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과 머저리」, 그리고 이름에 '청'자가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나도 모르게 젊은 이청준만을 생각하고 있다가 한번씩 깜짝깜짝 놀란다. 「병신과 머저리」, 그리고 「눈길」의 10년 터울이 늘 새삼스럽게 나를 놀래킨다. 10년 사이 그는 정말 그렇게 늙어버렸던 것일까. 근원을 알 수 없는 상처에 시달리던 그가 어느새 노인에게 진 빚을 끊임없이 상기하게 될 만큼. 문학 속 주인공을 저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참 나쁜 버릇이지만, 이 두 작품만을 놓고 봤을 때, 이청준의 '청'자가 조금은 늙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더운 때 추운 때를 가려 살 여유"도 없던 그는 끊임없이 "나는 노인에 대해서 빚이란 게 없었다"고, "노인이 그걸 잊었을 리가 없다"고 지붕 개량 사업 얘기를 핑계삼아 웬 빚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노인의 눈길이 차라리 무표정에 가까운 것"일수록, 아무도 그를 채근하지 않아도 그는 자꾸만 빚을 생각하는 것이다. 없는 게 분명하다는 것을 노인이나 자신이나 분명하게 알면서도 분명하게 있는 빚. "노인에 대해선 빚이 없음을 골백번 속으로 다짐"할수록 형체를 드러내는 빚. 사채업자에게서 급하게 돈을 끌어다 쓰고 원금보다 불어난 이자 빚을 지게 된 사람처럼 그는 원칙적으로는 없는 것이 분명한 그 빚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여 또 다른 핑계로 노인 곁을 떠나려고 한다.

그런 그를 위해 중개인으로 나서는 것은 그의 아내. 그를 원망하는 눈길을 보내어도 보고, "당신은 참 엉뚱한 데서 독해요" 다그쳐도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놓은 수가 노인의 입을 통해 그 알 수 없는 '빚' 이야기를 꺼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듣고 보면, 부모 자식간을 서로 빚쟁이 마냥 소원하게 만든 그 이야기는 미리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별 것 아닌 이야기이다. "액면가 없는 빚문서"처럼 그 시대를 살던 부모 자식이라면 누구라도 가질 법한, 흔하고 흔한, 그렇고 그런, 그냥 빚 이야기이다. 그 시대를 사는 부모 자식이 아니라도, 지금을 살고 있는 부모 자식이라도, 그 누구라도 지고 있을 그런 빚 이야기가 '눈길' 위에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눈길」의 '나'만큼이나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모른 척, 못 본 척하며 살고 있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똑바로 마주 보기가 오히려 힘든 수많은 진실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은 진실, 쳐다보기 무서운 진실일수록 누구 하나 밟지 않은 눈길 위의 발자국처럼 너무나 선명하고 너무나 또렷하다. 보이기 시작하면 고통스러우니까 우리는 고집스럽게 눈을 가리고 아옹하며 사는 것이다. 누가 봐도 청산되지 않은 분명한 빚을 처절할 정도로 바락바락 아니라고 우기는 '나'처럼 우리도 그렇게 산다.

그런데, 부모는 다르다. 노인은 좀 다르다. 그네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자식'이라는 몹쓸 이름만 걸리면, 그네들의 눈에는 빚 문서도, 다 허물어져 가는 지붕도, 눈길 위에 찍혀 있는 발자국도 모두 또 다른 빚처럼 짊어지고 살아야 할 무언가로밖에는 안 보인다.

