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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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린저 | 생의 한가운데 | quick space 2004/06/30 21:18

자신의 이름보다는 [생.의.한.가.운.데.]라는 그녀의 제목이 조금 더 유명한 독일産 여류작가가 있다. 생.의.한.가.운.데.를 알면서 그녀는 알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지만, 생.과 그 한.가.운.데.라는 두 단어의 결합에 묻어 있는 간결하지만 오롯한 느낌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아도 生.이란 한 마디는 언제나 우리 산 사람들의 말초를 자극하는 법이다.

그리고 니나 부슈만.

단언하건대 사랑 얘기인 척하는 소설치고 진짜 사랑 얘기인 것 없고,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명제 앞이라고 사랑이 물러나는 일도 없더라. 소설 쓰는 사람은 자기 얘기인 척 남의 얘기를 쓰고, 진짜 자기의 모습을 다른 사람인양 한다. 하지만, 아무리 돌려치고 메쳐도 그게 그거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이다.

그래서, 루이제 린저.

사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니나에게 열광하면서 정작 루이제 린저를 잘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모순이니, 말도 안된다느니 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는 거였다. 니나를 만나기로 해놓으면 루이제 린저가 따라 나온다. 소설과 현실을 혼란스럽게 섞어 놓은 속에서 니나로 분한 루이제 린저의 실체를 굳이 분리해 낼 필요가 없었던 거다.

그녀의 이력은 실로 화려하다. 화려하다기 보다는 나같은 범부가 말장난이나 삼고 있을 만한 것이 못 될 정도로 훌륭하며, 그래서 약간은 거북스럽기까지 하다. 1911년 뮌헨 대학에서 심리학과 교육학을 공부하였고 약 4년간 교편을 잡았으며 악단 지휘자와 결혼한 것까지는 겉보기로는 그냥 그렇고 그렇다. 그러나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남편은 소련으로 도피하고, 루이제 린저는 전쟁과 부조리와 편견에 맞서며, 반 나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그런 연유로 그녀는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옥살이를 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녀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84년에는 연방 대통령 후보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력만으로도 루이제 린저는, 정치라면 알지도 못하면서 치부터 떠는 나같은 무지한 사람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녀의 휴머니즘도 나치즘에 대항하여 싸운 수많은 사람들 누구나 가진 흔해 빠진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따금 크고 작은 국제적 사고를 치지 않는 한 잊고 사는 우리를 대신해, 고의를 가장한 고립과 싸우는 북한에 여러 차례 방문하는 애정을 보였다.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입 대신 온몸으로 자유와 정의를 외쳤다. 그녀는 대부분이 생각도 하지 않으려는 것을 행동하는 여자였다.

그녀의 열정은 젊음에 힘 입어 한창 때 반짝하고 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치열한 열정이 “생”이라는 가깝고도 먼 화두를 던진 것이다. 내가 여기 저기 다른 이름으로 흩뿌려놓은 말들을 다 모아도 온전한 내가 보일까마는, 적어도 그녀는 스스로 생.의.한.가.운.데.를 쓰면서 생의 한가운데를 정통으로 뚫고 지나는 황홀경을 체험하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니나를 18년간 짝사랑하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해버리고 마는 슈타인의 개인적인 일기들도 마치 생생한 역사적 기록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나처럼, 너처럼, 니나의 언니는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동생에게 잠깐 와서 있어달라는 편지를 받고,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떠날 준비를 하는 니나와 며칠을 지낸다. 니나의 언니는 동생을 짝사랑해온 슈타인이 18년간 써온 일기와 동생과의 짧은 만남으로 니나가 살아온, 살아갈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된다. 자신이 너무도 무감하게 언저리만 맴돌며 살아온 생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니나로 인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비친 슈타인은 꼭 홈으로 냅따 뛰려다가 런다운 플레이에 걸려 3루와 홈 사이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야구선수 같다. 관객들은 야유한다. 야 임마, 상황을 보고 뛰어야지. 아니면 진즉에 뛰던가. 이성이 작용하기 힘든 곳에, 자칫하면 모든 것을 놓쳐버릴지 모르는 순간에, 논리와 이치를 불러들이려는 슈타인의 모습은 답답하다.

