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포즈 데이 - Leap Yea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왜였을까, 내가 지금껏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 허세였던 걸까.

실제로 연애하지 못하는 약간 비뚤어진 사람이 로코를 즐겨본다 생각했었고 보면 볼수록 이것은 악순환의 고리가 되어 실제로 연애하기가 더 힘들어진다고 생각했다. 빤하디 빤한 수많은 로코를 의식적으로 멀리하고 꼭 로맨스 영화가 필요할 때는 [The Break-Up]같은 영화를 보며, 그래 연애란 이렇게 지독하고 현실적이고 일상적인것이다. 라며 자조하곤 했다.  

내겐 지금껏. 어쩌면 그렇게도 매번 연애가 힘들었다. 로코에 등장하는 백마탄 왕자 따위는 없었고, 줄리아 로버츠가 짓는 함박웃음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나는 로코의 주인공들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그래서 무수한 시련과 싸움을 이겨내고 결국은 해피하게 엔드하는 할리우드식 영화 속 주인공들이 미웠었나보다. 그래, 비뚤어진 인간은 나였다.   

그냥 뭐, 날도 좀 풀려서 두근두근한 것도 없지 않아 있고, 술을 마시지 못하니 마땅히 할 일도 없었고, 언젠가 한 번 영화를 함께 보기로 약속하긴 했지만 취향이 너무 달라서 무엇을 함께 봐야 함께 만족할지 도저히 모르겠는 사람과의 데이트였다. 그 때 [프로포즈 데이]가 마치 선자리에 나온 잘생기고 유머러스하고 집안까지 좋은 심장전문의마냥 눈을 깜박거렸고, 우린 그 영화를 선택했다. 우리는 함께 한숨을 내쉬고, 깔깔거리고, 만족했지만 욕구불만이 되어 극장을 나서야 했다. 

영화의 

남자주인공은 키가 아주 크고, 조금 웃기고, 여주인공을 놀린다. (나는 나를 골려먹는 남자에게 매료당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요리도 잘하고, 상처를 갖고 있지만 그것을 쉽게 말해주지 않으며, 여주인공을 싫어하는 것 같지만 언제나 뒤에 서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명 나를 사랑하는게 아닌데, 대담하게 키스하고, 그것도 아주 잘하고, 한 침대에 누워서 자면서는 단지 오른손을 잠결에 내 팔위로 감싼다. 

라며 점점 나는 여주인공이 되어버렸다 -_-; 젠장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는 여전히 뻔하다. 심지어 사랑을 확인하고 키스할 때는 두 사람의 입술 뒤로 석양이 진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대견하다. 내가 변한 것인지, 로코 자체의 트렌드가 변한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지금은 에밀 쿠스트리차나 프랑소와 오종, 김기덕의 영화들, 세계 각지의 온갖 실험적인 영화들보다 상업영화를 즐겨보게 된 것은 사실이고 이제는 상업영화 역시 그만의 매력이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모든 상업영화가 괜찮다는 것은 분명 아닌데 [프로포즈 데이]는 빤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구석이 있다. 

지독한 현실감각, 동화같은 로맨스의 상극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고, 빡빡한 여주인공과 느긋한 남주인공의 아슬아슬한 균형도 긴장감있다. 가장 좋았던 것은 우리가 차마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쳐가는 수많은 우연들과 기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나한텐 이런 일이 없는거야!" 라고 질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 나도 그 땐 그랬는데, 내가 그 때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며  저마다의 공상속에 빠지게끔 살짝 밀어넣어 준다는 말이다.

2시간 신나게 웃고 부러워하고서는 끝나버리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영화 자체의 여운이 남아서 벅차오르는 그런 영화도 물론 아니다.   

어떤 영화냐면,

예전에 아이일 때 가시가 손에 박혔을 때 그것을 빼지 않으면 혈관을 타고 흘러서 심장에 박혀버린다는 무서운 어른들의 말씀에 강박적으로 손에 박힌 가시를 뺐었는데( 그땐 왜 그리도 가시가 많이 박혔는지) 미처 빼지못한 그 때 그 가시가 내 온 몸을 훑고 다니며 여기저기 찌르고 다니는 것만 같다. 아, 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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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4-11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나는 이거 보고 감상쓸때 제목을 [4월의 밤은 좀 지독하다]라고 썼는데, 어쩐지 좀 통하는 감상이에요. 그쵸?

나는 한 침대에 둘이 누워서 잔뜩 긴장한 장면이 무척 좋았고 인상깊었어요.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장면은 여자가 떠나버린 줄 알고 남자가 허탈해하던 바로 그 모습이에요. 정말 그 장면이 무척 좋았어요, 무척.