서로 전생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엮인 관계라는, 촌수도 없다는 부모 자식 관계는 그 자체로 '나'의 실체 없는 빚 문서이고 고쳐두어야 할 지붕인 것이다. 아무리 갚고 또 갚아도, 아니 오히려 갚으면 갚을수록 이자가 무섭게 불어나는 무허가 사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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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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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 어둠의 저편


"그래, 하지만 세상에는 말이야. 트롬본이라는 악기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여자들이 꽤 많거든. 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믹 재거나 에릭 클랩튼이 트롬본을 불어서 스타가 된 건 아니니까....."
p.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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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각자의 전쟁터가 있기 마련이지."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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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은 어둡고 달의 뒷면처럼 죽어있다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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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는 가끔씩 생각난 듯이 책 읽는 자세를 바꾼다 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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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도 말이야, 라이언 오닐이 연기하면 그 나름대로 우아해 보이거든. 하얀 실로 두껍게 짠 털 스웨터를 입고, 알리 맥그로우와 눈싸움을 하는 아름다운 장면에서는 프란시스 레이의 감상적인 음악이 흐르고 말이야. 그렇지만 내가 그런 걸 한다면 꼴이 말이 아니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내 경우 가난은 어디까지나 그냥 가난일 뿐이니까. 눈도 그렇게 적당히 쌓이지 않을 테고 말이야." p.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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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주변에서 원인과 결과는 손을 잡고, 종합과 해체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p.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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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성숙하는 것은,
하루키의 감각이 퇴색하는 건가.
해변의 카프카 이후로는,
자꾸만 하루키 작품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
여전히 새끈한 표현이나 묘사가 작품 속에 있지만,
그건 식상하지도,
예전처럼 굉장히 신선한 자극이 되지도 않는다.
그냥, 그렇다. 무척 슬프게도-
조금만 독하게 마음을 먹으면
하루키, 실망이야.

라고 말 할 수 있겠고,
조금만 날카로워지면 하루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름대로 짐작을 해 볼 수 있겠지만,
암튼 판단유보다. 하루키.
읽을수록 새롭게 느껴지는 소설을 썼다고 하니,
아직은.
 

"아주아주 바싹 구워줘요"
"검게 타기 직전 상태로"

정말로 그렇다거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그저, 그렇게 믿게 된다는 것이 중하지.


"혹시 이런 얘기 시시하고 흥미  없는 거 아냐?"

내가 누군가와 길게 얘기하면 늘 갖게 되는 두려움.

역시 예리하긴 하지만, 조금은 무뎌진 것 같다.

그냥,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양을 좇는 모험,을 여러번 읽으면 위로가 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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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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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이라는 별명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를 꼽으라면,
우리 나라에서는 성석제, 그리고 외국작가 중에는 로알드 달.
물론, 내가 읽어본 작가의 범위 내에서 말하는 것이므로,
아주 주관적인 관점에서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로알드 달의 '맛' 표지에는,
성석제가 자기의 훼이보릿 다섯손가락 안에
이 로알드 달의 소설을 꼽겠다는 서평이 쓰여 있다는 것.

로알드 달은 영국 출신의 작가이다.
소설가이면서 동화작가이기도 한데,
그 유명한 <찰리와 초콜렛 공장>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로알드 달의 동화는 아름답거나 아기자기하지 않다.
늘 로알드 달의 동화에 그림을 그려주고 있는
쿠엔틴 블레이크의 그림도 애들 책 그림같지는 않다.
슈렉이 기존의 만화영화의 틀을 깼다면,
동화의 틀을 깬 작가가 바로 로알드 달이다.

대머리, 괴짜 영국 작가 로알드 달의 소설은 그야말로 재미있다.
무엇보다 잘 읽힌다.
그리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교훈도 간단하다.

