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나무 껍질에 칼·긁기낫 등으로 홈을 내면 옻나무가 상처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하얀 수액을 내보내는데 이 수액을 주걱칼로 긁어내 채취한 것을 옻 또는 옻액이라 한다. 옻액을 가공하여 만든 도료가 바로 옻칠로 전복·조개 등 어패류의 껍데기를 얇고 판판하게 갈아 자개로 가공한 뒤, 이를 옻칠한 바탕에 붙여서 꾸민 기물을 나전칠기(螺鈿漆器)라 합니다.

옻칠을 수십 번에서 수백 번까지 겹겹이 두껍게 바른 뒤, 그 층을 조각칼로 파내어 입체적인 무늬를 표현하는 조칠(彫漆) 기법을 사용했던 중국은 붉은색이나 검은색 옻칠의 단단하고 두터운 질감을 바탕으로, 꽃, 용, 인물 등 웅장하고 화려한 문양을 깊이 있게 조각하여 압도적인 입체감과 묵직한 나전칠 공예품을 만들어 왔습니다.

통일신라 시기부터 각종 생활 용품에 나전칠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한반도 장인들은  자개를 길고 가느다란 모양으로 오린 후, 아교를 바른 바탕 위에 칼로 끊어가며 붙여 장식하는 끊음질 기법으로 장식해서  특유의 광택과 색감에서 느껴지는 영롱한 아름다움을 새겨 넣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옻칠로 기물 표면에 그림을 그린 후, 굳기 전에 금속 가루의 굵기와 농도를 조절하여 그라데이션을 주거나, 옻칠을 두껍게 올려 입체감을 더하는  마키에 기법으로 화려함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10년 생 옻나무에서만 옻액을 체취 할 수 있고 나무마다 하루에 체취 할 수 있는 양이 한정 되어 있고 수액 추출 후 불순물을 걸러 내어야 하기 때문에 옻액은 국가에서 전적으로 관리 했습니다.

​​인류가 기원전 3000여 년 전부터 사용해 온 공예 재료이자 기술인 옻칠은 천연 페인트 역할 뿐만 아니라 습기와 화염에도 견뎌 낼 수 있는 방부제 성분을 함유 했기 때문에 각종 무기류나 철이 녹스는 걸 방지 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물과 가구 그리고 생활 소품까지 널리 사용 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옻칠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던 일본은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는 군수용품과 무기 제조에 옻칠을 사용하기 위해 한반도 전역에 자생 하고 있던 옻나무들의 수액을 추출해서 옻액을 추출하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한반도의 문화 유산을 마구잡이로 도굴 했고 귀중한 문화재를 수집하는데 광적으로 달려 들어서 한국의 조선 자기 보다 쉽게 손에 넣기 힘들었던 나전칠 공예품은 일본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수십 점이 전해지는 고려나 조선 후기 나전 유물과 달리, 현재 확인된 조선 중기 나전칠 공예품은 세계적으로 4점 정도만 남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세계를 떠돌고 있는 한국의 문화 유산을 적극적으로 환수 하는데 앞장선 민간 후원자(국립중앙박물관회 젊은친구들/YFM)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3점은 현재 서울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 되어있고 나머지 한 점은 일본 도쿄 국립 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는데 현재 일본은 조선의 나전칠 공예품을 국가 보물로 지정해 놓았습니다.

에도 시대 다이묘(유력 영주)들의 수집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조선 장인들이 혼으로 조각한 나전칠기

1551년 불타버린 오우치 궁궐의 불길을 견디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매료시킨 후 마침내 고국의 품(국립중앙박물관)으로 돌아온 '조선 나전 칠 연꽃넝쿨무늬 상자'의 파란만장한 대 서사시  5분 13초 영상에서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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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7년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심에서 시작해, 1551년 불타버린 오우치 궁궐의 불길을 견디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매료 시킨 후 마침내 고국의 품(국립중앙박물관)으로 돌아온 '조선 나전 칠 연꽃넝쿨무늬 상자'의 파란만장한 5분 13초의 대서사시를 @Scott-MoveableFeast 채널에서 만나보세요. 

