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교황의 선종 소식을 접한 로렌스 추기경은 바티칸 수도원을 지나 황급히 교황이 머물던 숙소로 간다.

세계 각지에서 갑작스런 교황의 선종 소식을 들은  추기경들은 애도를 할 새도 없이  교황의 죽음을 알리는 메시지를 어떻게 낼 것 인가를 두고 머리를 맞대고 교황청은 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 준비에 들어간다.

새로운 권력의 선출을 위한 작업을 시작한 교황청은 로렌스 추기경을 콘클라베 선거 단장으로 추대 하고 로렌스는 교황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뒤로 한 채  차기 교황 선출을 위한 선거 ‘콘클라베’를 빠르게 추진한다.


누런 불빛 아래 거울을 보니 잿빛 얼굴 여기저기 반점이 가득했다. 부디 계시라도 있기를, 내게 힘을 내리시기를. 승강기가 덜컥하며 멈췄는데도 위장은 계속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결국 손잡이에 의지해 중심을 잡아야 했다. 교황의 즉위 초기 함께 이 승강기에 탔을 때였다. 대주교 둘이 들어오더니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주님의 대리자를 직접 마주하자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교황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말고 일어나시게나. 나도 늙은 죄인일 따름이라네.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로버트 해리스의 <콘클라베> 중에서

 

작은 어촌의 일개 어부에서 교회의 반석이 되었던 베드로 사도로부터 시작된 교황이라는 자리가 지금껏 2천년의 시간을 넘어 면면히 이어져왔음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그것이 실로 가톨릭의 신비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본다. 과거의 교황들은 유럽이 중심무대였으므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오늘날의 교황만큼은 아니어도 많은 역량이 요구되는 자리였음은 분명하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의 <교황 연대기> 중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추기경들이 모여 교황을 선출하는 제도인 ‘콘클라베(Conclave)’는 라틴어로 ‘함께’라는 뜻의 ‘cum’ 과 열쇠라는 뜻의 ‘clavis‘ 에서 유래한 말로 ‘열쇠로 잠근 방’을 의미한다.

1274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칙서를 통해 “추기경단은 외부와 격리된 방에서 교황 선출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고 명문화하면서 교황 선거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교황이 사망 하면 가장 먼저  그의 반지를 부수고 방을 봉인하고 투표 용지 보존을 위해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한다.

1492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 선종 이후 이어져 온 콘클라베의 투표권은 교황 선종일을 기준으로 만 80세 미만인 전 세계 모든 추기경이 갖는다. 별도의 입후보 절차 없이, 투표권을 가진 모든 추기경이 후보가 된다.

 3분의 2 이상 득표하는 후보가 나올 때까지 바티칸 교황 관저에 있는 시스티나 경당(작은 예배소)에서 투표를 반복하는 동안 투표가 종료될 때마다 굴뚝에 피우는 연기의 색깔로 결과를 알릴 뿐 콘클라베의 모든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콘클라베 기간 동안 투표에 참가하는 추기경들은 교황청 내 방문자 숙소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숙식을 하고  공정성과 보안을 위해 인터넷 접속이나 뉴스 시청도 철저하게 제한 당한다. 

투표가 종료될 때마다 굴뚝에 피우는 연기가  흰색이면  선출 성공,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면  실패라는 의미다. 교황 선출에 성공하고 당선인이 즉위를 수락하면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새 교황을 얻었다)”이라는 공식 선언이 나오고 새 교황의 즉위명(名)도 발표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향년 88세의 일기로 4월 21일 선종 하셨다. 

젊은 시절 폐의 일부를 제거했고, 고령에 여러 차례 건강 문제를 겪어왔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월14일 호흡곤란으로 로마 제멜리 병원에 입원한 뒤 폐렴·신부전증 치료를 받다 38일 만에 퇴원했으나, 부활절인 지난 20일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 2층 발코니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성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도들을 향해 “부활절을 축하한다”고 말씀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이 되었다.

2000년 가톨릭 역사에서  이탈리아의 울타리를 벗어나  유럽 출신이 아니라 남미 출신이였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각별한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일반 사제가 아니라 수도회(예수회)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랜 수도와 묵상을 통해 일구어낸 영성가의 눈으로 이전 교황들이 교리와 제도에 묶여 주저주저하던 사안에 대해서도 과감한 개혁과 파격적 메시지를 내놓으며 격식보다는 본질을 중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성결혼이나 미혼 출산에 찬성하진 않았지만 이들을 차별하는 것은 비판했고 수녀 대상 사제 성폭력을 인정하며  성직자의 성범죄를 엄중하게 다루기 위한 규율 부서를 따로 두었다.

 2023년 4월 가톨릭교회 역사상 최초로 여성과 평신도에게도 주교회의(시노드) 투표권을 부여 했고 차관 이상 고위직에 여성 신자와 수녀를 임명 했다.

이 모든 개혁은  가톨릭 역사상 최초로 시행 된 것들로 2020년 11월 교황은 재무 구조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 교황청의 핵심 부서인 국무원의 교회 기금 관리 기능을 박탈 시키고 1500억원이 넘는 영국 런던 첼시지역 고급 부동산 매매 비리 사건에 연루된 조반니 안젤로 베추 추기경을 2020년 9월 교황청 고위 직책에서 경질 시켰다.

청빈과 순명의 상징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을 교황의 명칭으로 처음 사용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도 난민이였다며 이민자와 전쟁 난민을 위해서도 목소리를 내며 마지막 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보듬었던 교황이였다.

콘클라베 선거권을 갖고 있는 전 세계 80세 이하 추기경들이 바티칸에서  교황 선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영화 <콘클라베>의 비밀 투표 과정에서 드러나는 여러 사건은 교회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를 대변 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 진영 후보로 대표되는 교황 예비 후보들의  진실과 거짓의 가면이 벗겨 질 때마다  성추문, 매관매직, 인종 문제,동성애와 낙태, 그리고 여성의 인권 같이 현실 사회에서도 문제로 지적된 교황청의 비리들이 후보자들의 추문과 연결되면서  유력했던 후보가 바닥으로 추락하기도 하고, 눈에 띄지 않았던 후보가 급부상하기도 한다. 