아 또 생각하니까 미치겠다 ㅠㅠ

Forgettable. 2010-04-11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 장면!! 남자가 손가락을 하나씩 떼고 나가니, 여자가 한 숨도 자지않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번쩍 뜨는거요. ㅋㅋㅋ 남자가 돈을 받지 않은 것도 좋았어요. 돈을 받았더라면 아마 여자는 자기가 밥이었다고 체념해버렸을지도 모르겠어요.

전 계속 미치겠어요. 외로워요. 으흐흑

다락방 2010-04-12 09:00   좋아요 0 | URL
아 나 이 댓글 읽는데 심장이 벌렁벌렁 거려요. 자기 팔 위에 남자의 손이 놓여져 있던 그 촉감은 정말 생생할거야. 잊을 수 없을거에요, 그쵸? 아 미치겠네요. ㅎㅎ

다음부터는 걍 다 때려부셔, 하는 영화를 봐야겠어요. ㅎㅎ

Forgettable. 2010-04-12 18:10   좋아요 0 | URL
전 그래서 [아이언맨2]와 [킥애스]를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냥 뭐, 턱을 갈아버려(?이거맞나요?ㅋㅋㅋㅋㅋ) 이런 영화나 봐야징

다다음주쯤에 시간이 나서 봄꽃여행을 가보려고 했더니만 이미 동네에 벚꽃이 다 폈더라구요. 나뭇잎구경가게 생겼음 -_- 꽃이 피면 기쁘다기 보단 이 봄도 끝이구나 싶어서 슬퍼져요.

아포지 2010-04-12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얘기해준다고 하다가 계속 잊고 있었는데, 사랑니 뽑고 술마셔도 되요... 대신 자기 전에 가글을 확실히 해주길...

Forgettable. 2010-04-12 18:12   좋아요 0 | URL
그건 술 마시고 운전해도 되요... 란 말이랑 똑같다고 하던데;;; ㅠㅠ

많이 아물었으니 오늘은 막걸리나 한잔 할까, 라고 또 불이 당기네요. apouge님 밉습니다.

Seong 2010-04-16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맨틱 코미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근데 좀 변한 게 워킹 타이틀 작품을 보면서 그 마음이 좀 달라졌죠. <노팅 힐>, <브리짓 존스 다이어리>, <어바웃 어 보이>... 소급하다 보니 영국산이군요. 영국의 영화나 음악을 살펴보면 일상적이면서도 감성적인 부분이 굉장히 강한 것 같아요. 카이사르도 포기했다던 변덕스런 날씨 때문인가... ㅋㅋ

Forgettable. 2010-04-16 11:11   좋아요 0 | URL
최근에 500 days of Summer 도 좋았어요!
영국문화 좋죠. 저도 무지 좋아해요. 영국산 소설도 좋아하고.. 브리티시 락도 진짜 좋아해요!!
날씨가 우울하고 변덕스러우니 사람들 감성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건가..

아, 아침먹어야지. 새벽같이 면허필기셤 보고왔더니 배고프네요. 배고파서 뭔가 할 말이 더 있을 법한데도 생각이 안나요 ㅋㅋㅋㅋㅋ
 

어제. 

부러워서 "어이쿠" 하며 감탄사를 몇 번이나 내뱉어야 했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감상하고는, 애써 현실로 돌아오려 눈을 부릅뜨고 있자니 괴로움이 절로 밀려온다.  

게다가 오른쪽 아래 잇몸은 검은 실로 깊은 상처가 겨우 꿰메어져 있고, 진통제를 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없이 자기엔 약간 불쾌한 정도의 고통이 은근히 배어있다. 어차피 진통제도 다 떨어졌다. 

불가피한 금주령 때문에 술도 못마시고, 제대로 씹지못해서 소화도 안된다. 

마음을 좀 많이 빼앗겨버린 이에게 연락해봤자, 나는 아웃 오브 안중.  

책을 펴 들어도 어째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매력적인 인간들 투성이어서 그만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봄맞이 욕구불만인가. 

 

마취가 풀리는동안 울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마르케스였다. 

   
 

아래쪽 사랑니였다. 치과 의사는 입을 벌리고 뜨거운 집게로 어금니를 짓눌렀다. 읍장은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주 깊숙한 곳에서 얼어붙는 듯한 공허를 느꼈으나 고통을 토해 내진 않았다. 치과 의사는 단지 손목만을 움직였다. 아무런 증오 없이, 오히려 씁쓸한 부드러움으로. 그리고 말했다.

     “이것으로 스무 명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것이오, 중위.” ("Now you'll pay for our twenty dead men.")


     읍장은 턱에서 뼈마디가 삐걱거리는 것을 느꼈고, 두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어금니가 뽑혀져 나오는 것을 느끼지 않으려고 한숨도 쉬지 않았다. 그때 눈물 속에서 어금니를 보았다. 그의 고통에 비해 너무 어처구니없게 보였다. 그래서 지난 닷새간의 밤의 고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고 헐떡거리며 타구로 몸을 기울이고 군복 상의 단추를 풀었으며,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더듬더듬 찾았다. 치과 의사가 읍장에게 깨끗한 수건을 건네주었다.