3루든, 끝인 듯 보이는 홈이든 하나의 그라운드 위에 그려진 다이아몬드 모양 발판에 지나지 않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운드 한 가운데 놓인 우리에게는 그 사실이 중요하지 않거나 거기에 신경쓸 겨를이 없거나다. 생의 한가운데 던져진 우리는 그저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반면에, 니나는 거침이 없다.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감정을 따르면서도 쉽게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두려움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녀야말로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가졌다. 당연히 우리는 슈타인보다는 니나에게 매혹되기가 쉽고, 슈타인보다는 니나를 사랑한다. 니나는 우리가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혹은 잊고 있는 진정한 용기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슈타인에게 니나는 사랑하는 여자이기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존재이며, 그래서 영원한 동경의 대상일 뿐이다.

슈타인과 니나의 언니를 통해 니나를 보면서 나는 마치 내가 니나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만, 차라리 슈타인 쪽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래서 슈타인의 우유부단함과 끝끝내 현실의 구질구질함에 연연하는 것을 보고 있기가 쉽지 않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는 니나에 대한 슈타인의 희망이 끝내 좌절될 때는 나도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이제 린저는 자기의 열정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겪고 있지만, 쉬이 보려고 하지 않는 삶의 진면목을 조목조목 짚어준다. 나도 그랬고, 너도 그랬을, 앞으로도 그럴 수 밖에 없을 .생.의 절절함.

숲을 보려면 숲 밖을 나와야하지만,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그 속에 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태풍의 한가운데는 오히려 안전하다.

2003. 늦겨울
from www.goon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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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에는 똥이 많다
이창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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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 녹천에는 똥이 많다 | quick space 2004/06/30 21:14

suede = stay together

영화 "오아시스"의 활약덕분에, 대형도서관에서나 발견되었을 이창동의 92년작 소설집이 2002년 10월 문학과 지성사에서 재발간 되었다. 그의 최근작인 "오아시스"로 이창동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 소설집의 재발간은 다소 거북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창동 스스로가 그의 최근작을 '경계에 관한 영화'로 규정짓고 있지만, 바로 전 작품까지만 하더라도 진흙탕 같은 질펀한 현실 속으로 우리를 자꾸만 끌어당기던 그가 아니었던가.

이창동은 아마도 선천적으로 꾸미거나 둘러대는 것에 몹시 약했거나, 병적이면서도 의식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소위 예술이라는 것에 가치를 두기 시작하는 시기는 그야말로 극심한 사회적 병폐 속에 인간이라는 가치는 변두리로 밀려나 있던 7, 80년대였던 것이다.

이런 그의 표현방법을 사람들은 '비판적 리얼리즘'이라 이름 붙였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사회에서 떠밀려 있거나, 스스로 현실에서 멀어지기를 선택하며, 그들은 전자에 비하면 오히려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창동이 관심을 가지는 쪽은 후자 쪽이 아니다.

이창동의 관심사는 사회구조에 의해 노골적으로 밀려났던가, 밀려나지 않기 위해 그 속에 어정쩡하게 뒤섞여 끽 소리도 내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그는 철저하게 냉혹한 현실 속에 밀어 넣었고, 어느 순간에 그들로 하여금 정신적 무력감의 끔찍한 마지막 순간들을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영화보다 훨씬 잔인하며, 그 잔인성으로 무장된 내러티브로 읽는 이들을 수갑채운다.

이 소설집에는 5편의 중■단편 소설들이 실려있는데, 5가지 모두가 앞에서 언급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며, 그 형식상 구조 또한 너무나 단순하다. 그가 현실을 꿈과 판타지(이 판타지라는 것은 영화 "오아시스"를 경계에 세우고, 앞으로 꾀하게 될 변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로 포장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의 문장 역시도 너무나 메말라 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자면 마치 오래되어 지린 냄새를 풍기며 딱딱하게 굳어버린 오징어를 씹는 기분이면서도, 그 인물이나 이야기구조가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끝까지 그를 따라가고야 마는 것이다.

여기 실린 길고 짧은 소설은 꼭 한 번쯤은, 어디에선가는 분명히 있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7, 80년대를 피끓는 젊음으로 살아온 세대이며, 조악한 현실이더라도 그것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을 경계해온 작가이기 때문이다.