투표 당일, 미켈란젤로가 그린 유명한 천장이 있는 시스티나 성당은 물리적으로 봉쇄되며, 비밀 서약을 한 80세 미만 추기경들은 자신이 선택한 후보자에게 비밀리에 투표하고, 투표용지에 이름을 쓰고 제대 위 성배에 넣는다.

 세례를 받은 남성 로마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교황 후보자 자격이 있지만 철저하게 비밀 선거에서 선출 된 선출된 교황 266명 중 대다수가 유럽 출신이다.

13세기에는 약 3년, 18세기에는 4개월이 걸린 적이 있었던 콘클라베에서 교황 선출에  필요한 3분의 2를 얻는 후보자가 없으면 하루에 최대 4번 투표를  진행할 수 있다.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 되었던 콘클라베에서는   약 24시간 동안 5번의 투표를 진행되었다.

개표가 완료되면 바티칸 소방관들은 미리 설치한 시스티나 성당 내부의 첫 번째 난로에서  투표 용지를 태우고 두 번째 난로는 화학물질을 연소시켜 굴뚝을 통해 외부로 연기 신호를 보낸다. 

검은 연기는 새 교황이 선출되지 않았음을, 흰 연기는 새 교황이 선출됐음을 의미한다.
 

영화 <콘클라베>에서 바티칸에 모여든 추기경들을  먼 거리에서 희미한 붉은 점처럼 보여준다.

콘클라베 선거 단장을 맡은 로렌스 추기경이 내려다 보고 있는 추기경들은 모두 머리에 빨간 모자를 썼지만  관객들은 새 교황을 선출 하기 위해 모여든 추기경들이  어떤 피부색을 지녔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구체적인 얼굴 모양새도 체형도 알 수 없다. 

비밀 투표가 진행 될 수록  진보와 보수 진영 후보 사이의  조용한 음모와 암투극이 점점 더 날카롭게 충돌하면서  가장 신성한 공간인 비밀의 콘클라베가 열리는 시스티나 성당에 모인 추기경들의 인간적인  얼굴의 민낯이 드러난다.

살아 생전 교회의 개혁과 변혁을 추진 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성애 환대와 이혼 및 재혼자의 영성체 문제 등을 놓고 교회 내 보수파와 갈등을 빚으며 개혁을 마무리 짓지 못했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져 있는 지구촌 분단의 현장에서 세상을 향해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설파했다.

평소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실천했던 교황의 모든 실천의 뿌리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였다.

추기경이 되고 나서도 고급 승용차와 개인 기사를 두지 않고 일반인들이 타는 버스와 지하철을 탔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총에 맞아 죽거나 에이즈에 감염 될 수 있는 빈민촌을 찾아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삶을 보살펴 주었던 빈민가의 교황이였다.

신을 믿는 자에게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깊은 사랑과 영성을 주고 간 프란치스코 교황은 용서야말로 화해에 이르는 문이라는 말씀을 남기고  하느님 곁으로  가셨다.


 출처: 바티칸 교황청 

2025년 5월 8일  제267대 교황 레오 14세로 선출되었다.

현재 교황청 주교부 장관을 맡고 있는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Robert Francis Prevost, O.S.A.) 추기경은 미국 시카고 태생에 1982년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일원이다. 

 사제 서품 후 오랜 기간 페루에서 사목 활동을 펼치셨던  레오 14세 교황은  19세기 말 노동권과 사회 정의를 강조한 레오 13세 교황(재위 1878-1903)을 계승한다는 의미 새 교황명으로  '레오'를 선택 했다.

1810년 이탈리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교황 레오 13세는 1837년 사제 서품을 받고 1841년까지 교황령이였던 이탈리아 베벤토와 페루자 총독을 겸임했다.

 교황청 소속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교황 레오 13세는 1878년 콘클라베에서 투표 3번 만에 교황으로 당선되었다. 

귀족 가문 출신 답게 매우 보수적이면서도 19세기 산업 혁명기에 불어 닥친 노동과 인권 운동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던 교황 레오 13세는 노동자의 정당한 임금과 인간다운 노동 조건 보장의 필요성, 노동조합 설립 권리 인정, 사유재산의 권리를 인정하되 '공동선'을 위한 사회적 책임 등을 강조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교황을 지지하는 노동자들과 그를 반대하는 세력들 사이에서 대규모 충돌과 시위가 일어날 것을 우려 해서 시스티나 성당에 격리된 채로 교황으로 즉위 하도록 하였다.

교황으로 당선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68세로 93세까지 교황직을 유지 했던 레오 13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장려하고 교황권의 우위와 중앙집권화를 고집했으며, 교황청이 잃어버린 세속적 주권을 회복 하려 했고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자는 사회주의 이념을 강하게 반대했다. 

지난해 10월 바티칸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교황 레오 14세는 "주교는 자신만의 왕국에 머무는 작은 왕자여서는 안된다"며 "사람들에게 다가가 함께 걷고, 고난을 함께 나눠야 한다"고 말했다. 

영화 미션에서 신부와 사제들이 포르투갈 군대에게 목숨을 잃고 난 후 정치적 논리로 원주민들의 죽음에 무관심했던 당시 교황청 소속 추기경은  혼자 살아 남아 이렇게 말한다.

"사제들은 죽고 나만 살아남았지. 하지만 실제로 죽은 것은 나고, 산 것은 그들이야. 그것이 그들의 정신이니까. 그리고 그 정신은 영원히 살아남을 걸세." 
 

 레오 (Leo)는 라틴어로 ‘사자’를 의미한다. 

혼돈의 세상에서 새 교황 레오 14세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정책을 이어가면서도 포용과 사랑으로 서로 다른 세계에 다리를 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희망은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선물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1936=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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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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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영상 플랫폼 유튜브에는 다양하면서 잡다한  영상들이 올라 오는데 조회수가 높은 순위에 꼽히는 영상들은 유명인사들과 연예인들이 자신의 모습을 찍어 올리는 영상들이다.

유튜브 채널을 통해 배우들은 출연했던 영화나 드라마 속의 모습이 아닌  냉장고 안에서 음식을 꺼내 직접 요리해 먹거나 지인들을 초대해서 수다를 떠는 평범하면서도 일상적인 모습이나 작품에서 미처 보여 주지 못했던 개인적인 취미나 재주를 보여 주기도 한다.