4만 5천 개의 미세한 자개 조각과 장인의 집념이 빚어낸, 시공간을 초월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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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하루는 24시간으로, 1시간을 60분으로, 1분을 60초로 나눠진다.

인간은 동물과 식물들처럼 본능적으로 시간을 알지 못하기에  24시간 시계를 보고 시간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통상  24시간 시계는 밤 12시(자정)에 시작해서 낮 12시(정오)까지가 오전(am)이고 정오가 지나면 오후(pm)가 시작된다.

1년의 시간 동안 겨울 동면을 취하는 동물이 아닌 인간은 자정에서 잠자리에 든 시간을 빼고, 자정부터 잔 시간을 더하면 잠을 몇 시간 동안 잤는지 알 수 있다.

 만약 오후 8시에 잠들었다면  자정 4시간 전으로  오전 7시 30분에 일어났을 경우  자정 시간이 7.5시간 지난 후이니 이 둘을 더하면 4+7.5=11.5시간 동안 숙면을 취한 것이다

시간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 초 단위, 분 단위, 시 단위로 쪼개서  감각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숫자로 환산 시켜 보면 어딘가로 이동한 거리에 걸린 시간을  분 당 몇 걸음, 시간 당 몇 마일, 몇 킬로미터로 측정해 볼 수 있다.

오늘 일어난 각종 사건이나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을 미리 예측하거나 예상 해 볼 수 없지만 연간, 월간 스케줄러에 일지를 기록 하듯 시간을 기록해 본다면  하루 중 먹고 자고 씻고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24시간 중에서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3-4시간 정도 뿐이다.

 이 시간 조차도 부득이하게 개인적인 용무를 보거나  출퇴근 이동 시간까지 포함하면 2시간이 채 되지 못한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휴일 조차도 24시간 온 종일 멍 때리지 못하는 것처럼 두 팔과 두 다리가 달려 있는 인간의 삶의 방향이나 지향점 모두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적 선형선 위를 걸어가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다.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도, 유명한 사람도 유명하지 않은 사람도, 어린이도 어른도, 선인도 악인도, 모두에게  공평하게  24시간이 할당 된다.

7월의 첫 주말 24시간을 알차게 사용하기 위해 공평하게 자른  버터 조각을 갓 구워낸 빵에  발라 먹듯이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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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26-07-0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평하게 자른 버터 조각을 갓 구워낸 빵에 발라 먹듯‘ 하루를 시작하는 건 어떤 걸까요?
스마트한 개가 보여준 9초 덕분에 오후의 시간에 잠시 미소가 더해졌습니다.^^
 

미국을 기준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빅맥 값을 비교한 빅맥지수(Big Mac Index)는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1986년 처음 만들어서 매년 1월과 7월에 발표되어왔다.

지금까지 빅맥지수는 각 나라의 물가 수준과 화폐 가치를 평가하는 경제 지표로 자리 잡으면서 스타벅스 커피값을 비교하는 '라테 지수', 이케아 가구 제품 가격을 비교하는 '이케아 지수' 등과 같이 전 세계 다양한 도시에 수 천개의 매장을 운영하는 글로벌 기업의 대표 상품들의 가격 책정 변동에 따라 나라별 체감 물가 지수를 한눈에 파악 할 수 있게 되었다.

일명 커피 공화국으로 불리는 한국에서는 맥도날드 매장 보다 모퉁이만 돌아가면 간판이 보이는 별다방 가격 지수에 더 민감하다.

 하지만 점심 단골 메뉴 한 끼를 만 원으로 해결 하기 힘들 정도로 물가가 치솟으니 가성비 좋은 커피를 찾아 마시거나 인스턴트 스틱 커피로 휴대 하는 성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커피 가격 지출을 줄일 수는 있다해도  물가가 급등할 때 마다 가성비 반찬으로 식탁을 지키던 김 가격이 치솟아서 즐겨 사 먹던 김밥이 가격이 두 배로 급등하거나 조미김 한통에 김이 10장에서 8장으로 줄어 들게 되면  이보다 더 속상할 수가 없다.

