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학교에 다닐 땐 매일매일 다른 옷을 입어야 했었다. 매일 다른 구두를 신고 다른 컬러의 섀도우를 바르곤 했다. 언제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매일 만나는 친구들에게도 매일 매일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고(?)싶어 했었다. 난 "옷은 수수하게 차려입었으나 타고난 기품이 몸에 밴" 여인은 커녕 겉멋만 든 양아치였다.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느 순간부터 패션에 대한 집착의 끈을 놓아버리게 되었는데,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출퇴근 지옥철의 압박에 굴복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어느새 "옷은 수수하게 차려입었으나 타고난 얼굴도 마땅치 않아 그저그런" 찌질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요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찌질함과 품위에 집착하고 있음) 

그러던 어느날 내 공상 속 친구인줄로만 알았던 친구가 내 일상으로 침투해왔다. 회사 앞이라고 잠시 얼굴이나 보자길래 난 우습게도 일거리를 들고 나갔다. 난 외출시간을 따로 만들 수 없는 말단직원이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쌩얼을 들이 밀며 우체국으로, 은행으로 데리고 다니며 난 이 친구가 내 일상에 들어올 수 있는지 실험을 해봤다. 신기하게도 난 2년동안 단 한번도 까먹지 않았던 통장 비밀번호를 까먹고는 초조해했고, 난생 처음으로 등기를 부치는 무인기계를 앞에서 우쭐해했다. 이 공상 속 친구는 당연하게도 나의 일상을 공상화하는데 성공해버렸다. 단 24분으로 24시간을 꿈같이 만들어주는, 외국인 여자친구를 갖고있을거라 추정되는 친구. (ㅋㅋ) 

게다가 화장도 안하고, 옷도 거지같이 입고 있는 나같이 품위없는 찐따에게 볼매(불매아님)라는 문자까지 넣어주었다.
이거슨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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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2010-01-08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매.. '볼'수록 '매'력있다는 뜻인가요? 어머, 내가 이런말을..
>,.<

Forgettable. 2010-01-08 10:59   좋아요 0 | URL
앗 Tomek님께 이런 귀여운 면이 있을줄이야^^
네! 제가 그 '볼'수록'매'력있다는 볼매입니다. ㅋㅋ

Arch 2010-01-08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매는 사실 접니다.라고 사악하게 속삭이고 싶다. 하악하악. ㅋㅋ
그분은 일상 속에도 쏙쏙 잘 스며들고, 축지법이 아니라 와이드 시간 법(막 지어낸다. ㅋㅋ)도 만들줄 알고, 정말 부럽군요. 뽀님, 이제 볼매 뽀~ 라고 불러줘요? 달레랑스랑 서재 요정보다 약한데요. 히~

Forgettable. 2010-01-08 15:19   좋아요 0 | URL
자기가 자기보고 볼매래.
아치님, 그분이 내 일상으로 스며든게 아니라 나를 일상에서 끄집어 냈다니깐요. 이거참 내 글도 주어서술이 어줍인거에요? 아치 바보ㅎㅎ
와이드 시간법ㅋㅋ 좋아요 ㅋㅋㅋ

원래부터도 달레랑스나 서재요정은 별로 부럽지 않았어요, 쳇


Arch 2010-01-08 20:14   좋아요 0 | URL
난 자아도(취) 아치니까요. ㅋㅋ (지가 지 별명을 막 짓는다.) 저만 하려구요. 주어 술어 어줍은 저로 족해요. 서재 요정은 몰라도 달레랑스는 좀 부럽지 않아요? 달콤하잖아요.

Forgettable. 2010-01-09 13:00   좋아요 0 | URL
나 자꾸 눈에 경련이 와요. 이럴땐 뭐를 먹어야 낫죠? ㅠㅠㅠㅠ

음, 사실은 서재요정이나 달레랑스 부러워요, 땡깡부린거임ㅋㅋ 서재요정 아치 뽀레버!

Arch 2010-01-09 19:52   좋아요 0 | URL
그거 비타민 뭐가 부족해서래요. 경련 일어나고, 조금 떨리는거 말하는거죠? 뽀 요새 피곤한가봐요..

