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단편 작가로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캐나다 태생의 작가 앨리스 먼로라는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음과 같다.

20세기 현대 단편 소설의 대가

20세기 여자 체홉

진정한 이야기꾼

언어의 연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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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시골 마을 윙엄에서 여우 농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앨리스 먼로는 10대 시절부터 단편을 쓰기 시작했던 문학 소녀였다.

웨스턴 온타리오대학 영문과 재학 중 단편 '그림자의 차원'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등단한 앨리스 먼로는 대학 동기와 결혼 후 학교를 그만 두고 남편의 고향에 서점을 경영하며 세 아이를 낳는다.

육아와 서점 경영을 하는 중에도 틈틈이 글을 썼던 앨리스 먼로는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절 당한 끝에 1968년에 첫번째 단편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발표 하면서 작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단편보다 장편을 선호 했던 캐나다 문학계에서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은 길지 않은 분량 속에 도시와 지방, 욕망과 규칙, 현실과 이상, 도덕과 자유 사이에서 번민 하고 갈등하고 갈망하는 지극히 평범한 이들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어서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첫번째 단편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으로 앨리스 먼로는 작품 활동하는 내내 총독 문학상을 모두 세 차례 받으며 캐나다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2009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 하면서 전 세계 단편 소설 작가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고 2012년 13번째 단편집 <디어 라이프> 출간 이후 절필을 선언 한 앨리스 먼로는 2013년 마침내 전 세계 작가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들 중에서 장편이 아닌 단편집으로 수상 한 앨리스 먼로는 작가들이 평생에 걸쳐 이룩하고 성취 할 수 있는 모든 영광과 스포트라이트를 한번에 받은 전무후무한 작가였다.

노벨상 발표 당시 고령의 나이에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앨리스 먼로는 2013년 수상식 자리에 그녀의 딸이 대신 참석해서 메달을 받고 수상 소감을 발표 했다.

앨리스 먼로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치밀할 정도로 균일한 완성도와 작품의 깊이를 갖춘 작가로 오랜 세월 함께했지만 소통이 불가능한 결혼 생활, 우연한 인연이 남기고 간 상처를 뒤돌아보며 흘리는 눈물, 사회와 가정이라는 도덕적 규범과 암묵적 관습과 도저히 벗어나기 힘든 운명적 굴레의 수레 바퀴 아래 깔린 채 현실의 숨 막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여성의 삶을 섬세한 필체로 그렸다.

캐나다의 여성 체홉 또는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불리고 있는 앨리스 먼로는 2024년 5월 92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작가가 타계한 지 두 달 후 2024년 7월 미국 뉴욕 타임스가 21세기 베스트 북 100권 리스트에 올라가면서 앨리스 먼로를 둘러싼 충격적인 사건이 수면에 등장했다.

 

1951년, 대학교 1학년 때 결혼을 한 앨리스 먼로는 첫째 딸 셰일라를 낳고 나서 학교를 그만두고 둘째 딸 캐터린은 신장이 기형으로 태어나서 이틀 만에 사망하고 이 년 후 셋째 딸 제니를 낳는다.

1963년 학업을 마친 남편이 서점 경영을 시작하고 2년 후 막내 딸 안드레아가 태어난다.

막내 딸이 태어났던 시기 부터 서점은 장사가 잘 되어서 대 도시 빅토리아로 옮기고 회사 이름을 먼로 서점이라고 바꾼다.

먼로 서점은 캐나다 내에서 유명한 도서 유통 판매 회사로 규모가 큰 사업체가 되었지만 부부 사이에 균열이 생겨서 1972년에 두 사람은 이혼한다.

이혼 후 앨리스 먼로는 고향 온타리오주로 돌아가서 서부 온타리오 대학에서 운영하는 작가 레지던시에 들어가 창작 활동과 학업을 동시에 이어나갔다.

1976년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앨리스 먼로는 같은 대학의 지리학과 교수 제럴드 프레민과 재혼한다.

이후 작가로 명성을 얻은 앨리스 먼로는 두 번째 남편 프레민이 세상을 떠나기 전인 2013년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 했다.

여기까지가 세상에 알려진 작가 앨리스 먼로의 이력이다.

 

2024년 뉴욕 타임스는 기성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추천한 100권 중에서 독자들이 10권 씩 투표 한 결과를 바탕으로 21세기 베스트 북 100권 리스트를 발표 했고 그 리스트에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이 올라갔다.

이 리스트가 발표되는 시점에 캐나다 일간지 토론토 스타에 앨리스 먼로 딸의 충격적인 이야기가 게재되었다.

캐나다 일간지 토론토 스타에 게재된 기사에 따르면 1976년 40대였던 어머니 먼로의 집을 방문했던 9살 짜리 막내 딸 안드레아가 50대였던 의붓 아버지 프렘린의 집을 방문했을 때 프렘린이 자신이 자던 침대로 올라와서 처음 성폭행을 했다는 증언이 실렸다.

막내딸 안드레아는 이후 몇 년 동안 의붓 아버지 프렘린에게 강제로 차에 태워졌고 그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며 성적으로 괴롭혔다.

어린 여자아이를 상대로 성적 학대와 성폭행을 즐겼던 프렘린은 의붓딸 안드레아에게 엄마 앨리스 먼로의 기이한 성욕에 대해 떠벌렸고 자신이 좋아하는 이웃집 어린 여자아이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악마였다.

의붓아버지 프렘린은 먼로의 딸 안드레아가 10대가 되면서 관심을 잃기 시작했고 안드레아는 성인이 되어서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엄마 먼로는 딸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서 ' 무슨 일이 일어났든 그것은 나와 내 의붓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단호하게 선을 긋고는 자신의 단편에서는 의붓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후 극단적 선택으로 숨진 여성의 이야기를 그렸다.

안드레아가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과 성적 학대 휴우증으로 폭식증, 불면증, 편두통에 시달리는 동안 엄마 먼로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졌다.

결국 딸 안드레아는 2000년대 초반 먼로가 자신의 두 번째 남편 프렘린을 '용감한 인물'이라고 묘사한 잡지 인터뷰를 읽고 경찰에 신고하고 2005년 당시 80세였던 프렘린은 온타리오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

법정에 선 의붓 아버지 프렘린은 오히려 의붓딸 안드레아가 자신을 유혹 하고 침실에 침입했다고 법정에서 주장하며 뻔뻔한 태도를 유지했다.