     “눈물을 닦으시오.”

     읍장은 눈물을 닦았다. 떨고 있었다. 치과 의사가 손을 씻는 동안 읍장은 밑이 빠진 천장을 올려보고 거미알과 죽은 곤충이 널려 있는 먼지 낀 거미줄을 바라보았다. 치과 의사가 손을 닦으며 돌아왔다. ‘누우세요. 소금물로 입을 헹구시고.’ 그러나 읍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대식 인사로 작별을 고하고 다리를 끌며 문께로 나아갔다. 군복 상의 단추는 채우지 않고 있었다.

     “계산서를 보내시오.”

     “당신에게, 아니면 읍사무소로?”

     읍장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문을 닫고 철망 너머로 말했다.

     “마찬가지요.” ("It's the same damn thing."  나같았으면 "상관없어."로 했을텐데. 뭐, 마찬가지지만.)

<출처 : http://www.latin21.com/board3/view.php?table=translate_nh&bd_idx=15

 
   

이 단편을 다시 읽고 싶어서 이 단편이 실려있는 책을 찾기 위해 온 책장을 헤매고 다녔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잃어..버린 건가. 안그래도 욕구불만으로 열받아 있던 머리가 헤까닥 돌 무렵   

마르케스 치과 의사 

으로 구글링을 해보니 이 단편 번역이 나온다. 신비로운 구글의 세계.

 

이 단편은 1장 반쪽 분량으로, 꼬부랑꼬부랑 영어로 된 것을 몇번이나 읽으며 잘 이해도 못하고서는 좋아했었다.  

계산서를 어디로 보내든 상관없다는 읍장의 말을,  

마취가 풀리는 동안 몇 번씩이나 곱씹으며 그제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것은 사랑니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ㅠㅠ 무려 스무명의 목숨값! 

 

그나저나 나는 이 봄을 잘 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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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4-11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보내야지요. 무슨일이 있어도!

Forgettable. 2010-04-1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금주 며칠했다고 우울증걸린듯!!!

무스탕 2010-04-1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이를 빼셨군요. 더 빼셔야 하나요, 이걸로 끝인가요?

Forgettable. 2010-04-11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고민중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치과에서는 다 아물면 빼라고는 하는데, 썪지 않았다면 빼고 싶지 않아요. 한편으로는 이왕 시작한거 몽창 빼버릴까 싶기도 하구요. 휴..
 


 

어느 겨울이 지나갔는데, 당연히 올 봄이 오지 않는다면! 이라고 걱정하던 누군가의 공상에 아주 천천히, 이번에도 어김없이 봄은 대답해 주고 있다. 

어제같은 오늘과 몇년은 더 지난 것만 같은 어제와 내일같은 한달 후를 살고 있다.  

4번의 주말이 남았고 보고 싶은 사람은 많고 해야할 일도 많다. 그리고 봄은 왔다. 괜히 마음만 조급해져서는 더더욱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김에 치과에 전화해서 사랑니 수술 예약을 덜컥 해버렸다. 어떡해 ㅠㅠ  

하려고 했던 것의 대부분은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다이어리와 통장 잔액만 쳐다보고 있는 실정이 참 괴롭다. 

금요일에는 미녀친구와 눈이 고운 남자와 만나서 삼겹살에 소주를 먹고 맥주를 마시며 놀았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친구를 좋아한다. 이것은 마치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산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다."라고 단언하듯이 나 역시 "술 좋아하는 사람 치고, 재미없는 사람 없다."라고 말한다.  

눈이 고운 남자는 술을 잘 마실수 없는 사람이었는데도, 열심히 마시는 그 모습에 반해버렸다. 미녀친구와 나는 전 만남 때의 술꼬장담을 공유하며 술을 많이 마시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역시나 함께 취해버리고 말았다. 술과 고기와 미녀와 남자가 있는데 안취할래야!

토요일에는 축가멤버 뒤풀이가 있었다. 일요일에 새벽비행기로 출장간다는 결혼당사자는 결국 오지 못했고, 우리끼리만 놀았는데 수고비로 받은 돈으로 밥을 먹을까 술을 먹을까, 하다가 맛있는 밥 한끼로 돈을 다 써버리느니 차라리 양주로 써버리자며 양주를 마시러 갔다. 물탄게 너무 뻔한 양주를 마시고 취하지가 않아서 전전긍긍하다가 다음에는 차라리 파티룸을 빌려 마트에서 장을 봐서 먹고 마시는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로 연애이야기도 하고, 고대김예슬 얘기도 하고, 연대(연세대아님)이야기도 하고, 취업 이야기도 하고, 삶에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씩 했다. 후배는 김예슬이 좌파 스타란 이야길 했고, 친구는 그녀의 선택에 환호했고, 난 여기에서 약간의 의구심을 드러냈다.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맨몸뚱아리로 뻔하디 뻔한 사회에서 사는 것에 대한 나의 회의감은 우리 낭만주의자들의 거센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ㅎㅎ  

