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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 노재희 소설집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3년 5월
평점 :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라는 소설집의 제목을 보고, 너무 좀 대놓고 말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건 사실입니다. 다른 데도 아니고 고독 속으로, 다른 이도 아닌 너의 고독 속으로, 그것도 '달아나라'고 명령을 하는 책 제목이라니요. 심지어 책의 표지는 빡빡 민 머리의 뒤통수입니다. 마치 머리를 밀고 산 속으로, 절로 들어가는 스님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감옥으로 들어가는 죄수 같기도 하고요. 절이든, 감옥이든, 아마 고독하기는 할 겁니다.
그런데 그 고독은 나의 고독만은 아닐 겁니다. 산 속은 온통 고요하니, 나의 고독이, 도인의 경지에 오른 다른 스님의 고독이나, 물의 고독, 산 속 공기의 고독, 새들의 고독에 묻힐 지도 모릅니다. 감옥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수 그 자신도 고독하기는 참 고독하겠지만, 더 오래 형을 산 다른 죄수나, 그들과 씨름해야 하는 교도관이나, 열악한 화장실이나, 좁은 방에 놓인 침대의 고독을 이기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얼핏 보면 머리를 빡빡 민 이 뒤통수는 참으로 고독 속으로 처연히 걸어들어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속은 오히려 자신의 고독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군요, 저로 하여금.
이런 제목과 표지를 가진 노재희 작가의 첫 소설집이라는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에는, 모두 8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첫 번째 단편은 이러한 제목을 가진 소설집의 첫 작품에 걸맞게 <고독의 발명>이라는 작품입니다. 남부럽지 않은 번듯한 직장에 다니며 처자가 있는 엄복태는 마음 속에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있습니다. 시인이 되려면 고독이, 마음껏 고독할 수 있는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지만 알다시피 평범한 직장인, 가장, 생활인에게는 사실 그 필요한 것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습니다.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까요? 어쨌든 엄복태는 그 주어지지 않은 환경 속에서 스스로 고독을 '발명'해냅니다. 가정이 있고, 아이가 있고, 아내가 있는 남자가 고독 속에 잠기자니, 당연히 아내는 그것이 달갑지 않습니다. 그래도 엄복태는 굉장한 용기와 강단으로 그것을 꿋꿋이 견뎌내고 시를 씁니다. 비록 여전히 누군가의 영향을 지워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시를 쓰니 썩은 동아줄인지는 모르나 기회도 찾아옵니다. 엄복태는 과연 꿈에 그리던 등단을 해서, 시인의 아내가 되게 해주겠다고 했던 프로포즈를 현실로 만들 수 있을까요. 아마 그랬다면 이 소설은 현대소설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저는 어쨌든 그 와중에도 스스로 고독을 발명해내고, 적극적인 시도를 한 엄복태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또 모르죠, 소설 밖에서는 결국 엄복태가, 황지우도, 이성복도 벗어내고, 엄복태 자신의 시를 쓰는 시인이 될 지도.
