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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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슬퍼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경찰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율리아네에게는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빌려준 뒤 그녀를 친구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느라 나의 슬픔은 내내 왼손에 꼭 틀어쥐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슬픔에 무너질 차례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슬픔은 선물이며, 얻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p.23쪽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실제로 살아보는 것. 그 문화 속으로 이사하여, 손님으로 받아달라고 부탁해서 언어를 배운다. 어떤 순간이 되면 이해가 찾아온다. 이해는 언제나 비언어적이다. 무엇이 낯선 것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 설명하려는 충동을 잃어버린다.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그 현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내가 카나크에 대해서 나 자신에게든지 다른 사람에게든지 얘기하기 시작하면 결코 한번도 진정으로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을 다시 한번 잃어버리게 된다.

지금처럼, 수리공의 소파에 앉아 내가 왜 이누이트들과 연관성을 느끼는지 설명하고 싶을 때가 그렇다. 그건 이누이트들이 한 점 의심의 그림자 없이 삶이 의미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자신들의 의식속에서 화해할 수 없는 모순들 사이에서, 절망에 빠지지 않고 간단한 해결책을 찾지도 않으면서 긴장감을 지닌 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이 열락에 이르기까지 짧고도, 짧은 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이 동족 인간을 만났을 때, 판단하지 않고 편견으로 명확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임을.-p. 259쪽

행복만큼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은 없다. 행복으로 인해서, 우리는 이 순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 또한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가 현재의 나를 만날 수 있을 만큼 강인하기 때문에 나의 유년 시절도 마찬가지로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p. 259쪽

나는 일생 동안 지속될 것이라 여겨지는 그런 현상들에는 능하지 않다. 종신형, 결혼서약, 종신직. 그런 것들은 삶의 단편들을 고정시켜 시간의 흐름에서 면제시키려는 시도다.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일들은 더 심각하다. 자명종 시계처럼. 내 '영원의 시계'처럼. 사람들은 그 시계를 그렇게 불렀다. 나는 그것을 제 2차 NASA 달 탐사선이 빙산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난 직후에 부서진 계기판에서 떼어냈다. 그 탐사선은 영하 55도의 날씨나 보퍼트 풍력 계급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바람을 견뎌내야 하는 미국인들처럼 무력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시계를 집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내 주변에서는 영원히 지속되는 꽃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심지어 미국 우주 계획도 나한테서는 3주도 버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이해서 기념품 차원으로 집어온 것이었다.

이 시계는 10년을 버텼다. 모진 대접과 구박만 받으며 지내온 10년. 그렇지만 NASA 사람들은 그때만 해도 시계에 대단한 것을 기대했었다. 그 사람들 말로는 발염장치의 불꽃 속에 집어넣거나 황산에 삶거나 필리핀 해구 바닥으로 던져버려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정확한 시간을 가리킬 거라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나를 극도로 자극했다. 카나크에서는 손목 시계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사냥꾼들 중 어떤 이들은 장식용으로 차고 다니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시계의 규제를 받는 일은 꿈도 꾸지 않았었다.-p. 376-377쪽

크레바스(빙하 속에 생긴 깊은 균열) 속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크레바스 바닥은 좁아서 그 안으로 떨어지는 모든 것이 영하 30도의 온도에서 꽁꽁뭉쳐져 박혀있게 된다. 카나크에서는 날씨가 길잡이를 해준다고 나는 길에게 말해주었다. 동물이 길잡이를 해준다. 사랑이 그리고 죽음이. 기계 쪼가리가 해주지는 않는다.
-p. 377쪽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나는 자문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 이름인가?

내가 태어나던 해 어머니는 서그린란드로 여행을 가서는 밀라아르크라는 여자애 이름을 가지고 집으로 왔다. 모리츠에게는 그 이름이 덴마크어로 온화하다는 뜻의 '밀mild', 그와 어머니 사이의 애정 관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휘를 연상시켰기 때문에, 또 그는 그린란드의 것이라면 뭐든지 유럽식으로 변형시켜 익숙하게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확실히 그때는 내가 그를 보고 미소지었다는 이유 때문에-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그때는 알지못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어린아이의 무한한 신뢰감이었으리라- 내 부모는 '스밀라아라크'라는 이름을 합의를 보았다. 그 이름은 모두가 종속되어 있는 시간의 흐름에 닳고 닳아 스밀라로 압축되었다.

