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나를 ‘나‘ 이상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당신이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다른 것의 일부가 아니라 더욱더 나 자신이 되는 것이죠. 나는 사회 속에 있는 하나의 세포가 아니라는 겁니다. 당신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레니나?˝- P118

˝그래요. 물론 나도 알고 있어요. 그리고 엡실론도 쓸모가 있다는 것을. 나도 그렇고, 그러나 나는 내가 쓸모가 없기를 바라고 있어요!˝- P118

버나드는 자신만이 사물의 질서에 대항해 전투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의미와중요성을 취할 정도로 의식하면서 의기양양해졌다. 그는 자신이 박해를받는다는 생각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를 우울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힘이 솟았다.-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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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온 여행자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7
귀뒬 지음, 이승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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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기를 한 후 귀신을 보게 된 소년

열네 살 청소년 발랑탱 르탕드르는 그저 평범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단짝 친구인 레미를 놀리다가 격분한 레미에게 박치기를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후에는 더이상 평범한 소년이 아니게 되었다. 귀신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 통학하는 열차 끝 칸에서 루크레치아 보르자를 봤을 때는 그 멋진 여인이 귀신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보르자는 정확하게는 지하철에서 아무하고도 대화를 하지 못하면서 지하철을 계속 타고 다니는 형벌을 받고 있는 귀신이었다. 그녀가 1519년에 죽은 사람으로 요부이면서 희대의 살인마라는 걸 백과사전에서 찾아 보고 알게 되었다. 귀신은 보르자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칸에는 사형집행인이 타고 있기도 했고, 심지어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속 주인공 악당인 오셀로까지 있다. 이야기가 도대체 어떻게 흘러갈까?


귀뒬  Gudul 본명 Anne Liger-Belair 1945 ~ 2015 벨기에 출신 소설가.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청소년을 위한 판타지 소설

《지옥에서 온 여행자》은 좀 복잡한 책을 읽다가 머리 식힐겸 가볍게 읽으려고 집어 들었다. 청소년 소설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머리 복잡한 소설보다는 가볍고 쉽게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딱 적당한 청소년용 판타지 소설이다. 일상을 살다가 생긴 불가사의한 일들, 그리고 그 일들 속에서 헤매는 주인공, 그리고 주인공의 활약으로 끝나는 해피엔딩. 아무 생각없이 읽기에 꽤 괜찮은 소설이다.


루크레치아 보르자  Lucrezia Borgia 1480 ~ 1519 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딸. 당시 유럽 최고의 미녀라고 한다. 정략에 의해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여 평탄한 삶을 살지는 못한 듯. 실존인물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혹시나 해서 찾아 보니 생몰연도까지 정확했다. 우리로 따지면 황진이가 시공에 갇혀 있는데 중2 남자애가 황진이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져 천국으로 보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

평범하기는 하지만 조금은 다른..

《지옥에서 온 여행자》은 세 편의 단편이 연결된 옴니버스식 소설이다. 그런데 구성이 좀 특이하다. 처음에는 그저 주인공인 발랑탱이 귀신을 보는 능력이 생겨서 그 능력 때문에 생기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엮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진행이 되었다면 아마도 평범했을 것이다. 그런데 읽어 보니 세 편이 주인공이 조금씩 다르고 판타지 요소도 다르다.


제1부는 '사랑'이라는 부제를 가진 <지옥에서 온 여행자>인데 지하철에서 만난 (살았던 시대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상당히 연상임에 틀림없는) 여인에게 사랑을 느껴서 그녀를 철도라는 지옥에서 구해 천국으로 보내 주려고 고군분투하는 발랑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2부는 '마법'이라는 부제를 달아 놓았고 <릴리의 사랑을 얻기 위해>가 제목이다. 그런데 2부에서는 주인공이 발랑탱이 아니라 1부에서 가끔 나와 발랑탱의 상담상대가 되어주었던 블루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블루 할머니는 예전에 선물받은 마술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손자와 같은 열네살 소년이 되어, 발랑탱이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와 연결해 주기 위해서 활약한다. 3부는 주술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브륌의 마법사> 편으로 할머니가 발랑탱에게 아주 예쁜 여자아이의 사진을 보여 주며 친한 할아버지의 손녀라고 하고 꼬셔서 촌구석으로 3주간 휴가를 떠난다. 물론 사진은 뽀샵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발랑탱은 여자아이를 보자마자 실망하고.. 그런데 그 촌구석에 있는 고성에서 행방불명된 여자아이를 찾으러 발랑탱은 과거로 가고 여자아이를 찾아 현재로 돌아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한가지 주제로 주욱 가는게 아니라 각 편이 등장인물은 그대로 가면서 각각 다른 세 가지 판타지를 보여 주고 있다. 청소년용 소설이라서 설정이 촘촘하거나 설득력이 있지는 않지만 흥미롭게 읽을만한 요소는 충분하다. 특히 마지막 장에서는 이왕 과거로 갔으면 발랑탱이 1부에서 과거로 되돌려 보내준 보르자라도 나왔으면 좋았을텐데, 그런 서비스를 해 주지는 않는다.