기후 이상으로 바다 온도가 상승해서 발생하는 적조현상으로 인해 김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한국의 김은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 잡아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싹 쓸어가는 대표적인 상품이고 K푸드 열풍에 냉동 김밥 수출양이 대폭 늘어나서 수출로 물량이 빠져나가게 되어  국내 소비자들에게 공급할 김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 이어 전 세계 두 번째로 김 생산량이 많은 일본은  그동안 반 세기 넘게  세계 김 수출의 60퍼센트를 장악했던 시절도 있었다.

일본은 7세기 무렵 부터  미역보다 얇은 바다말을 얇게 펼쳐 말려 먹었다. 이 바다말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던 것은 도쿠가와 가문이 에도에 입성하고 나서 부터였다.

도쿠가와 가문은 안정된 식재료를 수급하기 위해 에도성 앞에 어장을 조성했다.

 그 시절에 생겨난 어장은 가니스기, 혼시바. 시나가와로 점차 이 어장이 번성하면서 주변에 상권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어장과 상권이 번성하기 시작하자 시나가와가 주변 포구를 총괄 하는 중심 어장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김 양식을 재배 했다.

17세기 에도에 시나가와에서 생산한 김은 색은 붉고 형태는 닭 벼슬처럼 작고 비린내가 난다 해서 노리(海苔)라 불렀다.

 이 시절에 김을 가공하기 시작한 것은 뜻밖에도 사찰에 종이를 대량 공급했던 아사쿠사 제조자로 당시 아사쿠사는 헌 종이를 수거 해서 재생종이를 생산했던 수공업체였다. 종이를 가공했던 수공업자가 미역보다 가는 김을 종이처럼 건조 시키는 방법을 고안했다.

바다에서 수거한 바다말을 담수에 섞어 대나무 판지에 얇게 펴서 바람에 건조 시키고 나서 숯불에 살짝 구우니 비린 냄새가 사라졌고 태운 종이처럼 입 속에서 바삭거리다 스르르 녹아 내리자 일본인들은 밥에 싸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공한 김을 조미한 간장에 찍어 먹으면서 에도 시대 일본인들은 김을  바다 채소라 불렀다.

 일본이 김을 종이처럼 얇게 가공 하기 훨씬 전부터 한국은 13세기 말인 신라 시대 부터 바다에서 김을 건져서 건조 시켜 먹었다. 

삼국 시대 때 김은 혼인을 앞둔 왕의 폐백 품목 중 하나였고  조선 시대는 임금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검은 바다풀이였다.

이 검은 바다풀이 김이라 불리게 된 건  조선시대 인조 임금이 자신의 수라상에 오른 검은 바다풀을 맛있게 먹고 무슨 음식인지 묻자 한 신하가 음식 이름은 모르고 전남 광양에 사는 김여익이란 자가 만든 음식이라 답했다. 이후 조선 왕실에서는 김여익이 만든 바다풀이라 해서 그의 성을 따 ‘김(金)’이라 부르게 했다. 

현재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 김밥의 기원은 일본 마키스시(巻き寿司)의 일종인 '노리마키(海苔巻き)'에서 왔다. 

에도 사람들은  식초와 설탕을 섞어 넣은 밥에 김을 싸서 먹기 시작했고 각종 속재료를 넣고 대나무발로 말아 원통형으로 만든 '후토마키(太巻き)'는 메이지 시대 들어서면서 부터 만들어 먹었다. 

메이지 시대때 '후토마키(太巻き)'의 속재료는 생선회였다.

1930년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 들어 온 일본식 김밥은 한국인 입맛에 맞게 변형 되어서 당근과 계란, 우엉, 햄, 깻잎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대체됐다.

일본은 쇼와 시대에 들어서면서 부터 노리마키의 기본이 되는 식초와 설탕으로 밥에 초절임을 하는 방식이 사라졌고 현재 일본 식당에서 파는 김밥은  미원과 소금, 참기름을 넣고 속재료도 한국 처럼 다양하지 않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김과  즐겨 먹는 김밥이 어느 나라에서 먼저 유래 되었는지 따지기도 전에 한국의 김밥은  일본의 라면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한국의 식재료와 뛰어난 조리 기술로  다채롭게 발전 시켜 나간 음식이다.

