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 노재희 소설집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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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라는 소설집의 제목을 보고, 너무 좀 대놓고 말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건 사실입니다. 다른 데도 아니고 고독 속으로, 다른 이도 아닌 너의 고독 속으로, 그것도 '달아나라'고 명령을 하는 책 제목이라니요. 심지어 책의 표지는 빡빡 민 머리의 뒤통수입니다. 마치 머리를 밀고 산 속으로, 절로 들어가는 스님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감옥으로 들어가는 죄수 같기도 하고요. 절이든, 감옥이든, 아마 고독하기는 할 겁니다. 


그런데 그 고독은 나의 고독만은 아닐 겁니다. 산 속은 온통 고요하니, 나의 고독이, 도인의 경지에 오른 다른 스님의 고독이나, 물의 고독, 산 속 공기의 고독, 새들의 고독에 묻힐 지도 모릅니다. 감옥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수 그 자신도 고독하기는 참 고독하겠지만, 더 오래 형을 산 다른 죄수나, 그들과 씨름해야 하는 교도관이나, 열악한 화장실이나, 좁은 방에 놓인 침대의 고독을 이기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얼핏 보면 머리를 빡빡 민 이 뒤통수는 참으로 고독 속으로 처연히 걸어들어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속은 오히려 자신의 고독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군요, 저로 하여금.


이런 제목과 표지를 가진 노재희 작가의 첫 소설집이라는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에는, 모두 8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첫 번째 단편은 이러한 제목을 가진 소설집의 첫 작품에 걸맞게 <고독의 발명>이라는 작품입니다. 남부럽지 않은 번듯한 직장에 다니며 처자가 있는 엄복태는 마음 속에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있습니다. 시인이 되려면 고독이, 마음껏 고독할 수 있는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지만 알다시피 평범한 직장인, 가장, 생활인에게는 사실 그 필요한 것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습니다.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까요? 어쨌든 엄복태는 그 주어지지 않은 환경 속에서 스스로 고독을 '발명'해냅니다. 가정이 있고, 아이가 있고, 아내가 있는 남자가 고독 속에 잠기자니, 당연히 아내는 그것이 달갑지 않습니다. 그래도 엄복태는 굉장한 용기와 강단으로 그것을 꿋꿋이 견뎌내고 시를 씁니다. 비록 여전히 누군가의 영향을 지워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시를 쓰니 썩은 동아줄인지는 모르나 기회도 찾아옵니다. 엄복태는 과연 꿈에 그리던 등단을 해서, 시인의 아내가 되게 해주겠다고 했던 프로포즈를 현실로 만들 수 있을까요. 아마 그랬다면 이 소설은 현대소설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저는 어쨌든 그 와중에도 스스로 고독을 발명해내고, 적극적인 시도를 한 엄복태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또 모르죠, 소설 밖에서는 결국 엄복태가, 황지우도, 이성복도 벗어내고, 엄복태 자신의 시를 쓰는 시인이 될 지도.


   "행복하지?"
   이제 혀가 꼬부라진 김형철의 말은 거의 '항복하지?'로 들렸다.
   "이 새끼, 넌 좆나게 행복한 거야."
   있지도 않은 자신의 행복을 발명해준 친구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김형철은 테이블 위에 두 팔    
   을 포개더니 그 위에 이마를 살포시 얹고 엎어져버렸다.
P.19


