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死者들은 진한 갈색 액체 속에서 어깨를 비비적거리며 머리를 맞대고 빽빽하게 뜨거나 반쯤 가라앉아 있었다. 부드럽고 흐릿한 피부에 싸인 그들은 결코 타자의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 견고함을 가진 독립체로 각자의 내부를 향해 응축된 채 집요하게 서로 몸을 비비고 있었다. - P27

나는 어제 오후 알코올 용액 수조에 보존되어 있는 해부용 시체를 처리하는 작업의 아르바이트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바로 의과대학 사무실로 찾아갔다. - P32

죽음은 ‘물체‘다. 그런데 나는 죽음을 의식의 측면에서만 이해하고 있었다. 의식이 끝난 다음에 ‘물체‘로서의 죽음이 시작된다. - P36

전쟁이 끝나고 그 시체가 어른의 뱃속 같은 마음속에서 소화되고, 소화가 불가능한 고형물이나 점액이 배설되었지만, 나는 그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윽고 우리의 희망이라는 것도 흐지부지 녹아 버렸다. - P43

"낳을 생각은 아니지?"
"아니야."
"그럼, 간단하네."
"남자애들한테는 그렇겠지." 여학생이 버럭 화를 냈다. "그것이 살해되든가, 양육되든가 모두 내 아랫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나는 지금도 그것에게 집요하게 빨리고 있어. 나에게는 흉터처럼 자국이 남을 거야." - P48

"응?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자네가 지금 절망했네 어쩌네 할 나이도 아니잖아. 변덕스러운 여학생 같은 소리를 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자신을 잃어버렸다. "굳이 희망을 품어야 할이유가 없단 말이지요. - P58

우리는 점액질의 두꺼운 벽 안에서 아주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우리의 생활은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조금 이상한 감금 상태이긴 하지만 우리는 결코 탈주를 꾀한다든지 외부 소식을 알고 싶어 안달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외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로 안에서 충실하고 밝게 살아가고 있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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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용서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어느 정도 망각을 해야 한다. 과거의 심적 고통을 더 이상 생생하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을 유발한 행위를 용서하기도 더 쉬워지고, 그 결과 해당 기억 자체가 덜 중요해지는 식으로 말이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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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속병원 앞 넓은 도로에서 시계탑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불쑥 나타나는 사거리, 하늘하늘 어린 가지를 흔들고 늘어선 가로수들 건너편 철골이 삐죽삐죽 하늘로 뻗쳐 있는 신축 중인 건물 쪽 어딘가에서 엄청난 수의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 P9

병원에는 실험용으로 기르던 150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한 영국 여자가 잔인한 일이라며 신문에 투고하는 바람에 병원에서는 개들을 계속 기를 예산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한 번에 다 죽이기로 했고 자기가 그 일을 하청받았다고 했다. - P10

"그 역겨운 문화에 발을 들여놓을 셈이야?"
"발을 들여놓느냐 마느냐 하는 단계가 아니라, 모두들 이미 목까지 꼴까닥 빠져 있는 셈이야. 전통적인 문화라는 늪에 빠져 전신이 진흙투성이지. 간단히 씻어 낼 수도 없어." - P15

"개는 살해되어 쓰러져 가죽이 벗겨져 나가지. 그런데 우리는 살해되어도 이렇게 돌아다녀."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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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는 다른 윈도를 통해 유저 그룹의 토론 게시판을 살핀다. 오늘의 화제는 데이터 사유화 종식을 외치는 ‘정보 자유 전선‘의 최근 활동이다. 지난주 이 조직은 데이터 어스의 액세스 관리 프로그램의 상당부분을 크래킹하는 기술을 공개했다. - P148

‘정보 자유 전선‘의 해킹 툴을 이용해 디지언트 몸의 고통 차단 회로를 무효화하는 그리퍼의 녹화 영상이다. 희생자가, 새롭게 생성된 이름 없는 디지언트가 아니라 해킹 툴을 이용해 불법 복제한,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이라는 사실이 더욱 끔찍하다. - P151

디지언트 양육을 위한 안내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이나 어린아이를 키울 때의 방법론을 응용해도 성공 확률과 실패 확률은 반반씩이다. - P159

기계식 자동 보모는 1861년 런던에서 태어난 수학자 레지널드 데이시의 발명품이다. - P251

데이시는 재봉틀과 세탁기 제조사인 토머스 브래드포드 사와 계약을 맺고 기계식 자동 보모의 제작을 위탁했다. - P255

딸인 니콜이 아직 젖먹이였을 무렵, 앞으로는 더 이상 아이들에게 읽거나 쓰는 법을 가르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음성 인식이나 합성 기술의 발달로 인해 머지않아 그런 능력이 불필요해지리라는 것이었다. - P269

지난 몇십 년 동안, 몇천만 명이나 되는 사용자들이 몸에 장착한 개인 카메라로 자기 삶 전체를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라이프로그를 유지해왔다. - P271

영향을 받는 유일한 인물들이 서로 사적인 관계일 때는 곧잘 다른 목적들이 더 중요해지기 마련이고, 그럴 경우 엄밀한 진실 추구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 P279

잘 생각해보니, 그는 이제 사람들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도 단어를 식별할 수 있었다. 사람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예전과 달라진 게 없는데, 지징기는 이제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전체를 이루는 조각들에 대해 눈을 떴던 것이다. 지징기 자신도 줄곧 단어들로 말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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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가 아시리아에 가까웠고 아시리아가 온갖 노력을 다해 바빌로니아를 다스리려 했지만 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 제국에 한 번도 완전히 통합된 적이 없다. 아시리아는 바빌로니아의 문화와 종교에 대한 존중심 때문에 바빌로니아를 특별대우하였다. 그러나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빌로니아의 근성과 저항운동이다. - P292

‘망국(亡國)은 이 당시 이스라엘에 가장 중요한 도전이었다. 야훼 하느님이 선택하신 백성이라는 독특한 종교적 자의식을 지닌 그들이었다. 도대체 하느님 백성의 나라가 왜 무너져야 했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임금도 성전도 땅도 모두 사라져 버린 상황은 신학적 성찰의 조건이었다. - P306

"페르시아 제국은 다양한 언어, 문화, 경제, 사회조직들을 성공적으로 융화시켰을 뿐 아니라 근동에서 처음으로 백성들 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국가가 되었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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