"진짜 사나이"나 "용천뱅이"는 소신을 지키며 사는 데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인색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며, "운명에 관하여"는 인생을 지나친 우연의 장단에 맡겼지만, 우리는 그것이 결코 억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똥구덩이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 어린애처럼 소리내 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녹천에는 똥이 많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에서 그토록 버리고 싶었던 나 자신과 주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더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창동은 마지막으로 실려 있는 "하늘燈"에서 지금은 우리가 역사의 터널 속에 있을 뿐이라는 수임의 말에 '터널 저쪽은 도대체 뭐가 있는 거지?'라는 반문을 던진 채 끝을 맺는다. 그러나 우리는 비극 속에 비극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듯이 우리는 역시 그를 통해 그래도 터널을 건너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 더 다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현실이 끔찍하게 두렵다면, 아직은 이창동을 피해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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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드의 여왕 (구) 문지 스펙트럼 3
알렉산드르 셰르계예비치 푸슈킨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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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 이반 폐트로비치 볠킨의 이야기

 

도덕적인 속담이나 격언은 우리가 우리 행위를 정당화시킬 구실을 스스로 생각해내기 힘들 때 놀랄 만한 효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p. 57

 

하루라도 관을 보지 않는 날이 있을까,

늙어가는 이 우주만상의 백발을?

- 제르자빈의 시 '폭포'의 일부                    p. 69

 

독자 여러분 중에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분은 이런 시골 아가씨들이 얼마나 매력적인 존재인지를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아가씨들에게는 말 방울소리가 이미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모험이고, 가까운 시내로의 나들이는 일생의 사건이며, 손님의 방문은 오래도록, 때로는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된다.   p. 106

 

원래 산문시인이었던 푸슈킨, 자신이 쓴 소설을 '이반 폐트로비치 라는 '허구의 훌륭한 소설가'를 만들어내서 그의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자신은 은근슬쩍 그 책임에서 물러나고자 하는 건가.

 

 

2. 스페이드의 여왕

 

'스페이드의 여왕'은 '비밀스런 악의'를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내게 1800년대의 소설은

약간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너무 교훈적인 것 같아서 거부감이 느껴진다.

 

대신에 좀 유치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내가 소설 속 주인공보다 별반 나을 것도 없으면서,

마음껏 욕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어쨌든 저쨌든, 그러면서도 재미있게는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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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 : 아방가르드의 문화사 - 몽마르트에서 사이버 컬쳐까지
마크 애론슨 지음, 장석봉 옮김 / 이후 / 2002년 5월
품절


아방가르드는 처음부터 정치적이었다.



아방가르드는 신비의 변경,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끝나는 바로 그 곳에서 시작되는 경계를 탐험한다고도 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것을 어떻게 예술로 바꿀 수 있을지 결정해야만 한다.


충격적인 예술이 대중성을 확보했다면, 이제 그 날카로움은 없어져버린 것이 아닐까?


피카비아는 미술이란 이제 어떤 것과 비슷하게 보이는 그 무엇이 아니라, 화가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인상'이라고 주장했다. -p. 17쪽

1917년 1월의 어느 추운 날 밤, 뒤샹과 존 슬로안(팔인회의 일원이자 완고한 사회주의자)을 포함해, 빌리지 사람 여섯 명이 워싱턴 스퀘어 파크의 입구에 있는 아치(1892년, 미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워싱턴의 취임 1백주년을 기념해 워싱턴 스퀘어 파크이 입구에 세운 궁형의 문. 프랑스의 개선문과 비슷한 모양이다) 위로 올라갔다. 흔들거리는 등불 속에서 그들은 "그리니치 빌리지의 미합중국 탈퇴"를 선언하는 문건을 작성했다. 사실, 그들은 일부러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빌리지가 여느 곳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p. 31쪽

만약 색이 자연을 모방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되지 않을 수 있다면, 색은 그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반 무렵에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같은 화가들은 익숙한 모든 세계와 결별이라도 하듯이 더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그들의 눈이 프리즘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러자, 삶의 모든 것들이 파편화된 것처럼 보였다.