얼굴만 알고 있다가 축가 때문에 새로이 친해지게된 한 남자후배에게 첫인상을 말해달라고 했다. 이 문장을 읽고 나의 평가받기 좋아하는 습성을 떠올리며 웃을 나의 지인들에게 말하지만, 이 의견은 내가 아닌 친구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끼리끼리 논다고 ㅎㅎ 어쨌든 나의 인상은 차분하고, 여성스럽다는것. ㅋㅋㅋㅋㅋㅋㅋ '아직은' 첫인상이 유지되고 있다고. 


일요일에는 죽은 듯이 잠만 잤고, 어제는 친해지게 된 지 벌써 2년에 접어든 한 남자사람과 술을 마셨다. 죽을 정도로 매운 콩불을 먹고, 다신 먹지 않겠다고 하며 두유를 쪽쪽 빨아먹었다. 내 mp3을 틀어둔 것만 같은 이자까야에서 이런저런 잡답을 나누다가 [천개의 고원]이야기가 나왔다. 

이 친구는 건축을 공부하는 친구인데, 자기 분야에 대한 꿈도 다부지고, 아이디어도 꽤나 참신해서 난 이 친구의 전공 이야기를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어쨌든 요즘 미학을 공부하게 되었다며 약간 머뭇거리며 [천개의 고원] 이야기를 꺼내는데, 내가 대뜸 아, 들뢰즈였나. 했더니 반색한다. 이후로 아도르노, 롤랑바르트의 이야길 잠깐 하고 기호학 이야길 잠깐 하고, 중세의 숭고미 이야기도 잠깐 하고, 임석재와 안도타다오 이야기도 잠깐 했다. 

그 친구에겐 허세부리느라고 아는척 했지만 이 아는 척은 대부분 알라딘 서재질에서 곁눈질한 결과; 

나 철학한 여자야, 라며 콧소리를 내니 이 친구 금새 사랑에 빠진듯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어이, 아무한테나 그런 눈빛 보내지 말라고.  

우리 나이의 친구들은 마치 유행처럼 '우리 서른 다섯이 될때까지 솔로면 결혼하자.' 라고 약속한 남자사람친구를 하나씩 두고 있는데, 어제의 이 친구는 나의 '그' 남자사람친구이다. 장난처럼 해왔던 얘긴데, 어제는 갑자기 진지하게 정말로 결혼하자고 한다. 애인한테나 잘하시라능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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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10-04-06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스물 몇 살에 서클 선배에게 선배, 우리 내가 서른둘까지 결혼 못하고 있으면 그냥 선배랑 나랑 하자,라고 했는데 정말 서른둘에 선배가 진지하게 물어보더라는. 식겁해서 땀 삐질 흘리며 아이 선배도 참, 뭐 그런 걸 기억하고. 농담이었죠. 농담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사람, 있더라구요.

Forgettable. 2010-04-08 15:56   좋아요 0 | URL
어이쿠, 쥴님! 오랜만이라 너무 반가워요!
그나저나 단발 인증샷은 아래아래아래인가 어딘가에 이미 올렸답니다 ㅎㅎㅎㅎ

제가볼 땐 그 선배가 기다린거 아닐까요. 쥴님은 초미녀에 센스쟁이니까!?
마음졸이면서 쥴님이 서른 둘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선배의 초조함이 여기까지 전해져 오네요.

무스탕 2010-04-06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신랑이랑 연애전에 솔로로 지낼때 '내가 28세까지 미혼상태면 못 간거고 그 이후는 안 간거다' 라고 공공연이 떠들고 다녔는데 딱 27세에 결혼을 했지요;;;
4주 남았군요. 좋은분 많이 만나세요. 오랫동안 못 만나도 째끔만 보고싶게요 ^^

Forgettable. 2010-04-08 15:58   좋아요 0 | URL
뭐, 지금 많이 만난다고 안보고싶을꺼 보고싶거나, 보고싶을거 안보고싶진 않겠죠? ㅠㅠ

이렇게 긴 잡담에 의외로 많은 분들이 '몇살까지 솔로면' 이란 문구에 호응을 보여주시는군요. ㅎㅎ
전 뭐.. 만나면 가는거고 못만나면 안가는건데 아마 만나도 놓칠 것 같단 마음이 아직은 크네요. 기대를 안한달까;;

아포지 2010-04-07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니를 뽑기로 한 건 정말 잘 한 선택이에요... 화이팅!!