두 번째 단편은 <누구 무릎에 꽃이 피나>입니다. 참으로 따뜻한 상상력과 또 작가 특유의 현실 인식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그 정도면 참으로 뻔뻔하다고 해도 무방한 아들 부부의 아이, 그러니까 큰 손자에 작은 손자까지 돌보느라 잠시도 허리 펼 틈 없는 춘복 씨는 무릎이 늘 아픕니다. 소설 속 춘복 씨까지 무릎이 아파 잠을 잘 못 주무신다하니,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왜 우리네 엄마들은 세월의 무게를 온통 무릎으로 받아내는 걸까요. 나이가 들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되는 거라면 왜 우리는 그토록 무릎이 아파 잠도 못 이룰 지경이 되기 전에 그만 애 쓰거나 그만 살거나 할 수 없는 걸까요. 어쨌든 그런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춘복 씨의 이야기를 읽는데, 어라! 어느 날 춘복 씨 무릎에 꽃이 핍니다. 이건 조금도 비유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무릎에 꽃이 핀 겁니다. 거짓말 같이 통증은 사라졌지만 무릎에 꽃이 폈으니 무릎을 접을 수 없고 무릎을 접을 수 없으니 걸을 수 없습니다. 다들 이게 무슨 일이냐며 깜짝 놀라지만 춘복 씨는 내심 기쁩니다. 끔찍하던 고통이 사라졌으니 좋고, 두 손자를 돌보는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어 좋습니다. 춘복 씨는 무릎에 핀 꽃 때문에 움직일 수 없고 그로 인해 찾아온 평화와 고독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 내외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꽃을 꺾어버리면, 무릎에서 뽑아버리면, 비록 고통은 다시 돌아오지만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과연 우리의 춘복 씨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번 뽑고 나면 다시는 무릎에 꽃이 피지 않는다면 춘복 씨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만약 우리 엄마 무릎에 꽃이 핀다면 나는 엄마한테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다음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샘소나이트 가방을 차곡차곡 모으더니 어느 날 떠나버린, 아니 그것까진 좋은데,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를 읽으면서 작가에 대한 감탄이 탄성이 되어 터져나왔습니다. 시인이 되고자 하는 생활인 엄복태의 이야기에서 엄복태가 고독을 발명해내는 방식에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고목에 꽃이 핀다'는 비유적 구절이나 노름판에서 오래 노름을 한 사람 무릎에는 꽃이 핀다는 낭설 혹은 근거 없는 비유적 소문에서 실제로 무릎에 꽃이 피는 상상을 해냈을 작가에게 또 한 번 감탄했지요. 그리고 이번에는 절대 고독할 수도 없고 고독해서도 안 되는 한 집안의 가장이 어떻게 그 비고독의 상황에서 탈출해 자신만의 고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지를 샘소나이트 가방으로 이야기하는 작가에게 경탄했습니다. 단순히 기술적으로 글을 잘 쓴다는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작가 자신이, 아마 역시도 고독할 수 없었거나 그래선 안 됐을 상황에 놓여있었을 작가가, 얼마나 작가가 되기 위해, 혹은 작가로 남기 위해, 고독을 찾을 방법을 모색하고 또 결국은 그것을 해냈는지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느끼는 배신감, 그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보다는 가방을 들고 달아난 아버지에게 느끼는 공감이 더 크도록 이 소설이 설계되어있다는(저만의 느낌일까요) 점 자체가 작가의 명백한 의도라고 믿고 있거든요. 아마 그것도 내 아버지가 아니라 남의 아버지니까 가능한 공감이겠지만요.


"이런 얘기 아니? 이 우주의 대부분의 에너지는 자기를 막아서는 어떤 것을 만났을 때 그 속으로 흡수되거나 혹은 그대로 소멸되는 대신 방향을 바꾼다는 거야. 그럼 어느 쪽으로 방향을 바꾸느냐, 자신의 안쪽으로 바꾸는 거지. 나선형을 그리면서 자신의 안쪽으로 점점 말고 들어가는 거야. 그렇게 하다 보면 나선의 중심이 탄생하는 거다. 그렇게 생긴 나선의 중심이 어떤지 아니?"
"......."
아버지가 목소리를 낮췄다.
"아주 고요하단다, 아주."
"......."
"태풍의 눈을 생각해봐라. 같은 이치지, 그래서 그 중심을 고요한 눈이라고 한대."
"고요한 눈이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요한 눈. 나는 그 고요한 눈이 자기 안에 똬리를 튼 우주라고 생각한다. 멋지지 않니?"
"......."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되게 커지는 것 같잖니."
"안 그래도 크세요."
P.135