우리가 로알드 달의 소설에서 얻어야 할 것은,
그저 읽는 기쁨이다.
이번 단편집 <맛>에 실린 열편의 단편은 모두
공통적인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마지막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은 조금 성격이 다르지만)
지나치게 욕심부리다가는 큰일 난다.
뭐 그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목사의 기쁨 Parson's Pleasure>은 가구사기꾼이 당하는 얘기이고,
<손님 The Visitor>은 천하의 바람둥이가 당하는 얘기,
<맛 Taste>은 포두주 사기꾼이 당하는 얘기,
<항해 거리 Dip in the Pool>에서는 포상금을 노리는 얍삽한 남자가 당하고,
<빅스비 부인과 대령의 외투 Mrs Bixby and the Colonel's Coat>에서는
빅스비 부인이 대령과 신랑 모두에게 당하며,
<남쪽 남자 Man from the South>는 내기에 미친 남쪽 남자가,
<정복왕 에드워드 Edward the Conqueror>는 예술가의 환생이라 믿는 고양이를
오로지 돈과 명예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시골여자가,
<하늘로 가는 길 The Way Up to Heaven>은 마누라 애닳게 하던 남편이,
<피부 Skin>에서는 추억을 팔아먹으려는 남자,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 Lamb to the Slaughter>에서는
마누라에 대한 사랑이 식은 남자와, 경찰들이 마누라에게 당하는 얘기다.

로알드 달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치밀한 반전에 있는데,
대놓고 복선을 깔아놔도 독자는 결론을 전혀 예상할 수 없다.
똑같이 지나친 욕심을 주제로 반전을 만드는데도,
이야기가 뒤집어지는 방향은 모두 개성있고, 독특하다.
아주 거만한 복선과 허를 찌르는 반전.
이야기하는 방법은 로알드 달에게서 배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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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3권 세트 - 신탁의 밤, 나는 아버지가 하느님인 줄 알았다, 타자기를 치켜세움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외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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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청취자 여러분의 도움으로 우리가 많은 사실을 한데 묶어 이른바 미국 현실의 박물관을 세우기를 희망한다고.

그런 날 저녁이면 나는 약 두세 시간 정도 온 미국인들이 다 우리 집으로 걸어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미국 전체가 나를 향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결코 완벽하지 못하지만 실제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닌가.

-들어가는 말 중에서

1975년, 유타

내 친구인 D는 나에게 자기의 어린 아들이 마침내 베트남 전쟁이 끝나던 날, 그날을 경축하고 싶어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떻게?” D가 묻자 그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빠 차의 경적을 울리고 싶어요.”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인들은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퍼레이드도 고적대의 연주도 없었고, 흥분된 기색을 드러내 보이지도 않았다. 솔트레이크 시티 교외에서 아홉 살 난 사내아이가 아버지이 허락을 얻어 배터리가 다될 때까지 차의 경적을 울린 것만 빼놓고는.

스티브 헤일_유타 주 솔트레이크 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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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의 밤, 타자기를 치켜세움, 나는 아버지가 하나님인 줄 알았다,
그리고 폴 오스터를 위한 음악모음 CD.

이벤트 도서로 함께 산 이 책 세 권 중에서 마지막으로 읽은
‘나는 아버지가 하나님인 줄 알았다’는
폴 오스터가 라디오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면서
받았던 사연들을 모아 엮은 거다.
평범한 사람들이 쓴 평범하거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이 책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역시 폴 오스터가 이 이야기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마음에 남는다.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짧으면서, 가장 인상에 남는 글 한 편과 함께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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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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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가 저런 얼굴이었을 때가 있었을까.

어느 구석에서 욕망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그럴 때는 내버려두면 제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가 저절로 돌아오는 일이 많다.
하지만 한번 짓눌린 욕망은 짧은 시간에 끊임없이 증식하고 증폭된다.
서서히 부풀어오른 것은 빵하고 터져 버리든지, 절로 김이 새어버리든지 하지만,
한번 눌러놓은 것은 좀 더 멀리 튕겨 나간다.
누르면 누를수록 탄성이 좋아져서
그 추락의 파괴력은 감히 짐작할 수도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한두번 더 튕겨 오를 수 있었던
우리의 마담 보바리는 마음의 파산으로 인하여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버리고 만다.
마담 보바리가 어떻게든 파산을 막아보려고 분주히 움직인 시간은
도리어 시간으로 인해 훼손된 기억, 포장된 추억의 본모습을 보는 것으로 가득 찬다.
이것을 견뎌내는 것은 너무도 비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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