의붓딸 안드레아를 성폭행 한 과거 범죄 이후 몇 차례 다른 여자 아이에게 저지른 범죄 혐의가 발견되었지만 온타리오 법원은 프렘린이 고령인 나이를 고려해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법정 분쟁과 소송으로 번진 이 모든 사태를 지켜 보았던 작가 앨리스 먼로는 딸 안드레아에게 일말의 사죄나 사과는 커녕 자신의 딸이 마치 두 번째 남편 프렘린과 불륜을 저지른 것처럼 격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기자들 앞에서 그녀는 문학적인 언어로 평생 끔찍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딸을 향해 태연하게 이런 말을 남겼다.

'너무 늦게 알게 되었구나. 하지만 난 그를 너무 사랑하고 있어.

욕구를 억누르고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부모에게 무언가 보상 받을 것 기대 하지 마라. 무슨 일이 일어났든 의붓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일 뿐 나와는 상관 없다.'

그녀는 법원 판결 이후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서 잠시 프렘린을 떠났다가 다시 프렘린 곁으로 돌아와 2013년 그가 숨질 때까지 곁을 지키며 부부 생활을 이어갔다.

캐나다 국민 작가로 추앙 받고 있는 앨리스 먼로의 전기를 집필한 작가 조차 두 번째 남편이 막내 딸을 지속적으로 성폭행 했던 걸 은폐 했고 작가의 에이전트들도 철저하게 작가의 사생활이라고 함구 해 왔다.

최근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앨리스 먼로는 2013년 절필 선언 무렵부터 2024년 숨질 때까지 10여 년동안 치매를 앓아서 2013년에 노벨상을 수상 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 하지 못했고 가족의 이름이나 얼굴 조차 깡그리 잊어 버렸다.

현대 단편 소설의 대가의 문학적 상상력은 가족의 어둠과 상처 속에서 태어났던 것일까?

2013년 그토록 사랑했던 두 번째 남편이자 변태 성욕자인 악마 프렘린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발표한 <디어 라이프>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 중에서

거의 모든 전세계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앨리스 먼로는 캐나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다른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이 일만큼 끌렸던 것은 없었고, 그러니 내 삶에는 다른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앨리스 먼로가 남긴 작품 속 인물들은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젊은 여자, 루게릭병을 앓는 남편, 알츠하이머병에 접어든 아내 등 제각각 보이지 않는 상처를 안고 있었다.

작가는 이 모든 사람들의 삶을 한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냈지만 정작 자신의 딸이 성적 학대와 성폭행을 당한 것에 대해선 너와 의붓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선을 긋고는 마치 자신의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 여자로 대했다.

문학은 인간의 상처 곁에 가장 가까이 있었다.

​

알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 된다…….

내 앞에 그리고 너의 앞에 어떤 운명이 가로 놓여 있는 지를

-앨리스 먼로(1931-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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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3일 스웨덴 한림원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의 이름을 호명 했을 때 전 세계인들은 귀를 의심했다.

소설가나 시인과 같은 문인이 아닌 대중음악인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 일은 전 세계 문학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였다.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을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

종이에 쓰여진 글이 아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가수에게 문학상이 수여 된 것을 놓고 전 세계주요 언론과 평론가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에서 밥 딜런의 수상이 ‘적절하다’,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으로 나눠졌다.

1960~70년대 베트남 전쟁으로 인권운동과 흑인차별 등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이 뜨거울 때 수많은 명곡을 남기면서 청춘의 우상이자 저항의 아이콘이 된 밥 딜런의 노랫말에는 정치와 사회, 문학 등 여러 분야를 망라한 내용이 시적으로 담겨 있어서 미국의 여러 대학 영문과에서는 그의 시를 분석하는 강좌가 개설되기도 했다.

밥 딜런이 음악적 전성기를 보냈던 시절에 세상에 존재 하지 않았던 나는 그의 음악성이나 가사적 의미가 시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미국 포크송을 좋아 하지 않기 때문에 밥 딜런이 수상자로 적임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스웨덴 한림원측에서 문학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 고정적 관념과 역할보다 독자, 대중과의 공감을 중요시한 결정 이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시와 소설 형식을 문학이라 지칭 했던 세상은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에는 가사가 문학의 장르로 편입되었음을 입증했다.

 

1941년 미국 미네소타의 시골 마을에서 로버트 앨런 지머맨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영국 시인 딜런 토마스에게서 영향을 받아 본인의 이름에 ‘딜런’이라는 이름을 붙여 개명했다.

1961년 음악에 대한 열정이 들끓어 올랐던 밥 딜런은 자신의 우상인 우디 거스리를 만나기 위해 통기타를 매고 대 도시 뉴욕으로 올라온다.

대공황기 미국 노동자들의 고난과 고통을 함께 하며 그들의 애환을 부른 가수 우디 거스리는 “이 기계는 파시스트를 죽이기 위한 것(This Machine Kills Fascists)”이라는 문구를 기타에 새기고 다녔을 정도로 그의 모든 음악은 정치적이였다.

하지만 우디 거스리를 우상으로 생각했던 밥 딜런의 관심사는 정치적 구호나 사회운동이 아닌 오로지 음악뿐이였다.

밥 딜런을 저항의 아이콘이자 시민 운동에 뛰어들게 만들었던 인물은 그의 첫 사랑 '수지 로톨로'다.

1961년 교회에서 노래를 불렀던 밥 딜런은 수지를 처음 보는 순간 눈을 떼지 못하고 사랑에 빠진다.

이탈리아계 이민자 부모의 영향으로 공산당원으로 활동 했던 수지는 세상 돌아가는 것에 도통 관심이 없었던 밥 딜런을 나라 안 밖으로 요동치던 정치,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해서 그를 시민 운동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1962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암살과 베트남 전쟁 등 혼란기에 빠진 미국 사회를 웅얼거리듯 읊조리는 창법으로 무대에 등장한 밥 딜런은 1963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핵 전쟁의 먹구름이 밀려 오던 날, 밥 딜런은 기타를 메고 평화 구호를 외치는 청춘들이 모여 있는 가스라이트에서 전쟁광을 저격하는 반전가요 Masters of War를 열창한다.

