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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 10차선 간선도로를 차들이 쉼 없이 오가고 있었다. 퇴근 시간대라 인도에도 행인이 많았다. 진수는 인도 가장자리에 서서 누렇게 단풍이 들어가는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P8

나는 실수한 것일까. 좋아하는 작가 취향에도 모범답안이 있다니. 실기가 아니라 면접 때문에 불합격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 P13

약자가 말이 많은 게 아니었다. 강자가 말이 많았다. 정확히는, 강자에게 선택권이 있었다. 강자가 말을 하면 약자는 듣고 강자가 침묵하면 약자는 눈치를 살피며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 P21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은 늘 비슷비슷했다. 선생들은 수업을 했고 학생들은 수업을 듣거나 혹은 듣지 않았다. - P34

글을 쓰다 보면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 곁을 떠나간 것들에 대해서. - P50

"지게에 어떤 물건 실었을 때가 제일 무거워?"
"아무것도 안 실은,"
한 박자 쉬고 나서.
"빈 지게가 제일로 무겁다."
할아버지는 마저 대답했다. - P54

멀리 창밖이 소란스러웠다. 중고 가전제품 삽니다. 고장 난 제품 수거합니다. 확성기 소음을 이불처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그는 눈을 떴다. - P60

"미래가 궁금하면 과거를 잘 살펴보게. 과거는 거짓말을 못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젊은 양반이 사주를 너무 믿으면 안돼. 점쟁이도 인간이야. 부처도 불경을 잘못 읽을 때가 있는데 점쟁이라고 실수를 안할까?"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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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왼팔이었다. - P8

케빈은 진흙을 잠시 바라보다가 내 얼굴을 보았다. "당신이 얼마 동안 없어졌는지 알아?"
"몇 분 정도 길지 않았지."
"몇 초였어. 당신이 사라졌다가 나타나서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기껏해야 십 초에서 십오 초밖에 흐르지 않았어."
"아니, 아니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든게 몇 초 만에 일어날 순 없어." - P21

첫 번째 여행은 아이가 안전해지자마자 끝났다. 딱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시점에서 끝난 것이다.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런 행운이 언제나 따르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깨달았다. - P29

아이에게 다 들어야 했다. 내가 이곳에 발이 묶인 신세라면, 가능한 모든 것을 알아내야 했다. 나를 쏠 수도 있는 남자의 집에 머무는 것은 위험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밖을 헤매는 건더 위험했다. - P31

"강에서 말이야. 물속을 걷고 있었는데 구멍이 있었어. 나는 구멍으로 떨어졌고, 바닥을 찾을 수 없었어. 당신이 방 안에 있는 모습을 봤어. 방이 일부 보였는데, 사방이 책이었어. 아빠 서재보다 더 많았어. 당신이 남자처럼 바지를 입었고...... 응, 지금도 그러네. 나는 당신이 남자인 줄 알았어." - P33

사실상 나의 여행은 거리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가로지른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 사실. 내여행의 중심은 그 아이였다. 어쩌면 여행의 이유일지도. - P37

루퍼스는 감당하기 힘든 곤경에 빠지면 나를 끌어당기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랐다. 본인은 자기가 그렇게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모양이었다. - P41

나는 루퍼스의 말을 믿었다. 정말로 믿었다.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내가 시간을 가로질러 여행했다는 사실은 진작에 받아들였다. - P43

루퍼스에게는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했다. 내가 살려면, 다른 사람들이 살려면 이 아이가 살아야 했다. 감히 시간 패러독스를 시험해볼 수는 없었다. - P47

"여동생은 사내놈같이 입었군!" 남자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도망자 동생이라. 네년 값은 얼마나 되려나."
나는 공포에 빠졌다. - P71

나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나를 저주했다. 기회는 사라졌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의 결벽은 다른 시대에 속한 것이었건만, 그시대의 예민함을 버리지 못했다. - P73

"난 감히 당신 말을 믿지 않는다는 식으로 행동할 수 없어. 어쨌든 당신이 여기서 사라질 때는 어딘가로 가겠지. 그곳이 당신이 생각하는 곳이라면, 그러니까 전쟁 전의 남부라면 우리는 그곳에 가 있는 동안 당신을 지킬 방법을 찾아야 해." - P82

