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02 - 멋진 신세계, 2021.1.2.3
문지혁 외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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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북스의 계간지다. 작년 하반기 창간호에 이어 통권 두 번째 잡지인셈이다. 차경희 편집위원의 인사말에 이어 펼쳐지는 고풍스러운 책 공방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색색의 가죽과 실, 오래된 책들, 나무와 금속으로 된 도구들을 찍은 사진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현란한 기계들로 대체되는 시대에 한 땀 한 땀 수놓듯 전부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공방의 모습에 마음이 편해진다. 

 

책을 제본하는 예술제본가를 '를리외르'라고 부르나보다.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제본소 '렉또베르쏘'의 고 백순덕 선생과 그 제자 조효은 현 대표의 일화, 그리고 프랑스 유학을 떠나 '를리외르' 자격증을 취득하고 돌아온 백순덕 선생의 조카 이효진. 이들을 통해 척박한 예술제본 공방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참고로 '렉또베르쏘'의 뜻은 '책의 앞장과 뒷장'이며 라틴어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책의 기원은 파피루스에서 시작되었고 성서의 bible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두루마리 형태의 파피루스는 낱장을 묶어 끝을 꿰매는 코덱스로 바뀌면서 휴대와 보존이 용이해졌다. 오래된 책이라도 겉표지는 낡았을지언정 속지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코덱스의 힘이다. 인터뷰어인 문지혁 작가는 책의 본질을 인터뷰하는 과정을 속해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내용이 아니라 물성이 책의 본질이다" (42쪽)

 

의외의 정의다. 책의 본질이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둘러싼 표지, 무게감이 느껴지는 책 그 자체에 있다니. 코로나19 감염증으로 인해 수업에 대한 본질도 약간 달리 해석되고 있다. 보통 수업하면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 그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물리적 시간을 떠올렸다면 비대면 원격 수업이 이루어진 코로나19 감염증 시기에는 수업의 본질이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과 수업 후 피드백에 있음을 경험한다. 컴퓨터 화면 상에 비춰지는 콘텐츠와 얼굴보다는 학생들을 생각하며 준비하는 그 시간이 더 의미 있으며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는 그 시간이 오히려 '수업'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제본 공방에서의책은 책이라는 크기와 무게를 지닌 물리적 형식이 곧 책임을 말해준다.

 

"페이지마다 빼곡히 적혀 있는 글자가 아니라, 앞장에서 뒷장으로 넘어갈 때 우리가 필연적으로 한순간 경험하는 어둠과 공백과 멈춤만이 진짜 책이다" (42쪽)

 

새로운 책을 모조리 샅샅히 다 읽지 않아도 그 책이 내 책인 것처럼 책은 내용보다는 책 자체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생각에 책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에픽#02-멋진 신세계>라는 책의 내용 구성도 남다르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느껴지는 감촉도 새롭게 느껴진다. 우리 사회가 놓칠 수 있는 사회적 소외자, 홈리스(노숙인)를 만나 구술한 이야기, 병원이 병원이 되게끔 변방에서 애쓰는 병원 노동자의 소박한 이야기, 몇 년전부터 우연찮게 읽게 된 추리 소설의 작가 정명섭의 진정한 덕후의 삶이 무엇인지 자신의 삶을 공개한 이야기는 평소에 접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기에 꼼꼼히 활자를 따라 읽어가게 되었다.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넘어가는 두 번째 파트에서는 에세이를 소개하되 사회적 현상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챙겨볼만한 책들을먼저 읽은 이들의 설명을 곁들여 놓아 궁금증과 호기심을 유발하게 하며 결국 관련 책들을 찾아 읽도록 강하게 유혹하고 있다. 나 사진 조차도 며칠 전부터 읽다가 만 김현경 작가의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의 책이 소개된 지면을 보고 중도해 읽기를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설득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글들이었다. 

 

마지막 부분 세 번째 파트에는 단편집들을 담아 놓았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중세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말하지 않은 책'의 이야기였다. 부패한 수도원장의 비뚤어진 욕망으로 경건한 독서를 금기시하고 성서를 번역하고 묵상하는 가련한 마르타 수녀를 재물삼아 자신의 자리를 오랫동안 보존하려는 음융한 계략을 고발하는 이야기는 결국 책이란 누군가 책에게 말을 걸때에만 비로소 책은 대답한다는 명제를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위대한 책을 읽는 순간, 책과 독자와 화자와 등장인물과 저자의 운명이 모두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174쪽)

 

