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일 년에 두 번 정도 만나는 절친한 친구 A가 있다.'절친'하다기에는 적게 만나는 셈인데 심지어 만나지 않는 동안에 통화는커녕 메일도 문자도 주고받지 않는다. 블로그를 오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느닷없이 만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마시러 간다. 술을 마시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친구이자 애인이며 가족이고 선배이자 후배이며 동지가 된다. 연락 좀 하고 살자거나 하는 의례적인 반성은 물론 하지 않는다. 어제 만났을 때도 그랬다. 따져보니 이번엔 8개월 만에 만났다. 우리는 조개탕과 쇠고기구이를 놓고 생(生) 백세주를 마셨다. 밀린 연애사와 가족 이야기, 회사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쏟아내느라 둘이서도 순서를 정해야 했다. 역시 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간이면서 다정한 사람이었고 술을 잘 먹고 내 유머를 알아듣는 친구이자 외모와 목소리까지 내 마음에 쏙 드는 애인이었다. 우리는 만나면 다 좋다. 굳이 하나 문제가 있다면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술도 8개월치를 먹게 된다는 것 정도? 

그래서 어제도 자정을 가뿐히 넘겨 술잔을 (끝도 없이) 기울였다. 아침(이라기도 뭣한 시간)에 일어(났다기보다 깨어)나니 도무지 내가 사람인가 싶다. 눈은 떴으되 술이 가득 담긴 욕조에 머리까지 담그고 있는 기분이다. 천근만근인 몸을 일으켜 앉아 생각했다. A하고는 다 좋은데 술을 너무 많이 먹게 되는 게 문제야. 다음에 만나면 12시 전까지만 마시자고 할까보다. 그럼 너무 야박하게 들리려나? 아냐 A도 그걸 바랄지 몰라. 아, 지금쯤 A가 나를 원망하며 다시 네꼬를 만나나 봐라 하고 다짐하고 있는 거 아닐까? 술이 문제야, 술이. 나는 왜 술꾼인 걸까? 왜 술꾼의 집안에서 태어나 이 운명을 짊어지고 사는 걸까? 하여간 이대로라면 A는 날 떠날지도 몰라. 술이 문제야, 술이.  

그러면서 방에서 기어나와(은유적인 표현이 아님) 싱크대를 짚고 일어나 찬장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운명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어머니가 사다 두신 고등어가 있더라고, 김창완 아저씨가 노래했지. 이런 마음으로 그는 어머니께 노래를 바친 것일까? 그렇다면 나도 나의 동거녀에게 노래를 지어 올려야 될지 모르겠다. '황태라면'이라니. 나는 이런 라면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어제 장을 본다던 동거녀가 사다 둔 모양이었다. 나는 당연히 이 라면을 끓였다. 냄새가 우선 나에게 다가오는 새 운명의 서막을 열었다. 나는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  

'얼큰한'이라는 겸손한 표현으로 묘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라면. 그 맛에 대해서는 섣부른 언급이 행여 해를 끼칠까 두려워 말하지 않으련다. 다만 나는 이 라면을 먹으며 지나간 술꾼의 아침을 보상 받는 기분이었다. 술을 마시고 몸이 힘든 것도 고된데 지난 밤의 나를 미워하고 반성하게 했던 그 수많은 아침들을 그분이 알고 계셨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그분이 말씀해주셨다.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위로받는다는 생각'. 냄비를 비우는 동안, 억눌렸던 마음이 서서히 풀어졌다. 그래, 술을 마시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다시 당당해지자. 나에겐 그분이 있다.  

이렇게 해서 A는 앞으로도 나의 친구이자 애인, 가족이자 동료이자 동지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이례적인 일이지만, 월요일에는 그에게 메일을 써서 황태라면에 대해 간증해줄 참이다.) 나는 일어나 청소를 하고 목욕을 하고 저녁에 집에 오기로 한 손님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술을 마신 다음 날도 인간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남의 비난보다 무섭다는 '자책'으로 수많은 아침을 허비하였을 전국의 술꾼들과 연말 술자리의 피로로 당황하고 있을 일반시민들께 전도하는 마음으로 이 라면의 일식(一食)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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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12-27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진작 좀 알려주시지 그러셨어요. 저도 어제 소주-와인-맥주로 이어지는 술독에 빠져 기절했다 일어났단 말예요. 그리고는 아주 조금 남아있는 김치찌개 냄비에 밥을 철푸덕 부어 슥슥 비벼먹었단 말예요. 왜,왜, 황태라면을 알려주지 않으셨어요? 왜, 왜 황태라면을 우리집 부엌 선반에 올려두지 않으셨어요?

