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5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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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데 서사의 지루함과 현실감 없는 연극조의 대화가 그것이다.
<분노의 포도>를 읽기 전, 나는 지레 겁을 먹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걱정했던 류의 어려움은 없이 책을 읽었다. 
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는 1930년대의 이야기임에도 지금의 현실과 너무나 흡사한 상황과 모습들이 펼쳐진다. 어느 미국인 가족의 생활기는 때와 곳을 달리한 나에게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인물들간의 대화도 현실의 내가 말함직한 직설화법이었고 생활언어였다. 분량이 만만치 않았지만 수월수월 읽을 수 있었다. 간혹 띄엄띄엄 읽기도 했다.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려 애쓸 것이 없는 너무나 현실적인 문장들이었다. 이야기하는 그대로 사실이었음이 분명한 한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 가족의 생존기.

대공황 시절의 미국 농촌은 그렇게 피폐했었고 사람들은 잔인하게 가난했었구나. 들어서 알고 있다, 보릿고개가 어땠으며 육이오가 얼마나 비참했었는지.
배워서 알고 있는 이야기들. 인간성 상실의 시대, 자본에 의한 인간의 도구화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예의를 잃는 상황들. 
자본에 의해 땅을 빼앗긴 사람들. 자연에 의지해서 이웃과 조화하며 살던 아메리카 땅의 농부들은 일거리를 찾아 온 식구가 트럭을 타고 대륙을 횡단한다. 동부에서 서부로 66번 국도 따라 '고 웨스트'. 금광이 발견된 그 땅에 일자리도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캘리포니아. 자본과 기업에 땅을 빼앗긴 동부의 사람들이 노숙을 해가며 광야를 건넌다.    
광야를 건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스러진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서부로 간다.
소박하지만 절실한 욕심. 생존에의 욕구는 동물적이었다. 동물은 단순하다. 살고 싶어하고 죽기 싫어한다. 그게 다다. 죽지 않기 위해 동물들은 향기로운 복숭아가 열리고 영근 포도송이가 주렁주렁한 캘리포니아로 간다. 

거대한 농장은 주인이 있다. 농장은 거대해서 많은 일손이 필요했다. 수천, 수만 에이커의 땅에 복숭아가 열리면 농장주는 일손을 구해야 한다. 배고픈 사람들이 모여들고 금방 일손을 구할 수 있었다. 배고픈 사람들이 계속 농장으로 밀려오고 일당은 내려간다. 그나마도 복숭아 수확이 끝나면 다시 다른 농장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사람들은 농장주를 위한 소모품이었다. 수확을 위해 필요한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의 섬세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도구는 다른 기계와 달랐다.
사용가치를 다한 인간은 아름다운 캘리포니아 땅의 노숙자였다. 농장주는 그들이 싫었고 두려웠다. 
희망이 없는 가난한 이주민들로부터 절망과 분노의 기운을 감지한 농장주는 그 웅성거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누어 줄 것은 없다. 과실이 남아도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농장주는 계곡과 바다에 버려야 한다. 배고픈 사람들이 혹여 주워라도 먹을까 석회를 뿌리고 기름을 부어 태워버린다. 돼지도 마찬가지, 팔리지 못한 돼지는 가격안정을 위해 땅에 묻어 버린다. 오키들(오클라호마 사람), 동부의 촌놈들은 버려지는 과실과 돼지를 주워도 못 먹는다. 사 먹을래야 사 먹을 돈도 없다. 일자리가 없고 노동력이 가치가 없어진 마당에 일을 한다해도 제대로 먹기가 힘들다. 배곯은 길 위의 사람들이 분노한다. 동물에게 먹히지 못하고 썩어나는 포도들이 분노한다. 무엇때문에 태어나고 길러졌는지 모르는 돼지들이 땅에 묻히면서 대지가 분노한다.
더럽고 약한 떠돌이 농부들간의 작은 연대도 농장주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가난한 강도들이 자기 것을 빼앗을까 전전긍긍. 두려움에 떨기는 서로 마찬가지였다. 
 
