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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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의로든, 타의로든 으레 책 추천을 받는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책 좀 읽는다, 하는 지인에게 추천 받은 책이다.  

나는 어느새, 일본 소설을 읽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와 다자이 오사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게만은 찬사를 바쳤고, 찬사를 바칠 수 있는 내 취향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지만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가네시로 가즈키는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마저도 치를 떨며 싫어하는 나는 일본 현대 소설이 싫다며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다녔다. 하지만 일본 추리소설의 세계에 입문하고 요코미조 세이시와 교고쿠 나츠히코에 홀딱 빠져서는 일본 문학에 대한 호불호를 결정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지금, 히라노 게이치로를 만났다. 

이문열과 김훈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지인의 추천이었기에 사실 난 [일식]이 어느 정도의 소설일지 대강은 감을 잡고 있었다.  

아마 한자어가 난무하고, 문장에 멋을 부려놨는데 그게 쫌 멋있을테고, 약간은 전통삘이 날테고, 그래서 엄청나게 고리타분할테지. 하지만 작가의 데뷔작일테니 어느 정도 파격적인 면모는 있을 것 같으니 조금은 기대해 볼까. 

책을 펼치니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 이라는 작가명과 작품제목에서 풍기는 일본적인 풍모는 간데없고 중세 유럽이 난데없이 펼쳐진다. 꼴에 중세철학을 공부했답시고, 작가의 수준 운운하며 약간은 감탄하면서 책을 읽는데 좀 졸린다.  

그래서 3주만에 겨우겨우 읽어냈다.
3주동안 읽은 시간을 모두 합쳐보면 하루나 될까. 가독성은 있지만 한 번 손에서 놓으면 다시 잡기가 힘들다. 읽다 만 책이 도처에 수두룩한데 그 와중에 꾸역꾸역 읽게 한 힘은 어디에 있었는지. 

숙사에 돌아갈 맘도 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걸음은 어디랄 것도 없이 마을을 배회하고 있었다. 남자고 여자고할 것 없이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밖에 나와 저마다 생업에 매달려 있었다. 생각해보면, 마을에 온 뒤 내가 조금이나마 의식적으로 이곳에 사는 이들의 생활모습을 살펴보고자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저녁답이 내리면 정해놓기라도 한 듯 주막을 찾는 사내들이 지금은모두 한결같이 무거운 얼굴로, 여위어 말라붙은 듯한 겨울밀을 마주하고 온종일 서서 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지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일손을 바쁘게 움직이거나, 기껏해야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설핏 냉소를 던지는 정도였다. 그들은 작년에 겪은 냉해의 기억 때문에 겁에 지려 있었다. 계절이 초여름에 이르렀건만, 날씨는 전혀 더워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겨울밀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작물에 병든 기색이 역력했다. 
(p.96~97)

살바도르 달리가 공포스러워 했다는 밀레의 '만종'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끝도 없는 노동의 힘겨움, 지난함으로 인한 하늘에의 외경과 공포가 문장 곳곳에 만연해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시무시한 일상, 그러나 그 시선의 끝에 담긴 작가, 혹은 신의 인간애을 나는 엿보았고 이 모호한 힘은 끝까지 설득력을 갖고 나를 마지막 문장으로 이끌었다.  

75년생, 23살밖에 되지 않은 대학생 작가가 그리는 중세 유럽의 수도자라. 처음에 나는 솔직히 처음에는 헤르만 헤세와 움베르트 에코 정도를 연상하며 냉소적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히라노 게이치로는 누구 말마따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 하나 없는 21세기에 자신만의 문체와 자신만의 이야기를 창조해내는데 단연 성공해버렸다. 나는 이 작가의 성공을 목도하고 받았던 충격을 나는 어떤 추리소설의 반전에서도 받았던 적이 없다. 그야말로 '펑'하는 느낌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 작가의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어쩐다 할지 모르지만, 내 보기에 이 작가는 평생 쓸 것은 모두 다 소진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예전에 교고쿠 나츠히코의 [항설백물어]를 읽고 내가 익히 알지 못했던 일본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글을 썼던 적이 있었는데, 나는 이번에 이 젊은 작가의 책을 읽고 진심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경외감이 머리에 박혀버리고 말았다. 그 마수가 뻗치지 않은 분야가 없다. 전통이면 전통, 장르면 장르, 순문학이면 순문학이 저마다 스토리며 캐릭터, 철저한 사료조사, 수려한 문장 뭣하나 부족하지 않은 작품이 존재한다. 장인정신이나 인내심따위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게 되어버린 뿌리 없이 흔들리는 대한민국의 현대문학을 더할나위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쓰다. 괜히 코끝이 찡하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것은 나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가의 엄청난 힘에 압도되어 작가의 천재성에 감탄할 지언정, 그 이야기에 감화되거나 내 나름의 것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원체 손이 닿을 수 없는 이야기여서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단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점에서 한국 현대문학의 가능성을 발견하고는 다소 진정했다.  