Forgettable. 2010-04-08 15:59   좋아요 0 | URL
저..........
진짜 후회하고 있어요.
'화이팅'과 느낌표 두개 정도로는 전혀 힘이 나지 않아요. 거의 죽어가고 있어요.

적어도 느낌표 다섯개 정도는 해주셔야...

2010-04-07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8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머큐리 2010-04-07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철학한 여자야~ ^^ 그 사랑에 빠진듯한 눈빛이 궁금해진 1인 임다..ㅎㅎ
봄 향기 나는 사진에 싱그러운 글이에요...^^

Forgettable. 2010-04-08 16:0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뭐, 술마시면 그 정도 눈빛이야 아무한테나 뿌리고 다니는 친구입니다. ㅎㅎ
애인도 있는걸요!! 흥!!

다락방 2010-04-07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김에 서로 사랑에 빠져도 좋았을것을!

Forgettable. 2010-04-08 16:03   좋아요 0 | URL
4월 5일을 제 기념일로 바꾸겠대서 제가 다이어리에 꼭 저장하라고 해두었죠.

사랑은 쉽게 빠질 수 있지만, 쉽게 빠질 사람을 만나는 건 어려워요!

무해한모리군 2010-04-07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서른다섯까지 솔로로 남으면 결혼하기로 한 남자 작년에 결혼했음 ㅎㅎㅎ

Forgettable. 2010-04-08 16:03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솔로 아니니깐 괜춘해요!!
여봐란듯이 얼른 결혼하시라능ㅋㅋㅋ

다락방 2010-04-07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서른까지 남으면 결혼하기로 했던 남자들이 여럿이었는데(누구였는지 기억도 안남) 그들중 몇몇은 결혼했고 그들중 몇몇은 정말 나랑 결혼할까봐 도망갔어요. ㅎㅎ

Forgettable. 2010-04-08 16:05   좋아요 0 | URL
이 약속은 역시 약속한 그 나이가 되어야 약속이었는지, 보험이었는지 판정이 나는거군요.....

뭐 누구였는지 기억도 안나는 사람이랑 그런약속을 했답니까, 락방님은!

이잘코군 2010-04-07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몇 예약해놔야하나. 서른다섯정도로 해볼까요? ㅋㅋㅋㅋ

Forgettable. 2010-04-08 16:06   좋아요 0 | URL
아프님이랑 예약하고 싶어하는 친구분이 있을까요????? 이러고 ㅋㅋㅋ
서른 다섯이면 너무 가까운 미래.... 이러고 2 ㅋㅋㅋ

늦지 않았으니 얼른 예약해두세요~ ^^

다락방 2010-04-08 16:07   좋아요 0 | URL
서른 다섯이면 너무 가까운 미래!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 이거 대못이다. ㅋㅋ

Forgettable. 2010-04-08 18:02   좋아요 0 | URL
으흐흐 너무 심했나요 (긁적<- 어머 왠 순진한척)


2010-04-07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니 저도 빼야 될텐데 역시 뺄 수 있을 때 빼 놀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어요 ㅠ 교정도 해야 하고...
몇 살까지 솔로면 결혼하자는 이야기는 만화에나 나오는 대사인줄 알았는데, 댓글 다신 분들도 그렇고 은근 많네요;; 유명한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온 대사인가요?;

Forgettable. 2010-04-08 16:09   좋아요 0 | URL
교정하시나요? 정말로? 언제부터? 교정도 엄청 아프다던데요....
저 사랑니 빼고 나서 뭔가 성형수술을 해볼까 하는 마음 싹 사라졌구요. 나머지 2개도 절대 절대 안뺄겁니다. 썪지 않도록 소중히 관리하겠어요. ㅠㅠ 저 진짜 아파서 죽어가고 있어요. 머리도 띵하고.. 지금 아직도 피맛이 나요! 24시간이 지났는데!!!

그 말이 어디서 나왔는진 잘 모르겠어요. 은근히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퍼져있는 약속인데;
정말 이런 약속 많이 하시나봐요 ㅎㅎ 코님은 아직 어리시니까 :)

파고세운닥나무 2010-04-10 22:17   좋아요 0 | URL
저는 얼마전 3개째 뽑았는데......
사람이 미련한 게 뽑을 땐 그렇게 아프지만, 금세 잊고 의사가 뽑자면 또 뽑고 말아요.
그래서 띄엄, 띄엄 3개째 뽑았답니다.
나머지 하나는 안 나와야 할텐데요.

Forgettable. 2010-04-11 12:58   좋아요 0 | URL
아, 역시 사람의 기억은 간사한 것인지요.
저도 이왕뽑기 시작한거 왕창 다 해결해버릴까 또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나도 관리만 잘해주면 굳이 뽑지 않아도 된다고 해요.
띄엄, 띄엄 3개째라니. 파고세운닥나무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

잉크냄새 2010-04-08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곳에는 봄이 왔나요. 여기는 아직도 을씬년스러운 날씨가 계속됩니다.
서른 다섯이면,,,전 이제 할수없는 약속이네요.