네꼬님 미워요, 네꼬님 미워요. 흑 ㅜㅡ

네꼬 2008-12-27 17:20   좋아요 0 | URL
다락님 나도 오늘 알았어요. 아까 우리 문자를 주고받던 그 때, 막 먹기 시작하던 때였어. (내 기상 시각이 짐작이 가죠? ㅋㅋ) 내가 꼭 사줄게, 황태라면. 다락님, 우리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어요!!

마노아 2008-12-27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술 안 마시는 처갓댁에서 늘 외롭게 소주잔을 기울이는 형부를 위해 황태라면을 구비해야겠어요. 네꼬님의 전도에 저는 푹 빠졌어요!

네꼬 2008-12-27 18:11   좋아요 0 | URL
(우선, 마노아님, 형부께 잘해 드리세요.--절절한 심정.) 형부가 용돈을 주실 지도 몰라요. 해장이 아니라 간식으로 드셔도 좋을 맛이니, 마노아님도 한번 드셔보세요. 술을 배우고 싶어질지도 몰라.

Mephistopheles 2008-12-27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그래도 술을 양껏 마신 다음날 라면으로 해장하는 건 위장이 말할 수 있다면 욕이 나올 일이에요..북어나 콩나물이 최고고요..이걸 끓여먹기 귀찮다 싶으면 http://100.naver.com/cocktail/list.php?kind=8&id=795862 이것도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나저나. 네꼬님 페이퍼에서 금기시되는 단어인 "고등어"를 직접 페이퍼에 써먹다니.!!

네꼬 2008-12-27 18:14   좋아요 0 | URL
하하 메피님, 이런 건 그래, 어디서 찾으셨어요? ㅋㅋ '충혈된 눈'이라니, 마치 오늘 아침의 저를 보기라도 하신 듯.

황태라면의 은혜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고등어 따위는 무섭지 않게 되었답니다. 물론 북어나 콩나물로 해장을 하면 좋겠지만, 어디 다음날 그럴 정신이 있나요. 황태라면에는 북어와 콩나물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하하핫.

조선인 2008-12-27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런 전도에 무지 약해요. 장 볼 목록에 적어두었습니다. 호호호

네꼬 2008-12-27 18:15   좋아요 0 | URL
'호호호'라니, 황태라면을 장 볼 목록에 적어두는 술꾼답지 않게 겸손한 웃음이세요. 하하. (여기 성도가 한 분 느셨네~)

Mephistopheles 2008-12-27 18:21   좋아요 0 | URL
요즘 연어가 아주 말깔난다고 하던데요 조선인님..=3=3=3=3=3

네꼬 2008-12-28 22:29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들으셨죠? ㅋㅋ

nada 2008-12-27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라면의 명가는 삼양인 건가요! 당장 오늘밤에 시식해 봐야징.
술을 마신 다음날도 인간으로 살 수 있다니. 심히 솔깃하군요.
사회적 숙취를 해결하는 법도 알려주어요. 네꼬댁~

네꼬 2008-12-28 22:34   좋아요 0 | URL
전 정말 삼양이 잘 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해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한 끼 대용으로 드시기보다는 정말 괴로운 날 아침에 도움을 받으면서 만나시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닐까 싶어요. 전 그 덕에 사람으로 돌아왔거든요. 사회적 숙취는 도무지 해결이 안 되어요. 하지만 제가 방법을 알아내면 배추님께 꼭 먼저 알려드리지. (그리고 이런 복음에 배추님이 솔깃할 줄 내 짐작했어, 짐작했어, 이 술꾼! ♡)

L.SHIN 2008-12-28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반갑군요.
나의 네팡이 내가 전에 썼던 벽지를 써서 말이죠.(웃음)
그나저나 해장페이퍼(?)도 어쩜 이렇게 이쁘게 쓰는지.
나는 쓰는게 고작해야 오타대마왕 음주페이퍼 써놓고 다음날 '끄아악' 하는게 다인데..
ㅋㅋ-_-

Mephistopheles 2008-12-28 13:14   좋아요 0 | URL
엘신님..자신의 고통은 곧 타인의 즐거움을 몸소 실천하시는 겁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네꼬 2008-12-28 22:35   좋아요 0 | URL
쿠션님, 아, 이 벽지 좋죠? (나도 웃음)
해장페이퍼가 이쁠 리가 있겠어요. 술 마신 다음 날 아무리 이뻐 봐야 술 냄새가.. (어우 나 이런 말 쓰니까 아저씨 같아.) 난 쿠션님의 음주 페이퍼 오타들 재미나고 좋던데! :)

메피님, 실은 저도 그래요. ㅋㅋ

L.SHIN 2008-12-29 04:59   좋아요 0 | URL
메피님,,이럴땐'유얼웰컴'행하는건가요? ㅡ.,ㅡ

Mephistopheles 2008-12-30 04:30   좋아요 0 | URL
노오~~~~~~프라블럼 하시면 됩니다 엘신님.