네 번째 단편은 <시간의 속>입니다. 이 작품 역시 작가 특유의 센스가 돋보입니다. '시간 더 드립니다'라는 노래방에 갔다가 바깥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 속에 잠시 살게 된 젊은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노래방에서 똑같은 돈을 내고 우리는 서비스로 시간을 더 받습니다. 그 서비스 시간을 주지 않는 노래방은 인정머리 없다고 흉을 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노래방 주인이 우리에게 준 서비스 시간만큼 우리는 노래는 더 부르지만 다른 것을 할 시간은 빼앗기는 셈입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흐르니까요. 노래방에서 쓰는 이 '시간 더 드립니다'를 갖고 이런 작품을 쓰는 노재희 작가님의 상상력과 통찰력과 감각은 이야기를 이렇게 바꿔 놨습니다. 시간을 선물할 수는 없으니 시계를 선물하고 떠난 애인, 그리고 병이 걸렸다는 걸 알고 순식간에 돌아가신 아버지, 그들에게서 어쩔 수 없이 떠나 그가 들어간 세계에서는 시간을 거꾸로 살고 있는 노망난 해맑은 노인과 그를 계략 속으로 끌어들인 노인이 삽니다. 노래방에서 노래 부를 시간을 좀 더 얻은 대가로, 노인이 해맑은 노인에게 투자해야 할 시간을, 내가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닫죠.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회의를 품습니다. 그 시간 속에 있으면 그 시간의 질서를 거스를 수 없지만 그 밖으로 나와버리면 얼마든지 거스를 수 있는 것이 그 이상한 공간 속 시간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 두 노인의 시간이 아닌, 과거 시계를 선물한 애인 해진의 시간도 아닌, 자신의 시간을 살아야하는데 말입니다.


다섯 번째는 <그날 저녁, 그는 어디로 갔을까>입니다. 누구 무릎에 꽃이 피나,나 시간의 속,처럼 이 단편에도 기이한 경험을 하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는 역시 버스기사로 월급을 받으며 가족을 보살피는 생활인입니다. 운전 중 배가 너무 아픈 영환은, 동료가 알려준 화장실에서 급한 일을 해결하고 시원하게 물을 내립니다. 물을 내린 후에야 물을 내리면 모든 걸 다 쓸어가버릴 거라는 경고 글을 보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누구나 그럴 겁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 보면 우선 버스가 없습니다. 도저히 스스로 없어질 수가 없는 버스가, 마치 물에라도 휩쓸려간 것처럼 흔적을 감춥니다. 버스를 찾기 위해 회사를 찾아가지만 당연히 회사도 없습니다. 이리저리 헤매던 사내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똑같이 걱에 버스를 대고 화장실로 가는 동료기사를 발견합니다. 그는 그에게 경고하려하지만 실패하고, 그는 그래서 이미 물을 내려버린 그 동료기사의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 봤어야하지만 역시 실패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고를 무시하고, 얼마나 많은 신호를 놓치고, 또 얼마나 많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걸까요. 그날 저녁, 그는 어디로 갔을까요.


여섯 번째는 <성가족>입니다. 독실한, 하지만 서로 다른 종교에 대해 독실한 두 사람이 가족으로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쪽에서 보면, 저 사람만 빼면 완벽하고, 저쪽에서 보면, 이 사람만 없으면 완벽합니다. 자신이 꿈꾸는 그 성스러운 가족을 이루는데 말이죠. 한 쪽은 그래도 내가 관용을 베풀었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 쪽은 역시 내가 많이 참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빼면 완벽할 그 한 사람이 삶에서 빼기로 사라졌을 때, 남은 한 쪽은 내심 기뻐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 성스러운 가족에 대한 성스러운 꿈은 무사히 이뤄질 수 있는 걸까요.


이제 일곱 번째 작품입니다. <생활의 기술>은 철학에 뜻이 있는, 그래서 생활에는 별로 보탬이 되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아내 대신 장을 보다가 환영을 봅니다. 물건을 하나 고르는 데도 너무 많은 정보가 필요하고 철학적 고민이 뒤따르는 남자입니다. 도저히 그렇게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다못해 그 흔한 장도 제대로 볼 수가 없죠. 그래서 생활의 달인인 학원 동료 여선생에게 노하우를 배웁니다. 단순히 감자를 어떻게 고르느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쓸 데 없는 걱정들을 어떻게 날려버리느냐 하는 굉장히 중요한 기술을 전수받게 되죠. 그 때부터 남자는 마치 마트에서 장을 보듯이, 자신의 걱정에도 '그래봤자 얼마' 하는 식으로 값을 매겨 어디론가 팔아넘기는 방법을 익히게 됩니다. 하지만 이 방법도 언젠가는 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세상에는 도저히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가 있으니까요. 이렇게 풀어서 쓰고 보니 굉장히 뻔한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만, 노재희 작가는 대체로 뻔한 이야기들을 뻔하지 않은 이야기 방식으로 보여주는 재주가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입니다. 책 뒤표지에 적혀 있던 구절에 마음을 빼앗겼는데, 그 구절이 어느 작품에 나오나 했었는데, 바로 이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였습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 빛나는 것을 보게 되면 나머지 인생 동안엔 그 그림자에 붙들려 살아야 하는 것 같아. 일단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우리는 평생 그 아름다운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진소영은 자석을 갖고 영혼을 이야기하는 엄마를 가진 딸입니다. 그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그걸 미안해하면서도, 계속해서 책을 읽은 사람입니다. 소영은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의 엄마로서, 이혼녀로서, 아이를 부양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부자들을 위해 그럴싸한 서재를 꾸며주는 희한한 인테리어로 돈을 법니다. 책이 엄마의 삶을, 엄마의 손목을 끊임없이 붙든 것처럼, 그런 엄마의 영향력이 소영의 손목을 계속 붙들고 있습니다. 놓아주질 않고 계속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억지로 붙잡혀 있다기보다는, 그렇게 잡아주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그 무언가에 손목이 붙들린 채 그 힘으로, 그 기억으로 인생을 살아냅니다. 그림자가 만드는 그늘은 어둡지만, 그 어두움이 반드시 나쁘거나 불안한 것만은 아닌 거죠.


