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몸 여성의 나이 또하나의 문화 16
또하나의문화 편집부 엮음 / 또하나의문화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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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열면 맨 처음 다섯 개의 연작 사진을 볼 수 있다. 포즈가 조금씩 다른 벌거벗은 중년의 여성 얼굴 위에 순서대로 활짝 핀 노란 장미와 다리미, 반을 가른 사과, 커다란 물주전자, 그리고 약간 시든 노란 장미가 각각 포개져 있다. 여성의 몸은 유방과 배가 늘어져 있으며 팔과 다리에는 군살이 붙고 배에는 자글자글 주름도 있다.

'인간적 삶의 양식을 담은 대안적 문화를 만들고 실천하는' 모임인 '또 하나의 문화'에서 펴낸 동인지 제 16호인 이 책은 여성의 몸과 여성의 나이, 여성의 성을 다룬 책이다. 얼마 전 티비에서 모진 시집살이를 겪던 한 여성이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쫓겨나면서 버려둔 자식 셋을 칠십을 넘긴 지금에 와서 찾는 장면을 봤다. 처음에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환영받지 못하는 딸에서 출발하여 집사람으로, 며느리로, 아이의 엄마로 끊임없이 가족에 소속되어 원치 않는 특정한 임무와 희생을 부여받으며 살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 시대에 며느리는 시아버지에 있어 다 자란 아들의 성적인 대상이며 일손을 하나라도 더 낳아줄 암컷일 뿐이었다. 모든 분노와 노여움, 증오 등의 감정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표출할 수 있는 손쉬운 대상이며 또한 쉽게 다른 암컷으로 교체할 수 있는 소모품 정도로 여겨졌다. 이제 야만적인 시대는 갔다고 해도 여전히 거개의 여성들은 결혼에 뒤따르는 주부와 며느리로서의 책임과 중압감, 오로지 아기엄마에게만 집중되는 육아의 의무, 생계의 책임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굴레를 짊어지고 신음하고 있다.

이 책은 여성의 몸 자체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더불어 이처럼 연령에 따라 여성이 사회에서 갖는 역할을 구분짓고, 그 안에서 각자가 선택한 생활 방식에 따른 다른 모습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여성 자신이 자신의 몸을 체험하며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몸이 열등하거나 혹은 성의 대상으로만 다뤄지는 잘못된 시각에서 벗어나 '여성의 몸을 드러내면서 남성 중심적 근대의 기획을 비판하고 몸의 체험을 언어화하는 것이 세상 바꾸기의 첫걸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십대와 이십대의 여성의 몸을 다룬 장 중 '몸과의 화해'는 사춘기 때의 경험으로 왜곡된 성의식을 지니게 된 여성이 성장하며 음란한 상상과 절대무감의 시간 등을 거치면서 자신의 성의식을 자리잡아 가는 과정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필자는 어린시절의 기억을 성찰하는 데 집착하다가 몸과의 화해를 통해 하나의 장막을 걷어버리고 한걸음 앞으로 나간다.

...물론 그 애가 "쾌락주의"라는 뜻은 아니다. 나른하게 밀려오는 잠에 솔솔 곯아떨어지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건강함이란 이런 것이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의 느낌을 과장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표현하는 것, 아무런 터부를 갖지 않는 것, 단 하나의 터부는 "폭력"과 "무배려"일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눈물나게 부러워하면서 내 경험의 한 국면을 건너는 느낌을 받았다...

책을 읽으며, 외부의 온갖 자극과 머리에서 그리고 가슴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날것의 감정과 반응을 힘겹게 여과하며 견뎌내고, 소리 없이 변화해 가는, 하루하루 시간에 적응해 가는 육체로서의 내 몸이 자랑스럽게 여겨진다. 경이롭게 느껴진다. 힘겨워 하지 말라고, 가끔은 쉬어가도 된다고, 너는 훌륭하다고 내 몸에게 토닥이며 속삭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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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im 2004-06-18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몸을 보고 제일 처음 감동했던 것이 <낮은 목소리>를 보고였어요.. 영화 마지막에서 할머니의 벗은 몸을 흑백(흑백이 맞았나.. 기억이 가물가물;;)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거보면서 얼마나 울었던지....... 자신의 몸에 대해 당당해지고 토닥거려줄지도 알아야하는데... 너무 막;; 굴리는 듯...

요즘은 가끔 스스로를 꼬옥 안아주려고 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지만 조금씩 조금씩 받아들여가면 되겠죠. 다리 좀 짧고 배 좀 나왔으면 어떻습니까... 님의 표현대로 "외부의 온갖 자극과 머리에서 그리고 가슴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날것의 감정과 반응을 힘겹게 여과하며 견뎌내고, 소리 없이 변화해 가는, 하루하루 시간에 적응해 가는 육체로서의 내 몸"인데요. ^^

superfrog 2004-06-18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특한 내 몸이니 맛난 것도 주고,
맛난 술도(^^;;) 먹이고,
달디단 잠도 재우고,
재밌는 만화도 읽게 하고,
즐거운 일도 많이 많이 시키렵니다..
가끔 날잡아 토닥여 주고 안아 줍시다..^^

참 어제 당산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딱 변영주 감독 덩치로 머리는 자연스럽게 헝클어지고 목과 소매끝이 해진 티셔츠를 입은 사람의 뒷모습을 봤는데-앞모습은 확인을 끝까지 못했어요;;-그냥 멋대로 변영주 감독이라 믿고 혼자 반가워했어요..^^;;

2004-06-18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4-06-18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근소근님, 행간의 의미를 잘 알겠습니다..^^ 저도 느끼고 있던 부분이에요.. 슬며시 낯부끄럽습니다..

alpachino 2004-06-2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문에서 나온 책은 나에게도 많은 의미와 깨달음을 주었었다.
예전 또문 책과는 다르게 표지조차 이쁘게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더욱 반가웠던 책.
예전 책들은 편집자의 눈으로 보면 좀 보여짐이라는 부분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긴 어려웠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