(이것은 피해의식인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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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3-3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뽀게터블님의 리뷰가 하나씩 올라올때마다 나는 다른 취향만 한번씩 더 깨닫게 되네요. 난 이 사람의[달]읽으면서 미칠뻔 했어요. 그래서 차마 다른 작품을 읽지를 못하겠어요. 주변에 제가 좋아하는 지인들은 다들 좋다고 하던데, 전 읽어낼 수가 없더라구요. 지금도 그 책이 무슨 말을 한건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안나요. 저한텐 꽤 어려운 책이었거든요.

근데, 리뷰 잘 쓴다, 뽀게터블님
:)

Forgettable. 2010-04-03 12:40   좋아요 0 | URL
이봐요. 잘 썼으면 추천을 하라구요. 저 이거 몇시간 동안 공들여 썼는데 10분만에 휘갈겨쓴 아래 글이랑 추천수 비교되서 허탈하다구요. ㅋㅋㅋㅋㅋㅋ

락방님, [일식]도 무척 어려웠어요. 근데 이 책 추천해준 지인은 [달]보다 [일식]이 훨씬 낫다고는 하던데.. 다시 한 번 도전? 콜? ㅋㅋ
한자로 단어의 뜻을 유추해보고, 사전도 가끔씩 찾아보면서 읽기도 하고 그랬는데요. 가끔은 이런 어려운 책도 좋아요. 작가가 공들였구나, 싶은 책이요. 원래는 이런거 멋부렸다면서 싫어하는데 이 책만은 나쁘지 않았어요. 전 오히려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좋아하는 편인걸요. 헤르만 헤세나 마르케스의 작품처럼 문장 자체에는 공들이지 않아서 (헉 내가 이런 댓글을 썼다니!! 공들이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문장 하나하나에 얼만큼의 치열함이 들어있는지 가늠할 수도 없는데 ㅠㅠ <-이라고 4월 3일 수정 ㅋㅋ) 읽는데 어려움은 없지만 엄청난 내공이 스며있는 그런거요.. ㅎㅎ

오늘은 낮잠자서 아직도 안자고 있어요!

다락방 2010-03-31 08:24   좋아요 0 | URL
이 사람이 또 나 흥분하게 만드네. 나 추천했어요. 저기 저 위에 손가락모양 추천했다고요. 다음블로거 선정되서 돈 받으라고 ㅎㅎ

Forgettable. 2010-03-31 15:46   좋아요 0 | URL
알라딘 추천도 해줘요. 네? ㅋㅋㅋㅋㅋ
요러고 있다. 추천욕심 ㅋㅋ

손가락 모양 추천수 많으면 다음블로거 선정되는거였어요?

다락방 2010-03-31 18:47   좋아요 0 | URL
앗. 이게 제가 지난번에 해보니까 손가락 추천되면 알라딘 추천은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음 둘중 하나만 되는가보구나 했는데, 뽀님 댓글 읽고 다시 해보니까 알라딘 추천도 되네요. 아, 무슨 삽질을 한건지.

손가락 추천 많으면 다음블로거 선정되는거라고는 확실히 말하지 못하겠지만 좀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 가끔 뽀도 다음블로거 특종 당선되길래..난 책 사는데 보태라고 또.. ㅋㅋ

Forgettable. 2010-04-03 12:41   좋아요 0 | URL
결국.. 당선되지 않았고.......
락방님은 또 (매주 그렇듯이) 당선 되었고!

stella.K 2010-03-3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소설은 후진 건 아주 후지지만ㅋ 일정한 향취와 멋과 각이 살아있는 것도 많아요.
전 요즘 <리큐에게 물어라>는 책 읽고 있는데, 참 뭐라 형언하기가 어렵더군요.
<일식> 읽어봐야 할텐데...저도 포겟님 말마따나 여기저기 건드려 놓은 책이 많아 참 손을 뻗히기가 쉽지 않습니다.ㅜ

Forgettable. 2010-03-31 18:49   좋아요 0 | URL
예전엔 일본 현대소설이라면 아예 제껴두어도 전혀 죄책감이 들지 않았는데, 요즘은 제껴두기가 죄책감이 든다니까요 ㅎㅎ
[리큐에게 물어라] 읽어봐야 할텐데,,, 또 제가 특히나 좋아하는 장인에 대한 이야기네요. 그것도 16세기의 다도! 스텔라님이 [일식]에 손을 뻗히기 힘든 딱 그만큼 이 책에 대한 제 마음도 그렇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겠지, 하며 느긋하게 기다려 보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