1969년 8월 미국 뉴욕 베델공원에서 사흘 내내 밥 딜런은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라이크 어 롤링 스톤즈’ 노래를 젊은이들과 함께 부르면서 사회저항운동에 있어 상징적인 뮤지션이 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몇 일 동안 제대로 씻거나 빗질 조차 하지 않은 모습의 밥 딜런은 정확하지 않은 발음과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리듬도 박자도 무대에 올라 갈 때 마다 제멋대로 불렀지만 데뷔 이후 그래미상만 11회 수상했으며, 영화 주제곡으로 골든글로브는 물론 아카데미까지 휩쓸었다. 2008년에는 퓰리처상 공로상을 수상했고 마침내 2016년 80세를 바라 보는 나이에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다.

음악적인 명성과 부를 모두 거머쥔 그의 삶은 완벽해 보였지만 실제로 그가 살아 온 인생은 삼류 드라마 막장과 흡사했다.

여성 편력이 심했던 밥 딜런은 1960년대 저항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주었던 수지에게 1963년 임신 중절 수술을 시키고 새로운 음악적 뮤즈인 조안 바에즈와 함께 활동 하다가 또 다른 뮤즈를 만나 자신의 음악 인생을 위해 헤어진다.

이후 사라 라운즈 클레어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여러 여자들을 사귀다가 엄청난 금액의 위자료와 소송비용 등으로 재산을 탕진한 밥 딜런은 자신의 곡 600곡 판권을 유니버셜 음반사에 3억을 받고 팔어 버리고 순회공연에 나서서 생활고를 만회하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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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에게 마약을 가르쳐준 장본인이라는 걸 자랑스러워 했던 밥 딜런은 스스로를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라 지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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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이 스무살이였던 1961년부터 1965년까지 4년의 시간을 담은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 하던 연인 수지와 미국 대중음악사에 흔적을 남긴 음악인들 틈에서 음악에 열정을 쏟아 붓는 팝의 전설의 청춘 시절의 모습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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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로 이 영화의 중심 스토리는 브라운관 시대가 도래 하고 화려한 영상과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음악가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의 시대에서 기타 한 대를 메고 무대에서 라이브 실력을 보여 주었던 진정한 음악 장인들이 활동했던 시절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까지 밥 딜런과 청춘을 함께 했던 세대들은 그가 무대에서 어떤 모습이나 상태로 노래를 불러도 박수를 쳐 주지만 그는 무대에서 가장 성의 없고 재미없는 공연을 하는 가수로도 유명하다.

선약이 있다며 노벨문학상 시상식에도 가지 않았던 밥 딜런은 자신을 지칭하는 저항의 아이콘, 팝의 역사, 노벨 문학상 수상 같은 타이틀이나 이력 조차 무색 할 정도로 그는 원곡의 멜로디를 몹시 변형하거나 발음을 흘려서 부르는 등, '원곡의 감동'을 재현하는 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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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자신을 찾는 게 아니에요.

어떤 것도 찾는 게 아니죠.

인생이란 자신을 창조하는 일입니다."

- 밥 딜런(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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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러분은, 이렇게 사람들이 강이라고 하거나,

우유가 흘러내린 흔적이라고 하는 이 뿌옇고 하얀 게,

사실은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미야자와 겐지 <은하철도의 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우유가 흘러내린 흔적'이 무엇인지 묻자 캄파넬라가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수줍음이 많은 조반니는 들다 만 손을 황급히 내린다.

선생님의 질문에 은하수라고 대답한 캄파넬라는 친구 조반니가 머뭇거리고 망설일 때마다 곁에서 챙겨주는 따스한 친구로 은하 축제의 날에 하늘타리 열매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 등불을 넣어 강에 띄우는 놀이를 하러 함께 간다.

캄파넬라와 달리 다른 친구들은 가난한 조바니가 엄마를 위해 우유를 사 오던 그날 놀이에 끼워주지 않아 조반니는 홀로 언덕에 올라가 밤하늘을 바라본다.

'은하정거장, 은하정거장.'

언덕 풀 밭 위에 누워 있는 조반니의 눈 앞에 갑자기 수억 마리의 반딧불이 날아오르듯 불빛이 쏟아지고 정신을 차린 조반니는 어느새 기차 안 열차석에 앉아 있다.

이곳과 저곳의 세상을 가로 질러 달리는 은하철도

은하 열차에 탑승한 조반니는 세상을 초월하는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아들과 나란히 버스 맨 뒤에 앉아 버스가 습지대 남쪽을 크게 우회 하는 동안에 셸터 콘크리트 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셸터의 위치를 그와 같이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될까? 그것은 세계의 마지막 전쟁이 일어난다면 핵폭발의 열과 충격파가 이 도시를 엄습하기 전에 냉정함과 끈기를 가지고 진과 함께 걸어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심한 열로 콘크리트의 외벽이 번쩍거린 다음에 이어질 충격파는 어린아이의 귀에도 울릴 것이다. 이사나는 그때 평온하게 속삭이는 듯한, ‘세계의 끝, 입니다’라는 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오에 겐자부로의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중에서

핵전쟁의 위기 속에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 진과 함께 아버지 이사나는 핵 방공호로 짓던 지하에 건물을 쌓아 올린 형태의 '핵 셸터'에 은둔한 채 세상과 단절한다.

은둔하는 남자 이사나는 자신을 나무와 고래의 대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아들 진의 미래를 고래에게 부탁하며 세상을 움직이는 건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라 믿고 버려지기 쉬운 존재인 스스로를 구원하겠다는 의지로 세상에서 낙오된 청년들과 연대 해서 정부와 맞선다.

이사나가 쥔 총엔 정확히 다섯 발의 총알만 장전 되어 있다.

그 다섯 발의 총알로 무력으로 진압 하려는 정부를 무너뜨리지도 못하고 핵전쟁의 위협에 처해 있는 세상을 구원하지도 못한다.

당신은 나라의 미래가 닫힌다 해도 자신은 나이가 들어 얼마 못 살 테니, 책의 지식만은 어떻게든 지닌 채로 죽자, 라고 말할 사람 아닌가요?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모습을 보이게 됐을까.