마찬가지로, 인간이 뭔가에 마음을 뺏기면, 자기의 부속품 하나하나가, 이를테면 그것을 바라보는 눈도 그것을 말하는 입술도 그리고 그것을 향해 내미는 손도, 모두 그것으로 빨려 들어가서 결국엔 끔찍한 몰골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아. 무서운 일이지. 자석산 근처엔 가지 않는 게 상책이란 말이야. 자력이 미치는 범위에 들어서면 일단 얘기는 끝난 거라고 봐.
P.336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에 실린 8편의 단편들이 모두 참 좋았지만, 저는 왠지 마지막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가 가장 마음에 남습니다. 마치 이 소설 속에 자석산이 들어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달까요. 우리 엄마는, 진소영의 엄마처럼, 그렇게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고, 그래서 이렇게 문학적인 표현으로 나를 꼼짝 못하게 하고 스스로 잘못을 말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표현이 다를 뿐 같은 이야기를 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의 영혼과 나의 영혼, 그리고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 나 사이의 어떤 자력, 그 자력이 영향을 미치는 자장 같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석처럼 제 마음을 붙듭니다. 


노재희 작가는 진소영의 엄마의 입을 빌려, 친절하게도 '자석산 근처엔 가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알려주지만 그것은 마치 버스운전기사인 영환이 동료 기사에게 했던 경고처럼, 이미 소용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책을 읽기 전에 벌써, 훨씬 전에, 그 자석산을 만났고, 빛나는 것을 봤고, 자력이 미치는 범위 속에 들어 있으니까요. 참으로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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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코스투라 1 - 그림자 여인 시라 샘터 외국소설선 9
마리아 두에냐스 지음, 엄지영 옮김 / 샘터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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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코스투라 1>의 부제는 '그림자 여인 시라'입니다. 온라인 상의 책 소개글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파이'라는 문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1권에는 재단사인 그림자 여인 시라가 스파이 활동을 하는 내용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중간에 시라가 의상실을 차리기 위해 위험한 일을 한 번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그런 본격 스파이 활동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라 코스투라는 2권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1권에서는 그저 이 여인이 스파이로 활동하기 전까지의 살아온 이력, 그리고 인물의 변화를 다룹니다.


솜씨 좋은 재단사의 딸로, 어머니가 다니던 의상실에서 바느질을 하며 연인과 소박한 행복을 계획했던 시라는 뜻하지 않게 한 남자를 만납니다. 결혼을 앞두고 타자기를 사러 갔다가 만난 이 남자는 쉬이 짐작하다시피 위험하고 나쁜 남자입니다. 위험하고 나쁜 남자의 매혹은 강렬합니다. 시라 역시 라미로 아리바스에게 빠져버리고 맙니다.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엄마도 버리고 결혼하려던 정인도 버리고 시라는 라미로와 모로코로 떠납니다. 화려하고 행복한 생활은 잠시. 두둥. 라미로는 그녀를 배신하고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 그녀를 떠나버리고 맙니다.