무해한모리군 2010-01-08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 나도 볼매라고 말해줄수 있고 뽀님 일상속으로 막 밀고 들어갈 수 있는데~
뽀님은 깜찍한 볼매녀예요 ㅎㅎㅎ

Forgettable. 2010-01-08 15:20   좋아요 0 | URL
제가 어디가서 볼매 취급 받겠습니까? 바로 알라딘뿐이죠! ㅎㅎ
데이트 좀 지루해질려고 하면, 저를 불러주세요!!! (인서점 가면서 저를 빼놓고 가다뇨ㅜㅜ <-엄청 뒷북ㅋ)

perky 2010-01-08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쟁이 대학생이셨군요! ^^
지금은 볼매 사회인이고! ^^
저는 한국에 있을 때만해도 치마도 입고 멋도 내고 했던 것 같은데,
미국 '서부' 촌년으로 살게 되면서 멋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버렸지요..ㅋㅋ

Forgettable. 2010-01-09 13:02   좋아요 0 | URL
차우차우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괜히 기분이 좋네요!!! 양아치에서 멋쟁이 대학생으로 신분 급상승ㅋ

저는 촌년이 되어도 좋으니 캘리포니아에 살고 싶어요!! 하지만 지진은 ㄷㄷㄷ 이틀연속으로 너무 무서우시겠어요 ㅠㅠ

2010-01-08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9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적금을 탔다. 떠나기 전 가장 필수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돈도 아니고, 옷도 아닌, 여권도 아닌 카메라!!
쿨캠 레드와 쩜팔이를 중고로 사려고 찜하고 판매자에게 연락을 해두었다.   
나처럼 팔힘 없고 악력 약한 여린 여인네에게 줌렌즈는 사치다.  

는 괜히 약한척 해보는거고, 쩜팔이만큼 가격대비 훌륭한 렌즈는 보지 못했다. 사실 비싼 렌즈를 소유해본 적도 없지만, 원래 좋은 사진은 비싼 렌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시선과 좋은 장소, 좋은 타이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던가. 흠흠

 

*blog.naver.com/pkapk 님의 사진입니다.
* ㅋ님, 사진 퍼왔다능 '-' 

원래는 멋~~~있게 [면도날]의 리뷰나 써볼까 하고 벼르고 있었는데, 모르겠다.
[데쓰프루프]도 신나게 봤는데, 그만큼 신나게 리뷰를 쓸 자신이 없다. 이 영화도 정말 끝내준다. 아우, 신나!
[지붕뚫고하이킥] 에피를 주말동안 몇개를 봤는지 모르겄다.. 여튼 이제 반정도 따라잡았는데, 최다니에에에에르르르 ㅠ_ㅠ 아씨 최고훈남이 황정음따위에게 넘어가는 건 정말이지 짜증나지만, 황정음 캐릭터 자체는 볼수록 귀엽달까.. 그치만 난 황정음은 별로.. 아, 너무 몰입하지 말자! 

**
눈이 온 아침의 하늘은 주황색이다. 한번은 너무 붉어서 자다 일어나서 깜짝 놀란적도 있었다. 오늘처럼 눈이 많이 온 날, 내 방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예쁜 주황색이었다. 그러나마나 출근길은 3시간이 걸렸고, 난 비몽사몽 졸다가 지각통보도 못해서 오만 눈치는 다 받았다. 그래도 눈이 오는 날이 좋은 이유는 내겐, 만나기만 하면 눈이 오는 그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눈이 오는 날 월미도에 가본 사람은 혹시 알까?   

흔하디 흔한 기중기라는 기계의 아름다움에 압도될 수밖에 없단걸,
펑펑 내리는 차가운 눈을 맞으면서 '월미도'바이킹을 타면 아무리 바이킹을 사랑해도 제발 내려달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단걸,
아무도(-_-) 잡아주지 않아서 하얀 옷을 입고 눈이 진창인 디스코 놀이기구 바닥을 굴러도 깔깔깔깔 웃음이 날 수밖에 없단걸, 
수많은 대화들이 눈 밑에 파묻혀 더이상 기억나지 않아도 웃던 얼굴만은 기억할 수밖에 없단걸,

아마 모를걸. 왜냐면 우리랑 함께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다른 세상 이야기니까. 이것은 현실이었지만 현실에서 벗어난 다른 공간에서의 경험이었다. 그날도 이야기했었나. 우리 자체가 일상이 된다면 어떨까? 우리는 일상이 아니기 때문에 더 행복하고 서로의 존재를 고마워하는 것이 아닐까. 이 대화의 결론이 잘 기억나지 않는건 아무래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 눈오던 날은 '뭐 신나는 일 없을까?'의 신나는 일 자체였고, 우리는 구멍 뚫려 위태한 젱가를 화끈하게 부셔버리는 것과 같은 경험을 했던 것 같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해. 