"그럼・・・・・・ 루퍼스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가 나를 불러가고, 내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는 나를 집으로 데려온다는 거네."
"그런 것 같아." - P89

다시 가게 되면 루퍼스의 시대에 더 오래 갇힐까 봐 겁이 났다. 첫 번째 여행은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고, 두 번째 여행에는 몇 시간이 걸렸다. 다음에는 얼마나 있게 될까? 며칠? - P104

"검둥이는 백인과 결혼할 수 없어!" 루퍼스가 말했다.
나는 얼른 케빈의 팔에 손을 얹고 그가 하려던 말을 막았다. - P109

우리에게 일어난 일 자체가 말이 안 돼. 하지만 난 사실 그대로 말하고 있어. 우리는 미래의 시공간에서 왔어.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오는지는 나도 몰라. 오고 싶지도 않아. 우리는 이곳에 속해 있지 않으니까. - P112

세라의 눈동자에 깃든 표정은 어느새 슬픔에서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조용하지만 무서운 분노였다. 남편이 죽고, 자식 셋이 팔려가고, 넷째에게는 장애가 있는데 그녀는 그 장애를 두고 신에게 감사해야 했다. - P140

"루퍼스를 가르칠 때 내가 최대한 돕게 해줘. 루퍼스가 자기 아버지의 복사판으로 자라지 않게 하려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나 알아보자. " - P150

"그 여자가 얼마나 도덕적인지 알고 싶어?"
케빈의 말투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무슨 뜻이야?"
"그 여자가 날 조금만 더 열심히 쫓아다닌다면 우리 둘이 그 여자가 읽는 성경책 한 장면을 찍을 판이야. 보디발의 아내와 요셉의 장면‘으로." - P157

루퍼스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난 계속 당신이 집으로 가버릴 거라는 생각을 해. 어느 날 누군가가 와서 당신과 케빈이 사라졌다고 말하겠지. 당신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여기에 있다가 다치는 일도 바라지 않아." - P167

시간이 흘러갔다. 케빈과 나는 점점 더 이 집의 식구가 되어갔다. 친근해졌고, 서로를 받아들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 또 마음이 심란해졌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환경에 순응하는가. - P182

"수월함 말이야. 우리나, 아이들이나.... 노예제도를 받아들이도록 훈련시키기가 얼마나 수월한지 전에는 몰랐어." - P191

와일린은 나를 조금 더 끌고 가더니 세게 밀쳤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나는 채찍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보지 못했고, 첫 번째 타격이 오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채찍은 떨어졌고, 달군 쇠처럼 내 등을 내리쳤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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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모든 것은 바다로 떨어진다
세라 핀스커 지음, 정서현 옮김 / 창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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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짜증
내용이 이해가 되지않아 억지로 읽다가 포기
중간중간 번역에 일관성이 없는 곳이 많이 보인다.
이것저것 적으면서 읽었으나 중단했으니 서평도 포기
알라딘
추천 제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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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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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정복하라

일단 주인공은 자크 클라인이다. 여자친구는 샤를로트. 엄마는 카롤린 클라인. 아빠는 요트사고로 일찍 돌아가셨으니 신경쓸 필요는 없다. 자크는 어릴 때 좀 찌질했다. 공부도 못하고 체력도 약하니 또래의 힘센 녀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살 수밖에.. 자크의 엄마 카롤린은 유명한 신경생리학자로 꿈 연구의 권위자인다. 엄마는 자크에게 꿈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쉽게 말하면 수면의 질이 떨어져서 꿈을 꿀 수 없게, 정확히는 꿈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면 지식의 갈무리도 못하고 트라우마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자크가 최고 수준의 잠을 잘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잠을 훈련한다는 건 5단계인 역설수면까지 방해없이 자고 꿈을 기억할 수 있게 되는 걸 의미한다. 자크는 엄마에게 잠 훈련을 받은 후 머리도 좋아지고 트라우마를 극복하여 용기도 솟는다. 좀 부럽네. 잠만 잘자는 것만으로 이런 발전을 이루다니..