그 이름은 순전히 소리일 뿐이다. 소리 너머까지 본다면, 그 소리가 돌고 있는, 액체처럼 움직이고 있는 육체를 발견하게 된다. -p. 401쪽

북그린란드에서 거리는 시니크, '잠'으로 측정된다. 즉, 여행 한번에 몇 밤을 지새야 하느냐는 것이다. 시니크의 수는 날씨나 연중 시기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에 고정된 거리가 아니다. 시니크는 시간의 측정 단위도 아니다. 폭풍우가 닥쳐올 조짐이 보이는 날씨에 어머니와 나는 함께 포스 만에서 이타까지 쉬지 않고 여행했었다. 그 거리는 원래 두 밤은 보내야만 할 거리였다.

시니크는 거리도 아니고, 날이나 시간의 숫자도 아니다. 그것은 공간적 현상이자 시간적 현상이고, 공간-시간의 개념으로, 이누이트에게 있어서는 당연시되지만 유럽 언어의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공간과 동작과 시간의 결합을 나타낸다. -p.423쪽

그걸 보니 뭔가 내 맘속에 떠올랐다. 그렇지만 나는 그 생각이 흘러가도록 놔두었다. 나는 서른일곱 살이다. 나이가 들면 어떤 걸 봐도 뭔가 떠오르게 마련이다. -p.433쪽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대단히 과장된 얘기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45퍼센트와 이번에는 그 두려움이 무색하게 되리라는 광적인 희망 45퍼센트, 거기에 소박하게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여린 감각 10퍼센트를 더하여 이루어진다.

나는 더 이상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내가 더이상 볼거리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그렇지만 물론, 누구나 사랑에 압도될 수는 있다.
-p. 441쪽

여러곳을 여행하다가 아주 추운 곳까지 이르면 생존은 곧 단순히 깨어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p. 453쪽

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냉담해질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긴장할 수는 있겠지만 냉담해질 수는 없다. 삶의 본질은 온기다.
-p. 475쪽

극대양에 던져진 건 무엇이든 다시 올라오지 않는다. -p. 519쪽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끝맺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뿐이다. 결코 결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p. 6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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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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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통브.는 또 뭐람.
암튼 독한년, 몬땐년, 나쁜년.

1_
내가 이상하다고? 어째서 이상하다는 거야?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상처 주는 말이나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적이 없으니까.
이상하다고, 그게?

2_
포르노그래피는 우리 현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거식증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것에도 굶주려 있지 않습니다. 그럴 만하지요.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3_
폴 볼스가 <진정한 여행자는 돌아올 것을 확신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4_
<시베리아>란 말을 들을 때 웃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야.

5_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어. 대단하지 뭐야. 말의 힘이라는 거.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어. 그런데 그 막막한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시베리아>라고 중얼거리자마자 감동으로 온 몸이 떨려 오지 뭐야.


주인공 1_
'장래희망이라곤 연애가 전부'이고, 스스로를 '시선의 구토제'라고 여길 정도로 아주 못생겨빠진 '카지모도' 에피판,

주인공 2_
에텔, 에텔, 에텔, 에텔이라고 말하다보면, 에테르가 되는 에피판이 사랑한 그녀, 에텔.

줄거리_
'아름다움이란 게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이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어'라고 말하던 여자가, 장래희망이 '연애'인 못 생겨빠진 뻔뻔한 남자와 절친한 친구하며, 겉만 번지르르하게 잘생긴 남자 만나서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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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림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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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는, 기존 소설가들의 권위에 겁없이 도전했다.
그라고 겁이 나지 않았겠느냐마는, 어쨌든.
이 한 권만으로 엄지를 치켜세우기는 부족하지만, 어쨌든.

