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지적이고 멋졌던 97학번 오빠에게 혹해서 사회과학 소모임에 든 후에, 문과대 핵심 집행부였던 언니를 알게 됐다. 나의 신념은 선배들로 인해 주조되었고 언니는 감언이설과 욕지꺼리로 나를 그녀의 라인에 우격다짐으로 집어 넣었다. 함께 데모를 나가고, 새터를 준비하고, 소모임을 꾸려나가고, 일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이 술을 마시며 나는 내가 라인에 들어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니는 우리에게 술을 사주기 위해 엄마에게 폰뱅킹으로 돈을 쏴달라고 당당히 요구하고선, 집에가서 엄청난 잔소리를 들었었다. 반미운동을 주창했으면서 제일 먼저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갔다. 굉장히 엄하고 무서운 우리 부모님께 밤중에 내대신 전화를 해서 '학생회장인 제가 책임질테니 오늘 이 친구 집에 안가면 안되겠습니까' 라고 물어서, 난 당장 집으로 끌려들어와 두들겨 맞아야 했다.  

언니와 마신 술과, 함께 흘린 눈물과, 큰 목소리로 다졌던 무수한 약속과 다짐들은 쉽게 잊혀졌다. 

졸업 후에는 1년에 한두번 만날까 말까 했고, 난 술만 마시면 언니에게 했던 실망들을 번복해서 고백하기 일쑤였다. 언니가 축가를 요청했을 때에도 귀찮았고, 창피했다. 하지만 언니의 숱한 연애들, 그러니까 굉장히 참혹했던 연애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평생 처음으로 잘 해주는 사람을 만났고, 평생 지금만큼 행복했었던 적이 없다. 이 사람이 나의 사랑이다.' 라고 말하며 부탁하는 언니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귀찮음과 창피함을 견뎌내며 후배와 동기들과 함께 축가 연습을 했고, 우리는 하객을 감동시키는 글렀으니, 언니라도 감동시키자는 목적으로 열심히 했다. 나와 내 친구는 연극을 다시 하는 정도의 긴장감과 성취감이라며 떨려했고, 뭐 우리가 얼마나잘했든, 하객들에게 박수를 얼마나 받았든, 관계없고 어쨌든 언니는 슬쩍 눈물을 훔쳤다. (눈이 간지러웠는지는 아직 확인 못했다) 

결혼이라. 

나는 결혼을 하지 않을 것 같다. 앞일은 어찌될 지 모르지만, 어쨌든 안할 것 같다. 하지만 화려한 결혼식장에서 너무 예쁜 드레스를 입고, 하객들에게 몇만원 짜리 코스 요리를 대접하며 온 집중을 받으며 예식을 올리는 언니를 보면서 부러웠다. 나도 결혼하고 싶었다. 최대한 화려하게, 최대한 많은 사람의 집중을 받으며, 최대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평생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잘 살았으면 좋겠다. 언니도, 나도.  

그리고 대학 시절의 풋풋하고 치기어렸던 청춘을 평생 함께 공유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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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3-25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뽀게터블님은 저랑 정 반대에요, 정말.
난 결혼식이 싫어서 결혼하기가 두려운 1人 이거든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들 모여서 나를 빤히 쳐다본다는게, 나 때문에 모인다는게, 게다가 드레스를 입고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는게 끔찍하게 느껴져요. 항상 다른이들의 웨딩사진을 보면서도 불편했어요. 각종 색깔의 드레스들과 한복을 바꿔 입어가며 사진사들이 요구하는대로 작품사진을 찍는게, 그게, 어휴.
저는 그래서 만약 결혼을 한다해도 신랑될 사람에게 미리 얘기하고 싶어요. 결혼식은 올리되, 웨딩사진 찍는건 하지말자고요. 화려하지 않게, 사람들은 적게 불러서 하자고. 저는 그렇게 얘기하고 싶거든요.

아 정말 우리는 무척 다르군요, 무척.


그러나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에는 동의해요.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뽀게터블님도, 나도.

Forgettable. 2010-03-25 20:38   좋아요 0 | URL
정말 달라요. ㅋㅋ
순간적으로 부러운 마음에, 나도 이런 결혼식을 하고 싶단 생각을 하긴 했지만 평소 결혼식에 대한 생각은
쓸데 없는데 돈을 너무 많이 쓰고, 형식절차일 뿐이며, 정작 결혼을 하는 사람과 축하를 해주러 오는 사람의 교류는 전혀 없고, 허세다.
입니다. 결혼식을 싫어하는 건 같지만 싫어하는 이유는 정말 다르네요 ^^

가만 보면 전 주목받는 걸 좋아라 한다능;;; -_-

락방님! 잘 살아요!!

turnleft 2010-03-26 0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7학번이... 오빠군요..;;