유튜브 플랫폼이 존재 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배우들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각 방송사에서 특별 제작 하지 않은 이상 대중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한 때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배우들, 화려한 조명 아래 멋지게 차려 입은 그 배우들이 한 시절의 인기가 저물고 나서는 대중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 되고 싶을까? 라는 생각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 카트린 드뇌브는 10대 때 부터 영화에 출연 해서 19살에 출연했던 뮤지컬 영화 <쉘부르의 우산>으로 단숨에 월드 스타가 되었다.

 데뷔 이후 부터 배역을 가리지 않고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했던 그녀는 지난 시절을 회고하며 배우로 엄마로 살았던  자신의 인생을 자서전을 통해 공개하기로 결심한다.

대 배우의  인생 이야기는  책도 유튜브도  아닌 일본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손에서 영화로 탄생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오래전에 깊은 감동을 받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을 읽고 조금씩 구상을 하다 2003년 인생의 말년을 맞이 한 어느 여배우에 관한 이야기의 시나리오 <이렇게 비 오는 날에>라는 제목으로 준비해 두었다.

애초에 이 시나리오는  연극 상영이 시작 되던 날 분장 실에서 여배우가 소원해진 자식과 우정을 나눌 동료 배우조차 없는 현실을 한탄한다는 내용이였다.

감독이 미리 점찍어 두었던 여주인공은 1950년대부터 60년대 까지 일본을 대표 했던 여배우 와카오 아야코와 감독의 페로소나 같은 배우 기키 기린을  염두 해 두고 시나리오를 써나갔다.

다른 작품 촬영에 밀리고 밀려서  시나리오 작업이 부진해 졌고 여러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하면서 차일 피일 미루다가 2018년 영화 제작을 시작할 무렵에 기키 기린 배우가 암 투병 끝에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나서 시나리오는 서랍 속으로 들어 가 버렸다.

칸 국제 영화제에서 <바닷 마을 다이어리> 상영 때 직접 관람했던 카트린 드뇌브와 인연이 닿았던 감독은 우연곡절 끝에 <어느 가족> 촬영을 마치고 나서 시나리오를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연출한 영화에서 카트린 드뇌브의 이름은 파비안느, 직업은 배우로 실제 카트린 드뇌브의 삶과 매우 흡사하게 설정 했다.

 출연하는 작품마다 대 성공을 거두었던 배우 파비안느는 한때 프랑스를 대표했던 대 배우였지만 이젠 작품 섭외조차 들어 오지 않는다.

그녀는 대중들에게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배우였는지 알려 주고 싶어서 자서전을 준비하는 동안  발간 하기에 앞서 좀처럼 왕래 하지 않았던 딸 부부를 초대 한다.

파비안느의 딸 뤼미르는 엄마의 자서전을 읽다가 단 한 줄도 진실이 없다는 사실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딸의 기억 속에 엄마는 항상 영화 출연 중이여서 집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책 속에서는 둘도 없는 모녀 사이를 넘어 단짝 친구처럼 묘사 되어 있었다. 

엄마와의 추억이 전혀 없었던 딸 뤼미르가 이 자서전은 허구라고 따지자 파비안느는 무심한 눈빛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진실은 재미없지 않겠어?"

배우가 되지 못해 시나리오 작가가 된 딸 뤼미르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가식과 허영 덩어리로 대중들에게 조차 엄마의 모습을 연기 하고 있을 뿐이다.

파비안느 삶에서 가식적인 모습을 갖지 않는 진실 된 사람이 존재 한다.

손녀 샤를로트는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는 아이이지만 배우인 할머니의 성격을 쏙  빼닮아서 개성 있고 매력적인 성격의 아이다.

영화는 배우 파비안느가 그동안 살아 오면서 실제 인생과 시나리오에 적혀 있는 인물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교차 시키며  펼쳐 보인다.

사랑과 위트가 넘치는  가족 품에서 다정한 엄마로 살고 있는 딸과 달리  엄마 파비안느는 어린 시절 부터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인생을 연기 하다가 실제의  삶과  가상의 인물의 삶이  혼재 되어 어느 새 모든 순간이 가식적인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감독은 파비안느가 연기하는  '내 어머니의 추억’에서 흘리는 눈물과 딸과 사위 앞에서 흘리는 눈물의 모습을 뒤섞어 놓고 관객들에게  영화와 현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흥미로운 시선으로 관찰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배우들은 연기하는 인물과 실제의 삶이 다르지만 일반 대중들은 작품 속 배역에 완전하게 몰입한 배우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감정을 주최하지 못하고 같이 눈물을 흘릴 때가 있듯이 연기하는 배역이 그 배우의 실제 모습과 가깝다고  착각 할 때가 있다.

감독이 실제로 만났던 배우 카트린 드뇌브는  영화 속 인물처럼 살지 않고 연기와 자신의 인생을 구분해서 살고 있다.

영화 <죽은 시인 사회>로  전 세계인들에게 이름을 알리면서 10대 시절 부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배우 이선 호크는 카메라 밖에서는 수다쟁이에 딸의 치아 교정을 언제 해줄 지 고민하는 딸 바보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쓴 프랑스를 대표하는 줄리엣 비노쉬는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출연 섭외를 받자   감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직접 식사 대접을 했다.

줄리엣 비노쉬는 대 배우와 기싸움을 벌이거나 작품에서 자신의 배역 비중을  놓고 감독에게 압력 행사를 하지 않고  다른 국적의 감독들이랑 영화 촬영 당시에 얽혔던 에피소드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 하며 영화 출연에 있어서 감독의 국적이나 언어 장벽에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2019년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이라는 영화로 개봉한 이 작품의 원 제목은 <진실>이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2003년 부터 지지부진하게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다 캐스팅을 염두 해 두었던 배우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영화 배경을 일본이 아닌 프랑스로 옮겨서  배우의 삶을 살고 있는 엄마와 딸의 갈등과 화해에 촛점을 맞추었다.

프랑스 현지 촬영에서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감독은 통역사를 통해 촬영과 연기 지시를 했고 편집하는 동안 코로나 팬데믹이 터져서 격리 기간 동안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배우들과 함께 연기하고 촬영했던 것을  일지처럼 기록했다.

 마지막까지 멋지고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에게 직접 하이쿠 시와 그림을 그려서 편지를 남긴 감독은  촬영하는 동안 여러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연기 배테랑들의 배려와  촬영팀의 협력으로 두 달 만에 완성했다.