3부인 <브륌의 마법사> 편에서는 오래된 성이 시간의 덫이 되어 아이들이 과거로 끌려간다. 수십년전 사라졌던 아이가 현재로 돌아오자 마자 순식간에 늙어 버리는 장면은 조금 안타까웠다.

낯선 문화

《지옥에서 온 여행자》은 그냥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그런데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낯선 장면들이 생각할 바를 던져 준다. 우선 발랑탱과 보르자의 관계. 소설에서 발랑탱은 14살인데 보르자는 1480년에 태어나 1519년에 죽었다고 하니 39살이다. 무려 25살 차이인데도 불구하고 보르자를 사랑하는 발랑탱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거의 어머니 뻘인데.. 블루 할머니가 어려지는 것도 참 특이하다. 당연히 소녀로 변신할 것 같은데 소년으로 변신한다. 나이가 어려지는 설정은 많이 봐왔지만 성별까지 바뀌면서 어려지는 설정은 본 적이 없다. 그리고 3부에서 블루 할머니와 앙젤의 할아버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장면도 참 낯설다. 확실히 프랑스 정도 되니 사람을 사랑하고 성적인 관계를 맺는데 나이 때문에 생기는 편견이 없는 것 같이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 같다. 만약 우리나라 청소년 소설이었다면, 좀 상상하기 힘든 장면인 듯 하다. 아.. 내가 확실히 머리가 좀 굳은 것인지..


★★★★

대단한 철학이나 설정의 재미가 있는 소설은 아니지만 그냥 어릴 때 읽었던 동화책을 읽는 듯한 기분으로 읽을 수 있다. 내용도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그런데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단지 열네 살 프랑스 소년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건 좀 쉽지 않았다. 워낙 뒤죽박죽인데다 지멋대로 감정이 움직이니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이진 않는다. 문화 차이로 인해서 생긴 낯선 느낌은 인간관계, 특히 나이에 따른 관계에 대해서 좀 고민을 해 볼 여지를 남겨 주었다.


가볍게 읽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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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이 낮으면 낮을수록 산소를 더욱더 조금 공급하게 됩니다.˝
산소가 부족하면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게 두뇌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골격이었다. 산소가 정상치의 70퍼센트면 난쟁이가 되고 70퍼센트 이하면 눈이 없는 괴물이 된다.- P34

버나드는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거룩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자기 자신이 고립된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예배가 시작되기 전과 다름없이 고립되었다. 충족되지 않은 공허감과 시들어버린 만족감 때문에 더욱 비참하게 고립되었다. 다른 사람들은그 위대한 분에게로 융합이 되었으나 버나드만은 속죄를 받지 못하고 고립된 것이다. 그는 자기 일생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고독했으며 큰 절망을 느꼈다. 그는 아주 비참했다.-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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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해봐. 미어터지는 싸구려 공동주택, 출퇴근 시간의 간선도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토요일 오후의 대형 마트, 공장, 원자력 발전소, 이런 게 지옥이 아니고 뭐겠니?˝-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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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비유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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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초상화

여자친구와 함께 대학로에 갔다. 실수로 연극표를 놓고 와서 연극을 보지 못하고 여자친구에게 타박을 받다가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노인에게 여자친구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던 노인은 그림솜씨도 평범하지 않다. 한 장의 예술작품과 같은 초상화를 그리는 노인. 하지만 그림이 완성되어 갈수록 뭔가 이상하다. 분명희 여자친구인 진희를 그리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묘하게 어긋난다. 이질감을 느끼는 와중에 그림 완성. 머쓱해 하면서 그림을 받아 들었다.


1년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다시 대학로를 찾으니 그 노인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1년 전 그렸던 그림을 노인에게 보여 주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림이 변했다고 한다. 그렇다. 도화지 속에는 진희가 아닌 다른 여자가 자리잡고 있다. 도대체 왜 그림의 여자가 변하고 있는 걸까?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노인을 끌고 술집으로 가서 얘기를 들려 달라고 했다. 기세좋게 위스키까지 주문하고 썰을 풀기 시작하는 노인.


