시도 쓰고, 한강은 문체가 유려한 시 같으니까) 소설을 열심히 써서 기형도 낭독회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성석제는 기형도 20주년 소회를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갑자기 '유인물' 이야기를 꺼냈다.
"낭독을 하려고 유인물을 보니 글자가 안 보여 혼났다. 이렇게 노인을 배려하지 않는 나라가 있을까? 아마 기형도가 살아 있었으면 이렇게 불평했을 것이다"
청중들은 이 소설가들의 재담에 그 날이 제삿날인줄도 모르고 킬킬거렸다. 황인숙 시인은 더 이상 보탤 것 없는 말로 기형도에 대한 감상을 정리했다.
"나잇살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도 참 살이 많이 쪘구나. 기형도도 살이 많이 쪘으련만."
이 말에 옆에 있던 이문재와 성석제가 몹시 흥분했다. 성석제가 한마디 거들었다.
"저는 보이는 곳에 나잇살이 있고, 안 보이는 곳에 노안이 있습니다."
기형도 시에 대한 시인들의 고뇌도 엿들을 수 있었다. 함성호 시인은 십 년만에 읽은 느낌이 '유치하다'고 말했다. 기형도는 죽었지만 자신은 살아서 시를 계속 써야 했기 때문에 시가 늙고 노련해지는 게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유치함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나는 박제된 시와 나잇살 먹은 시를 동시에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문재가 이런 느낌에 대해서 좀 더 정확하게 지적해 주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이 젊은이(기형도)로 하여금 이토록 단정적이고 단호한 언사를 사용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이것은 기형도 시를 오랫동안 마주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이 경우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는데, 기형도를 넘어서거나 기형도를 회피하게 된다.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 기형도의 시 <오래된 書籍(서적)> 일부
▲ 기형도에 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단짝친구 성석제다. 시인이 생을 마감한 3월 7일로부터 두 날 남짓한 때에 첫시집을(입 속의 검은 잎)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노력 때문이다. 원재길, 조병준, 이영준, 후배 기자 박해연 등은 누구의 위임도 받지 않은 편집위원으로 자처하고 첫 시집과 전집, 최근 출간된 20주기 기념 문집 작업을 함께 했다. 기형도의 첫 시집을 황망히 엮고 지금은 작고한 김현 선생을 찾아갔을 때 김현 선생이 직접 원고를 받으며(선생은 당시 몸이 불편했다) 손을 꼭 잡아주셨던 그 손의 힘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대학 3학년 때 손에 쥔 유고시집 뒷장에 쓴 말 "1989년 7월 15일 나에게"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 기형도의 시 <그 집 앞> 일부
2시간이라는 짧은 '의식'을 위해서 문인들과 음악인들이 오랫동안 준비했을 법한 재주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독자들이 말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알라딘에 남긴 250개의 댓글을 보면서 독자들의 생생한 반응을 엿볼 수 있었다. 진행자 성기완 씨는 그 중에 몇 개를 소개하는 것으로서 위안을 삼아 달라고 요청했다.
제가 갖고 있는 기형도 시인의 유고시집 맨 뒷장에는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이 시집을 샀던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1989년 7월 15일 나에게'. 시집을 구입한 이후 정말 책이 낡을 정도로 읽고 또 읽었더랬지요. (jure)
기형도가 죽은 날 대학 3학년이었던 몹시 오래된 독자가 들려주는 회고와 시집에 기록된 말이 청중들의 가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독자들은 자신의 경험 속에 자리잡은 기형도라는 숨겨진 공간을 슬쩍 끄집어내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기형도는 사라지지 않는 추억이다.
내가 그 시를 처음 알게 된 건 열일곱살 때 였는데 저는 지금 서른네 살의 아이 아빠가 되었어요. 그렇지만 기형도 시인은 언제나 그대로 이네요.. 15년이란 세월이 흘러 아이 아빠가 된 지금 기형도 시인이 쓴 <엄마생각>이란 시를 나의 아이도 함께 느꼈으면 좋겠어요 (비쿨)
네티즌 윤화는 수험생이었는지 현대시 문제집에서 <입 속의 검은 잎>을 발견해 문제를 풀다 말고 시에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기형도가 교과서에 실린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문청'이라는 이름을 들었던 사람들은 문인이나 독자를 막론하고 기형도를 모방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나 보다. 네티즌 'mamasday'은 스무 살 때 기형도 시집을 산 이후로 시풍이 기형도의 그것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기형도가 시집에 잃은 사랑 이야기를 쓴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기형도 하면 '실연'이나 '슬픈 연애'라는 이미지가 덧붙었다. 특히 <빈집>이라는 시가 그러한데, 네티즌 'dudn'은 <빈집>을 처음 읽었을 때 잃었던 사랑을 기억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형도 시가 '그로테스크'라는 이름을 얻었던 것처럼(김현에 의해) 2~30대 독자들을 매료시킨 것은 그로테스크한 감수성이었다.
20살이 되어서 그의 시집을 읽고 저는 많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 후부터 매년 칼바람이 불거나 눈이 오는 밤이면 자연스레 그의 시들이 생각나네요.
아마도, 그로테스크한 그의 시들이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닮아 있어서일까요. (아난)
네티즌 '타인의삶'은 "20대를 통과하면서 겪었던 현실에 대한 억한 심경과 분노"를 위로받았다고 썼다. 네티즌 'renee'는 '"이십 대의 밤, 외로이 앉은 새벽,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내 삶과 영혼과 자유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고 말했다.
네티즌 로맨티스트는 "대체 기형도 시인은 왜 차별화가 되는건지" 궁금하다고 썼는데 수많은 댓글들을 보면서 그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시를 읽는 독자도 시를 쓰는 시인도 몹시 희귀해졌다는 게 요즘 드는 생각인데, 기형도가 대중의 사랑을 잔뜩 받은 거의 마지막 시인이 아닌가 싶다.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은 그의 '유령'을 사랑한 것이겠지만, 20살이나 먹은 나이 든 유령이 지금도 사랑을 잔뜩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재미있었다.
▲ 좌석이 없어서 맨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았어도 나쁘지 않은 기색들이었다.
◆ 기형도 시인의 주요 작품과 최근 출간된 20주기 기념 문집 ◆
▲ 2008년 여름 동요를 부르는 잡곡가(잡다한 노래를 짓는다고 해서) 백창우가 기형도 <빈집>이라는 시에 노래를 붙인 <빈집>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날 백재현 씨의 퍼포먼스 '빈집'과 비교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 첨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