다락방 2010-03-26 08:29   좋아요 0 | URL
위로의 말씀을 드리자면, 제게는 97학번이 동생입니다. ㅎㅎ

무스탕 2010-03-26 08:52   좋아요 0 | URL
97년이면 제가 30줄에 들어선 해군요;;;

turnleft 2010-03-26 09:25   좋아요 0 | URL
아.. 이 훈훈한 위로의 덧글들이라니.. ㅋ

Forgettable. 2010-03-26 10:42   좋아요 0 | URL
아니 이것이 왠 때아닌 97학번 논쟁입니까 ㅋㅋ

턴님 ㅋㅋ 저 워홀 간댔잖아용ㅋㅋ 워홀 나이제한을 떠올려보심이 ㅎㅎ
락방님. ㅡㅡ 그랬군요. (새삼 놀라고 있다)
무스탕님 전 알라딘이 참 좋아요 여기 아님 제가 어디서 막내취급 받겠어요 ㅠㅠ

다락방 2010-03-26 10:55   좋아요 0 | URL
뽀, 내가 너무 늙어서 싫어요? 실망했어요? ㅠㅠ

Forgettable. 2010-03-26 11:02   좋아요 0 | URL
아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너무 언니한테 막 맞먹을라 그러고 장난걸고 그래서 ㅋㅋㅋㅋㅋ
싫긴. 아 웃겨 ㅋㅋ

다락방 2010-03-26 11:06   좋아요 0 | URL
내가 '너무' 언니죠 orz

saint236 2010-03-26 16:41   좋아요 0 | URL
저도 댓글 놀이...저에겐 동기군요...

Forgettable. 2010-03-26 21:36   좋아요 0 | URL
아하하 다들 이곳에서 은근 나이 고백을 ^^;;
의도한 바는 아닌데 알라디너들의 나이 서열이 여기에서 갈리네요 ^^

saint236님, 저의 그 선배와 동기시라니 새삼 친근감이ㅋㅋ 반갑습니다 ㅎ

Seong 2010-03-26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 "당신은 내 청춘의 무덤~ ♬"
결혼이란 제도는 모르겠지만, 같이 사는 건 좋죠~
^.^;

Forgettable. 2010-03-26 11:00   좋아요 0 | URL
좋아요??
엄마가 맨날 너는 죽고 못사는 사람 만나야 된다고 하세요 ㅋㅋ

머큐리 2010-03-26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이나 그런거 상관없이 난 뽀님이 평생 멋지게 연애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요...ㅎㅎ
아 그리고 이건 다락방님도 같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응?!

다락방 2010-03-26 11:39   좋아요 0 | URL
늙은 다락방은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ㅎㅎ

머큐리 2010-03-26 11:58   좋아요 0 | URL
왜요...락방님의 감성은 여전히 청춘이신데.. 늙다니요..섭한 말씀을...ㅎㅎ

Forgettable. 2010-03-26 12:43   좋아요 0 | URL
연애는 아무나하나요 org
뭐 캐나다 유학생 꼬셔야 하나. 엄마가 외쿡인은 안된댔는데 ㅠㅠ
이러고 있슴다 ㅋㅋㅋ

락방님과 전 잘살기로 했으니 염려는 붙들어 두세용 ㅋㅋ

락방님. 나 지굼 말실수한건가 진심 골똘히 생각중......

다락방 2010-03-26 12:55   좋아요 0 | URL
ㅎㅎ 아니아니아니아니야 아니에요. 아 뭐 그런거 생각해. 아니야. 웃자고 한 소리에요. 이런! ㅠㅠ

다락방 2010-03-26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위에 Tomek 님 댓글에 뽀게터블님이 단 댓글 보니 생각난건데요,
울 아빠엄마는 내가 차가운 사람을 만나도 다 괜찮을거래요. 내가 너무 뜨거워서.

Forgettable. 2010-03-26 21:3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원래 좀 뜨거운 여자들은 찬 사람을 만나줘야 해요. 우리 엄마도 저보고 무뚝뚝한 사람 만나라고 하더군요. 아, 우린 너무 뜨거워!! 앗뜨뜨~ 쏘핫


saint236 2010-03-27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결혼식 갔다가 어디서 많이 본 사진을 봤습니다. 신랑 신부 영상이 나오는데 위에 있는 사진이 나오네요. 물론 사람만 다르고 구도나 배경은 똑같고. 한참 웃었습니다.

Forgettable. 2010-03-29 09:25   좋아요 0 | URL
아, 정말요?? ㅎㅎㅎ
진짜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수많은 신혼부부들이 나와 똑같은 매뉴얼의 웨딩사진을 갖고 있는거네요;; 흠, 좀 웃기기도 하지만 씁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