'그러니까 미루는 말이지..'


최제훈 1973 ~ .


최제훈의 단편소설집

처음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은 후 나는 최제훈의 팬이 되었다. 한국소설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최제훈같은 스타일로 글을 직조하는 소설가를 아직까지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즉시 서점에 있는 그의 책을 몽땅 샀고 그동안 《퀴르발 남작의 성》뿐만 아니라 《일곱 개의 고양이 눈》, 《나비잠》을 아껴 가면서 차례대로 읽었다. 《위험한 비유》는 최제훈의 소설 중에서 네 번째로 읽는 소설이다. 처음 읽은 《퀴르발 남작의 성》과 같이 단편집이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는 어떤 퍼즐같은 소설로 나의 잠든 감각을 깨워줄까?


누군가 SNS에 올려 놓은 책 표지를 보더니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연상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색감이나 분위기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각양각색의 8가지 이야기

최제훈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중구난방'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단편집 한 권으로 엮여있더라도 통일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각 소설들이 제각기 논다. 심지어 장편소설도 서사를 제멋대로 쪼개서 새로 조립하기 때문에 줄거리가 제멋대로 쳐박혀 있다. 이게 굉장히 번잡스러워 보이면서도 굉장히 신선하고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위험한 비유》는 같은 장편인 《퀴르발 남작의 성》과 많은 부분 비슷하다. 단편 사이에 연관성이 없고 각 소설이 조금씩 기괴하기도 하고 환상적이기도 한 얘기들로 가득차 있다. <철수와 영희의 바다>는 평범한 이름을 가진 두 연인의 평범하지 않은 결말, <2054년, 교통사고>는 미래의 교통사고에 대한 뜻밖의 결론, <마네킹>은 피그말리온 신화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기괴한 이야기, 환상인지 실제인지 모를 인물에 사로잡힌 한 화가의 이야기를 담은 <미루의 초상화>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흥미를 자극한다.


작중 단편인 <마네킹>에서 과연 마네킹은 스스로 움직인 것일까? 추정은 하도록 놔두지만 명확한 대답은 해주지 않는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

그런데.. 《위험한 비유》는 재미있고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멋진 소설집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아.. 이게 끝인가?', '더 끌어당겨 주지 않나?'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좀더 읽으면 뭔가 나올 거야.', '최제훈이 여기서 끝낼 리가 없어.', '마지막 단편은 충격적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계속했지만 그 기대는 결국 충족되지는 않았다. 최제훈에게 기대하는 '어떤 것'이 모자른 느낌이다. 어쩌면 내가 최제훈이라는 자극에 익숙해져서 그럴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동안 최제훈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신선함이 《위험한 비유》에서는 좀 떨어졌다. 그리고 《위험한 비유》은 가장 최근에 출간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소설들보다 일찍 쓴 소설들을 나중에 모아 발표한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했다.


<미루의 초상화>는 광기 넘치는 한 화가의 이야기이다.


상상발랄한 소설들

앞에서 《위험한 비유》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는 했지만 《위험한 비유》가 싫은 건 아니다. 여전히 최제훈의 상상력은 한도가 없고 특유의 이야기를 비틀어 버리는 실력 역시 뛰어나다. 각 편마다 흡입력도 뛰어나고(<위험한 비유>는 좀 이해하기 힘들었다.) 재미도 있다. 하지만 《퀴르발 남작의 성》에서 받았던 충격만큼은 아니다. 그래서 《위험한 비유》은 순한 맛 《퀴르발 남작의 성》이다. 명확한 결말을 내려주지 않고 작품마다 한가지씩 의문점을 남겨두는 것 역시 최제훈 소설의 특징.


★★★★

최제훈 소설의 팬이라면 당연히 읽어야 할 소설인데, 예전 소설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2%가 부족하다. 그런데 이 아쉬움이 작품에 대한 것보다는 기대감이 큰 탓에 생긴 것이니 《위험한 비유》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 느낌대로 평가하는 것이 맞으니 별 한 개 정도 뺐다. 처음 최제훈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읽기에 무난한 것 같으니 이 책으로 시작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좀 쉬었다가 이제 아껴뒀던 《천사의 사슬》을 읽어야겠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분명히 호불호는 갈릴 것이다. 나는 강추한다.

위험한비유, 최제훈, 소설, 한국소설, 단편소설,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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