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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평점 :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부의 양극화, 경제적 불평등, 불공정, 인간의 존엄성 하락, 노동의 가치 하락의 이유를 '능력주의의 환상', '학력지상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꼬집고 있다.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이야기하는 미국의 한 복판에서 말이다. 원래 전통적 능력주의는 공공선과 시민성을 포함한 개념이었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 기원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의 능력주의는 '변질된 능력주의'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미국이라는 국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3개주의 연합체로 시작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떠난 청교도들, 경제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 유럽 대륙을 떠난 이주민들(카톨릭의 아일랜드 주민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독일 이주민들이 두 번째로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정치적 박해를 피해 도망자의 신분으로 찾아온 정치인 등 그야말로 '자유'라는 핵심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겼고, 연방국가의 헌법에 그 가치를 담아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연방헌법이든 각 주의 헌법에서 마스크가 반드시 써야 한다는 행정명령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유' 라는 가치를 어떤 이유에서든지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국가 단위 뿐만 아니라 광역단체, 지방자치단체도 시민의 안전을 위해 행정명령을 언제든지 발령낸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본다.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소위 알려진 미국의 전통적 능력주의는 자유시장주의와 신자유주의 사상의 거센 물결 속에서 완전히 변질되고 말았다. 과거 전통적 능력주의에서는 능력 자체가 개인이 노력해서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운, 또는 신의 은총의 결과로 보았다. 능력에 따라 부를 누리거나 명예를 얻는 것을 당연한 자격으로 여기지 않았다. 독일에서 촉발된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의 정신 또한 그렇다. '엄격한 은총론'을 기반으로 한다. 구원은 인간의 선행이나 행위,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다시 말하자면 '반능력주의적'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격 없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몸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와 죄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돌아가셨기에 지금 살아가는 삶 자체는 은혜 그 자체다. 인간의 삶 속에 능력과 노력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종교적 정신으로 세워진 국가가 미국이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은 비대졸다. 미국 최고의 대통령 중 하나로 꼽히는 해리 트루먼도 비대졸자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딜정책을 미천한 학력의 소유자들에게 맡겼다. 법무장관은 법학 학위가 없는 사람이었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이사장은 작은 마을의 은행원이었으며, 농무장관은 지방 주립대 출신에 불과했다. 당시 대서양 반대쪽 나라인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노동당 당수였던 애틀리 내각은 장관 가운데 일곱명이 탄광 갱부 출신이었다. 특히 외무장관은 11세 때 학교를 중퇴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결코 능력이라는 것 자체가 학력과 상관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학력과 국정 운영 능력은 관련성이 없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 미국 뿐만 아니라 서구 사회, 그리고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정책을 결정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문대 출신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만큼 미국도 입시부정, 입시경쟁, 명문대학 입학을 위한 경쟁이 심각할 정도라고 마이클 샌델 교수가 이야기한다. 왜 미국인 부모는 자녀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문대학에 입학시키려고 할까? 명문대학 입학 그 자체가 성공을 보장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과외에 들이는 돈이 예일대 4년 과정보다 더 많이 들며, 명문대 입학을 위해서라면 지체장애자 특별 선발전형에도 기웃거리며 기부금을 들여서라도 어떻게든 입학시키려고 하는 것은 능력주의 환상, 학력주의 환상이 미국을 지배하고 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본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소득의 불평등, 사회적 명망의 불평등(노동의 존엄성, 인간의 존엄성)이 일어나는 원인을 3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고등교육(명문대 입시), 시장중심적 세계화 프로젝트(자본소득이 노동소득을 앞질렀다), 현대정치의 기술관료화다. 공공선이라는 가치는 이미 버려진지 오래다. 공공선이라는 무엇인가? 개인이 아닌 국가나 사회 모두를 위한 선을 말한다. 청소노동자도 사회를 지탱해 가는 꼭 필요한 존재다.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공공선을 위해 애쓰는 이들은 돈을 떠나서 존중받아야 하는 사회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 관점에서 그들은 낙오자며 패배자로 취급된다. 배관공이나 전기 기술자, 치과 위생사도 공공선에 기여하는 훌륭한 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인정은 커녕 하급자로 바라본다. 공공선이 무너진 사회는 결코 정의로운 사회라고 볼 수 없다. 대학이 언제부터인가 교육을 수행하는 장소가 아니라 학력을 부여하는 공장으로 변질되고 '학위'라는 그럴싸한 딱지를 통해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를 독점하다보니 시민성을 구현하는 일은 찬밥신세가 되어버렸다. 민주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힘의 근원은 공공선과 시민성이다. 이것은 능력이나 학력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이 도덕적 미덕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지,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타인을 위해 겸손하게 내려 놓는 시민성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달려있다고 본다.
민주주의 사회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라는 사회가 아니다. 그 자유가 오만이 될 수 있다. 다른 이에게는 굴욕을 줄 수 있다. 가난과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굴레를 씌우는 사회가 아니다. 기회의 평등을 넘어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는 환경을 수정해 가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다. 공공선과 시민성은 공동체의 책임을 요구한다. 개인의 이익이 아닌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책임말이다. 공공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희생이 뒤따른다. 누군가는 양보해야 한다. 자기 스스로의 행위에 엄격한 잣대를 부여해야 한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교만이며, 오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