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인 서울
방현희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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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인 서울은 방현희 작가의 단편 일곱 편을 엮은 단편집입니다. 제목과는 달리 모든 소설의 배경이 서울은 아닙니다. 중국, 영국, 일본을 배경으로 하거나, 서울 혹은 대한민국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지만 우즈베키스탄과 같은 타국에서 온 주인공의 이야기를 하거나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집의 제목이 '로스트 인 서울'인 것에 대해 곰곰 생각해봅니다. 서울에 와서 길을 잃고, 또 서울에서 길을 잃어 다른 곳으로 떠나지만 대부분의 주인공은 그 곳에서도 길을 잃습니다. 서울과 상관 없는 사람들은 또 그 사람들대로 그들이 살고 있는 '그들의 서울'에서 또 길을 잃고 맙니다.

 

첫번째 단편은 표제작인 '로스트 인 서울'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그렉안나와 그렉안나의 무력한 애인은 이 소설집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에 굉장히 부합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렉안나는 먼 우즈베키스탄에서 서울까지 왔지만 결국은 길을 잃고 말고, 그녀가 길을 잃으니 그녀를 통해 길을 찾은 듯했던 무력한 애인 역시 그녀도 잃고 또 길도 잃습니다. 먼 타국이든,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든, '서울'이라는 공간은 그렇게 사람들이 쉽게 조난 당하고 그렇지만 쉽게 구조받지 못하고 적지 않게 사라지는 그런 도시입니다. 이 작품 안에서는 그렉안나나 그 애인과 대척점에 있는 가해자처럼 보이는 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방식이나 다른 원인이나 다른 경로일 수는 있겠으나 그 역시 그 곳에서 아직 구조되지 못한 조난자이기 때문에 그렉안나를 그런 방식으로밖에는 곁에 두지 못했던 겁니다.

 

두번째 단편은 '세컨드 라이프'입니다. 아내와 중국으로 여행간 남편이 그곳에서 자신의 또 다른 인생을 보는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인생을 보지 못하는 아내가 아무리 증언해도, 남편은 아내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내의 말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형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사랑에 대한 아련한 감정이, 낯선 땅에서 또 다른 인생을 보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북경에서의 삶이 그의 두번째 삶인 걸까요, 아내가 증언하는 아내와의 시간이 두번째 삶인 걸까요.

 

세번째 단편은 '탈옥'입니다. 주가조작으로 감옥 신세를 지게 된 주인공이 또 다른 작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탈옥을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실패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왠지 스포일러 같지만, 주인공이 탈옥에 성공한다면 아마 이 작품은 현대소설의 범주에 쉽게 들지 못하겠죠. 현대의 소설들은 대부분, 성공담이기보다는 실패담이고, 설사 그것이 성공담이라 해도 '그리하여 그들은 결혼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라든지, '그리하여 결국 그는 탈옥에 성공하여 자유를 되찾았습니다'와 같은 방식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은 탈옥을 위해 떼어내도 상관 없는 장기를 하나하나 떼어낸다는 나름대로는 완벽한 계획을 세웁니다. 수술할 때 빠져나가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완벽한 계획을 꿰뚫어보는 인물이 존재합니다. 빅브라더인 셈이죠. 근대 이후의 인간들은 언제나 탈출에 필패하고 만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하는 것 같아 서글픕니다.

 

네번째 단편은 '그 남자의 손목시계'입니다. 나의 엄마를 늘 때리는 남자, 그걸 보고도 그저 그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는 자신의 비겁함을 자꾸만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거북한 남자, 그 남자가 애지중지 모으는 손목시계와, 그 손목시계의 출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남자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몰래 뒤를 밟는 나는, 엄마가 맞는 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 피해있는 나에서 결국 한치도 나가지 못합니다. 이 남자는 왠지 그렉안나와 강의 폭력적인 정사를 비밀 공간에 숨어 훔쳐보고 듣던 그 남자와 같은 인물로 읽힙니다.