감독은 한국에서 영화 <브로커>촬영과 동시에 프랑스에서 영화 촬영과 편집 작업을 했기 때문에 영화 일지 마지막에 한국 영화 제작 촬영 팀과 일했던 소감을 적어 놓았다.

 횟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한국을 자주  방문 했던 감독은 한국에 대한 애정이 있지만 한국 영화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갑과 을의 관계, 촬영 중에 막말을 쏟아내는 촬영팀의 우두머리와 콧대 높은 배우들의  모습이 초대형 히트작 <오징어 게임>과 흡사 하다고  일지에 남겼다.

감독은 15년 전 처음 한국을 방문 했을 때에 비하면 그나마 한국 영화계는 수평적이게 되었다고 하지만  일본과 프랑스 영화  현장에서 60대 부터 70대까지 꾸준하게 활동 하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은 나이와 출신 세대 별로 보수와 진보로 나눠져서 기싸움을 벌이다 현장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한국은 팬들과 소통을 위해 작품 홍보를 위해 배역을 맡지 못하는 동안 연기 공백기를 이유로 상당수의 연예인들이 유튜브에 개인 채널을 만들어 놓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며 연예인 프레미엄으로 붙는 PPL까지 챙기고 있다.

전국민 80퍼센트 이상이 유튜브를 시청하고 있고 누구나 개인 콘텐츠를 제작해서 영상을 촬영하고 올릴 수 있는 시대에 일반인들보다 유리한 조건에 있는 연예인들의 모습까지 마음껏 볼 수 있는 세상이다.

영화 속 세상이 진실이 아닌 걸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 영화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보여지는 것들을 진실로 받아 들일 때가 있다.

실시간 영상 시대에 진실처럼 보여지는 가상의 세상을 보며 울고 웃는  우리는 진실이 덮어진 무시 무시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빈 공간을 가지고 있고, 그 공간은 다른 사람만이 채울 수 있다."

 영화 <공기인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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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5-24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한국 영화계를 보고 남긴 일지의 글들이 참 뜨끔하네요.
우리 나라 영화계에도 좀 더 분위기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텐데 말입니다.
요즘 저도 유튜브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는데요. 확실히 예전보다 연예인들의 판?이 더 많아지긴 한 것 같아요. 알고리즘이 뜨다보니 어? 이 사람도 유튜브 채널 개설했네? 생각많이 했거든요.
나중엔 유튜브 열풍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긴한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암튼 스콧 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고 계시죠?^^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손턴 와일더 지음, 정해영 옮김, 신형철 해제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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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 7월 20일 정오 무렵 리마와 쿠스코 사이를 이어주는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 산 루이스 레이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다리가 무너져 버릴 당시에 건너던 다섯 사람 모두 떨어져 죽게 된다.

간발의 차이로 참사를 피한 주니퍼 수사는 “왜 이런 일이 하필 저 다섯 사람에게 일어난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고 다리 붕괴 사고로 희생된 사람들이 우연히 그 장소에 가게 되어 죽게 된 것이였는지 아니면 신이 정해 놓은 운명의 섭리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들의 죽음’의 원인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인생 행적을 탐사해 나간다.


주니퍼 수사가 가장 먼저 인생 행적을 탐문하는 첫 번째 희생자는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으로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딸을 키워냈지만 엄마의 과도한 집착과 사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딸은 스페인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엄마를 두번 다시 찾지 않는다.

두 번째 희생자는 후작 부인을 수행했던 하녀로 수도원에 버려졌던 고아 소녀 페피타이다.

그녀의 뒤를 따라 다리를 건넜던 세 번째 희생자 에스테반 청년은 자신의 쌍둥이 형제의 죽음으로 자살을 시도 했지만 실패 한 후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 하기 위해 다리를 건너갔던 청년이다.

네 번째 희생자는 '늙은 어릿 광대' 피오 아저씨로 한때는 유명했던 연극 배우였던 그는 젊은 시절 페루의 최고의 여배우가 성공 할 수 있게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연인에게 버림 받는다.

다섯 번째 희생자는 하이메라는 이름의 아이로 '늙은 어릿 광대' 피오 아저씨가 자신이 연기를 가르쳤던 여배우 카밀라 페리콜이 낳은 아이를 맡아 키우며 함께 리마로 가던 중이었다.

한 날 한 시에 같은 마차에 타고 산 루이스 레이 다리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 다섯 명의 운명은 ‘모두 죽을 만했던 사람들이였을까?" 아니면 ‘신의 섭리였을까?, 허무한 우연인 것인가?'

만일 이게 섭리라면 신은 잔혹하고, 한낱 우연이라면 인생은 무의미한 것 아닌가?

이 다섯 사람들은 그 날 왜 산 루이스 레이 다리를 건너갔던 것일까?

가톨릭 성인의 이름을 딴 산 루이스 레이 다리를 건너 산길을 오르면 클루삼부쿠아 성지에 닿는다.

이 성지는 개혁적이고도 헌신적인 마리아 수녀원장 이끄는 수녀원과 성당이 있는 곳으로 발길이 닿는 곳마다 성당과 수녀원에서 들리는 종소리가 울리는 경건함으로 가득 찬 곳이다.

포목상의 딸로 태어나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몬테 마요르 후작부인은 딸 클라라에 대한 강박과 집착이 결국은 자신을 위한 딸의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다리를 건너다 죽음을 맞이 하고 후작부인의 하녀인 페피타는 고아였던 자신을 키워준 수녀원장의 사랑을 구하려다 결국 다리 아래로 떨어진다.

쌍둥이 동생을 잃은 형 에스테반은 삶의 의지를 잃어 버렸지만 자신의 형제를 키워준 수녀원장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다리를 건너다 추락하고 연인에게 버림 받은 늙은 연극 배우와 그가 데려다 키우는 아이까지 각기 다른 사연을 품고 리마로 되돌아가던 한날 한시에 죽는다.

저마다 욕망하고 자학 하고 절망하고 원망하다 비로소 “용기”를 내어 죽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고 새 삶의 의지를 품고 다리를 건너던 그 순간에 죽음을 맞는다.

이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다섯 명의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세상은 오만함과 부유함이 저주 받은 것이라 했지만 신의 섭리를 연구하던 주니퍼 수도사는 이들의 삶이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다르다고 추론 했지만 결국 이교도로 몰려 책과 함께 화형을 당한다.