여기까지가 라 코스투라의 서막입니다. 그 이후는 시라가 어떻게 상처를 극복하고 시련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애쓰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기까지 시라 주변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습니다. 그 와중에 스페인 내전의 상황은 더욱 나빠집니다. 전쟁 때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위험한 스페인에 혼자 남겨진 엄마도 데려오지 못하는 가운데 시라의 죄책감과 마음의 짐은 깊어져만 가죠.

그러다 우연히 시라는 잊고 있었던 바느질을 다시 시작합니다. 시라를 거두고 있던 칸델라리아가 시라의 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한 눈에 알아봅니다. 시라의 의상실을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모로코에 파견와있던 군부 유력인사들과 남편을 따라 남의 나라로 와서 할 일이라고는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고 각종 파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는 없는 그들의 아내들을 고객으로 하는 고급 의상실이 칸델라리아의 장사꾼다운 기질과 시라의 타고난 재능으로 인해 모로코 테투안에 들어서는 거죠.

1권에서는 거의 이런 이야기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아마 2권에 이르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유력인사들과 그들의 아내 혹은 정부가 시라와 어떻게 해서 인연을 맺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확실한 재능은 신뢰를 부르는 걸까요, 철 없이 예쁜 소녀에서 그림자 여인으로 거듭난 시라가 과연 2권에서는 또 어떠한 변화와 활약을 보여줄지를 기대하게 하는 것이 1권의 역할인 듯 합니다. 아직 2권을 읽어보지 못한 저로서는 그래서 1권에 대한 어떠한 평가를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 상황 당시의 스페인의 모습, 그리고 그보다 더 자세하게 다뤄진 모로코 탕헤르와 테투안의 분위기는 상당히 잘 그려져 있습니다. 이야기의 빠른 전개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각 캐릭터의 뚜렷한 개성 또한 <라 코스투라 1>이 술술 읽히게 하는 가장 큰 매력 포인트입니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을 제쳤다는 자극적인 홍보문구가 이런 연유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듯 합니다. 

시라의 시각에서 1인칭으로 쓰였다는 점도 다소 독특한 인상을 줍니다. 그 당시에 이런 여인이 있었다더라, 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을 직접 겪은 주인공이 회고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주워들은 영웅담이 아니라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피부에 와닿는다고 해야할까요.

암튼 이제 2권을 읽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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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개정판이 나온다면 교정교열을 좀 더 세심하게 보셔야 할 듯 합니다. 제가 적어놓은 오타만 10개가 됩니다 

   55쪽 마지막줄 오타 '놓치'
-created on 2013-06-01 17:27:53 +0000

84쪽 2문단 마지막줄 '활력을'->'활력이'
-created on 2013-06-02 03:18:03 +0000

131쪽 8번째 줄 '라프전쟁' -> '리프전쟁'
-created on 2013-06-02 05:13:06 +0000

134쪽 마지막줄 '점식' -> '점심'
-created on 2013-06-02 05:42:43 +0000

189쪽 4줄 '얼마큼'
-created on 2013-06-02 06:32:32 +0000

263. 3문단. 5-6째줄 '스페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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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각주 "다 (됐)습니다."
-created on 2013-06-02 08:11:32 +0000

391쪽 5문단 마지막줄 '해안지방으로(의) 대피시킬 계획인데요'
-created on 2013-06-11 13:52:47 +0000

405쪽 각주. 모로코의 전통요. 전통요리 아닐까
-created on 2013-06-11 14:04:02 +0000


419쪽 8줄 끝 '정치의 정자로' '정자도'
-created on 2013-06-11 14:1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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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인 서울
방현희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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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인 서울은 방현희 작가의 단편 일곱 편을 엮은 단편집입니다. 제목과는 달리 모든 소설의 배경이 서울은 아닙니다. 중국, 영국, 일본을 배경으로 하거나, 서울 혹은 대한민국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지만 우즈베키스탄과 같은 타국에서 온 주인공의 이야기를 하거나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집의 제목이 '로스트 인 서울'인 것에 대해 곰곰 생각해봅니다. 서울에 와서 길을 잃고, 또 서울에서 길을 잃어 다른 곳으로 떠나지만 대부분의 주인공은 그 곳에서도 길을 잃습니다. 서울과 상관 없는 사람들은 또 그 사람들대로 그들이 살고 있는 '그들의 서울'에서 또 길을 잃고 맙니다.