꽃피우는시간_
내 도시인 것 같은 K에 다녀간 이야기

해방(술마시는인간)_
도대체 이 여자는 왜 우는 걸까 추측하는 시간

소설쓰는인간_
뻔뻔한 왕제비의 회고록

홀림_
아이인지, i인지, 자신의 과거인지 모를 '아이'를 보는 이야기

협죽도그늘아래_
협죽도 그늘 아래 앉아있는 일흔살짜리 처녀 이야기

붐빔과 텅빔_
불행의 대물림

방_
책과 애인의 대물림

이무기_
바보 곽영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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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것은 가짜다 -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미학
정민 지음 / 태학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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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내가 그대와 헤어진 뒤 그대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정자 난간을 세며 돌고, 나도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다리 어귀에서 말을 세우고 그대가 서성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소. 그때 우리 두 사람이 바라보던 그 지점은 어디였을까요? 허공의 환희와 그리움이 만나던 지점은 앞이었던가요, 뒤였던가요? 아니, 우리의 마음은 애초에 떨어짐이 없이 하나였는데, 만나기는 어디서 만난답니까?
 
박지원이 곁에 살아서 콧구멍으로 숨을 내뿜는다면,
나는 보따리짐을 싸고 튼튼한 신을 신고 그의 뒤만 졸졸졸,
그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리했을텐데-
하지만, 이렇게 얘기해놓고 생각해보니,
나는 평생 그를 좇아도 그는 나를 동정해줄지언정,
마음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싶은데,

애초에 마음이란 것이 없었는데 나는 무엇을 어찌 얻는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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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변화 - 상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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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일롱카 - 열정적 사랑
 
숨도 못 쉬고, 물도 못 마시고 읽었던 1.

 

책을 읽으면서 몰입할수록, 내 속에서는 갖가지 단어들이 합체하지 못한 채 마구 튕겨 올라왔고
포스트잇까지 붙여가면서 그 단상들을 붙잡고 싶었다. 일롱카에게 페터와 함께 한 시간은 행복하고 무난했던 몇 년이든, 괴롭고 억지로 이어갔던 몇 년이든, 그저 '그의 시간'의 고정돼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멀리서 그를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한겨울에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큰 숟가락으로 퍼먹게 만드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린 존재.

 

2부 페터 - 용기 없는 사랑
 
페터가 유디트에게 엉켜있지 않았더라면 일롱카가 그와 헤어진 뒤 그를 우연히 만났을 때 그렇게 큰 숟가락으로 쉴 새 없이 아이스크림을 퍼먹진 않았을 것이다. 페터가 한 번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겁을 집어먹은 채 유디트를 마음속에 품고 있지 않았어도 일롱카에게 그렇게 매력적인 인물이었을까.

손에 들어온 것보다는 손 끝에 닿는 것이 훨씬 매력적인 법이니까. 페터가 일롱카에게 얘기했듯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지만 아무리 모른 척 눈 돌려봐도 결국 문제는 문제. 결국 헤어졌잖아.

3부 유디트 - 파괴적 사랑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셋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시작되고 유지될 수 있었다. 유디트의 사랑은 경외였으며 경외는 무의식에서 솟구쳐 올라온 경외라고 믿었던 다른 것이었다. 유디트가 그 사실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았다거나 조금만 더 늦게 알았더라면 또 한 번의 결혼이 미완으로 끝나지 않았을 텐데-

시작도 되지 않았을 거니까. 그리고 그들도 결국은 헤어졌잖아.

 
일롱카에서 페터, 유디트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차가 드러난다. 일롱카의 이야기가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 있고 유디트의 이야기는 시기적으로 가장 뒤에 있다. 또 일롱카의 이야기가 지극히 페터에게 초점 맞춰져 있었다면 페터의 초점은 유디트였고 유디트의 초점은 사회 속의 자기자신과 그들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들이 서로 결혼을 하게 된 데는, 사적인 감정 따위는 사실상 영향을 주지 못했고 사회가 이들을 그렇게 하게끔 등을 떠민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자신의 감정이며 의지라고 생각했나 보다.


읽으면서 나는 이게 무어 특별히 결혼 이야기냐 생각했는데, 이건 사랑 이야기다 생각했는데, 사랑 이야기보다는 결혼 이야기에 가깝고 결혼 이야기보다는 어떤 '', 우리가 무의식 중에 우리에게 씌운 틀에 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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