주니퍼 수사가 탐문하기 시작한 다섯 사람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완전히 우연한 사고처럼 보이는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무너지는 사고에 더 큰 운명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족 사이의 사랑, 스승과 제자 사이의 애정,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부모를 잃은 고아를 키워준 마리아 수녀원장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었던 다섯 명의 운명은 인류 전체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연결 시켜 주는 가장 강력한 두 세계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땅’과 ‘죽은 사람들을 위한 땅’으로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하는 유일한 동물이지만 자신과 다른 또 다른 인간의 속성을 찾아 서로 비교 하고 경쟁하며 동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인간이 직면하는 고통과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극복하며 서로 공존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제주항공 참사와 같은 비극을 겪는 동안 "왜 하필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며 사건 수습과 대처, 사고 예방에 미흡할 뿐 그저 누구나 우연히 그런 사고를 당해 그런 죽음을 맞이할 뿐이라고 덮어 버린다.

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에서 마리아 수녀원장은 자신의 신자들이자 다리 붕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죽음의 의미를 이런 말로 추모 한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

-손턴 와일더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중에서

작가 손턴 와일더(1897~1975)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작품의 첫 장의 시작은 '어쩌면 우연' 마지막 장은 '어쩌면 신의 의도'로 끝이 난다.

1714년에 페루 리마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사고로 희생된 운명을 갖은 사람들에게 <신>은 구원적인 존재가 아니였다.

어차피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들은 언젠가 죽게 될 것이고 죽고 나서는 그 모든 기억들이 사라져 버린다.

어떤 시대가 도래 한다 해도 결국엔 모두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끝이 있고 그 끝에서 다시 태어나서 시작되는 사랑이 있듯이 모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우리 모두 날마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삶과 죽음의 다리를 건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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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5-16 13: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책 궁금했는데 스콧님 덕분에 바로 찜합니다. ^^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 2024 스웨덴 올해의 도서상 수상작
리사 리드센 지음, 손화수 옮김 / 북파머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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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금요일이라고 적혀 있는 책의 첫 장을 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13시 10분

보는 점심으로 생선 그라탱과 설탕을 많이 넣은 커피를 원했음.

가래를 제거하기 위해 천식약을 흡입하고 식스텐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음.

그는 식스텐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한다는 가족 일원의 말에 자신이 상당히 화를 냈다는 것을 꼭 일지에 적어 놓으라고 내게 부탁했음. 벽난로 상태는 양호함.

-잉리드

몇 시 몇 분이라는 정확한 시간과 '보'라는 환자의 식사 여부와 건강 상태 일지를 적은 '잉리드'는 요양 보호사다.

그녀는 6개월 전부터 89세 남자 '보'라는 환자의 집에 드나들면서 간호 하고 '보'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에게 일지를 적어 보여 주며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알려주고 있다.

환자를 돌보는 요양 보호사와 아내의 일기 그리고 아들의 시선이 번갈아 교차 하면서 진행 되는 이야기의 중심 인물인 '보'는 자신이 눈을 감기 전 반려견 식스텐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는 아들에게 분노한다.

치매를 앓던 아내가 요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은 '보'는 살아 생전에 아내가 썼던 스카프를 병 속에 넣어두지만 병뚜껑을 열기도 힘들어서 요양보호사에게 부탁해야 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곧 임박했음을 감지 하고 지난 시절 한 때 가족과 행복하게 보냈던 기억을 하나 하나 떠올리기 시작한다.

'나는 스카프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면서 타들어 가듯 아픈 마음을 감은 눈꺼풀 뒤에 숨겼다. 나이가 들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기억 속에는 눈물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

-리사 리드센의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아버지 보는 아들 한스의 꼬마 시절 함께 낚시를 다니며 친구 투레의 오두막에서 셋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지만 아들 한스는 어릴 때부터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다.

남편과 아들 사이에 냉랭한 기류가 흐를 때 마다 아내는 엄마로 아들을 따스하게 품어 주었고 단 한번도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남편을 이해 했다.

아들 한스가 대학에 진학하고 부터 아버지 보는 아들이 말하는 정치, 사회 문제에 관한 어려운 용어를 이해 하지 못했고 세상에 모든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아들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분노의 여파였는지 최근 나를 괴롭히던 감정이 다시 밀려들었다. 가슴 속에서 고개를 든 것은 이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였다.'

보는 천식과 심장약을 복용하고 있어도 친구 투레와 달리 움직이고 외출 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자부 하며 반려견 식스텐을 매일 산책 시키고 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피곤해지고 잠이 쏟아졌고 방금 전 했던 일을 잊어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나날이 기력이 쇠약해진 '보'는 한 여름에도 스웨터를 껴 입거나 반려견 식스텐이 목줄을 채울 때 도망치는 것을 따라 잡기 힘들게 되자 정밀 진찰을 받으러 병원에 간다.

병원에서 보는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의사로 부터 심장 마비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에 화가 치밀어서 병원을 박차고 나가고 아들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의 불안한 시선을 애써 외면 한다.

보는 수면 중에 소변을 보기에 이르지만 요양원에 가지 않기 위해 부엌 소파에서 자기 시작하고 부지런히 반려견을 산책 시키고 친구를 찾아 가며 일상적인 생활을 이어간다.

결국 '보'는 산책 중에 참지 못하고 옷에 오줌을 싸고 급기야 집으로 돌아와서는 바지 조차 벗기 힘겨운 상태에 이르자 자신에게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실감한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갑자기 오른쪽 허벅지가 묵직해졌다. 안개 낀 듯 흐릿한 시야 속에서 내 다리에 얹은 한스의 손이 보였다. 우리가 얇은 옷차림으로 낚시를 하기 위해 오랫동안 호숫가에 앉아 있을 때면 나도 그의 어깨에 그렇게 손을 올려놓곤 했다. 문득, 우리의 손이 너무나 닮아서 깜짝 놀랐다.

-리사 리드센의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은 작가 리사 리드센이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가 남긴 메모에서 시작 되었다.

손녀인 작가는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 하던 중 요양보호사가 남긴 메모에서 할아버지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의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작가는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기록과 메모를 정리 하면서 죽음에 이른 한 남자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한 생을 살다 간 남자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던 소년이 제재소에서 일하며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들을 낳고 키우며 생의 한 시절을 보내다 치매를 앓던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홀로 남겨진다.