 

첫번째 단편은 표제작인 '로스트 인 서울'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그렉안나와 그렉안나의 무력한 애인은 이 소설집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에 굉장히 부합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렉안나는 먼 우즈베키스탄에서 서울까지 왔지만 결국은 길을 잃고 말고, 그녀가 길을 잃으니 그녀를 통해 길을 찾은 듯했던 무력한 애인 역시 그녀도 잃고 또 길도 잃습니다. 먼 타국이든,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든, '서울'이라는 공간은 그렇게 사람들이 쉽게 조난 당하고 그렇지만 쉽게 구조받지 못하고 적지 않게 사라지는 그런 도시입니다. 이 작품 안에서는 그렉안나나 그 애인과 대척점에 있는 가해자처럼 보이는 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방식이나 다른 원인이나 다른 경로일 수는 있겠으나 그 역시 그 곳에서 아직 구조되지 못한 조난자이기 때문에 그렉안나를 그런 방식으로밖에는 곁에 두지 못했던 겁니다.

 

두번째 단편은 '세컨드 라이프'입니다. 아내와 중국으로 여행간 남편이 그곳에서 자신의 또 다른 인생을 보는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인생을 보지 못하는 아내가 아무리 증언해도, 남편은 아내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내의 말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형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사랑에 대한 아련한 감정이, 낯선 땅에서 또 다른 인생을 보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북경에서의 삶이 그의 두번째 삶인 걸까요, 아내가 증언하는 아내와의 시간이 두번째 삶인 걸까요.

 

세번째 단편은 '탈옥'입니다. 주가조작으로 감옥 신세를 지게 된 주인공이 또 다른 작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탈옥을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실패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왠지 스포일러 같지만, 주인공이 탈옥에 성공한다면 아마 이 작품은 현대소설의 범주에 쉽게 들지 못하겠죠. 현대의 소설들은 대부분, 성공담이기보다는 실패담이고, 설사 그것이 성공담이라 해도 '그리하여 그들은 결혼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라든지, '그리하여 결국 그는 탈옥에 성공하여 자유를 되찾았습니다'와 같은 방식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은 탈옥을 위해 떼어내도 상관 없는 장기를 하나하나 떼어낸다는 나름대로는 완벽한 계획을 세웁니다. 수술할 때 빠져나가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완벽한 계획을 꿰뚫어보는 인물이 존재합니다. 빅브라더인 셈이죠. 근대 이후의 인간들은 언제나 탈출에 필패하고 만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하는 것 같아 서글픕니다.

 

네번째 단편은 '그 남자의 손목시계'입니다. 나의 엄마를 늘 때리는 남자, 그걸 보고도 그저 그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는 자신의 비겁함을 자꾸만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거북한 남자, 그 남자가 애지중지 모으는 손목시계와, 그 손목시계의 출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남자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몰래 뒤를 밟는 나는, 엄마가 맞는 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 피해있는 나에서 결국 한치도 나가지 못합니다. 이 남자는 왠지 그렉안나와 강의 폭력적인 정사를 비밀 공간에 숨어 훔쳐보고 듣던 그 남자와 같은 인물로 읽힙니다.

 

다섯번째 단편은 '후쿠오카 스토리-위급 상황에서의 이별에 관한 섬세한 보고서'입니다. 후쿠오카에서 외롭게 공부하던 시절 만났던 네 명의 연인들은 이제 서울에 삽니다. 그러다 작은 보트를 타고 다시 그들의 기원으로 들어가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선장은 무슨 일인지 기절해 쓰러져버리고 설상가상으로 바닥에는 구멍까지 납니다. 그 위기의 순간 동안 그들은 서로에게 쌓여있었던 불만을 쏟아냅니다. 결국 그들은 죽지 않고 목숨을 구하지만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리적인 목숨은 붙어있지만, 그들의 관계, 그 관계 속의 한 명 한 명, 그리고 후쿠오카 시절에서 시작해 다시 후쿠오카로 가서 끝나는 그 8년이라는 시간은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습니다.

 

여섯번째 단편은 '로라, 네 이름은 미조'입니다. 서울이 싫어 머나먼 영국으로 시집갔지만, 그 곳은 또다른 서울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랜 해외생활 후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은 아직도 그러네 어쩌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보면 그 곳 역시 같습니다. 한국에 사는 미조와 영국에 사는 로라는 그저 사는 곳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만 옮겼을 뿐입니다. 엄격한 남편에게 '그곳의 룰'을 따를 것을 끊임없이 종용받던 로라는, 언젠가부터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기 시작합니다. 소화해낼 수 없는 문화를 소화하는 것보다 먹어서는 안 될 것들을 소화하는 것이 더 쉽게 느껴졌을까요. 그렇게라도 다 소화해내고 싶었던 걸까요.