-오에 겐자부로의 <만년 양식집> 중에서

2023년 3월 3일 오에 겐자부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책장에서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모조리 꺼냈다.

몇 편의 단편집과 장편집은 추가로 해외 주문을 해 놓고 그의 초기작 부터 읽기 시작해서 전부 완독 했다.

오에는 생전에 인터뷰도 활발하게 했지만 주요 매체에 기고글도 많이 남겼다.

아들 히카리와 함께 나온 다큐부터 노벨상 수상식을 하러 스웨덴으로 떠나는 여정을 담은 영상까지 보면서 나는 오에가 세상에 남긴 글을 읽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이 결정되던 날 밤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생생합니다.

1994년 10월 13일, 저녁 9시가 조금 넘어서 였지요.

전세 승용차에서 전화를 받은 교도통신 기자가 '아앗!'하고 다소 만화적으로 외치는 바람에 도쿄의 세이조 자택 앞에 모여 있던 저희들은 순간적으로 수상이 결정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삼사십 명이 있었던가요?

''일본 현대 작가들이 쌓아 올린 업적 덕분에 살아 있는 내가 수상한 것이다...'

이 말이 제 입에서 떨어지자 마자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받아 적던 기자들 모습이 제 시야에 들어 왔습니다.

두 다리가 후들 후들 떨렸고 '도대체 내가 여기 왜 서있지?'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뉴스에 제 얼굴과 목소리로 전부 도배 되고 온갖 신문 잡지 마다 제 얼굴이 표지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기자들 40명 정도가 저희 집에 찾아 왔고 그리고 몇 달 후 마침내 수상식이 열리는 스웨덴으로 날아갔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 와서 앞서 인터뷰 예약을 한 기자들과 몇 시간 동안 인터뷰를 마친 후 침대에 누웠습니다.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눈을 뜬 저는 거울을 보고 이렇게 중얼 거렸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세상을 향해 마음껏 목소리를 높이자.'

-오에 겐자부로

오에 겐자부로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일본 사회를 향한 발언과 행동에 거침 없었고 어떤 협박과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아베가 죽기 몇 달 전 어느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오에 겐자부로의 선한 눈빛과 미소 뒤에 숨은 결의가 섬짓 했다는 말을 했고 정확히 100살을 채운 헨리 키신저는 미소를 띄우며 유창한 영어로 자신에 맹렬하게 질문을 퍼붓던 오에 겐자부로를 어디서든 마주치는 게 껄끄러웠었다고 회고록에서 언급 했을 정도로 인간 오에 겐자부로는 어떤 국가, 어떤 권력 앞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외쳤다.

'내가 쓴 소설이 인쇄되고 있는 이상, 남아 있는 몇 권의 책이 미래에 소수의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어 사람들이 열중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때 나는 유령이 되어 나타나서 '그렇습니다. 나는 재미있는 것을 썼습니다 ! 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오에 겐자부로가 남긴 책을 전부 완독 하고 난 후 중국의 대 문호 '루쉰'이 남긴 글을 차례 차례 읽어나갔다.

인류의 멸망은 매우 외롭고도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몇몇 사람의 멸망은 결코 외롭거나 슬프지 않다. 생명의 길은 진보 하는 것이다.

항시 무한한 정신이라는 삼각형의 빗면을 따라 올라가니 어떤 것도 그를 방해 할 수 없다.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부조화는 여전히 많다. 인간 스스로 시들고 타락하고 퇴보한 것도 여전히 많다. 그러나 생명은 결코 이 때문에 돌아보지 않는다. 인간의 절박하고 완벽한 잠재력은 어둠이 몰려와 대세를 막아도 비참함이 사회를 습격해도 죄악이 사람의 도를 더럽히더라도 항상 이런 철가시를 즈려 밟고 앞으로 나아간다.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의 면전에서 웃으며 뛰며, 멸망하는 사람들을 뛰어 넘어 앞으로 나아간다.

무엇이 길인가? 바로 길이 없던 곳을 밟아 길을 만들어 낸 곳이다. 가시덤불만 있던 곳을 개척하여 만들어 낸 곳이다.

이전에도 길이 있었으니 이후에도 영원히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인류는 외로울 리 없다.

왜냐하면 생명이 향상적이고 낙천적이기 때문이다.

-루쉰의 생명의 길 중에서

1945년 8월 15일, 정오 뉴스에 방송된 일본 제국의 종전 선언을 한지 78년의 시간이 흘러 2023년 8월 24일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시작했다.

자신들부터 살겠다며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기 시작하자 전문가들은 앞다퉈 실시간으로 방사능 오염 진단 키트를 꺼내 들고 문제 없다고 외치고 있다.

맑은 샘물에 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샘물은 전과 다름 없이 맑고 투명하다. 한 방울, 두 방울 그리고 연달아 핏물을 쏟아 부어버리면 어디선가 엄청난 양의 조류가 닥쳐 오지 않은 이상 샘물은 어느새 붉은 핏물로 가득 차 버리고 차츰 시간이 흘러 악취가 나는 오염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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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껏 얼마나 많은 생명을 해쳤습니까. 그런데 제가 잡아먹히게 되자 도망치다 이 꼴이 되었습니다. 이왕에 죽을 거라면 족제비에게 잡아먹혀 족제비가 오늘 하루 목숨을 잇도록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신이여, 다음엔 이렇게 쓸모 없이 버려지지 않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 쓸 수 있게 해주세요.'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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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 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이 정거장에서 하나 둘 내리고 마지막 조반니와 그의 유일한 친구 캄파넬라 친구만 덜렁 기차 안에 남겨진다.

'캄파넬라 ,다시 우리 둘만 남았네. 어디까지든 함께 가자 나는 이제 그 전갈 처럼 정말로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 몸 따위는 백 번이고 불에 탄다고 해도 상관없어.'

1924년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며 무자비한 폭력을 저지를 때 미야자와 겐지는 <은하철도의 밤>을 썼다.

' 나 이제 저런 커다란 어둠 속이라도 두렵지 않아.

정말로 모든 사람의 진정한 행복을 찾으러 가겠어.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우리 함께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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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마지막 탑승권을 손에 쥔 조반니는 친구 캄파넬라는 죽어서 은하 끝 하늘나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깨닫는다.