1871년의 파리에서 부자들은 동물원의 코끼리와 곰으로 식사를 했지만, 극빈자들은 쥐를 잡아먹었다. -p. 60, 61쪽

나는 모음의 색깔을 발명했다!-A는 검고, E는 하얗고, I는 붉고, O는 푸르고 U는 초록이다. 나는 자음의 형태와 운동을 조절했고, 본능적인 리듬으로 언젠가는 온갖 감각에 다 다다를 수 있는 시 언어를 창조하리라 자부했다. 나는 번역을 거부했다.

.........나는 침묵과 밤에 대해 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 유의했다. 나는 현기증을 응시했다. ( 랭보의 '헛소리' 두번째 시편 중에서 )


아방가르드의 완전한 한 쪽 날개는 니체와 허무주의에서 생겨난 것. -p. 67, 69쪽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그림을 꼼꼼히 관찰하고, 유럽에서 망명해온 예술가들을 만나는 일에 가슴 설레했던 미국의 예술가들은 한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들은 입체주의자들에게서 현대 예술의 형식은 추상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예술을 위한 진정한 영감이 잠재의식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던 초현실주의자들도 신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초현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꿈을

깊이 파고들거나 자신들의 환상을 그릴 때, 오직 인식 가능한 형태들만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왜곡되거나 우스꽝스럽거나, 그도 아니면 괴기스럽긴 했지만 말이다. 서로 다투는 두 명의 스승 사이에 놓인 착실한 학생처럼, 미국인들은 당황했고 자신들만의 길을 찾아 나서야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1940년대와 1950년대의 미국 예술계가 처해있던 문제였다. -p. 160-161쪽

관람객을 불편하게 만들고 예술에 내려진 예전이 정의에 들어맞지 않는 작품들을 만드는 것은 아방가르드에 이르는 가능한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예술의 범주를 뒤집어엎는 것이 목표라면, 도대체 왜 예술을 닮은 작품들을 만드는 것인가?
-p. 231쪽

에이즈가 예술 공동체에 엄청난 황페함을 가져오게 되자,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이 관심을 쏟을 만한 주제는 육체와 육체의 과정밖에 없다고 느끼게 됐다. 안무가였던 빌 T. 존스는 자신의 연인을 에이즈로 잃었을 뿐 아니라 자신도 HIV 양성반응자였는데, 그는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알려져 있던 상당수의 무용수들과 함께 '여전히/여기에' 라는 무용을 1994년도에 무대에 올렸다.

'여전히/여기에' 는 신체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골치 아픈 문제들을 모조리 담고 있다. 만약 예술이 당신이 어떤 존재인가 ("나 여기 있어. 난 심각한 병에 걸렸어.")를 선언하는 행위라면, 그것도 여전히 예술인가? 그렇다면 정치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아픈 아이들이 영화클립에 등장해 자선을 호소하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비평가나 관객은 그 개인의 고통을 염두에 두지 않은채 그것을 예술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이는 일종의 정서적인 협박 아닌가? 그렇지만, 어느 예술가의 삶이 진정 치명적인 병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거나, 그 병으로 죽은 친구나 연인의 죽음과 싸우는 것이라면, 이 아방가르드 예술가가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 비극을 자신의 예술로 만들려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랭보에서 자리, 뒤샹, 브르통, 폴락, 케루악, 헨드릭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동안 삶을 예술로 만들고 예술을 삶으로 만든 예술가를 끊임없이 봐오지 않았던가?

치명적인 질병의 결과를 묘사해 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치명적인 질병의 결과이기도 한 신체 예술은 아방가르드의 죽음을 완벽하게 표상해준다. 유행성 페스트가 절정에 달한 지 한 세기가 지난 1400년대에, 예술가들은 춤추는 해골들이 병자들을 무덤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담은 죽음의 춤을 그렸다. 얼핏 보기에, 세상을 바꾸려 했던 아방가르드의 희망은 새로운 죽음의 춤, 즉 이번에는 살아 있는 해골들이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춤으로 끝나버린 듯했다. -p. 239-241쪽