"행복하지?" 이제 혀가 꼬부라진 김형철의 말은 거의 '항복하지?'로 들렸다. "이 새끼, 넌 좆나게 행복한 거야." 있지도 않은 자신의 행복을 발명해준 친구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김형철은 테이블 위에 두 팔 을 포개더니 그 위에 이마를 살포시 얹고 엎어져버렸다. | |
| P.19 | |
두 번째 단편은 <누구 무릎에 꽃이 피나>입니다. 참으로 따뜻한 상상력과 또 작가 특유의 현실 인식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그 정도면 참으로 뻔뻔하다고 해도 무방한 아들 부부의 아이, 그러니까 큰 손자에 작은 손자까지 돌보느라 잠시도 허리 펼 틈 없는 춘복 씨는 무릎이 늘 아픕니다. 소설 속 춘복 씨까지 무릎이 아파 잠을 잘 못 주무신다하니,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왜 우리네 엄마들은 세월의 무게를 온통 무릎으로 받아내는 걸까요. 나이가 들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되는 거라면 왜 우리는 그토록 무릎이 아파 잠도 못 이룰 지경이 되기 전에 그만 애 쓰거나 그만 살거나 할 수 없는 걸까요. 어쨌든 그런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춘복 씨의 이야기를 읽는데, 어라! 어느 날 춘복 씨 무릎에 꽃이 핍니다. 이건 조금도 비유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무릎에 꽃이 핀 겁니다. 거짓말 같이 통증은 사라졌지만 무릎에 꽃이 폈으니 무릎을 접을 수 없고 무릎을 접을 수 없으니 걸을 수 없습니다. 다들 이게 무슨 일이냐며 깜짝 놀라지만 춘복 씨는 내심 기쁩니다. 끔찍하던 고통이 사라졌으니 좋고, 두 손자를 돌보는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어 좋습니다. 춘복 씨는 무릎에 핀 꽃 때문에 움직일 수 없고 그로 인해 찾아온 평화와 고독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 내외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꽃을 꺾어버리면, 무릎에서 뽑아버리면, 비록 고통은 다시 돌아오지만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과연 우리의 춘복 씨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번 뽑고 나면 다시는 무릎에 꽃이 피지 않는다면 춘복 씨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만약 우리 엄마 무릎에 꽃이 핀다면 나는 엄마한테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다음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샘소나이트 가방을 차곡차곡 모으더니 어느 날 떠나버린, 아니 그것까진 좋은데,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를 읽으면서 작가에 대한 감탄이 탄성이 되어 터져나왔습니다. 시인이 되고자 하는 생활인 엄복태의 이야기에서 엄복태가 고독을 발명해내는 방식에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고목에 꽃이 핀다'는 비유적 구절이나 노름판에서 오래 노름을 한 사람 무릎에는 꽃이 핀다는 낭설 혹은 근거 없는 비유적 소문에서 실제로 무릎에 꽃이 피는 상상을 해냈을 작가에게 또 한 번 감탄했지요. 그리고 이번에는 절대 고독할 수도 없고 고독해서도 안 되는 한 집안의 가장이 어떻게 그 비고독의 상황에서 탈출해 자신만의 고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지를 샘소나이트 가방으로 이야기하는 작가에게 경탄했습니다. 단순히 기술적으로 글을 잘 쓴다는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작가 자신이, 아마 역시도 고독할 수 없었거나 그래선 안 됐을 상황에 놓여있었을 작가가, 얼마나 작가가 되기 위해, 혹은 작가로 남기 위해, 고독을 찾을 방법을 모색하고 또 결국은 그것을 해냈는지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느끼는 배신감, 그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보다는 가방을 들고 달아난 아버지에게 느끼는 공감이 더 크도록 이 소설이 설계되어있다는(저만의 느낌일까요) 점 자체가 작가의 명백한 의도라고 믿고 있거든요. 아마 그것도 내 아버지가 아니라 남의 아버지니까 가능한 공감이겠지만요.