가족처럼 반려견에게 의지하며 생의 끝을 향해 가고 있는 보는 새 가정을 꾸린 아들에게 태어날 손녀를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89세 보의 일생에서 조금씩, 부분 부분 잃어버리고 놓쳐 버리는 시간의 길이가 행복했던 시간보다 훨씬 더 길었다.

론 뮤익 <피노키오 Pinocchio>(1996), 혼합재료, 84 x 20 x 18cm, The John and Amy Phelan Collection / 사진. ©Anthony d'Offay


장난감 가게 아들로 태어난 소년은 어린 시절부터 손에 잡히는 재료로 인형을 만들었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즐겨 보는 어린이 TV프로그램의 캐릭터 인형을 만들다가 직접 방송국에 자신이 만든 인형을 가져 간다.

그의 재능을 알아 본 제작진은 청년에게 일자리를 제안하고 대학에 진학 하지 않고 일찌감치 영화와 TV 분야에서 마네킹과 소품을 제작하다 영국의 광고 재벌이자 컬렉터 찰스 사치의 눈에 띄어 그가 1997년에 기획한 ‘센세이션’전에 직접 만든 마네킹을 끌고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한다.


론 뮤익 <쇼핑하는 여인 Woman with Shopping>(2013), 혼합재료, 113 × 46 × 30 cm / 사진. © Patrick Gries, 출처.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홈페이지

양 손 가득 묵직한 비닐 봉지를 들은 여자의 커다란 외투 속에 이제 막 목을 가눌 수 있는 아기가 엄마의 얼굴을 쳐다 보고 있지만 피로에 찌든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가와 눈을 마주치 않은 채 다른 곳을 응시 하고 있다.

호주 멜버른 태생의 극사실주의 조각가 론 뮤익(Ron Mueck, 1958~)의 작품은 가까이 다가가면 조작상이 말을 걸거나 불쑥 손을 내밀 것 같이 실제 사람 크기와 너무나도 흡사하게 만들었다.

론 뮤익 <죽은 아버지 Dead Dad>(1996~1997), 혼합재료, 20 x 38 x 102 cm / 사진. © Eva Herzog,

출처. 타데우스 로팍 홈페이지

호주 멜버른에서 장난감 제조업체를 경영했던 론 뮤익의 아버지는 아들의 손에 의해 1996년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 마지막 숨을 거둔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들 론 뮤익은 아버지의 얼굴에 새겨긴 주름과 검버섯을 만들고 한올 한올 흩어진 머리카락과 땀구멍까지 정밀하게 표현해서 자식에게 모든 걸 주고 떠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자신의 <죽은 아버지>를 세상에 공개 했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복잡 다단한 삶을 살다 숨결이 다하는 그 마지막 날은 모든 걸 소진해 버린 육신만 남겨진다.

출처: 바티칸 교황청,목관에 안치된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목관에 안치된 모습이 세상에 공개 되었다.

교황의 마지막 유언에 대로 바티칸 내 거처인 산타 마르타의 집 예배당에 있는 목관에 붉은 예복을 입고 머리에는 미트라를 썼고, 손에는 묵주가 들려 있다.

화려한 치장을 한 관이 아닌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목관에 조문객 눈높이보다 아래에 몸을 누인 교황이 선종 뒤 남긴 재산은 100달러 뿐이다.

평생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며 청빈한 삶을 살다 간 교황은 마지막 까지 그의 교황명인 13세기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빈자의 성인’으로 살다 갔다.

인간의 생이 다한 육신을 마주 할 때면 마지막 내 것으로 가져 갈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죽음 또한 살아보지 못한 삶의 시작이기에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죽음을 인생의 마무리로 받아들인다면 매 순간 삶을 더 소중하고 충실하게 살아 갈 수 있으리라..

희망은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선물입니다.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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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4-25 12: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재작년에 욘 포세의 작품들을 몇 권 읽었었는데, 거기서도 삶과 죽음이 이어져있다는 메시지 같은 걸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scott 님의 글을 통해 그러한 메시지가 한 번 더 각인 된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25-04-25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4-25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친애하는 개자식에게
비르지니 데팡트 지음, 김미정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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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라일리가 13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겪게 되는 혼란과 자기 발견의 이야기가 중심인 '인사이드 아웃2'의 감정 컨트롤 센터에 새로운 감정들이 등장한다.

새롭게 감정컨트롤 센터에 들어 온 불안 , 당황 , 따분 , 부끄러운이 감정들이 센터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던 기쁨이 , 슬픔이 , 버럭이 , 까칠이 , 소심이들과 감정의 충돌이 일어나면서 더 이상 단순한 감정만으로 조절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인간은 하루에도 여러 번 기쁘기도 하다가, 슬픔을 느끼다가 , 당황 하기도 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 어느 순간 불안감에 사로 잡히기도 한다.

시종일관 단 하나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복잡 미묘한 인간의 여러 감정 중에서 픽사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2는 불안을 정면으로 내세우며 애초에 인간은 단순히 기쁘거나 슬픈 것이 아니라, 여러 감정이 뒤섞여서 궁극적으로 감정의 변화가 행동을 만들어 내면서 성장하고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터넷 익명 게시판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마음껏 감정을 표현 할 수 있는 요즘은 그야말로 '감정'의 시대다.

인터넷 통신망이 없었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나 사적인 모임에서 표출된 감정이 사람들의 입을 통하지 않고는 익명의 사람들이 알지 못했고 정치적 탄압이나 억압적인 권력층에 의해 감정을 억누르고 표출을 자제해야 했던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광활한 통신망 시대에는 누구나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개인 블로그나 인스타를 통해 경험과 취미, 일상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하거나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을 밝히기도 하고 혐오하거나 싫어하며 불편한 것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한 명의 사람이 여러 개의 계정을 만들어서 다양한 자아로 다중적인 일들을 벌일 수 있다.

그러다 어느 날 무심코 올린 사진 한 장에 단 한번도 연락하거나 만난 적이 없는 이들에게 충격적인 메시지를 받게 되는 일이 발생 하기도 한다.