독서를 통해 독자뿐만 아니라 책의 운명도 바뀐다는 것을 수도원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말하지 않는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인터뷰와 논픽션,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물들, 픽션까지 한 권의 책에서 다양한 종류의 글들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은 <에픽>의 장점이자 특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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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로켓 가우디 프로젝트 변두리 로켓
이케이도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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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를 돕기 위해 채산이 맞지 않는 인공심장판막을 만드는 <가우디 프로젝트>에 변두리 로켓 제작소 <쓰쿠다 제작소>가 도전한다. 이전에도 대형 로켓 발사 사업에 필수적인 부품을 납품하면서 기술력을 인정받은 <쓰쿠다 제작소>는 이번에도 라이벌 회사인 <사야마 제작소>의 비열한 술수와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신념하나로 손해를 감수하며 인공심장판막 제작에 성공한다. 인공심장판막 기술은 기계로 제작하기 보다 섬세한 수제작이 필요한 작업이다. 중소기업인 <쓰쿠다 제작소>의 피나는 노력을 <변두리 로켓 가우디 프로젝트>에서 만나보시라.

 

이 책에서 보이지 않는 경쟁이 펼쳐지는 의학계의 숨은 비밀과 강소 기업인 <쓰쿠다 제작소>를 이끄는 오너 쓰쿠다의 리더십을 꼼꼼히 살펴 볼 것을 권유한다.

 

첫째, 의학계에서 펼쳐지는 보이지 않는 경쟁 심리를 보자. 어느 조직이든 경쟁이 없는 곳은 없다고 하지만,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의학계 집단에서도 권모술수가 펼쳐지고 있음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의학계의 숨은 권력자 기후네 교수는 병원장을 노리며 돈이 되는 사업이면 눈독을 들이며 끌어오는데 명수다. 심지어 제자의 기술로 이뤄낸 성과도 자신의 이름으로 둔갑하여 세상밖으로 홍보하는데 도가 튼 사람으로 나온다. 시골 이름도 없는 무명의 대학으로 옮긴 젊은 의사 '이치무라'가 지닌 심장 수술 노하우도 어떻게든 자신의 수하로 만들어 볼까 호시탐탐 노리는 인물이 바로 '기후네' 교수다. 어찌됐든 이야기의 초반부는 '악'이 '선'을 이기는 듯한 모습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악'의 본성인 '탐욕' 이 드러나고 신문에 보도되면서 '기후네' 교수의 악한 전략이 온천하에 드러나게 되면서 '선' 이 '악'을 이긴다는 내용으로 결말이 난다.

 

"출세를 결과가 아닌 목적으로 삼는 인간은 정말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잊어 버리죠. 사람 목숨보다 눈앞의 성공을 우선하게 됩니다"

 

의학계에만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교육계도 그러지 말아야 할 일지만 보이지 않게 학생보다 출세에 눈이 멀어 학생을 자신의 성공의 도구로 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특히 교육감을 주민들에 의해 직접선거로 뽑게 되면서 교육감 당선에 기여한 이들이 대거 여러가지 명분으로 한 자리씩 차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교육자는 분명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양심과 가르침에 대한 소명이다. 정직하지 않고 온갖 거짓과 변명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출세를 결과가 아닌 목적으로 삼는 인간이라고 저자는 주인공을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다.

 

둘째, <쓰쿠다 제작소>를 이끄는 오너 '쓰쿠다'의 리더십을 살펴보자. 권위적인 모습을 버리고 '권위'를 가지고 중소기업을 이끈다. 창업 신념을 돈으로 바꾸지 않는다. 인재를 알아보며, 떠나보내더라도 기꺼이 잘 되라고 응원한다. "지위란 시야이며 시점의 높이다" 지위와 입장에 따라 시각도 사고방식도 달라진다. 그게 조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이라는 이유만으로, 수평적인 조직 문화 구성을 위해 지위를 깡그리 무시하고 모든 입장을 n분의 1로 취급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이 책의 한 글귀에 불과하지만 "지위란 시야이며 실점의 높이" 라는 날이 가슴에 와 닿는다.

 

끝으로,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기준점이 되는 질문을 꼽으라고 한다면 "왜 이 일을 하는가?"이다. 과정이 길고 힘들더라도 그 물의 답만 알고 있으면 해매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답은 단순명쾌해야 한다. 왜 교사는 가르침에 솔선수범해야 하는가? 그 답은 '학생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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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도시 SG컬렉션 1
정명섭 지음 / Storehouse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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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작가의 신작이다. 이전에 정명섭 작가는  <남산골 두기자>, <미스 손탁>에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추리형식의 이야기를 전개한 바가 있다. <남산골 두기자>는 저작거리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모아 사건의 진위를 밝혀내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고, <미스 손탁>에서는 고종 황제의 헤이그 밀서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스토리 자체는 매우 탄탄하다. 최근 주남 마을 양민 학살사건과 광목간 양민 학살 사건을 다룬 <저수지의 아이들>을 통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과정을 기록했다. 그리고 올해가 다가기 전에 또 다른 추리 소설인 <제3도시>를 출간했다. '제3도시' 란, 개성공단을 말한다. 개성공단을 배경으로 남측과 북측 공작원들이 벌이는 진실게임을 읽어보시는 재미를 누려보시길.