현재는 너무나 완강하다.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더 내딛으려는 시도는 그것이 이루어지자마자, 곧바로 또다른 예술 이벤트, 또 다른 웹 사이트, 클립 파일 속의 또 다른 이미지로 변형되고 만다. 새로워지려는 노력 그 자체가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세계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아니라, 단지 온갖 가능성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p.243쪽

폴록이 1940년대에 물감을 뿌려 만든 그림들은 전후 미국의 모든 가정이 추구한 발자취와 닮았다. 오늘날 그 그림들은 내부에서 보는 웹과 흡사하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매순간을 뒤쫓는 미디어를 통해 이미지, 말, 소리를 주고 받는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인생이라는 길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리라는 희망이 아니라 잡음과 소음뿐이다. 미디어는 이제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구성하는 것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제 아방가르드의 임무는 미래에 대한 정보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끝없이 내뱉는 장광설을 가로질러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치밀하게 구성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p. 244쪽

아방가르드의 존재여부는 바로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있다. -p. 246쪽

가장 발달된 예술과 가장 효과적인 광고가 그 즉시 서로를 비평하고 차용했듯이, 아마도 디지털 세계에서는 기존의 구분법이 완전히 와해될 것이다...가장 급진적인 것일수록 그 즉시 가장 상업적인 것이 된다. 이런 사실조차도 급진적이다. 아방가르드가 완전히 승리를 거두었든 패배를 했든 그 둘 중 하나지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분명히 말할 수 없다. -p.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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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 모르는 개들의 삶
엘리자베스 마셜 토마스 지음, 정영문 옮김 / 해나무 / 2003년 6월
구판절판


인간은 이렇듯 다른 동물의 삶을 해석할 때, 우리의 가치와 경험을 적용하려는 유일한 종족이다. -p. 18쪽

더 깊이 조사하려면 실험이 필요했을 것이다. 즉 미샤의 눈을 가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 데려가 풀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적어도 우리 관계의 본질이 아니었다. -p. 36쪽

미샤는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세인트버나드가 뒤쫓겠다고 결심하고 그를 위혐하는 차들 속으로 내몰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또 미샤로서는 계속 빨리 달려서 세인트버나드가 서있는 곳으로 올 수도 없었다. 거기서 그 개의 공격을 받았다가는 황급히 도망가는 모습을 보이는 따위의 품위 없는 질주를 해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잠시 동안 모든 상황이 미샤에게 불리하게 보였다. 그러나 이내 미샤는 훌륭히 그 문제를 해결해 버리는 것이었다. 미샤는 의기양양하게 머리를 쳐들고, 확신에 찬 깃발마냥 꼬리도 슬쩍 올리더니 갑자기 빠른 속도로 세인터버나드가 있는 방향으로 똑바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도 미샤는 전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고 모두가 알아차릴 때쯤에, 미샤는 마치 세인트버나드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듯이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그 옆을 잽싸게 지나쳐버렸다. -p. 62쪽

첫번째 만남 이후 일주일 가량 지나자 마리아는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스스로 느끼는 모양이었다. 마리아는 네 다리를 꽉 버티고 서서 애정어린 눈길로 미샤를 어깨 너머로 바라보며 꼬리를 거의 몸통에 닿을 정도로 옆으로 비켰다.

그러자 미샤가 앞발을 마리아의 등에 얹으며 올라탔다. 그리곤 둘은 결합했다. 처녀였던 마리아는 한번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으나 발버둥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곧 서로를 껴안았다. 귀가 접혔고,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며 입이 벌어졌다. 체온이 상승하자 두 개의 숨소리가 빨라졌고 엉덩이를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마룻바닥으로 같이 떨어졌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둘의 몸이 떨어졌다가는 곧 서로에게 몸을 돌려 키스를 한 뒤 경쾌하게 방안을 뛰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p. 104쪽

우리가 어떤 일을 해준다 해도, 또 어떤 말을 해준다 해도 마리아를 좀더 침착해지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아무런 경험 없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직면하게 되자 마리아는 두려움을 느꼈고 너무나도 외로워했다. -p. 108쪽

보통 늑대들은 차 안에서 밤을 보냈는데 놀랍게도 달이 저물 무렵이면 창문 쪽으로 몰려와 동쪽하늘을 정신없이 바라보곤 했다. -p.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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