한편 카롤린은 '비밀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다. 꽤 유치한 제목의 프로젝트지만 최고 전문가가 수행중이니 그런가 보다 하자. 그 프로젝트는 1, 2, 3, 4, 5 단계 꿈보다 더 깊은 단계인 6 단계 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엄마는 6단계의 꿈을 수도자나 성자가 일종의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신 깊숙히 들어가야 하는 것이니 위험할 법도 해서 아킬레시라는 수도자를 데려다 6 단계로 들어가는 실험을 했다. 그런데, 실험중 아킬레시가 죽었다. 이 소문은 매스컴을 통해 퍼지고 카롤린은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 실종된다. 꿈속을 탐험하는 엄마와 아들을 지켜보는 소설이 《잠》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Bernard Werber 1961 ~ .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베스트셀러 작가

우리나라에서 책만 냈다 하면 반드시 베스트셀러에 올려 놓는 작가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굉장히 특별한 경우에 속하는데, 본국인 프랑스보다 한국에서 오히려 인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나도 그의 초기작인 《개미》와 《타나토노트》를 보고 지식에 대한 집요한 집착과 엉뚱한 상상력을 잘 접목시켜 놓은, 손을 놓기 힘든 소설에 매혹을 느꼈다. 그래서 이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꽤 읽었는데 초기 소설과는 달리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특히 《카산드라의 거울》을 읽은 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은 단 한 편도 읽지 않았다. 소설가가 되기 전에 쌓아둔 밑천이 이제는 다 떨어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잠》은 오랜만에, 그래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이제 소재 다 떨어진 거 아냐?

《잠》의 주요 소재는 '잠'이다. 이게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잘 때 1~5 단계를 거치고 5단계는 '역설 수면'의 단계이다. 이 잠의 단계를 잘 조절하면 머리도 똑똑해지고 정서도 안정이 된다. 어릴 때는 좀 뒤떨어진 학생이었던 주인공 자크는 엄마가 유도해 준 '잠' 덕분에 유망한 의대생이 된다. 그리고 엄마는 5단계보다 더 깊은 단계인 6단계 수면을 발견하기 위해 연구를 계속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떠오르는 소설이 두 개 있다. 가사 상태에서 좀더 내면 깊은 곳으로 다이브한다는 설정은 《타나토노트》에서 가져 왔다. 단지 그것이 '꿈'이고 《타나토노트》는 그것이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외부의 도움으로 지능이 발전한다는 건 《뇌》와 비슷하다. 《뇌》는 지능이 초인적으로 발전한 반면 《잠》에서는 조금 똑똑해지면서 일종의 시간여행을 하고 영혼과 대화하고.. 초능력이 생긴 것이다. 이 정도면 그냥 자기표절 아닌가? 표절이 아닐 수는 있지. 소설가가 직업이니 얼마나 그럴싸하게 변형했겠어? 하지만 이미 두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자기 표절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거두기는 힘들 것이다.


이제는 《개미》나 《타나토노트》같은 걸작을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허접한 설정

소재는 좀 비슷한 걸 끌어다 그냥 좀 썼다 치자. 하지만 설정은 더 형편없다. 엄마는 수면전문가로 아들의 잠을 컨트롤해서 똑똑한 의대생을 만든다. 말레이시아의 소수 부족은 꿈꾸는 시간을 현실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서로의 꿈을 나누며 공동체를 유지한다. 자각몽은 언제든 이어질 수 있고, 내용도 뚜렸하다. 게다가 부족은 꿈이 모인 집단의식(집단무의식이 아니다)이 존재해서 5단계 꿈에 든 사람이 찾아갈 수 있다. 6단계 잠이 들면 꿈속의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이게 잠이고 꿈이야? 그냥 유체이탈이잖아. 흔한 유체이탈을 써놓고 엄청난 과학이론이 숨어있는 것처럼 분장해서 써 놓았다.


물론 소설이 꼭 현실적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의 설득력과 개연성을 있어야 읽으면서 수긍하고 지나가는데 《잠》은 최소한의 덕목을 지키지 않았다. 《개미》가 명작인 이유는 개미에 대한 엄청난 과학적 지식을 쏟아 부은 후 그 이상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기 때문이고, 《타나타노트》는 많은 죽음에 대한 신화들을 집대성한 후 거기에서 한 발짝 상상력을 내밀었기 때문에 수긍이 되는 것이다. 그 자체로 말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잠》은? 잠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되어 잠만 자면 모든게 다 해결된다. 미래의 '나'는 꿈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주고 현자가 나타나 6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인 약물을 만드는 방법을 친절히 알려 준다. 형태는 비슷하다. 하지만 밑바탕이 탄탄하지 않으니 쌓아놓은 건물이 그냥 무너져 버리고 만다.