***
나라고 매일 이렇게 천생연분인 것만같은 친구들만 만나는 건 아니다.  

나는 [면도날]을 읽으며 모피코트와 다이아몬드를 결국 버릴 수 없었던 한 여인에게 주목했는데, 요즘 들어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말하는 내가 스스로 가식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배곯아본적이 없다. 간식이나 인스턴트 식품을 먹고싶어했던 적은 있었다. 우리 웰빙가족은 밤에 TV보는 것은 물론 야식 먹는 것도 금기사항이었기 때문에 어린 나는 항상 보잘것 없는 것들에 목말라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디가 찢어지게 가난했다거나, 뼈저리게 배가 고팠다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보건데, 돈은 필요한 만큼만 있어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돈많은 남자, 직장이 대단한 남자들을 찬양하는 친구들을 경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멸하는 나의 마음이 불편했다. 무엇이 불편했을까, 며칠 전 대단히 화려하신 생활을 하는 친구를 보며 약간 비웃으며 동시에 생각했다. 나, 이 친구를 부러워하는걸까? 내키는대로 성형수술을 하고, 명품가방을 사고, 무슨무슨 파티에 다니며, 돈 잘벌고 잘생긴 남자들을 만나는 이 친구의 허영심이 부러운건가?

내가 원하는 삶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 어떤 지점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반대지점을 향하는 것인지를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나는 돈이 내 고민을 진정으로 해결해줄 수 없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이 사소한 쾌락을 만족시켜준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던 적도 없다. 만약에 돈이 더 많다면? 제한 없이 돈을 쓸 수 있다면? 내게 그런 기회가 생겼을 때 나는 자본의 유혹을 뿌리치고 내가 지금 원하는 삶을 지킬 수 있을까. 

예전의 나는 헤세의 작품에 나오는 구도자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했는데, 지금의 나는 구도자의 곁가지에 있는 속물인 여인에게서 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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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4 22: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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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4 2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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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4 22: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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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5 09: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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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lei 2010-01-05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좋은 사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 원래 좋은 사진은 좋은 렌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해 말한다는 건 지금 돈이 없다는 이야기죠.
돈이 많다는 걸 터부시하는 건 전혀 넌센스죠.
나 같은 재벌은 전혀 돈에 대해서 언급을 않죠.
돈을 그저 돈으로 볼 수 있으면 재벌이 되죠.

Forgettable. 2010-01-05 09:43   좋아요 0 | URL
하하하 예리하신 레이님^^ 제 글 정독하시는 분은 레이님밖에 없는 걸까요?
수정했습니다. ㅎㅎㅎ

돈이 어떻게 그저 돈이죠? 전 돈이 생기면 이미 상상 속에서 형체를 가진 어떤 물건이 되던데요. 그리고 그 물건은 어느샌가 실제화되어서 제 손에 들어오고요. 저는 절대로 재벌이 될 수 없을거에요. 돈 자체를 가져볼 수도 없을거구요.

뷰리풀말미잘 2010-01-05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명품가방은 됐고 성형수술은 저도 좀 하고 싶은데요. ^^
곧 죽어도 줌렌즈. 그것도 고배율. 팔 아파도 줌렌즈. 그거슨 진리.
잡담 재미있어요 뽀님. 자주 좀 써 주세요.