햄버거 한 개 먹은 포만감 보다  김밥 몇 줄을 먹은 포만감은 세계 물가 지수 지표로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김밥은  한국인에게 무척 특별한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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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10주년 기념 <레터스 라이브 letter's live> 행사  마지막 무대에 선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 조지 버나드 쇼가 신문 <더 타임스>에 보낸 서한을 생전 버나드 쇼의 목소리와  제스쳐로  청중들이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재현 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지난 10년 동안 '편지 쓰기' 운동을 꾸준히 실천하며 한 해 끝자락에  공개적인 행사 무대에 서서 여러 인물들의 편지를 낭독하며 글자와 종이로 소통하며 마음을 표현하는 유희를 예술적인 영역으로 끌어 올렸다.

정복의 야심으로 무장했던 정복 왕 나폴레옹은 살아 생전 총 4만 여 통에 가까운 편지를 썼고 현재 남아 있는 편지는 총 3만 3천 여 통이다.

이 양은 수시로 트윗을 날리는 세계 제 1일의 부자 머스크와 재선 준비를 하고 있는 전직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양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집트 파라오 시대 사람들은  파피루스에 상형 문자를 적어 소통했을 정도로   인류 문화 유산 중에 편지가 남긴 흔적은 방대하다.

편지의 전성기는 중세 시기인 서기 500년 부터 1930년 전화기가 널리 보급 되기 전 까지다.

1990년대 휴대 전화와 인터넷 망이 보급 되면서 편지 발행 횟수도 줄었고 우편 발송량도 줄었다.

문자와 사진, 이미지로 소식을 주고 받는 시대에 누군가에게 보내기 위해  펜을 쥐고 종이에 편지를 쓰는 일은 좀처럼 없다.

편지 뿐만 아니라 하루 일정 관리, 업무 계획, 간략한 메모까지 손으로 종이에 쓰는 경우도 거의 없다.

빠르게 저장하고 복사하고 빛의 속도로 타자를 치는 시대에 펜과 종이는 서랍 속에서 먼지가 쌓여 가고 있다.

서랍 속에 잠들어 있는 펜들을 모조리 꺼내 놓았지만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 조차 낯설게 느껴 질 뿐만 아니라  이메일 주소와 SNS계정만 알고 있으니 써도 보낼 주소를 적지 못한다.

발신인과 수신인이 존재 해야 보낼 수 있는 편지는 최첨단 기기로 소통 할 수 있는 시대에 미련하게 시간을 낭비하거나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 시키는 거라 생각 할 수 있다.

지난 시절 기숙사를 나와서 하우스에서 살기 시작 할 때부터 처음 만나는 이들로 부터 편지와 엽서를 받는 동안 낯설면서도 따스한 감정을 느꼈다.

그렇게 주고 받았던 편지는  다른 도시, 다른 국가에서 살 때도 이어져서 서로 축하하고 기뻐하고 애도 하는 순간에도 주고 받았다.

특히 곤경에 처했거나 도움이 필요 할 때 긴 세월 편지를 주고 받았던 이들이 가까운 지인들 보다 더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41년 3월 28일, 버지니아 울프는 오전 마지막 산책을 나가기 전 남편 레너드 앞으로 편지 한 장을 남긴다.

주머니에 돌을 집어넣은 버지니아는  우즈 강물 속으로 뛰어 든다.

물에 흠뻑 젖은 채 구조 된 버지니아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 바늘은 11시 45분에 멈췄다.

스스로를 처벌하기 위해,자유롭게 항해하기 위해, 물 속으로 들어 가버린 아내가 남긴 마지막 편지

남편 레너드는  마지막 아내의 숨결이 남아 있는 편지 위에 눈물을 쏟아 낸다.

"당신은 최대한으로 가능한 행복을 내게 줬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에게 내 인생이 모든 행복을 빚졌다는 점이에요."

-버지니아 울프(1882-1941)

손으로 눌러 쓴 편지만큼 가장 진솔하고 진실한 글은 없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편지는 후대인들에게 읽혀 지고 있다.

 한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흔적이자 인생의 이력과 같은 편지처럼 영장류 중에서 오로지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만이 문자로 소통하고 기록 하고 생의 흔적을 남긴다.

쓰는 행위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 유일한 예술적인 활동일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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