Forgettable. 2010-04-08 16:11   좋아요 0 | URL
아 을씨년스러운 날씨 + 이제 할 수 없는 약속
이 댓글은 괜히 암울해보여요. ㅠㅠ

잉크냄새님 잘 지내시죠! 얼마 전에 포카라 글 보고 감동하고 댓글은 미처 못남기고 나왔는데요. 아, 그리고 그 만우절 낚이신것도 -_-;;;;;;;

이곳은 거의. 봄입니다. 아직 밤늦게나 새벽 일찍은 춥지만요. ㅎㅎ

2010-04-09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0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이라고 '나'를 주어로 사용하는 문장은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나처럼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어찌 '나'를 뺀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동시에 고민중이다. 이것은 글쓰기의 문제라기 보다는 글 쓰는 사람의 성향의 문제인가 싶기도. 

각설하고, 나는 요즘 악역을 맡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보다 말았던 드라마 [추노]를 보면서 꼴보기 싫은 캐릭터만 잔뜩 나온다고 불평을 했다. 하물며 드라마의 악역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는데, 내 자신이 악역을 맡는다는 것은 진정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껏 연애를 할 때 나는 계속해서 희생양이었기 때문에 악역은 상대방에게 맡기고 나 자신은 하잘것 없는 자기연민을 극도로 부풀려서 비극의 아름다운 여주인공인양 괴로워했다. 이 얼마나 가당찮은 나르시시즘이었던가. 난 이게 자기애인줄도 몰랐다. 그저 실연당하는게 오히려 더 편하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며 헤어지자는 말을 듣도록 유도한 적도 있었고, 내가 죽을정도로 밉다고 말해달라고 애걸한적도 있었다. 와, 진짜 애기다. 

그래서 난 구체적으로 어른이라면 상대방을 위해 악역을 맡아줄 수도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내자신에게 던지고 있다. 

모르겠다. 

상대방을 정말로 사랑했다면 그 언젠가의 그가 내게 했던 것처럼 독한 마음을 먹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인생 최악의 기억을 떠올리라면 그와의 이별을 떠올린다. 그는 냉정했고, 독사같았다. 인간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가 나를 위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의 관계는 누가 봐도 끝나 있었지만, 서로 겁이 나서 끝내지 못하고 있을 때 그가 용기를 내주었고, 나는 무척 힘이 들었지만 그가 그렇게 해준 덕에 그를 증오하면서 끝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쩌면 인식하지도 못한 채 나보다 훨씬 많이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악역을 맡는 것이란 그런거니까. 그는 내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나쁜 사람이다. 내게 상처줬으니까. 하지만 나보다 성숙했고 오히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것일지도 모르겠다.  

3년이 흘렀다. 그 동안 나는 연애도 했고, 짝사랑도 했다. 그를 잊은지 오래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비오는 밤, 그를 향한 새삼스러운 그리움을 마음에 아로새기는 지금에서야 난 그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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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4-01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전 오늘 또 혼자 서운하고 신경질 나는 일이 있어서 지금 머그컵에다가 와인 한잔 가득 따라서 얼굴 뜨거워지게 마시고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이 글을 읽으니, 더 후벼파네요. 아 정말이지.

지금 제 방 오디오에서는 루시드 폴의 고등어가 나와요.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나는 눈을 감는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나를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뽀게터블님, 오늘 수고했어요. 그리고 잘 자요!
나도 잘 잘 게요.

Forgettable. 2010-04-03 12:34   좋아요 0 | URL
잘 잤나요?

루시드 폴의 이야기가 자주 들리네요. 전 가끔 궁금해요. 좌판에 널린 고등어들은 먹히기를 바라는지, 아니면 끝까지 선택당하지 않기를 바라는지..

전 교육 끝나고 와서 지금 엎어져있어요. 힘들어요. 수업이란건. ㅠㅠ

그나저나 이건 후벼팔라고 쓴 글은 아닌데, 어쩌다보니 ㅎㅎㅎ

비로그인 2010-04-01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있는 '나'를 다 빼고 '너'로 바꿔보세요.

Forgettable. 2010-04-03 12:35   좋아요 0 | URL
알스님..............
저 소리질렀잖아요.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획기적인 방법이!

가끔 놀러오셔서 이렇게 조언해주셔야 해요 ㅠㅠ

Arch 2010-04-07 11:10   좋아요 0 | URL
그러게. 정말 멋진 방법인데요. 알스님, 오랜만이에요.
뽀도~ ^^

Forgettable. 2010-04-08 18:30   좋아요 0 | URL
알스님은 이제 알라딘에 없어요. 으흐흑 ㅠㅠ

아치, 인터넷 어떻게 접속했죠?