무시 무시한 무기로 세상의 반을 불태우며 이웃 국가의 무고한 생명들을 마구 짓밟은 일본은 자신들만 살겠다고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 하고 있다.

핵과학자들(미국 핵과학자회보·BSA)이 인류 멸망까지의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만든 '운명의 날 시계'가 2023년 1월 1일 '자정 90초 전'으로 3년 만에 10초 앞당겨졌다.

그리고 8월 24일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시작으로 10초 더 앞당겨졌고 휴먼노보이드로 대륙 굴기를 하고 있는 중국은 전기 먹는 인공지능 제국을 꿈꾸며 매년 원전 건설 10기의 기록을 세울 태세를 보이고 있다.

세금 걷어가는 루팡들에게 유리지갑을 탈탈 털리는 시민들이 현 세대와 미래 세대의 앞날을 걱정 한들 이 세상은 이전 시대로 회귀 하지 않을 것이고 '운명의 날 시계'는 지금 보다 더 빠른 속도로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


상처투성이인 나를 벌거벗기고,

당신이 따온 약초 기름을 발라주면서 어머니는 탄식했다.

아이들이 듣고 있는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살 수 없다고 말해도 되나?

그리고 어머니는 나에게 오랫동안 수수께끼가 될 말을 이어갔다.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만년 양식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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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노벨 문학상에서 여성 수상자들은 총 17명으로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1909년 스웨덴의 여류소설가 셀마 라게를뢰프(1858~1940)다.

셀마는 교사로 활동하던 1885년 고향인 베름란드의 제철소 주인과 소지주들의 생활상을 연대기 순으로 서술한 첫번째 소설 '예스타 베를링의 이야기'를 발표하며 1890년대 스웨덴 낭만주의 부흥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

1909년에 셀마가 수상한 이후 17여년 동안 남성에게 문학상이 수여 되다가 1926년 이탈리아의 소설가 그라치아 델레다가 여성으로 두 번째 수상을 했다.

노벨위원회 측은 노벨 문학상 분야에서 여성에게 연이어 상을 수여 한 적이 없이 그동안 드문 드문 상을 수여 해왔다.

2024년 한강 작가의 수상으로 마침내 아시아권에서  최초의 여성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탄생했다.

2000년대 부터 영국 도박사이트 나이서오즈(Nicerodds)에서 노벨 문학상 유력 후보 배당률을 주고 있는 여성 작가들은 미국의 조이스 캐롤 오츠와 캐나다의 마거릿 애트우드이고 2010년대 부터 영어권에서 활발하게 출간 되고 창작 수업에서 교재로 쓰이고 있는 중국 작가 찬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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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생인 조이스 캐롤 오츠는 미국 현대 문학의 거장이자 거의 모든 장르를 종횡 무진 쓰며 매년 두 세권의 벽돌 부피의 책을 출간할 정도로 왕성한 필력에 선두주자다.

시라큐스 대학 시절에 발표한 단편 소설로 단번에 출판사로 부터 출간 제의를 받았을 정도로 일찌감치 문학적 재능을 싹 틔웠던 캐롤 오츠는 1960년대부터 50편이 넘는 장편과 1000편이 넘는 단편 소설을 동시에 집필하면서 틈틈이 시와 산문을 쓰고 여러 문예지에 비평을 발표 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희곡을 쓰는 무시 무시한 필력으로 그녀가 매년 쏟아내는 작품에 대해 비평을 하려 달려드는 비평가들이 없을 정도로 문학계 괴물로 불리고 있다.

동시대 작가들은 조이스 캐롤 오츠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하고 있다.

‘문학의 여성’이라는 말이 존재한다면,

오츠야말로 이 나라에서 가장 자격 있는 작가일 것이다.

작가를 성별로 구분 짓고 그녀와 그가 써 내는 작품을 구별해 놓고 이 작품은 여성이 저 작품은 남성이 라는 잣대로 평가를 하는 건 유치한 짓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작품을 미국 남부 출신 백인 남성 작가가 썼다면 과연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까?

가부장적인 문화와 인종차별이 극에 달했을 때 작품 활동을 시작한 캐롤 오츠는 남성 작가들이 절대 다수인 장르까지 창작 영역을 넓혀서 거의 모든 문학 분야에 걸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해 부조리와 폭력으로 가득한 20세기 미국의 삶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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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건 이런 거야.” 그녀가 지친 듯이 말했다.

“여자는 꿈 같아. 여자의 일생은 기다림의 꿈이지. 그러니까,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면서 꿈속에서 산다는 뜻이야. 굴욕적이지만 여기서 벗어날 길은 없어. 어떤 여자도 도망치지 못해. 여자의 일생은 남자에 대한 기다림이야. 그뿐이야. 이 꿈에는 문이 하나 있는데, 여자는 그 문을 통과해야 돼. 선택의 여지가 없어. 늦든 빠르든 그 문을 열고 통과해서 어떤 남자, 한 명의 남자에게 도달해야 돼.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 결혼 상대는 누구든 상관없지만, 이 길에서는 벗어날 수 없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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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미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가장 많이 거론 되는 작가는 장편과 단편을 총 망라해서 헤밍웨이, 포크너, 필립 로스이다.

이 세 명의 작가들은 주요 문학상을 거의 전부 휩쓸었고 미국 현대 문학 수업에서 이들 작품은 절대 빠지지 않고 주기적으로 출판사에서 새 커버로 출간 할 정도로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이들 백인 남성 작가들을 제외 하고 미국 현대 문학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는 조이스 캐롤 오츠다.

그녀가 1970년에 발표한 장편 <그들>은 일명 미국의 불평등과 차별이 극한에 달한 폭력의 시대를 집중 조명한 연작 작품인 '원더랜드 4부작'의 첫 작품으로 시대적 배경은 1937년 여름부터 1967년 디트로이트 빈민가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흑인 폭동의 한 복판에서 분투하는 가족의 모습을 소설처럼 구성한 역사적 인간 드라마다.