Forgettable. 2010-01-05 09:46   좋아요 0 | URL
아니 꽃미남 말미잘이 무슨 성형수술? 오징어라도 되고싶은게요?
난 팔아파서 줌렌즈 안써요. 줌렌즈 따위. 이러면서 카메라 2개 들고다니면 돈없어서 줌렌즈 못산다는거 티나나요? 나도 GRD 팔면 줌렌즈 살 수 있다구요. 흑흑 (이건 무슨종류의 고백일까요)

오랜만에 써서 재밌는건가봐요. 내 잡담 기다리는 사람은 딱 둘뿐인 것 같아. ㅋㅋㅋ

2010-01-05 0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5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포지 2010-01-0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렌즈가 모에요? @.@ 부럽네요 부러워... 뽀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Forgettable. 2010-01-05 12:46   좋아요 0 | URL
뭐가 부럽습니까. ㅎㅎ 맘내키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저가렌즈에요~ ^^
또 아는 사람에게 산거라 더 저렴하게 구했어요^^
그나저나 갈 때 카메라만 3개 들고가게 생겼네요 -_-

a님도 새해복 많이 받아요! 즐거운 한해 되시길 ^^

바밤바 2010-01-05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구가 인상적이네요. 캐나다 언제 가시옵니까?ㅎㅎ

Forgettable. 2010-01-06 09:04   좋아요 0 | URL
아직 멀었습네다. ㅎㅎ 몇개월 있다가 가요-
저 마지막 문구는 제겐 상당한 충격이었어요. ㅠㅠ 속물입니다. 전.

무해한모리군 2010-01-05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야 내게 쳐박아두었던 폴라로이드가 있다는게 생각남 --

Forgettable. 2010-01-06 09:05   좋아요 0 | URL
원래 폴라로이드가 사고나서 한달쓰고 안쓰는 카메라라면서요? ㅋㅋㅋ
전 어제 받아왔는데 얼른 필름 사와서 찍어보고 싶어 죽겠어요!
 

고대 누구누구 민족이 정립해두었다는 12개월 365일 주기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데, 하물며 새해 첫날이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그래도 나도 고정관념으로 가득찬 인간종족인지라, 새해 첫 날 읽을 책은 무엇이 좋을까, 하며 한참을 책장 앞에서 서성였다. 서성였다지만 책 몇권을 두고 무엇을 고를지 고심했다는 편이 더 맞겠다. 



[독서일기] 알베르토 망구엘 , 진행중 
 

 



[반지의 비밀] 앨리스 피터스 , 진행중
 

 




[세상을 보는 방법] 쇼펜하우어 , 진행중 

 



[전망 좋은방] E.M.포스터 , 읽지 않음 

 

  




[면도날] 서머싯 몸 , 읽지 않음 

 

 

읽던 책은 괜히 망설여지고 해서 자꾸 눈에 밟혔지만 또 손은 가지 않던 [면도날]을 과감히 꺼내어 들었는데 왜 이 책을 지금껏 읽지 않고 방치해두었던가 싶다. 나는 서머싯 몸을 좋아한다. 그의 작품은 작가 자신이 바로 정확하게 이야기 해주듯이 특별히 대단한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히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난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나 자신에게는 당당하게 권할 수 있다. 독서권태기이신가요? 서머싯 몸의 책을 집어 드세요.  

나는 그들([면도날]의 등장인물들)이 완벽한 미국인이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그들은 영국인의 눈을 통해서 본 미국인이다. 나는 미국인들이 말하는 독특한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려고 애쓰지 않았다. 영국 작가들이 그런 시도를 하면 미국작가들이 영국에서 사용하는 영어를 그대로 재현할 때 범하는 것과 똑같은 실수를 하게 된다. 특히 속어가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헨리 제임스*는 영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빈번하게 속어를 사용했지만 영국인이 쓰는 것과 똑같이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가 원했던 구어적 효과는 내지 못하고 영국 독자들에게 불편한 느낌만 안겨주었다.(p13)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서실을 나올 때도 래리는 여전히 윌리엄 제임스의 책에 몰두해 있었다. 나는 클럽 안에서 혼자 점심을 먹었다. 도서실이 조용했기 때문에 나는 식사 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면서 한두 시간쯤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놀랍게도 래리는 그때도 여전히 독서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옆자리를 떠난 이후로 꼼짝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오후 4시쯤 내가 그곳을 나올 때도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그는 내가 도서실에 드나드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날 오후에는 여러가지 볼일이 있어서, 블랙스톤 호텔로 돌아갔을 무렵에는 벌써 어느 초대 자리에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어야 할 시간이었다. 저녁 초대에 가는 도중에 나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다시 클럽에 들러 독서실에 가보았다.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신문 따위를 읽고 있었다. 래리는 아직도 같은 자리에서 독서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말 특이한 젊은이었다. (p60)