친애하는 개자식에게.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 봤습니다. 어깨에 똥을 싸지르는 비둘기보다 당신이 나은 게 하나라도 있을까요? 역겹고 불쾌하기 짝이 없군요. “왈왈왈, 나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허접한 머저리입니다. 사람들 주목을 받고 싶어 칭얼거리는 개새끼입니다.” SNS에 영광을 돌려야겠네요, 아주 잠시나마 유명세를 누렸을 테니.

-비르지니 데팡트의 <친애하는 개자식에게> 중에서

프랑스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사십대 인기 소설가 오스카 제이야크는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선망해왔던 여배우의 외모를 폄하하는 발언을 별 생각 없이 개인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 여배우에 대한 글을 올려는 지 조차 잊고 살았던 어느 날 오스카는 그 여배우로 부터 <친애하는 개자식에게>라는 답장을 받게 된다.

오스카는 책 출판 홍보를 담당했던 직원에게 미투로 고발 당하고 책 출간이 무산 되어 하루 아침에 그는 SNS에서 '개자식'으로 불리면서 언론의 먹잇감이 되어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물어 뜯기게 된다.

소설가 오스카가 도대체 그 여배우에 대해 어떤 글을 썼길래 <친애하는 개자식에게>라는 답장을 받게 되었을까?

오스카가 한 때 자신의 여신이였던 여배우 레베카를 직접 보고 나서 술잔을 기울이며 개인 SNS에 이런 글을 썼다.

참담함의 기록

파리에서 우연히 레베카 라테를 봤다. 그 배우가 그간 맡아온 캐릭터가 머릿속에 차례차례 소환되어 다시 상영되었다. 위험하고, 치명적이며, 연약하고, 애처롭다가도, 때론 영웅적이기까지 한 여자. 얼마나 숱한 나날을 레베카와 사랑에 빠졌던가. 무수히 많은 사진이. 허다한 집을 거치며, 얼마나 많은 침대 머리맡을 장식했던가. 얼마나 많은 나날을 그 사진을 보며 꿈꾸었던가. 그런데 끝으로 치달은 한 시대의 비극적 은유를 목도한 것이다.

한 때 프랑스 남성들의 이상형이였던 배우 레베카는 전성기 시절에 잡지 표지와 광고계를 평정 했던 스타였지만 오십 줄에 들어 서자 배역이 들어 오지 않아서 커리어에 큰 위기가 불어 닥친다.

레베카는 배우로 한창 잘나갔던 시절에 몰랐던 성차별이나 여성 혐오에 대한 남성들의 시선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고 페미니즘 블로그를 운영하는 도서 홍보 담당자 조에 카타나의 글을 읽으면서 여성들에게 공격적인 백인 남성 블로거들을 물어 뜯기 시작한다.

한 때 동경 했던 미모의 여배우 레베카로 부터 온갖 저주의 말을 주고 받던 오스카는 자신의 도서 홍보 담당자였던 이십대 여성 조에 카타나에게 미투 고발까지 당하자 무결함을 호소하면서 부르주아 계급 여성들이 노동 계급 출신인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익명으로 페미니즘 블로그를 운영 해 왔던 조에는 실명을 밝히고 자신이 운영하는 페미니즘 블로그를 통해 계속해서 여성을 쾌락과 혐오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백인 남성들의 폭로를 이어나간다.

여성과 남성, 청년 세대와 기득권 세대, 노동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 미투 고발자와 미투 가해자 등 전혀 다른 상황과 처지에 놓인 이들의 목소리를 1인칭 시점의 SNS의 서간체 형식으로 가감 없이 담아낸 《친애하는 개자식에게》의 배경은 현 시대 프랑스이지만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층과 세대간의 대립과 갈등의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미디어의 환상적인 카메라와 편집 기술로 인한 비현실적 미의 기준, 부의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 계층간의 갈등과 차별, 노인 혐오와 폄하, 젊은이들에 대한 불신 온라인에서 자행되고 있는 사이버불링, 청년 세대가 겪는 우울과 불안, 마약과 알코올 중독 문제까지 현 시대의 모든 문제들이 용광로 처럼 펄펄 끓어 오른다.

현실감 넘치는 현대 사회 이슈를 폭넓게 담아낸 <친애하는 개자식에게>를 쓴 작가 비르지니 데팡트는 젊은 시절 학대와 성폭력을 당했던 피해자였지만 가족과 지인 그리고 사회로 부터 보호나 치료를 받지 못했다.


1969년 프랑스 낭시에서 태어난 비르지니 데팡트는 사춘기 시절 '여자 아이가 과격한 행동을 보인다'는 이유로 부모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에 감금 당한다.

15살 나이에 정신병원 담당의사로 부터 성적 수치심과 모욕을 당했던 비르지니는 병원을 탈출한다.

그녀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자신이 학교에서 퇴학 당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탈출에 성공했지만 의지 할 곳을 찾지 못하게 되자 무작정 리옹에 가서 닥치는 데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학력도 없고 정신병 이력을 달고 있었던 10대 소녀 비르지니는 어느 가정집 상주 가정부로 일을 하다 그 집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신고하게 되면 다시 병원에 감금 될 것이 두려웠던 비르지니는 식당 과 음반 가게를 전전하다 성 노동자가 된다.

비르지니는 성매매 하는 남성들의 민낯을 경험하고 나서 포르노 영화계 실상을 파헤치기 위해 위장 취업을 해서 익명으로 매체에 기고를 하다 사회 곳곳에서 성폭력을 당하는 저임금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취재를 하며 기자로 활동한다.

1993년 비르지니는 그동안 철저하게 남성들이 감독하고 연출하고 제작 해왔던 포르노그래피 물에 정면으로 대항하기 위해 포르노그래피와 성폭력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장편 소설 <베즈무아>를 발표 하면서 프랑스 문학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장편 소설 <베즈무아>는 영화로 제작 되었지만 프랑스 측에서 과도한 선정성과 폭력성을 이유로 최고 행정 법원에서 배급 중단 행정 명령이 내려지지만 비르지니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검열 반대 운동을 펼쳐서 개봉 시키는데 성공한다.

비르지니는 자신이 당했던 성폭력의 경험을 과감하게 공개 하면서 SNS시대에 나날이 교묘해지고 악랄해진 젠더 간의 차별과 갈등으로 인해 왜곡된 성의식을 갖고 있는 남성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수 많은 여성들에게 성폭력과 차별을 가하고 있는지 사회 전역에 걸쳐 공론화 시키는데 앞장 서고 있다.