 

일곱번째 단편은 '퍼펙트 블루-기이한 죽음에 관한 세 가지, 혹은 한 가지 사례'입니다. 원래의 피부색에서 흰색으로, 그리고 다시 파란색으로 바뀐 후 결국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한 번도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마이클 잭슨이 분명한 인물이 등장하고, 연예인이 된 후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게 된 M이 등장하고, 그 M을 흉내내다 그 M으로 보이게 된 M2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일곱번째 단편에서, 앞 여섯편을 읽으면서 일관적으로 느꼈던 거의 모든 것들을 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헤쳐놓고 보면 방현희 작가의 단편들은 굉장히 모던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단편들 속에서 그것이 자연스럽고 모던하고 치밀하게 잘 드러났느냐 하면, 저는 다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알레고리들이 너무나 직접적이고 일차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렉안나와 강의 이야기도 너무 상투적입니다. 물론, 인테리어 일을 하는 주인공과의 만남이나 그를 통해 마련된 벽과 벽 사이의 비밀공간의 설정이 이 상투성을 조금이나 희석시켜주긴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등장인물을 보여주는 방식 때문인지 '사랑과 전쟁'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퍼펙트 블루도 그렇습니다. 직접적으로 전 세계인이 다 아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또 '프로포폴'이니 하는 사실들을 실제로 거론하는 것이 뭐랄까, 아마추어처럼 느껴집니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비슷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설정에 치중한다는 느낌인데, 그 설정마저도 너무 익숙한 모티프여서,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사고는 굉장히 현대적임에도 불구하고 서사나 플롯은 전근대적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런 점들이 개인적으로는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요즘 서평을 쓰면서, 또 소설을 공부하면서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좋은 소설은 누가 봐도 좋은 소설이고, 또 누가 봐도 좋아하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겠지만, 몇몇 손꼽는 작품들을 제외하면 모든 것은 다 취향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내가 읽어내지 못한 것을 다른 독자는 읽어낼 수 있고, 나는 좋지 못하다고 느끼는 방식을 다른 사람은 좋다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제가 쓰고 있는 이 서평들이 이 소설집이 좋은 소설집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기준은 전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저와 비슷한 취향이나 관점을 가진 독자들은 저와 비슷한 감상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정도의 기준만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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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제너레이션 - 좀비로부터 당신이 살아남는 법
정명섭 지음 / 네오픽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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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책의 등장인물입니다. 좀비 불신론자죠. 산통 깨졌나요? 죄송합니다. 낚이셨나요? 그것도 죄송합니다. 

어쨌든 저는 좀비 불신론자입니다. 놀래키는 영화를 싫어해서, 시체인 줄 알았던 좀비가 벌떡벌떡 일어나고 안 보이는 데서 좀비가 갑자기 나타나는 좀비 영화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괜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처럼 계속 "에이, 좀비가 어딨어?! 그거 다 상상의 산물이지!"하고 좀비 존재를 불신하고 있다가, 언젠가 정말 좀비가 나타나면 속수무책으로 꼼짝없이 당하고 나도 좀비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래서 안 믿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나름대로 몇 가지는 기억하려고 애 쓰며 읽게 되더군요. 안 믿긴 안 믿는데, 혹시 모르니까요. 그리고 대부분의 비극은 사실 어느 정도 예고되는 경향이 있어서 '미리 준비하고 대비했다면 막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후회를 남기니까요.

좀비 제너레이션은 그런 책입니다. 그러니까, 좀비 불신론자이던 한 카페의 사장인 주인공이 어떻게 좀비 제너레이션으로 편입돼 좀비들에게 감염되지 않고 살아남아 이 이야기를 전하고 매뉴얼까지 쓰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책이죠. 좀비가 나타났을 때의 징후나 대피장소, 이동수단, 무기 등에 대한 매뉴얼이 함께 제시됩니다. 이러한 매뉴얼들은 서사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제시되기 때문에 겹치는 내용들이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실제로 겪은 후에 주인공이 다른 이들을 위해 남기는 매뉴얼인 셈이니까요. 