 

북측 노동자들은 개성 공단에서 일하는 것만으로 중상류층에 속한다고 한다. 특히 개성 신도시에서는 왠만한 특권을 북한의 북측 사람들이 독차지 하고 있어 개성 신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기회는 가족 중에 한 사람을 개성 공단에 취업 시키는 일이라고 한다. 물론 공짜가 없는 법. 개성 공단에 취업 시키는 조건으로 뇌물이 필요하다고 한다. 생필품이 귀한 곳인 북측에서는 개성 공단에서 몰래 빼내 오는 물건들이 날개 솟는 귀한 값으로 팔린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개성 공단에 입주한 남측 기업에서 생산해 낸 각종 물건들이 재고량과 생산량이 잘 맞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단지 눈감아 주는 격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제3도시>의 모티브가 개성 공단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련의 과정에 북측과 남측의 공작원들이 개입되고 있으며 서로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서로의 정보를 주고 받는 창구로 개성 공단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정명섭 작가는 놓치지 않고 드라마틱하게 서술하고 있다. 

 

남측 기업의 법인장을 맡고 있는 유인태라는 주인공이 의문의 살해를 당한다.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본격적인 주인공들의 쫓고 쫓기는 탐정 활동들이 박진감 넘치게 전개된다. 누가 범인인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함정을 여러 군데 설치해 놓은 작가의 기술이 돋보인다. 범인은 늘 마지막에 밝혀지는 법. 독자들도 아마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밝혀지며 밝혀지는 과정이 논리적으로 아주 자세하게 주인공들의 대화를 통해 알려진다. 독자들이 탐정 소설을 즐겨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남과 북이 분단되어 보이지 않는 정보전이 전개되고 있음도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위장으로 탈북하여 비밀리 남측에서 활동하고 있는 북측 공작원의 이야기, 개성 공단에 기업인으로 들어가 감쪽같이 북측과 남측의 정보를 이어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 남측 국가정보원의 이야기 등 실제와 같을 정도로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정명섭 작가의 신작 탐정 소설 <제3도시>를 강력히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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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로켓 변두리 로켓
이케이도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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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관전 포인트를 3가지로 요약하라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현실과 꿈은 함께 가야 한다. 현실을 무시한 꿈은 몽상에 불과하며 꿈이 없는 현실은 생명 없는 흙과 같다. 꿈이 현실을 이끈다!

 

둘째,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대기업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중소기업이 살아남는 생존 전략을 파헤치다. 당장 눈 앞에 닥친 현실을 보기보다 미래를 내다보라!

 

셋째, 신용은 유리컵과 같다. 한 번 깨어진 유리컵을 다시 사용할 수 없듯이 한 번 틀어진 신용은 회복이 불가능하다. 이익을 쫓아 신용을 저버린 인간 군상들의 심리를 들여다 보다!

 

중소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몇 퍼센트가 될까? 거래처의 뒤통수 치기, 정리해고, 자금난, 사내 갈등 등 간단히 해결될 만한 문제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 숨가쁘게 이어가고 있는 것이 중소기업이다. 변두리 지역에서 선대의 가업을 이어 받은 쓰쿠다는 오직 신념하나로 어려운 여건을 견디어 내며 로켓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대기업 조차도 이뤄낼 수 없는 성과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경영자 쓰쿠다의 흔들리지 않는 연구의욕이 있었기 때문이라. 대기업이 호시탐탐 굶주린 사자의 먹잇감처럼 입벌리고 있는 경영 현실 속에서도 오직 기술력 하나만으로 당당히 맞서 나가는 중소기업의 투지에 가슴 졸이며 긴 서사의 이야기를 읽게 된다. 

 

자금난에 봉착했을 때 분열되어지는 직원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게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다. 조직의 리더 조차도 흔들리는 경우는 강한 외압이 아니라 내부에서의 작은 갈등으로 점화된 작은 불씨 때문이다. 어김없이 빚독촉과 경영 자금난의 압박 앞에서 과연 특허권을 팔아 넘겨 당면한 어려움을 넘길 것인지, 아니면 회사의 명운이 걸려 있는 특허권을 고수하며 당당하게 협상을 해 나가야 할 것인지 오직 오너가 결정해야 될 일이다. 쓰쿠다제작소의 오너 쓰쿠다는 정면 승부를 펼친다. 초반에는 직원들의 오해와 불만이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정직한 승부를 펼치는 쓰쿠다제작소의 열정에 걸림돌이 되었던 여러 환경들이 하나하나 정리되어 진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고통 속에 얻어낸 성과라 직원 모두 대동단결할 수 있었다.