2010-04-02 0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3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4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4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5 1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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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의로든, 타의로든 으레 책 추천을 받는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책 좀 읽는다, 하는 지인에게 추천 받은 책이다.  

나는 어느새, 일본 소설을 읽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와 다자이 오사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게만은 찬사를 바쳤고, 찬사를 바칠 수 있는 내 취향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지만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가네시로 가즈키는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마저도 치를 떨며 싫어하는 나는 일본 현대 소설이 싫다며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다녔다. 하지만 일본 추리소설의 세계에 입문하고 요코미조 세이시와 교고쿠 나츠히코에 홀딱 빠져서는 일본 문학에 대한 호불호를 결정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지금, 히라노 게이치로를 만났다. 

이문열과 김훈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지인의 추천이었기에 사실 난 [일식]이 어느 정도의 소설일지 대강은 감을 잡고 있었다.  

아마 한자어가 난무하고, 문장에 멋을 부려놨는데 그게 쫌 멋있을테고, 약간은 전통삘이 날테고, 그래서 엄청나게 고리타분할테지. 하지만 작가의 데뷔작일테니 어느 정도 파격적인 면모는 있을 것 같으니 조금은 기대해 볼까. 

책을 펼치니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 이라는 작가명과 작품제목에서 풍기는 일본적인 풍모는 간데없고 중세 유럽이 난데없이 펼쳐진다. 꼴에 중세철학을 공부했답시고, 작가의 수준 운운하며 약간은 감탄하면서 책을 읽는데 좀 졸린다.  

그래서 3주만에 겨우겨우 읽어냈다.
3주동안 읽은 시간을 모두 합쳐보면 하루나 될까. 가독성은 있지만 한 번 손에서 놓으면 다시 잡기가 힘들다. 읽다 만 책이 도처에 수두룩한데 그 와중에 꾸역꾸역 읽게 한 힘은 어디에 있었는지. 

숙사에 돌아갈 맘도 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걸음은 어디랄 것도 없이 마을을 배회하고 있었다. 남자고 여자고할 것 없이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밖에 나와 저마다 생업에 매달려 있었다. 생각해보면, 마을에 온 뒤 내가 조금이나마 의식적으로 이곳에 사는 이들의 생활모습을 살펴보고자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저녁답이 내리면 정해놓기라도 한 듯 주막을 찾는 사내들이 지금은모두 한결같이 무거운 얼굴로, 여위어 말라붙은 듯한 겨울밀을 마주하고 온종일 서서 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지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일손을 바쁘게 움직이거나, 기껏해야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설핏 냉소를 던지는 정도였다. 그들은 작년에 겪은 냉해의 기억 때문에 겁에 지려 있었다. 계절이 초여름에 이르렀건만, 날씨는 전혀 더워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겨울밀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작물에 병든 기색이 역력했다. 
(p.96~97)

살바도르 달리가 공포스러워 했다는 밀레의 '만종'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끝도 없는 노동의 힘겨움, 지난함으로 인한 하늘에의 외경과 공포가 문장 곳곳에 만연해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시무시한 일상, 그러나 그 시선의 끝에 담긴 작가, 혹은 신의 인간애을 나는 엿보았고 이 모호한 힘은 끝까지 설득력을 갖고 나를 마지막 문장으로 이끌었다.  

75년생, 23살밖에 되지 않은 대학생 작가가 그리는 중세 유럽의 수도자라. 처음에 나는 솔직히 처음에는 헤르만 헤세와 움베르트 에코 정도를 연상하며 냉소적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히라노 게이치로는 누구 말마따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 하나 없는 21세기에 자신만의 문체와 자신만의 이야기를 창조해내는데 단연 성공해버렸다. 나는 이 작가의 성공을 목도하고 받았던 충격을 나는 어떤 추리소설의 반전에서도 받았던 적이 없다. 그야말로 '펑'하는 느낌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 작가의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어쩐다 할지 모르지만, 내 보기에 이 작가는 평생 쓸 것은 모두 다 소진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예전에 교고쿠 나츠히코의 [항설백물어]를 읽고 내가 익히 알지 못했던 일본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글을 썼던 적이 있었는데, 나는 이번에 이 젊은 작가의 책을 읽고 진심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경외감이 머리에 박혀버리고 말았다. 그 마수가 뻗치지 않은 분야가 없다. 전통이면 전통, 장르면 장르, 순문학이면 순문학이 저마다 스토리며 캐릭터, 철저한 사료조사, 수려한 문장 뭣하나 부족하지 않은 작품이 존재한다. 장인정신이나 인내심따위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게 되어버린 뿌리 없이 흔들리는 대한민국의 현대문학을 더할나위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쓰다. 괜히 코끝이 찡하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것은 나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가의 엄청난 힘에 압도되어 작가의 천재성에 감탄할 지언정, 그 이야기에 감화되거나 내 나름의 것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원체 손이 닿을 수 없는 이야기여서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단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점에서 한국 현대문학의 가능성을 발견하고는 다소 진정했다.  