| "이런 얘기 아니? 이 우주의 대부분의 에너지는 자기를 막아서는 어떤 것을 만났을 때 그 속으로 흡수되거나 혹은 그대로 소멸되는 대신 방향을 바꾼다는 거야. 그럼 어느 쪽으로 방향을 바꾸느냐, 자신의 안쪽으로 바꾸는 거지. 나선형을 그리면서 자신의 안쪽으로 점점 말고 들어가는 거야. 그렇게 하다 보면 나선의 중심이 탄생하는 거다. 그렇게 생긴 나선의 중심이 어떤지 아니?" "......." 아버지가 목소리를 낮췄다. "아주 고요하단다, 아주." "......." "태풍의 눈을 생각해봐라. 같은 이치지, 그래서 그 중심을 고요한 눈이라고 한대." "고요한 눈이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요한 눈. 나는 그 고요한 눈이 자기 안에 똬리를 튼 우주라고 생각한다. 멋지지 않니?" "......."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되게 커지는 것 같잖니." "안 그래도 크세요." | |
| P.135 | |
네 번째 단편은 <시간의 속>입니다. 이 작품 역시 작가 특유의 센스가 돋보입니다. '시간 더 드립니다'라는 노래방에 갔다가 바깥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 속에 잠시 살게 된 젊은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노래방에서 똑같은 돈을 내고 우리는 서비스로 시간을 더 받습니다. 그 서비스 시간을 주지 않는 노래방은 인정머리 없다고 흉을 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노래방 주인이 우리에게 준 서비스 시간만큼 우리는 노래는 더 부르지만 다른 것을 할 시간은 빼앗기는 셈입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흐르니까요. 노래방에서 쓰는 이 '시간 더 드립니다'를 갖고 이런 작품을 쓰는 노재희 작가님의 상상력과 통찰력과 감각은 이야기를 이렇게 바꿔 놨습니다. 시간을 선물할 수는 없으니 시계를 선물하고 떠난 애인, 그리고 병이 걸렸다는 걸 알고 순식간에 돌아가신 아버지, 그들에게서 어쩔 수 없이 떠나 그가 들어간 세계에서는 시간을 거꾸로 살고 있는 노망난 해맑은 노인과 그를 계략 속으로 끌어들인 노인이 삽니다. 노래방에서 노래 부를 시간을 좀 더 얻은 대가로, 노인이 해맑은 노인에게 투자해야 할 시간을, 내가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닫죠.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회의를 품습니다. 그 시간 속에 있으면 그 시간의 질서를 거스를 수 없지만 그 밖으로 나와버리면 얼마든지 거스를 수 있는 것이 그 이상한 공간 속 시간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 두 노인의 시간이 아닌, 과거 시계를 선물한 애인 해진의 시간도 아닌, 자신의 시간을 살아야하는데 말입니다.
다섯 번째는 <그날 저녁, 그는 어디로 갔을까>입니다. 누구 무릎에 꽃이 피나,나 시간의 속,처럼 이 단편에도 기이한 경험을 하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는 역시 버스기사로 월급을 받으며 가족을 보살피는 생활인입니다. 운전 중 배가 너무 아픈 영환은, 동료가 알려준 화장실에서 급한 일을 해결하고 시원하게 물을 내립니다. 물을 내린 후에야 물을 내리면 모든 걸 다 쓸어가버릴 거라는 경고 글을 보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누구나 그럴 겁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 보면 우선 버스가 없습니다. 도저히 스스로 없어질 수가 없는 버스가, 마치 물에라도 휩쓸려간 것처럼 흔적을 감춥니다. 버스를 찾기 위해 회사를 찾아가지만 당연히 회사도 없습니다. 이리저리 헤매던 사내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똑같이 걱에 버스를 대고 화장실로 가는 동료기사를 발견합니다. 그는 그에게 경고하려하지만 실패하고, 그는 그래서 이미 물을 내려버린 그 동료기사의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 봤어야하지만 역시 실패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고를 무시하고, 얼마나 많은 신호를 놓치고, 또 얼마나 많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걸까요. 그날 저녁, 그는 어디로 갔을까요.
여섯 번째는 <성가족>입니다. 독실한, 하지만 서로 다른 종교에 대해 독실한 두 사람이 가족으로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쪽에서 보면, 저 사람만 빼면 완벽하고, 저쪽에서 보면, 이 사람만 없으면 완벽합니다. 자신이 꿈꾸는 그 성스러운 가족을 이루는데 말이죠. 한 쪽은 그래도 내가 관용을 베풀었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 쪽은 역시 내가 많이 참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빼면 완벽할 그 한 사람이 삶에서 빼기로 사라졌을 때, 남은 한 쪽은 내심 기뻐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 성스러운 가족에 대한 성스러운 꿈은 무사히 이뤄질 수 있는 걸까요.