★☆

좀 작정하고 까서 미한한데, 좀 쉬세요. 마른 수건 짜내듯 아무 것도 없는데서 자꾸 글을 쓰려고 하니 이런 졸작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개미》에서 103683호가 편지를 인간에게 전했을 때의 그 소름끼치는 충격이나 죽음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던 타나토노트들의 목숨 건 프론티어 정신을 기대하면 안되는 걸까?


쓰고남은 소재 조각들을 그러모아 소설책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파쇄된 종이뭉치같은 소설이다.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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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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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불완전하다

나에게 가장 오래된 기억은 2살 때의 기억이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엄마 아빠와 함께 극장에서 서부극일 것 같은 영화를 본 것 같다. 딱 한 장면, 마차 바퀴가 보이고 엄마 아빠가 영화를 보며 나를 안고 있는 장면이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남아 있다. 그 다음 떠오르는 것은 6살 이후의 기억이기 때문에 영화관에서의 기억은 나에게 정말 소중했다.


나이가 든 후에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영화였을까? 영화를 보면서 울지는 않았을까? 2살이었던 건 맞을까? 어머니께 여쭤 보았다. 그런데 어머니께 들은 대답은 물음표였다. 어머니는 결혼 후 단 한 번도 아버지와 극장에 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 않을 거라고, 서부영화 본 적이 있을 거라고, 기억을 잘 더듬어 보시라고 해봐야 부질없었다. 하긴, 2살 때 본 영화를 기억한다는게 말이나 되나? 결국 아마도 나의 두살 기억은 왜곡된 것 같고, 내 생애 첫 5년은 백지가 되고 말았다.


기억은 완벽한 사진첩이 아니다.

 

줄리언 반스 Julian Barnes 1946 ~ . 영국의 소설가.

 


전작의 기대감을 오롯이 받은 신작

줄리언 반스는 전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다산책방, 2012)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아서 한참동안 베스트셀러의 윗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주인공이 가지고 있던 기억과 책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사실을 독자가 마주쳤을 때 충격을 받았고, 나는 기억이라는 소재로 이렇게 충격적인 결말을 맺는 소설을 이전에는 보지 못했다.


《연애의 기억》, 이 책의 제목이다. 제목을 보자마자 바로 원제를 살펴 보았다. 《The Only Story》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도 제목을 잘못 달아 놓아서 책을 읽는 내내 서스펜스를 기대하다가 어리둥절해 하면서 제목이 썩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연애의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전작의 히트에 기대는 제목인데, 전작의 결말이 계속 떠올라 충격적인 결말이 마지막에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이 제목은 나의 생각을 많이 방해했다.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좋은 결말을 기대하기 힘든 연애 이야기

《연애의 기억》은 모두 3부로 되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폴, 소설이 시작할 때 19세이고 보수적인 분위기의 부모 밑에서 자랐다. '연애'의 기억 속에 있는 연애의 대상은 수전, 다르게 부르면 매클라우드 부인, 즉 유부녀다. 게다가 소설 시작 시점에서 48세, 무려 폴보다 29살 연상이며, 심지어 두 딸은 폴보다 나이가 많다. 둘은 동네 테니스 클럽에서 복식조로 테니스를 치면서 친해졌고 연애를 시작한다. 영국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라면 쉽게 인정받기 힘든 연애 형태이다. 엄마 나이의 유부녀와의 연애라니...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1부는 폴과 수전이 만나서 연애를 시작하고 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굉장히 급하게 빠져 들고 연애를 하게 된다. 그런데 연애소설이라고 하기엔 사랑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폴이 표현하는 수전의 모습도 그렇고 에피소드도 그렇다. 이 소설이 시작하는 시점이 1960년대이고 폴은 노인이 되어 현재의 시점에서 기억을 더듬어 가며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마치 인생을 달관한 사람같이 굉장히 쿨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1부에서 두 사람이 사랑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준 후 2부에서는 수전의 불행, 둘이 멀어져 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1부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수전은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었고(폴 때문인지, 원래 폭력성향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폴이 좋아하던 앞니 두 개가 부러지기까지 한다. 결국 둘은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되는데, 이제는 수전이 알콜 중독에 시달리며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알콜 중독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을 하기도 한다.