빈곤 노동 계층의 사랑과 계급, 인종과 도시 빈민화 문제를 정면으로 펼쳐 보인 오츠의 '원더랜드 4부작'은 그녀의 작품 중에서 가장 독창성이 뛰어나고 시대의 어둠을 문학적 언어로 빚어낸 20세기 현대 영미 소설 중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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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캐롤 오츠는 2000년의 첫 장편 소설로 세기의 배우 매릴린 몬로의 삶을 픽션으로 재 구성한 <블론드>를 출간하며 미국 문학계와 예술계를 놀라게 했다.

메릴린 몬로의 삶은 숱하게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어 왔고 여러 책들이 출간 될 정도로 언제나 전세계인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그녀에 대해 많은 이들은 상당한 수준의 소문과 진실을 알고 있고 더러운 쇼 비지니스 세계에서 미스터리한 삶과 더러운 미국 정치인들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라는 것 정도 알고 있다.

타고난 필력을 자랑한 작가 캐롤 오츠는 매릴린 먼로의 진짜 이름인 노마 진의 삶 부터 출발해서 어린 노마 진이 전전했던 수많은 위탁가정 중 딱 한 곳인 허구의 가정을 탐사 하듯 수많은 연인과 건강상의 위기, 임신중단과 자살 시도, 영화 속 연기 중 상징적인 것들만 선택 해서 픽션의 형식으로 그녀의 삶을 문학적으로 증류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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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 머리에 풍만한 곡선형의 먼로의 외모는 대단히 유혹적이였지만 그녀의 내면은 문학적인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실제로 먼로는 약물에 취해 있을 때도 술에 취해 있을 때도 여러 남자들과 잠자리를 함께 하고 나서도 일기를 빠짐없이 썼고 영화 촬영 장에서 종종 시를 쓰기도 했다.

위탁 가정에 맡겨졌던 시절에도 동화책을 읽었고 신문은 항상 탐독 했고 성인이 된 이후로 다윈의 종의 기원도 읽었을 정도로 먼로의 독서열은 동시대 여 배우 중에서 최고였다.

조이스 캐롤 오츠가 증류 시켜 버린 노마 진의 삶의 첫 시작 <특급 배송>의 첫 페이지는 영화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 계단에서 유모차가 내려오는 명 장면 처럼 물 흐르듯 천천히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의 삶 앞으로 배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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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울어가는 세피아색 빛을 받으며 죽음이 큰길을 따라 질주해오고 있었다.

장식 없이 무겁고 단순한 배달 자전거를 타고 어린이 만화에서처럼 죽음이 달려오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죽음이 오고 있었다. 죽음은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죽음은 부랴부랴 서두른다. 죽음은 미친듯이 페달을 밟는다. 죽음은 특급배송취급주의라고 표시된 소포를 안장 뒤쪽의 튼튼한 와이어 바구니에 실어나른다.

도로 공사로 서쪽으로 가는 두 개의 윌셔 차선이 하나로 줄어드는 바람에 막히고 혼잡한 윌셔와 라브레아 교차로를 볼품없는 자전거를 타고 요리조리 능숙하게 누비며 죽음이 오고 있었다.

죽음은 무척 날래다! 죽음은 경적을 울려대는 중년 남자들을 비웃는다. 죽음은 웃음을 터뜨린다, 엿이나 드쇼, 아저씨! 그리고 당신도. 반짝반짝 매끄럽게 빛나며 오도 가도 못하는 값비싼 최신형 자동차들을 지나쳐 벅스 버니처럼 휭 달린다.

로스앤젤레스의 스모그 자욱한 공기 따위 꺼리지 않고 죽음이 오고 있었다. 죽음의 고향인 남부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방사성 공기 따위.

그래, 난 죽음을 봤어. 엊저녁 꿈에서. 그전에도 여러 번. 난 겁나지 않았어.

너무나 자명한 죽음이 오고 있었다. 볼썽사납긴 해도 튼튼한 자전거의 얼룩덜룩하게 녹슨 핸들 위로 등을 구부린 죽음이 오고 있었다. 세탁은 했지만 다림질은 생략한 카키색 반바지와 칼테크 티셔츠를 입고 맨발에 스니커즈를 신은 죽음이 오고 있었다. 근육질 종아리와 갈색 털이 숭숭한 다리. 울퉁불퉁 둥글게 솟은 손마디뼈. 얼굴에 여드름과 잡티가 돋은 소년. 햇빛이 자동차 앞유리와 크롬도금에 반사되어 언월도처럼 번쩍이는 바람에 죽음은 머리가 어찔하고 신경이 곤두선다.

죽음의 현란하고 대담한 질주에 더 많은 경적이 울려댄다. 죽음은 성의 없이 아주 짧게 머리를 깎았다. 죽음은 껌을 질겅질겅 씹는다.

죽음은 아주 판에 박은 듯 규칙적이다. 일주일에 오 일, 거기에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요금을 더 높게 받는다. 할리우드 배달 서비스. 죽음은 특송 소포를 직접 배달한다.

죽음이 예기치 못하게 브렌트우드로 오고 있었다! 죽음은 8월의 인적 드문 브렌트우드 주택가의 좁은 골목길을 빠르게 달린다. 세심하게 가꾼 수고가 애처롭고 헛되게도 이곳 브렌트우드의 ‘정원들’을 휙 지나치며 죽음은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앨터비스타, 캠포, 하쿰바, 브라이드먼, 로스올리보스. 막다른 골목인 헬레나 드라이브 5길까지. 야자수, 부겐빌레아, 붉은 덩굴장미. 만개 후 썩어가는 꽃 냄새. 햇볕에 그을린 잔디 냄새. 담으로 에워싸인 정원, 등나무. 원형 진입로. 햇볕을 막으려 블라인드를 끝까지 내린 창문.

-조이스 캐롤 오츠의 <블론드>의 '특급 배송'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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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생인 조이스 캐롤 오츠는 작년에 두툼한 부피의 자서전을 출간하며 지금도 글을 쓰고 있다.

2026년 노벨 문학상의 메달이 어떤 작가의 목에 걸리게 될 지 모르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동화 스토리에서 좀비적인 디스토피아 세계관 까지 넘나드는 조이스 캐롤 오츠는 아름다운 문학적 언어가 아닌 충격적이고 기괴하며 과격한 스토리 작법으로 동시대 세계를 열정적이면서 예언적인 목소리를 쏟아내는 그녀는 이 시대 최고의 스토리 텔러다.