이 책은 아직 60페이지밖에 읽히지 않은 주제에 마구 컴퓨터로 달려와서 재미있는 구절을 기록해두고 싶게 만든다. 깊은 성찰으로부터 거둘 수 있는 가장 값진 수확물은 바로 유머가 아닐까. 기록하면서 또 알베르토 망구엘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우리는 작가가 쓴 게 아니라 우리가 읽고 싶은 것을 읽는다. [독서일기] 中


*덧- 
참고로 헨리 제임스는 서머싯 몸에게 비웃음(??)을 샀을지언정 두 아들에게 이런 멋진 편지를 쓴 작가란다. 

지적인 십대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삶이라는게 소극(笑劇)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심지어 점잖은 코미디조차 아니고, 그러기는 커녕 존재의 뿌리가 뻗어나간 본질적인 기근의 더없이 심오한 비극적 깊이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말이다. 정신적인 삶을 구가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물려받게 되는 유산은 늑대가 울부짖고 음탕한 밤새들이 지저귀는, 정복되지 않은 숲이란다. [독서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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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1-01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망 좋은 방]은 재작년인가 암튼 읽었더랬어요. 포게터블님 다 읽고 나면 어땠는지 얘기해주세요. 면도날 강추 넣어야겠네. 뽀게터블님 저한테 땡스투 받는거 즐기시는구나. 그쵸? ㅎㅎ

Forgettable. 2010-01-02 11:16   좋아요 0 | URL
역시 벌써 읽으셨군요. 저도 궁금해요. 괜찮으면 E.M포스터 전집을 노려보려구요. 추천받은지 1년이 넘었는데 이제야 읽으려 하다니;;;

[면도날] 제가 써놓은 글귀가 다락방님께도 괜찮았나봐요?? 순전히 호기심에 다시 도서관에 들러서 청년이 아직도 책을 읽고 있는지 확인해보는 화자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요 전 ㅠ ㅋㅋㅋ

다락방님의 땡스투덕분에 제 삶이 풍요로워졌잖아요. ^^

2010-01-02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2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5 0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글을 쓰지도 않는데 고맙게도 방문해주시는 수많은(!) 방문자들을 위해, 차라도 대접하고 싶지만, 곧 백수가 될 예정인 주제에 카드빚 말고는 가진게 마땅찮아 아쉬운 마음을 시로 달래본다.  

다들 무언가 꽉 잡고 있는데
그걸 놓치면 조난당할까 두려워하는데
그는 인파에 몸을 맡기고 유영한다
몇 차례 큰 파도 지나가고
남극 같은 지하도 계단에
섬이 되어 앉아 있다.

W의 [어부생활사] 中

다행인지 당연인지, 내게는 시를 쓰는 후배가 있다. 연휴 중 흥청망청 술로 보내는 시간의 일부를 그와 함께 잠시 나누었는데, 일본으로 오랜 기간 떠나있을 그 친구가 내게 A4지 뭉텡이를 자랑스레 건넨 중의 일부이다. 친구는 그의 시를 읽고는 80년대 감성을 키보드에 두들기고 있냐며 비난했다지만, 난 그의 치열한 단어선택이 좋고, 나로서는 절대 알지 못할 본질적인 외로움이 두렵고, 그럼에도 시에 담긴 따스함을 발견하는 순간이 좋다.  

몇개의 시 중에는 자기고백이 담긴, 굳이 말하자면 증오하는 아버지에 대한 시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왠지 그 시가 나에게 주는 편지같았다.  

이십팔일 후,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멍청하게도 항생제 몇 십 알을 처먹었다. 운 좋게도 나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자정에 알았다. 착한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피곤한 일일구를 출동시켰다. 나는 모르는 척 잠을 잤고 망할 놈의 고대병원새끼들은 그를 또 치료해줬다. 그 착한 아들의 생각을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뭐 그도 나를 잘 모르겠지만. 그런데 웃긴 것은 착한 그녀의 생각도 도통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W의 [기시감, 착한 아들, 그리고 복선] 中

왤까, 이런 아픈 기억을 풀어서 꺼내보일 수 있다고, 그만큼 많이 자랐다고, 아버지에 대한 미움도 그만큼 사그라들었다고 웃으며 건네는 편지같았다.