개인 데이터를 통째로 뽑아내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셀프 브랜딩(self-branding)’ 해서 사회가 좋아하고 원하고 있는 '나’의 이미지로 설계 할 수 있게 만든 서비스다.

인스타그램, 틱톡, 트위터, 블로그 등 수많은 SNS에 가입한 사람들은 이 세계 속에서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의도적으로 전시해서 스스로를 브랜드처럼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은 각 플랫폼과 그곳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나’의 모습에 맞춰 페르소나를 취사 선택한다.

그렇게 타인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나’의 모습에 맞춘 페로소나를 선택한 개인들은 각자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자신과 특정 성질을 공유하는 집단의 정체성과 자신을 동일시 하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집단의 주류에 편승한다.

극단적인 성향의 커뮤니티들은 계층도, 연령도 모두 제각각인 세대의 집단이지만 자신의 집단에 몰입하고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여성이나 성 소수자를 공격하며 그저 무분별한 ‘혐오’로 똘똘 뭉친다.

문제는 이렇게 똘똘 뭉친 커뮤니티들 회원들 중에서 무시와 혐오를 당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이나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 상대적인 박탈감이 원한으로 심화될 경우 이는 곧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표출되어 사회 양극화의 갈등을 조장하고 여론 몰이와 마녀 사냥으로 이어진다.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겪고 있는 세대별 차별과 불안, 청년층의 불안과 노년층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전 세계 사람들이 겪고 있을 정도로 현 시대 사람들의 감정에서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불안감이다.

특히 한국은 태어나자 마자 살고 있는 거주지부터 계층이 나눠져서 극성스러운 양육과 교육열로 5살 부터 학원에 다니고 7살 때 부터 대학 입시를 향해 공부 하는 한국인들은 경쟁에서 도태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다.

학교에서는 결석을 하지 않고 성실하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중에서 부모를 따라 해외 여행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리켜서 '개근 거지'라 부르고 유행 하고 있는 아이템이나 옷으로 패딩 가격과 색깔로 또래집단 내 위계가 형성되어 학교 폭력으로 번지는 사태가 발생 하고 있다.

안정적인 일자리 부족과 불안정한 경제 상황, 소득 양극화, 높은 주택비용, 극심한 사교육 열풍 속에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 속에서 입고 있는 '옷과 가방 그리고 자동차'가 신분증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는 '헬 조선'으로 불리고 있다.

장기 침체로 인해 노동 시장은 불안정해 졌고 소비는 위축되어서 불안의 심리가 사람들을 잠식했고, 이 불안감은 SNS전체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사는 것이 고달 퍼지니 사회 형평성과 분배 문제를 둘러싼 계급 갈등과 젠더, 세대, 취향 등을 둘러싼 인정 욕구가 현실에서는 감정 표현을 자제하더라도, 인터넷 익명 게시판과 커뮤니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마음껏 감정을 분출하고 있다.

프랑스 작가 비르지니 데팡트의 《친애하는 개자식에게》의 시대 배경은 2020년 프랑스다.

다른 국가에 비해 자유와 관용이 넘쳐 날 것 같았던 프랑스는 SNS 서비스가 없던 시절에 자행 되어 왔던 성차별과 성폭력이 2010년 부터 폭발적이게 늘어 나자 가해자 집단이 된 프랑스 남성들의 극우 커뮤니티에서 ‘여성혐오’를 조장하고 계층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여성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미투 고발자이면서 미투 가해자 그리고 관찰자이기도 했던 비르지니 데팡트는 ‘여성혐오’를 논의의 장 한복판으로 끌고 온 《친애하는 개자식에게》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상처와 차별로 인해 함부로 꺼내 보일 수 없는 불안감을 안고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구조적으로 적대성을 띠는 가혹한 곳이다.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은 백인 남성들이 24시간 상주 하며 먹잇감을 찾아 다니며 공격할 대상을 찾으면 그 사람들의 행동보다 그들의 존재 자체에 낙인을 찍고 성희롱과 조롱, 인종 비하와 사이버 불링을 지나가다 툭 내뱉는 농담처럼 하고 있는 공간이다.

흑인, 아랍인, 아시아인, 극빈층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이들의 사이버 불링 대상으로 혐오와 차별을 조장해서 궁극적으로 폭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자행 하고 있다.

인간이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감정에 따라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며, 사고도 치고,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에도 사로잡히고 한 순간의 감정으로 인해 이전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하거나 감정 때문에 여러 관계나 일을 포기하고 바꾸는 경우도 무척 흔하다.

온갖 계층과 국적의 사람들의 감정의 배출구 역할을 하고 있는 인터넷 익명 게시판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한 인간의 인생을 망가뜨려 버리거나 사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막강해져서 어느 날 누군가가 가해자가 되거나 피해자가 되는 세상이다.

특히 한국은 남성에 의해 자행 되는 여성 혐오적 살해가 전국적으로 분당 13건씩 발생하고 있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2022년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2024년 이별 통보한 동갑 여성 살해 사건, 수능 만점자 출신 의대생의 여자 친구 살인 사건까지 데이트폭력, 스토킹, 강력범죄 피해자의 80% 이상이 여성이다.

문제는 이별 후 보복 범죄, 불법 촬영, 온라인 스토킹이 폭력이나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폭발적이게 증가하고 있어도 강력 범죄 사건이 발생 할 때 마다 초기 대응도 미흡한 것 뿐만 아니라 .스토킹 처벌법, 가정폭력방지법 등의 법적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해도 법적 실효성이 느슨해서 피해자를 국가가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SNS의 등장으로 가속화된 계층 간 세대간의 갈등이 취업과 결혼, 출산 등 부모 세대가 경험하고 이루어 놓은 것들 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들어서 현재 대한민국은 불안정과 무기력의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다.

'우리가 공유하는 유일한 것이 바로 공통의 적입니다. 그외에 대해서는 우리는 너무 많은 개체를 보유한 인간종이기에 동질적인 집단을 형성 하기 힘듭니다. 적들은 우리를 관찰합니다. 우리를 파악합니다.

뿌리가 같은 우리 저격수 그들이 서로 총질할 때 그들은 즐거워 합니다."

-비르지니 데팡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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