그녀가 오랫 동안 여러 대학의 문예 창작학과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작가 10계명은 다음과 같다.

1. 당신의 가슴속에 있는 것을 써라.

결코 당신의 주제와 그에 대한 열정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당신의 ‘금지된’ 열정은 글쓰기의 연료와 같다.

2. 첫 문장은 마지막 문장을 쓴 다음에야 쓸 수 있다. 초고는 지옥이다. 완고는 낙원이다.

우리의 작품이 돌에 새겨지는 것처럼 돌이킬 수 없이 인쇄되기 전까지는 원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해야 한다.

3. 후대인이 아니라 동시대인을 위해 써라. 운이 좋으면 당신의 동시대인은 후대인이 될 것이다.

4.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염두에 둬라.: 조금 진지하면 위험하다. 대단히 진지하면 치명적이다.

5. 어떻게 한 챕터를 끝내야 할지 망설일 땐, 총을 든 남자를 등장시켜라. (레이먼드 챈들러의 조언이다. 나는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6. 형식적 실험을 하고 있다면 단락을 나눌 가능성을 염두에 둬라.

7. 당신 자신의 편집자, 평론가가 되어라. 공감하면서도 잔인해져라.

8. 이상적 독자를 기대하지 마라. 아니, 아예 독자를 기대하지 마라. 독자가 있긴 있겠지만, 다른 책을 읽을 것이다.

9. 열심히 읽고 관찰하고 들어라. 마치 당신의 삶이 거기에 달린 것처럼

10.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신 가슴속에 있는 것을 써라.

조이스 캐롤 오츠는 전화 통화 신호음이 가는 동안에도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책을 읽을 정도로 활자 중독자 이고 비행기 대기실에서는 장편 한 편을 뚝딱 읽어 치울 정도로 읽는 속도가 진공 청소기 흡인력과 맞먹을 정도다.

세상의 거의 모든 유명한 소설을 전부 읽은 조이스 캐롤 오츠는 상당량의 작품을 쏟아 내고 나서 역사 소설과 논픽션을 탐독하고 있고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한 누아르물은 수시로 읽을 정도로 가장 좋아하는 문학 장르다.

90세를 앞둔 조이스 캐롤 오츠는 현재 분자 생물학, 신경과학, 심리언어학, 철학책을 탐독하며 세상에 존재 하는 현상을 소설적 언어로 재현할 방법에 몰두 하며 지금까지도 쓰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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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작가는 젊은 작가에게 어떤 충고를 해야 할까?

그는 자기가 몇 년 전 들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할 만한 것들만 이야기해줄 수 있을 뿐이다.

글쓰기는 경주가 아니다.

아무도 진짜로 ‘이기지’ 못한다.

만족은 노력에서 나오고, 그 결과 보상이 따른다 해도

그런 보상은 아주 드물게 오는 법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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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2026-10-03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한강이 아시아권 여성 최초수상자 아닌가요?

카스피 2026-10-0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4년에 한국인 한강이 수상했으니 중국의 찬쉐는 물건너 간 것 같은데 조이스 캐롤 오츠나 마커릿 앳트우드도 유력하지만 역시나 유럽권 남성작가가 받지 않을까 싶어요.
 

1921년 미국 콜로라도의 오지 중에 오지인 캐슬락에서 목장 주의 아들로 태어난 남자가 있었다.

이 남자는 척박한 오지에서 소와 양떼를 키우며 가업을 일으킨 아버지 세대와 달리 태생적으로 유약 하고 힘쓰는 걸 싫어 했다.

학교 체육 시간에도 급우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다닐 때 이 남자는 몰래 인근 숲으로 도망쳐서 그 곳에서 디킨스와 마크 트웨인 책에 푹 빠져 살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이 남자는 미국 동부에 있는 아이비리그 대학에 입학 하고 싶었지만 태어나기 일 년 전인 1920년에 불어 닥친 경제 대공항으로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서 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다행히 이 남자는 고등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장학금을 받고 콜로라도 주립대학에 입학한다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삼촌들 처럼 아들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해서 변호사가 되기를 바랬다. 남자는 아버지의 바램대로 법학을 전공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경제학 전공으로 바꾸지만 수업은 영문학과 수업을 청강 했다.

학과 성적이 좋지 않아 졸업마저 불확실해 졌을 때 군 입대 통지서가 날아 온다.

1940년 대동아 전선에 뛰어든 일본의 침공이 태평양으로 확대 되고 미 해군은 서부 버클리 대학에 일본어 랭귀지 스쿨을 개설한다. 이 소식을 들은 남자는 미 해군 통역관으로 군 생활을 편하게 하고 싶다는 바램 하나로 버클리 대학에서 일본어 수업을 신청한다.

2년 동안 버클리에서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한 남자는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 항만을 침공하자 교수들의 추천을 받아 맥아더 장군의 직속 통역관으로 선발 되어 미 해군 기지 함선에 올라탄다.

하지만 군 장성 집안 출신도 아니고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 남자는 장군의 직속 통역 최종 선발 심사에서 탈락한다.

1942년 일본 나가사키 항구에 도착한 남자는 주변의 수상한 동태나 정보를 수집이나 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어촌 마을을 떠돌아 다닌다.

남자는 어촌 마을에서 일본 민간인들과 접촉하면서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는 살아 있는 일본어를 배우게 되고 뜻밖에도 적군인 미군에게 친절하게 다가와 먹을 것을 주는 일본인들의 마음에 감동 받는다.

임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남자는 미 해군으로 부터 미국 서부 수용소에 갇힌 일본인 포로들을 심문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는다.

미 해군은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 하와이에 거주 하고 있던 15만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을 서부 강제 수용소로 몰아 넣었고 이 곳에 스파이나 조력자가 있을지 모른다며 미국은 수용자들을 강하게 심문하며 이중 간첩 색출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인 포로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심적인 고통을 겪은 남자는 임무를 마치고 미국 워싱턴 국무부에 찾아가 외교관 시험에 응시한다. 필기 시험에 통과 한 남자는 면접 자리에 나온 담당 교수로 부터 콜로라도 촌놈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일본 신문과 방송을 능숙하게 번역하고 통역하는 실력으로 단번에 합격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 한 후 남자는 전쟁 당시 그림자 조차 목격한 적 없었던 맥아더 장군의 직속 통역사이자 외교관 자격으로 다시 일본 땅에 밟는다.