네꼬 2008-12-31 01:36   좋아요 0 | URL
영어로 대화 가능한 네꼬 씨의 서재. ㅋㅋ

도넛공주 2008-12-28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촛불집회때 각광받았다는 그 라면! 맛이 궁금하네요.삼촌댁에 가면 하나 훔쳐와야겠습니다(삼양라면 모든 종류가 다 있는 집)

네꼬 2008-12-28 22:36   좋아요 0 | URL
오! 그렇던가요! 심지어 이 라면이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치기까지 했다 이거죠! (아멘.) 일단 하나 훔쳐와 보세요. 맘에 든다 하시면 내가 또 사드릴게요!

치니 2008-12-28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옷, 이런 전도 앞으로도 좀 자주 자주 해주세요. 저도 완전 솔깃.
그나저나 네꼬님 댁 동거녀, 제가 같이 살면 안될까요, 어쩜 그리도 참한 처자가 다 있는지 등장할 때마다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네꼬 2008-12-28 22:37   좋아요 0 | URL
동거녀를 내 드릴 순 없으니, 음, 그럼 치니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같이 살면... 아 참 그럼 하린군은.. 음, 그럼 우린 모두 네 식구... (퍽! 뭔 소리냐.)

노이에자이트 2008-12-28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황태라면이라...한번 사서 먹어봐야겠군요.

네꼬 2008-12-28 22:37   좋아요 0 | URL
듣자 하니까 어떤 동네에서는 구하기 어렵다고도 하더라고요. 노자님, 기필코 꼭 구하시길! 화이팅!! (완전 진심 응원)

순오기 2008-12-29 00:18   좋아요 0 | URL
아니 사기 어렵다는 동네가 내가 사는 동네인가요?
황태라면 나도 기필코 사와야지~ 불끈!
우리 아들 엄마가 좀 늦으면 '라면 먹어도 돼?' 그래서 우리집에선 최고의 식사가 먹고 싶은 라면 먹는거예요. 거의 안 먹거나 못 먹게 하는데 이건 예외로 봐줘야겠당~ 네꼬님 추천이니까!

네꼬 2008-12-31 01:36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아닌 게 아니라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궁중요리 전문가 댁에 시집을 가서 걱정인데 신랑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라면이라더군요. (엄마가 못 먹게 해서.) ㅋㅋ 라면을 꼭 먹어야 된다면 이 라면을 강추!

노이에자이트 2008-12-2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웬 화이팅 씩이나...기어코 찾아야겠는데요.

네꼬 2008-12-28 23:19   좋아요 0 | URL
어, 그러고 보니 화이팅은 좀 웃긴가 했어요. 꼭 짚으시네. (긁적긁적. 지금은 제가 노자님 퍼스나콘 포즈입니다.)

보석 2008-12-29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한 전도군요.^^ 네꼬님 글을 읽으니 오늘이라도 당장 슈퍼마켓에 가서 황태라면을 구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네요. 퇴근길에 꼭 그분을 모시겠습니다.

네꼬 2008-12-31 01:31   좋아요 0 | URL
보석님. 그분 모셨어요? (간혹 뵙기 어렵다는 지역도..) 혹시 못 구하시면 제가 보내드릴게요!

2008-12-29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31 0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8-12-29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이거 레어 아이템으로 굉장히 각광 받던 완소 라면이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저는 못먹어봤습니다만 ^_^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습니다!)

네꼬 2008-12-31 01:33   좋아요 0 | URL
어어 그랬구나. 전 몰랐어요. 모르다 만나서.... 더 좋았어요. ㅠㅠ 웬디양님, 우리 담에 같이 먹어봐요. (그러려면 일단 밤새... 알죠?)

무해한모리군 2008-12-29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타 마트가면 저도 라면 코너는 자세히 보고 신제품을 즐겨먹는데 저건 처음 보는데요 ^^;; 함 찾아봐야겠습니다~~
꼭 네꼬님 댁에만 놀러오면 먹는얘기 하게 되는군요.

네꼬 2008-12-31 01:34   좋아요 0 | URL
그러게 제가 회사에서 동료들한테도 얘기해줬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평소 같았으면 저만 맛있는 거 먹는 걸 좋아했을 텐데 (제가 이런 인간이에요) 이 라면은 안 팔려서 안 나올까 봐 걱정되어 전파를... 음. 먹는 얘기... 왜 이럴까요, 저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