 

다섯번째 단편은 '후쿠오카 스토리-위급 상황에서의 이별에 관한 섬세한 보고서'입니다. 후쿠오카에서 외롭게 공부하던 시절 만났던 네 명의 연인들은 이제 서울에 삽니다. 그러다 작은 보트를 타고 다시 그들의 기원으로 들어가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선장은 무슨 일인지 기절해 쓰러져버리고 설상가상으로 바닥에는 구멍까지 납니다. 그 위기의 순간 동안 그들은 서로에게 쌓여있었던 불만을 쏟아냅니다. 결국 그들은 죽지 않고 목숨을 구하지만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리적인 목숨은 붙어있지만, 그들의 관계, 그 관계 속의 한 명 한 명, 그리고 후쿠오카 시절에서 시작해 다시 후쿠오카로 가서 끝나는 그 8년이라는 시간은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습니다.

 

여섯번째 단편은 '로라, 네 이름은 미조'입니다. 서울이 싫어 머나먼 영국으로 시집갔지만, 그 곳은 또다른 서울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랜 해외생활 후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은 아직도 그러네 어쩌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보면 그 곳 역시 같습니다. 한국에 사는 미조와 영국에 사는 로라는 그저 사는 곳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만 옮겼을 뿐입니다. 엄격한 남편에게 '그곳의 룰'을 따를 것을 끊임없이 종용받던 로라는, 언젠가부터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기 시작합니다. 소화해낼 수 없는 문화를 소화하는 것보다 먹어서는 안 될 것들을 소화하는 것이 더 쉽게 느껴졌을까요. 그렇게라도 다 소화해내고 싶었던 걸까요.

 

일곱번째 단편은 '퍼펙트 블루-기이한 죽음에 관한 세 가지, 혹은 한 가지 사례'입니다. 원래의 피부색에서 흰색으로, 그리고 다시 파란색으로 바뀐 후 결국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한 번도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마이클 잭슨이 분명한 인물이 등장하고, 연예인이 된 후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게 된 M이 등장하고, 그 M을 흉내내다 그 M으로 보이게 된 M2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일곱번째 단편에서, 앞 여섯편을 읽으면서 일관적으로 느꼈던 거의 모든 것들을 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헤쳐놓고 보면 방현희 작가의 단편들은 굉장히 모던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단편들 속에서 그것이 자연스럽고 모던하고 치밀하게 잘 드러났느냐 하면, 저는 다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알레고리들이 너무나 직접적이고 일차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렉안나와 강의 이야기도 너무 상투적입니다. 물론, 인테리어 일을 하는 주인공과의 만남이나 그를 통해 마련된 벽과 벽 사이의 비밀공간의 설정이 이 상투성을 조금이나 희석시켜주긴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등장인물을 보여주는 방식 때문인지 '사랑과 전쟁'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퍼펙트 블루도 그렇습니다. 직접적으로 전 세계인이 다 아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또 '프로포폴'이니 하는 사실들을 실제로 거론하는 것이 뭐랄까, 아마추어처럼 느껴집니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비슷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설정에 치중한다는 느낌인데, 그 설정마저도 너무 익숙한 모티프여서,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사고는 굉장히 현대적임에도 불구하고 서사나 플롯은 전근대적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런 점들이 개인적으로는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요즘 서평을 쓰면서, 또 소설을 공부하면서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좋은 소설은 누가 봐도 좋은 소설이고, 또 누가 봐도 좋아하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겠지만, 몇몇 손꼽는 작품들을 제외하면 모든 것은 다 취향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내가 읽어내지 못한 것을 다른 독자는 읽어낼 수 있고, 나는 좋지 못하다고 느끼는 방식을 다른 사람은 좋다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제가 쓰고 있는 이 서평들이 이 소설집이 좋은 소설집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기준은 전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저와 비슷한 취향이나 관점을 가진 독자들은 저와 비슷한 감상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정도의 기준만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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