산업 자본주의의 단면, 친미 반미 양단의 관점들과 구호에 익숙한 나는 또 다른 미국의 모습을 보았다. 불과 백 년 전 모습에서 아마 지금도 그러할 것이겠지만 그곳도 자본에 의해 억압당하는 약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느 걸. 국가니, 자본이니 거창하다. 나와 같은 소심한 욕심 가진 사람들이 희노애락, 아둥바둥 살고 있는 사람 사는 땅 아메리카. 사람끼리 연대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지만 찰나의 자각. 내일이면 나는 미국놈 욕할 테고 오늘도 일본놈 욕하고 있다.
무엇엔가 내 정신을 빼앗긴 건 아닐까. 돈과 직업, 종교와 사상 그것을 뛰어넘는 진정한 가치, 이웃 사랑과 모두 함께 따뜻하게 잘 먹고 조화롭게 사는 것. 이웃과 대지와 나무와 새들까지도...


(음... 결론이 <분노의 포도> 결말을 따라가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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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8-23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후레시맨 시절 영어 원서로 보다가 지루해서 때려친 작품이에요...영문과 수업시간에 다시 봤는데요...역시 지루하더고요~ 아마도 제대로 못읽어서 그런가 봅니다. 아니면 영어라는 문장에 휘둘려버렸는지도 모르겠어요.

이거 존스타인백의 작품을 흠모하는 후배에게 존스타인백의 작품은 제미 없다고 하니...어떤 작품이 재미없냐면서 열변을 토하던 그 친구가 떠오르네요..^^

차좋아 2011-08-23 23:25   좋아요 0 | URL
후레시맨 시절이라길래(오후에 덧글을 처음 읽었을 때) 후레쉬맨 티브이 플그램 하던 시절을 말한는줄 알았어요. ㅎㅎ 제 수준이 이래요 ㅋ
다시 보고 알았습니다.ㅎㅎㅎㅎ

저도 지루했어요. 여타 소설에서 느끼던 긴장감이 없으니 책 여러번 들었다 놨어요. 문장이 쉬워 술술 읽히기는 했는데 쉽게 놓게도 되더라고요. 분량이 상당하니 읽는데 오래 걸릴 밖에요.ㅎㅎ


pjy 2011-08-23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내용이 현실과 너무 정확하게 맞아들어가는게 무섭습니다-_-; 일단 결말을 제가 읽고 급! 정치권의 필독도서로 권장해드리고 싶네요

차좋아 2011-08-23 23:31   좋아요 0 | URL
일반의 정서로써 이 책을 이 이야기를 접한다면 분명 이 세상이 문제가 있구나라는걸 깨닫거나, 다시 느끼거나 할꺼에요. 분명히.
근데 그건 오키들을 전제 했을 때구요. 이미 자본의 노예가 된 자본가들 정치인들 종교 지도자들이 본다면 글세요~ 뻔한 이야기에 귀기울일 인종들이 아닐꺼에요. 그치들에게서 기대 버려야지요. 우리끼리라도 연대하고 이해하면 다행입니다.
무상급식 투표 따위, 찬반 양분되서 가난한 사람들끼리 싸우는 거 보면 속상해서... 에휴~~

동우 2011-08-24 0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향편님.
나는 사회적 혹은 계충적 연대의식보다는 인간의 연대의식이라는 보편적인 인간성을 그린 것으로 읽히는바 있었습니다.
진부한 휴머니즘쯤으로 이 소설을 폄훼할수 있으나.
존 스타인벡이라는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계층은 어느 사회나 존재하는 것.
동류의식 가득한 순정한 집단 속에서도 계층은 있습니다.
인간성이란 일반화하여 집단적으로 정의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신비한 그 무엇입니다.
우리의 조르바가 통찰하듯 말입니다. 하하하

차좋아 2011-08-24 09:1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계층적 연대의식의 다른 표현이 집단 이기주의 일수도 있으니까요.
소수의 압제자도 어찌보면 불행한 인종들. 수억 수천억 돈을 가지고도 계량될뿐 도대체 얼마만큼인지도 모를 그 부. 그 부 때문에 외롭게 사는 사람들 보면 자본의 숙주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견해 또한 열등감에 의한 감상적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 의미에서 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 결말을 폄훼하지는 않아요.

다소 어쩡쩡하지만 분명한 거 보단 신뢰가 갑니다. 케이시 목사도 어정쩡...
저도 그래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