이제 일곱 번째 작품입니다. <생활의 기술>은 철학에 뜻이 있는, 그래서 생활에는 별로 보탬이 되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아내 대신 장을 보다가 환영을 봅니다. 물건을 하나 고르는 데도 너무 많은 정보가 필요하고 철학적 고민이 뒤따르는 남자입니다. 도저히 그렇게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다못해 그 흔한 장도 제대로 볼 수가 없죠. 그래서 생활의 달인인 학원 동료 여선생에게 노하우를 배웁니다. 단순히 감자를 어떻게 고르느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쓸 데 없는 걱정들을 어떻게 날려버리느냐 하는 굉장히 중요한 기술을 전수받게 되죠. 그 때부터 남자는 마치 마트에서 장을 보듯이, 자신의 걱정에도 '그래봤자 얼마' 하는 식으로 값을 매겨 어디론가 팔아넘기는 방법을 익히게 됩니다. 하지만 이 방법도 언젠가는 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세상에는 도저히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가 있으니까요. 이렇게 풀어서 쓰고 보니 굉장히 뻔한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만, 노재희 작가는 대체로 뻔한 이야기들을 뻔하지 않은 이야기 방식으로 보여주는 재주가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입니다. 책 뒤표지에 적혀 있던 구절에 마음을 빼앗겼는데, 그 구절이 어느 작품에 나오나 했었는데, 바로 이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였습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 빛나는 것을 보게 되면 나머지 인생 동안엔 그 그림자에 붙들려 살아야 하는 것 같아. 일단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우리는 평생 그 아름다운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진소영은 자석을 갖고 영혼을 이야기하는 엄마를 가진 딸입니다. 그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그걸 미안해하면서도, 계속해서 책을 읽은 사람입니다. 소영은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의 엄마로서, 이혼녀로서, 아이를 부양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부자들을 위해 그럴싸한 서재를 꾸며주는 희한한 인테리어로 돈을 법니다. 책이 엄마의 삶을, 엄마의 손목을 끊임없이 붙든 것처럼, 그런 엄마의 영향력이 소영의 손목을 계속 붙들고 있습니다. 놓아주질 않고 계속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억지로 붙잡혀 있다기보다는, 그렇게 잡아주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그 무언가에 손목이 붙들린 채 그 힘으로, 그 기억으로 인생을 살아냅니다. 그림자가 만드는 그늘은 어둡지만, 그 어두움이 반드시 나쁘거나 불안한 것만은 아닌 거죠.
| 마찬가지로, 인간이 뭔가에 마음을 뺏기면, 자기의 부속품 하나하나가, 이를테면 그것을 바라보는 눈도 그것을 말하는 입술도 그리고 그것을 향해 내미는 손도, 모두 그것으로 빨려 들어가서 결국엔 끔찍한 몰골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아. 무서운 일이지. 자석산 근처엔 가지 않는 게 상책이란 말이야. 자력이 미치는 범위에 들어서면 일단 얘기는 끝난 거라고 봐. | |
| P.336 |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에 실린 8편의 단편들이 모두 참 좋았지만, 저는 왠지 마지막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가 가장 마음에 남습니다. 마치 이 소설 속에 자석산이 들어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달까요. 우리 엄마는, 진소영의 엄마처럼, 그렇게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고, 그래서 이렇게 문학적인 표현으로 나를 꼼짝 못하게 하고 스스로 잘못을 말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표현이 다를 뿐 같은 이야기를 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의 영혼과 나의 영혼, 그리고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 나 사이의 어떤 자력, 그 자력이 영향을 미치는 자장 같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석처럼 제 마음을 붙듭니다.
노재희 작가는 진소영의 엄마의 입을 빌려, 친절하게도 '자석산 근처엔 가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알려주지만 그것은 마치 버스운전기사인 영환이 동료 기사에게 했던 경고처럼, 이미 소용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책을 읽기 전에 벌써, 훨씬 전에, 그 자석산을 만났고, 빛나는 것을 봤고, 자력이 미치는 범위 속에 들어 있으니까요. 참으로 아름다운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