 

그런 부분들을 제외하면 이 책은 쉽게 읽힙니다. 좀비를 믿지 않던 자가 어떻게 좀비를 만나 그를 물리치고 살아남게 되었는지를 다루는 모티프는 여타 액션영화에서도 흔히 보아온 모티프이기 때문에 친숙합니다. 이러한 친숙함은 독서의 속도를 높이고, 대충 빤한 결말을 예상하는 와중에도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법이니까요. 읽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그러니까 나도 결국은 좀비의 존재를 의심하지 말고 훗날 '나는 다 알고 미리 준비했지'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나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미 좀비의 존재 자체를 좀 더 친숙하게 여기는 서양과는 다른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충분히 반영해서 쓴 소설입니다. 주인공이 좀비를 피해 대피하는 경로는 상수-합정 구간이라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져서 좀 더 실감이 난달까요.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여진 역사 속 좀비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들은 어디까지 믿어야하는지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읽고도 다소 아쉬웠던 점은 오타나 비문이 굉장히 많았다는 점(일일이 다 체크를 해뒀는데 이것도 한 번 정리를 해야겠지요), 그리고 소재 자체는 그렇게 뻔하지 않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은 너무 뻔했다는 점입니다. 재미있는 책을 빨리 내는 것도 좋지만, 좀 더 꼼꼼하게 교정과 교열이 이뤄졌으면 좋겠고요, 좀비 소재가 이미 현대인들에게는 충분히 익숙한 만큼 좀 더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고 싶습니다. 다음 번에는 말이죠. (아직 좀비 서비이벌 가이드를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 책과는 또 어떻게 다를까도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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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의 [마법의 순간]과 원빈 스님의 [같은 하루 다른 행복]을 비슷한 시기에 읽었습니다.

 

코엘료의 [마법의 순간]은 작가가 트위터에 올린 글들을 추려서 묶은 책이고 원빈 스님의 [같은 하루 다른 행복]은 스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들을 추려서 묶은 책입니다.

 

우선 원래 처세술이나 잠언집 같은 종류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 저의 취향을 밝혀야겠습니다. 두 책 다 대단한 감흥은 없었습니다.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어서 큰 실망은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불호' 취향을 뒤엎을 만한 놀라운 감동이나 반전도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코엘료는 지금까지 펴내온 책들의 면면을 볼 때 오히려 트위터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고하는 글들이 평범하게 느껴졌습니다. 똑같은 삶의 지혜라도 유명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있는 사람이 전하면 감동이 더 큰 법입니다. 게다가 코엘료는 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이다보니 뭔가 그런 삶의 지혜가 빛나는 문장 속에 들어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140자라는 트위터의 글자수 제한 때문이었을까요. 다 맞는 말이긴 한데 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들이기도 했습니다. 아- 작가는 이런 것들을 이렇게 표현하는구나! 하고 감탄할 만한 부분이 없어서 아쉬웠달까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원빈 스님의 책은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역시 하시는 말씀이 다 옳은 말씀이기는 한데 너무 구구절절 옳은 말씀을, 너무나 평범한 문장으로 써놓으셔서 페이스북이 아닌 '책'을 읽는 독자로서의 기대는 전혀 충족되지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는 살지 마라 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고 그 말씀들 모두 옳은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지 그걸 몰라서 답답한 사람들이 이 책을 주로 읽을텐데 그러한 답답한 마음이나 고민에 대해서 구체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경험을 곁들여서 쉽게 썼다는 것은 이 책의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작은 행복이 소중하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하고 욕심부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뭔가 그 이상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보는 독자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책을 굳이 비교하자면, 그래도 트위터는 140자라는 제한된 글자수 내에 하나의 생각을 정리해서 담다야하기 때문에, 그리고 파울로 코엘료가 문학작가이기 때문에, 그래도 좀 더 문학적인 향취가 느껴지는 책이었습니다.

 

아, 그런데 여기까지 쓰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만 종교에세이에서 문학적 향취를 기대하는 걸까요? 종교에세이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자명한 진리를 쉬운 말로 해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할 뿐인 걸까요? 서로 기준이 다를 뿐이라면, 신뢰할 만한 누군가의 명쾌하고 단순한 조언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이 책들은 그들에게 좋은 책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좀 더 경험에 근거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듣는 대신 그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 느끼고 싶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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