수전이 병원에서 퇴원한 후 폴은 수전과 몇년간 생활을 계속하지만 견디지 못하게 되고, 해외출장을 핑계로 수전과 결별을 하는 내용이 3부이다. 이후 폴은 많은 시간이 지나서 수전이 죽을 때가 되어서야 병원에 있는 수전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서 병원을 찾는다.

 


바라건대, 당신은 내가 기억나는 대로 모든 걸 이야기 하고 있다고 알고 있겠지? 나는 일기를 쓴 적이 없고, 내 이야기-내 이야기! 내 인생!-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거나 멀리 흩어졌다 .따라서 내가 꼭 일이 일어난 순서대로 적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기억에는 다른 종류의 진정성이 있고, 이것이 열등한 것은 아니다.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의 요구에 따라 정리되고 걸러진다.
p.39


파편화된 기억, 파편화된 문장

《연애의 기억》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은 문장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쉼표가 문장 곳곳에 찍혀 있고, 도치된 문장이 너무 많다. 게다가 너무 사변적이다. 위에 인용한 것처럼 체계적인 기록이 아니라 그냥 아무 말이나 나오는대로 주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만약 작가가 의도적으로 파편화된 기억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썼다면 성공적이다. 읽는 내내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읽는 속도가 나지 않는데 재미도 없다. 정말 읽기 힘든 소설이다. 굉장히 짧은 문장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책을 읽다가 계속 딴 생각이 난다. 흡입력 따위는 쥐뿔도 없고 몇 번이나 책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번역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이 책을 번역한 정영목은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번역가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은 줄리언 반스가 그렇게 쓴 책이고 번역자는 그런 느낌을 최대한 반영해서 번역했을 것이다.


내용은 너무나도 단순하다. 어머니 또래의 연상의 여자와 사랑을 하고 도피를 하고 헤어졌다. 단지 이것 뿐이다. 그 외에 에피소드나 폴의 생각에 대해 계속 쓰고 있지만 도저히 흥미가 돋지 않는다. 연애에 대해서든 기억에 대해서든 소설을 쓰고 싶었으면 전체 플롯에 에피소드와 생각을 녹여냈어야 하는데, 그냥 따로 노는 것 같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문장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인상적인 에피소드도 별로 없다. 연애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쓰고 싶었으면 에세이를 써야지 이런 식으로 단순한 플롯에 아무 말이나 마구 집어 넣어서야 곤란하다. 대단히 지적인 것처럼 쿨한 태도로 글을 썼는데, 온갖 잡다한 생각을 모두 때려 박아 넣었다고 해서 지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결정적으로 읽는 재미가 전혀 없다.


책 후면에 쓰인 매체들의 평가에도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이 책은 힘의 절정에 이르지 못했다. 황량하긴 하지만 전혀 찬란하지 못하다. 강렬하지도, 팽팽하지도 않다. 진실 따위는 전혀 담겨 있지 않다. 더불어 나에게 어떠한 감동도 사랑에 대한 통찰도 주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너무 지루해서 책을 읽는 즐거움을 전혀 주지 못했다. 내가 이 책에 대해서 내리는 평가는 '노년의 소설가가 그냥 젊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끄적거린 책을 명성에 기댄 매체들이 호평하고 그 명성에 기대하는 나같은 멍청한 독자들이 선택하는 재미없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느낌은 황량함이다. 제목은 《연애의 기억》인데, '연애'보다는 '기억'에 방점이 찍혀 있다.


★☆

내가 이 책에서 건진 건 두가지다. 유명작가나 전작이 인상적이었던 작가라고 해도 다음 책이 좋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그 하나다. '인생은 단면이고, 기억은 결을 따라 쪼개지는 것이며, 기억은 그것을 끝까지 쭉 따라간다 (p.188)'는 기억에 대한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던 것이 다른 하나다. 하지만 겨우 이 두가지를 깨닫기 위해 돈을 쓰고 출퇴근 시간 피곤함을 이겨내며 이 책을 읽을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보통 책을 읽으면 되도록 정독을 하고 끝까지 읽으려고 하는데, 이 책은 마지막까지 읽는데 정말 큰 인내심을 가져야 했다. 전작의 함정에 빠지기 말기를.. 추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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