핸드폰이 없던 베이비 펌의 귀여운 신입생, 나와 함께 서양 고전 철학, 미학개론 같은 가장 어려운 수업만 골라 듣던 후배, 치매에 걸린 나이많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아무도 오지 않을까 걱정하던 친구, 음악만 할거라고, 시만 쓸거라고 하다가도 금새 취업 걱정을 하던 친구, 마음먹자마자 JLPT 시험에 덜컥 붙은 친구, 긴 팔로 안아주며 '누나! 사랑해요!' 라고 애인보다도 더 크게 외쳐주는 나의 후배. 이 친구와 다시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괜히 눈물을 글썽거리며 하얀 A4지 종이 위의 글자들을 다독였다. 언젠가 우리 친구의 시가 떵떵거리며 우쭐대는 꼴을 한번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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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2-28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에 대해 시를 쓸 수 있다는 건, 이미 내면에선 화해했기 때문이라 생각되네요.
자기 내면에서 화해하지 않았다면 어떤 글도 쓸 수 없을테니까요.

Forgettable. 2009-12-29 00:4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유독 자기 시 평가 받기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이 글을 보여주고 싶은데 제가 생각한게 틀릴까봐 망설이고 있답니다. 근데 왠지 순오기님의 댓글이 힘이되네요^^

뷰리풀말미잘 2009-12-28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백수가 된다니 듣던중 반가운 소리네요. 그렇잖아도 어떻게 됐을랑가 궁금했는데 선뜻 물어보기가 어려웠어요. 어쨌거나. ^^ 웰컴 투 리얼월드!

2009-12-29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9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9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zydevil 2009-12-29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네요, 두루두루...

Forgettable. 2009-12-29 01:01   좋아요 0 | URL
정말요?? 데빌님도 좋으세요? 참 다행이에요^^ 전 이 친구 시가 모든사람에게 마구 다가가서 어떤 방식으로든 반향을 일으켰음 해요 ㅎㅎ 저 잘시간을 너무 지나버려서 큰일이에요ㅠㅠ 낼 아침이 무지 걱정되요 ㅠ

푸하 2009-12-29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시군요.
공감이 많이 되네요.

Forgettable. 2009-12-29 09:1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는 시를 잘 모르기도 하고, 딱히 시에 반응한 적은 없는데 지인의 시라서 좋은건줄 알았거든요.괜히 제가 기분좋네요 ^^
 





 - 2009.12.24. 에버랜드. 

오전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캐롤을 들으니 어렸을 때 동생들이랑 카세트에 캐롤 테잎을 넣고 틀어두고는 막춤을 추고, 함께 케익을 먹던 기억이 났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신나는 이유는 지금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연인들을 위한 날이기 이전에 각자의 소중한 날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다들 즐겁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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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9-12-25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 크리스마스! ^^

Forgettable. 2009-12-26 12:33   좋아요 0 | URL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냈나요??
난 눈떠보니 벌써 토요일;; 아 정신없어라- (어머, 왠 바쁜척)

후애(厚愛) 2009-12-25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피 메리 크리스마스에요~
선물 많이 많이 받으세요.^^

Forgettable. 2009-12-26 12:38   좋아요 0 | URL
후애님!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은 받으셨나요?
저는 고흐책과 에버랜드 사막여우인형과 기린수면안대를 받았어요^^ 히히

다락방 2009-12-25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 크리스마스, 뽀게터블님!! :)

Forgettable. 2009-12-26 12:3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잘 들고;;가셨어요?;;;
본의아니게 소소한 테러들을 저질러 버렸다능 ㅋㅋ

비로그인 2009-12-30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다 내려보기 전, 윗부분만 보고서는 모차르트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의 아리아' 무대 디자인인 줄 알았어요. 호홋

Forgettable. 2010-01-01 00:00   좋아요 0 | URL
역시 아는만큼 보인다는게.. 많이 보고 많이 알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