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는 처음부터 정치적이었다.
아방가르드는 신비의 변경,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끝나는 바로 그 곳에서 시작되는 경계를 탐험한다고도 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것을 어떻게 예술로 바꿀 수 있을지 결정해야만 한다.
충격적인 예술이 대중성을 확보했다면, 이제 그 날카로움은 없어져버린 것이 아닐까?
피카비아는 미술이란 이제 어떤 것과 비슷하게 보이는 그 무엇이 아니라, 화가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인상'이라고 주장했다. -p. 17쪽
1917년 1월의 어느 추운 날 밤, 뒤샹과 존 슬로안(팔인회의 일원이자 완고한 사회주의자)을 포함해, 빌리지 사람 여섯 명이 워싱턴 스퀘어 파크의 입구에 있는 아치(1892년, 미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워싱턴의 취임 1백주년을 기념해 워싱턴 스퀘어 파크이 입구에 세운 궁형의 문. 프랑스의 개선문과 비슷한 모양이다) 위로 올라갔다. 흔들거리는 등불 속에서 그들은 "그리니치 빌리지의 미합중국 탈퇴"를 선언하는 문건을 작성했다. 사실, 그들은 일부러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빌리지가 여느 곳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p. 31쪽
만약 색이 자연을 모방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되지 않을 수 있다면, 색은 그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반 무렵에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같은 화가들은 익숙한 모든 세계와 결별이라도 하듯이 더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그들의 눈이 프리즘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러자, 삶의 모든 것들이 파편화된 것처럼 보였다.
1871년의 파리에서 부자들은 동물원의 코끼리와 곰으로 식사를 했지만, 극빈자들은 쥐를 잡아먹었다. -p. 60, 61쪽
나는 모음의 색깔을 발명했다!-A는 검고, E는 하얗고, I는 붉고, O는 푸르고 U는 초록이다. 나는 자음의 형태와 운동을 조절했고, 본능적인 리듬으로 언젠가는 온갖 감각에 다 다다를 수 있는 시 언어를 창조하리라 자부했다. 나는 번역을 거부했다.
.........나는 침묵과 밤에 대해 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 유의했다. 나는 현기증을 응시했다. ( 랭보의 '헛소리' 두번째 시편 중에서 )
아방가르드의 완전한 한 쪽 날개는 니체와 허무주의에서 생겨난 것. -p. 67, 69쪽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그림을 꼼꼼히 관찰하고, 유럽에서 망명해온 예술가들을 만나는 일에 가슴 설레했던 미국의 예술가들은 한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들은 입체주의자들에게서 현대 예술의 형식은 추상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예술을 위한 진정한 영감이 잠재의식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던 초현실주의자들도 신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초현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꿈을
깊이 파고들거나 자신들의 환상을 그릴 때, 오직 인식 가능한 형태들만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왜곡되거나 우스꽝스럽거나, 그도 아니면 괴기스럽긴 했지만 말이다. 서로 다투는 두 명의 스승 사이에 놓인 착실한 학생처럼, 미국인들은 당황했고 자신들만의 길을 찾아 나서야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1940년대와 1950년대의 미국 예술계가 처해있던 문제였다. -p. 160-161쪽
관람객을 불편하게 만들고 예술에 내려진 예전이 정의에 들어맞지 않는 작품들을 만드는 것은 아방가르드에 이르는 가능한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예술의 범주를 뒤집어엎는 것이 목표라면, 도대체 왜 예술을 닮은 작품들을 만드는 것인가? -p. 231쪽
에이즈가 예술 공동체에 엄청난 황페함을 가져오게 되자,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이 관심을 쏟을 만한 주제는 육체와 육체의 과정밖에 없다고 느끼게 됐다. 안무가였던 빌 T. 존스는 자신의 연인을 에이즈로 잃었을 뿐 아니라 자신도 HIV 양성반응자였는데, 그는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알려져 있던 상당수의 무용수들과 함께 '여전히/여기에' 라는 무용을 1994년도에 무대에 올렸다.
'여전히/여기에' 는 신체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골치 아픈 문제들을 모조리 담고 있다. 만약 예술이 당신이 어떤 존재인가 ("나 여기 있어. 난 심각한 병에 걸렸어.")를 선언하는 행위라면, 그것도 여전히 예술인가? 그렇다면 정치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아픈 아이들이 영화클립에 등장해 자선을 호소하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비평가나 관객은 그 개인의 고통을 염두에 두지 않은채 그것을 예술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이는 일종의 정서적인 협박 아닌가? 그렇지만, 어느 예술가의 삶이 진정 치명적인 병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거나, 그 병으로 죽은 친구나 연인의 죽음과 싸우는 것이라면, 이 아방가르드 예술가가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 비극을 자신의 예술로 만들려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랭보에서 자리, 뒤샹, 브르통, 폴락, 케루악, 헨드릭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동안 삶을 예술로 만들고 예술을 삶으로 만든 예술가를 끊임없이 봐오지 않았던가?
치명적인 질병의 결과를 묘사해 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치명적인 질병의 결과이기도 한 신체 예술은 아방가르드의 죽음을 완벽하게 표상해준다. 유행성 페스트가 절정에 달한 지 한 세기가 지난 1400년대에, 예술가들은 춤추는 해골들이 병자들을 무덤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담은 죽음의 춤을 그렸다. 얼핏 보기에, 세상을 바꾸려 했던 아방가르드의 희망은 새로운 죽음의 춤, 즉 이번에는 살아 있는 해골들이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춤으로 끝나버린 듯했다. -p. 239-241쪽
현재는 너무나 완강하다.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더 내딛으려는 시도는 그것이 이루어지자마자, 곧바로 또다른 예술 이벤트, 또 다른 웹 사이트, 클립 파일 속의 또 다른 이미지로 변형되고 만다. 새로워지려는 노력 그 자체가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세계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아니라, 단지 온갖 가능성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p.243쪽
폴록이 1940년대에 물감을 뿌려 만든 그림들은 전후 미국의 모든 가정이 추구한 발자취와 닮았다. 오늘날 그 그림들은 내부에서 보는 웹과 흡사하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매순간을 뒤쫓는 미디어를 통해 이미지, 말, 소리를 주고 받는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인생이라는 길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리라는 희망이 아니라 잡음과 소음뿐이다. 미디어는 이제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구성하는 것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제 아방가르드의 임무는 미래에 대한 정보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끝없이 내뱉는 장광설을 가로질러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치밀하게 구성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p. 244쪽
아방가르드의 존재여부는 바로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있다. -p. 246쪽
가장 발달된 예술과 가장 효과적인 광고가 그 즉시 서로를 비평하고 차용했듯이, 아마도 디지털 세계에서는 기존의 구분법이 완전히 와해될 것이다...가장 급진적인 것일수록 그 즉시 가장 상업적인 것이 된다. 이런 사실조차도 급진적이다. 아방가르드가 완전히 승리를 거두었든 패배를 했든 그 둘 중 하나지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분명히 말할 수 없다. -p. 24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