 

대기업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변두리 로켓>에 등장하는 데이코쿠중공업은 정말 치사하기가 유치하기 짝이 없다.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지 않나, 미끼를 던져 경영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중소기업의 기술을 빼어 내려는 속성은 있는 자들의 욕망이 한도 끝도 없음을 보게 한다. 꿋꿋히 버터내는 쓰쿠다제작소의 직원들에게 박수를 쳐 주고 싶은 심정이다. 가상 속의 소설 주인공들이긴 하지만.

 

<변두리 로켓>의 최고의 문장을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난 말이야, 일이란 이층집과 같다고 생각해. 1층은 먹살기 위해 필요하지. 생활을 위해 일하고 돈을 벌어. 하지만 1층만으로는 비좁아. 그래서 일에는 꿈이 있어야 해. 그게 2층이야. 꿈만 좇아서는 먹고살 수 없고, 먹고살아도 꿈이 없으면 인생이 갑갑해."

 

쓰쿠다제작소의 직원 중의 한 명이 마노에게 사장이 쓰쿠다가 한 말이다. 마노는 대기업 부품 납품 과정에서 일부러 결함 제품을 몰래 넣어 보내 회사가 한 때 위기에 처한 바가 있었다. 현실에 갇혀 살아가는 마노에게 꿈을 잃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쓰쿠다. 불만으로 가득찬 마노가 제발로 회사를 떠나가지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마노를 아껴 자신이 알고 있는 대학 연구소에 취직을 시켜 준다. 신용은 한 번 깨지면 회복하기가 어렵다. 깨어진 유리컵을 붙인 들 과연 사용할 수 있을까? 신용도 마찬가지다. 신용을 얻기는 어렵지만 잃기는 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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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유전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강화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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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자체가 묘하다.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지만 결국 완벽히 찾지 못했다. 작가의 말처럼 '느슨한 연결'을 의도했나보다. 책의 첫 이야기는 "해인 마을은 이제 지도에서 찾을 수 없다" 라고 시작한다. 해인 마을은 대대로 유전되어 온 것이 있다. 마을 이름이 첫째요, 소작을 해야 했던 부모 세대의 직업이 둘째요, 그 아픔을 보고 자라야 했던 자녀들의 억척스러운 삶의 근성이 셋째다. 책 제목 '다정한 유전' 처럼 부모가 가지고 있던 유전적 특성이 자녀에게 고스란히 대물림 되는 장면들이 등장하는 인물들이 작가가 되어 쓴 소설 속 이야기에 나타난다. 

 

도심 속으로 진출하기 위해 글쓰기라는 도구로 승부를 걸어야했던 소년들의 보이지 않는 경쟁, 경쟁 속에서도 진한 우정을 잃지 않기 위해 느슨한 연결을 이어가려고 하는 노력들이 인물들 속의 심리에 그대로 나타난다. 황녀와 옹주의 이야기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삶을 살아야했던 여성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나는 아무도 아닙니다" 라고 말해야 했던 것은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자신을 철저히 숨겨야 했던 당시의 여성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병원 꼭대기층 있는 숨겨진 다락의 이야기는 무서움 그 자체다. 병원 스스로 자생하기 위해 특이한 병력을 가지고 있는 여성 환자들만 입원시키는 병원에서 이름 모를 죽음이 일어나고 소리없는 소문의 출처가 된 접근 금지된 장소인 '다락'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따라가다보면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자 친구의 신체 폭력 앞에 무기력한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지 또 다른 환자를 통해 이의를 제기한다. 

 

지금은 한 자녀의 엄마로 살아가는 처지이지만 그 엄마도 한 때는 꿈 많은 소녀였고 자신도 모르게 엄마의 삶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유전되듯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이것이 이제 새로운 유전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휴대하기 편하게 작은 책 크기로 구성되어 있는 '아르테 한국 소설선'의 8번째 소설인 '다정한 유전'은 소리책(오디오소설)로도 만날 수 있다. 특히 배우 이유영님이 직접 낭독했다고 하니 장소 불문하고 가볍게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든다. 소설 분량이 적다고 해서 내용의 무게감이 떨어질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길 바라며 인간성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의 세계에 한 번 발을 푹 담가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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