(이것은 피해의식인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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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3-3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뽀게터블님의 리뷰가 하나씩 올라올때마다 나는 다른 취향만 한번씩 더 깨닫게 되네요. 난 이 사람의[달]읽으면서 미칠뻔 했어요. 그래서 차마 다른 작품을 읽지를 못하겠어요. 주변에 제가 좋아하는 지인들은 다들 좋다고 하던데, 전 읽어낼 수가 없더라구요. 지금도 그 책이 무슨 말을 한건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안나요. 저한텐 꽤 어려운 책이었거든요.

근데, 리뷰 잘 쓴다, 뽀게터블님
:)

Forgettable. 2010-04-03 12:40   좋아요 0 | URL
이봐요. 잘 썼으면 추천을 하라구요. 저 이거 몇시간 동안 공들여 썼는데 10분만에 휘갈겨쓴 아래 글이랑 추천수 비교되서 허탈하다구요. ㅋㅋㅋㅋㅋㅋ

락방님, [일식]도 무척 어려웠어요. 근데 이 책 추천해준 지인은 [달]보다 [일식]이 훨씬 낫다고는 하던데.. 다시 한 번 도전? 콜? ㅋㅋ
한자로 단어의 뜻을 유추해보고, 사전도 가끔씩 찾아보면서 읽기도 하고 그랬는데요. 가끔은 이런 어려운 책도 좋아요. 작가가 공들였구나, 싶은 책이요. 원래는 이런거 멋부렸다면서 싫어하는데 이 책만은 나쁘지 않았어요. 전 오히려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좋아하는 편인걸요. 헤르만 헤세나 마르케스의 작품처럼 문장 자체에는 공들이지 않아서 (헉 내가 이런 댓글을 썼다니!! 공들이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문장 하나하나에 얼만큼의 치열함이 들어있는지 가늠할 수도 없는데 ㅠㅠ <-이라고 4월 3일 수정 ㅋㅋ) 읽는데 어려움은 없지만 엄청난 내공이 스며있는 그런거요.. ㅎㅎ

오늘은 낮잠자서 아직도 안자고 있어요!

다락방 2010-03-31 08:24   좋아요 0 | URL
이 사람이 또 나 흥분하게 만드네. 나 추천했어요. 저기 저 위에 손가락모양 추천했다고요. 다음블로거 선정되서 돈 받으라고 ㅎㅎ

Forgettable. 2010-03-31 15:46   좋아요 0 | URL
알라딘 추천도 해줘요. 네? ㅋㅋㅋㅋㅋ
요러고 있다. 추천욕심 ㅋㅋ

손가락 모양 추천수 많으면 다음블로거 선정되는거였어요?

다락방 2010-03-31 18:47   좋아요 0 | URL
앗. 이게 제가 지난번에 해보니까 손가락 추천되면 알라딘 추천은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음 둘중 하나만 되는가보구나 했는데, 뽀님 댓글 읽고 다시 해보니까 알라딘 추천도 되네요. 아, 무슨 삽질을 한건지.

손가락 추천 많으면 다음블로거 선정되는거라고는 확실히 말하지 못하겠지만 좀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 가끔 뽀도 다음블로거 특종 당선되길래..난 책 사는데 보태라고 또.. ㅋㅋ

Forgettable. 2010-04-03 12:41   좋아요 0 | URL
결국.. 당선되지 않았고.......
락방님은 또 (매주 그렇듯이) 당선 되었고!

stella.K 2010-03-3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소설은 후진 건 아주 후지지만ㅋ 일정한 향취와 멋과 각이 살아있는 것도 많아요.
전 요즘 <리큐에게 물어라>는 책 읽고 있는데, 참 뭐라 형언하기가 어렵더군요.
<일식> 읽어봐야 할텐데...저도 포겟님 말마따나 여기저기 건드려 놓은 책이 많아 참 손을 뻗히기가 쉽지 않습니다.ㅜ

Forgettable. 2010-03-31 18:49   좋아요 0 | URL
예전엔 일본 현대소설이라면 아예 제껴두어도 전혀 죄책감이 들지 않았는데, 요즘은 제껴두기가 죄책감이 든다니까요 ㅎㅎ
[리큐에게 물어라] 읽어봐야 할텐데,,, 또 제가 특히나 좋아하는 장인에 대한 이야기네요. 그것도 16세기의 다도! 스텔라님이 [일식]에 손을 뻗히기 힘든 딱 그만큼 이 책에 대한 제 마음도 그렇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겠지, 하며 느긋하게 기다려 보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