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동료가 건네준 청첩장을 열었더니
흔한 인사말 대신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처음엔 당신의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구두가 가는 곳과
손길이 닿는 곳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시작입니다
나는 그만 주책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청첩장 글이 이렇게 뭉클할 수도 있구나, 하고.
나의 동료는 예쁘고 날씬하며 경쾌한 아가씨이고,
그의 신랑은 수줍음을 타지만 사람을 좋아하는 건강한 청년이다.
아니 이들이 나 모르는 사이에 이런 시적 감수성을 키웠단 말인가
한 대 맞은 기분이었는데
물어보니 이 글은 그가 그녀에게 쓴 연애편지에 인용되었던 것이란다.
(어쩐지 정말로 한 대 맞은 기분. 그렇지, 세상엔 연애편지라는 게 있지. 털썩.)
시가 좋아서 전문을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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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성미정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그 안에 숨겨진 발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리도 발 못지않게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당신의 머리까지 그 머리를 감싼 곱슬머리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어디부터 시작했나요
삐딱하게 눌러쓴 모자였나요
약간 휘어진 새끼손가락이었나요
지금 당신은 저의 어디까지 사랑하나요
몇번째 발가락에 이르렀나요
혹시 아직 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러했듯 당신도 언젠가 저의 모든 걸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구두에서 머리카락까지 모두 사랑한다면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아니냐고요
이젠 끝난 게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처음엔 당신의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구두가 가는 곳과 손길이 닿는 곳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