끝없이 밀려 드는 서류 작업과 전범 재판소 기록물을 번역하는 일에 싫증을 느낀 남자는 2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외교관을 그만 둔 남자는 대학에서 일본어 강의를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일본 문학을 공부 한다.

1956년 미국 포드사가 지원하는 장학 프로그램 대상자가 된 남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대학에서 헤이안 시대 문학과 일본 현대 문학을 공부 한 후 예수회 재단 학교인 소피아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면서 일본 현대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강사 월급으로 턱없이 부족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번역 작업은 곧바로 미국 출판사에 출간 되어서 1960년대 미국 독자들은 일본 문학의 3대 거장이라고 불리고 있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 다니자키 준이치로,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을 영어로 읽게 되었다.

8년의 시간이 흘러 1968년 이 남자는 스웨덴 스톡홀롬 왕궁에서 열리는 노벨문학상 수여식 자리에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바로 옆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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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2월 노벨문학상 시상식장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수상 소감에서 "이 노벨문학상의 절반은 사이덴스티커의 몫"이라고 밝혔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노벨 재단에서 받은 상금 6만 크로네에서 절반을 뚝 떼어서 '설국'을 영어로 유려하게 번역한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Edward George Seidensticker1921-2007)에게 주었다.

일본 언론은 노벨 문학상 수상에 큰 기여를 한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가 일본 건국 기념일인 2월 11일에 태어났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노벨 문학상 발표 당시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한국 지리산 노고단을 등정 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동안 일본 전역을 돌아 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던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 습성을 뼛속까지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아 도쿄에 집을 마련하게 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한국 유물을 수집했다.

불운한 경제 대공황에서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일본어 공부로 인생 역전을 맞이했어도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건 한국의 전통 문화 예술이였다.

그는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은 태생적으로 싸우기를 좋아하고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목소리가 크고 마늘 냄새가 나는 더러운 종족이라 비하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조선 백자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밀 반출한 도자기를 일본 정부가 마련해준 도쿄 저택에 숨겨두기도 했던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한국을 자주 드나들면서 만난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다정하면서도 품위 있는 말과 행동을 갖춘 심성이 부드러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그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번역 하지 않았다면 노벨 문학상 수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세계에 널리 알린 1등 공신은 그녀의 작품 <채식주의자> 영어로 처음 번역한 영국 출신의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다.

데버라 스미스가 영어로 번역한 한강의 <채식주의자Vegetarian >는 2016년 맨부커 국제상을 받기 전에는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수상 이후 비평가와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부커 상 수상 이후 데버라 스미스가 영어로 번역한 한강의 책은 프랑스어 독일어를 비롯해 스웨덴어로 번역되어 출판 되는 동안 많은 학자들이 오역을 지적하면서 원본을 왜곡하고 한국문학을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 영어 번역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는 학자들은 원본에 충실한 번역의 잣대로 문학번역에서 오역을 했는지 안 했는지, 충실한지 아닌지, 정확한지 아닌지에만 초점을 맞춘다.

영어와 한국어 두 문화와 언어가 달라서 1대 1 직역 번역을 하게 될 경우 한국어 맛을 살리는 번역은 실제 영미권 독자들에게 와 닿지 않게 된다.

한국 학자들은 해외 심사위원들과 독자들이 한강의 작품을 한국어 원본과 영어 번역본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서 읽지 않고 오로지 그들의 언어로 작품으로 읽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 하고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영어로 번역한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도 과감하게 의역을 해서 한동안 일본의 영문학자들 사이에 비판이 일어 났지만 일본 내에서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영어 번역을 해서 전 세계인들에게 소개한 번역가의 공로는 높이 칭송했다.

1937년에 출간된 <설국>은 일본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지 못해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1960년대까지도 1쇄를 넘기지 못했다.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시기에 일본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작가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미시마 유키오였다.

바둑대전이 열리는 날이나 바둑 전문 잡지에서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글이 실렸을 뿐 일본 독자들은 시적인 언어로 함축된 그의 작품을 지루 하다고 생각했다.

반 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미국 명문대인 스탠퍼드·미시간·컬럼비아대학 등에서 일본문학을 강의하며 최고의 교수로 이름을 날렸던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10년이 넘는 작업 끝에 일본 최고 고전인 '겐지이야기'를 영역을 완수한다.

그는 생애 마지막 시기에 출간한 회고록에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언어구조가 완전히 다른 언어를 영어로 번역하려면 뭔가를 끊임없이 내다 버려야 하는 가차 없는 일"이라며 “작품을 시작하고 끝 맺는 단락에는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사람들이 가장 많이 주목하고 흠을 잡는 부분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한강 작품의 영어 번역을 원본과 한 문장씩 대조 하면서 오역을 지적하는 세미나를 열었던 영문학자들 중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의 지대한 공을 세운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의 번역을 깊이 있게 분석한 논문을 쓴 학자들이 없다.

번역가에게도 상금을 수여하는 부커상 수상식에서 데버라 스미스는 단어를 선택할 때, 그 단어가 얼마나 많은 음절이 있는지, 독자들이 읽었을 때 어떻게 보이고 느껴지는지 어떤 소리로 들리는지를 생각하면서 원문에 있는 함축적 의미와 이미지들을 깊이 고민하면서 번역한다는 말을 했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 하기 전까지 그동안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날짜가 가까워질 때마다 해외토픽에 실릴 만큼 기이한 장면이 여러 매체에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시인의 집 앞으로 기자가 대거 몰려가 있는 모습이라든지 이번에도 한국의 **시인의 수상은 유력한가?라는 기사 제목부터 영국의 한 도박 사이트에 **시인은 몇 번째 올라가 있는가?라는 기사까지 노벨 문학상 발표 직전까지 쏟아졌다.

이런 장면들이 20년 동안 이어지는 동안 한국 학자들과 학계는 번역가들을 양성하는데 투자하지 않고 오히려 번역가의 자질과 오역을 지적해 왔다.

한강의 기적이 일으킨 K문학의 르네상스가 더 넓게 뻗어 나가려면 번역을 창작으로 보고 번역가에게도 문학적 자율성을 허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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