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던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느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 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 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 「국수」(1941)
눈 쌓인 산속, 급히 제 집을 찾아 뛰어가던 토끼가 푹푹 눈구덩이에 빠지기도 하는 한겨울, '마을에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온다. 마을은 구수한 즐거움에 들떠 흥성흥성 하다. 뽀오얀 흰 김이 온마을에 가득하다.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던 세월로부터' 봄과 여름과 가을을 지나 한 마을에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이것이 온다. 아버지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 사발에 이것이 담겨 있다. 아마도 옛이야기의 옛이야기 속에서부터 온 듯, '곰의 잔등에 업혀서' 자란 큰 어머니와 재채기를 한번 하면 산너머 마을까지 들렸다는 호방한 큰 아버지가 여기에 함께 온다.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과 어울리는 이것. 산짐승과 전설과 대대로 함께 사는 이 억세고 동시에 순연한 마을 사람들과,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뜰하니 친한 것. 마을을 온통 잔치 분위기로 만들어버리는 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 함박눈과 똑같은 색깔의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따끈한 국수 한 그릇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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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서 해주는 다큐멘터리 '누들로드'를 볼 기대에, 주말에 잔치국수를 해보았다. 재료를 듬뿍 넣은 덕에 국물은 썩 괜찮았는데 도무지 양념장이 맘에 들지 않았다. 엄마가 해준 국수는 이런 맛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해. 일요일 오후에는 필요한 책이 있어서 도서관에 갔다가 (예상했던 대로) 찾으려던 책은 까맣게 잊고 엉뚱한 서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창 밖에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당연한 순서로 이 시가 생각났다. 그제야 나는 내 국수가 실패한 것은 어쩌면 흥성흥성 들뜬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이 없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