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시작은 우주와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연구하는 도구에서 유래 했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의 황하유역에는 해마다 홍수가 범람하여 고대 중국인들은 하늘의 별자리를 관찰 하며 별의 움직임에 따라 한 해 농사를 지었다.

이렇게 고대 중국인들이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하던 돌들은 기원전 2300년 경 중국의 요왕이 아둔하고 게으른 아들의 인격 수양을 위해 흑과 백이 겨루어 집을 많이 짓는 편이 이기는 게임인 바둑을 시작했다.

한반도에 바둑이 전해진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삼국사기'에 고구려 승려 도림이 백제의 개로왕과 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는 도구에서 하나의 놀이 문화 였던 바둑은 17세기 일본에서 막부 정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게임의 룰이 생겼고 오로지 바둑만 두고 사는 직업군인 기사제도와 본인방 같은 가문 대대로 바둑 기사의 계보를 이어가는 바둑 가문이 탄생했다.

일본에서 지역별 종파별 바둑 가문 대결이 시작되면서 전 열도의 대전으로 게임의 룰이 정비 되었다.

바둑의 룰은 간단하다. 반상 위에 찍힌 361개의 점 안에 돌을 놓고 흑과 백이 겨루어 집을 많이 짓는 편이 이기는 게임이다.

한국은 20세기 초까지 흑과 백의 돌을 미리 바둑 판에 배치 하고 시작하는 순장 바둑을 두었지만 해방 후 일본에서 바둑 공부를 하고 돌아 온 조남철 9단이 일본 바둑 룰을 한국에 보급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바둑은 단 한 번에 게임으로 승부가 나지 않는다.

흑의 수로 중단 되는 것이 오래 전부터 지속된 게임의 룰이지만 일본 바둑은 여기에 상수(上手)에 대한 예외를 두고 일단 상대의 수를 봐 두고 다음 수를 다시 바둑이 재계 되는 시기까지 천천히 고심해서 대국이 중단될 때까지 마지막 수를 봉할 수 있는 규칙으로 변형 되어 왔다.

이렇게 자잘한 규칙과 예외, 만일에 대비한 비책까지 바둑의 현대 룰을 확립한 바둑 기사는 일본의 명인이라 불리는 혼인보 슈사이다.

일본의 메이지와 다이쇼, 쇼와 시대에 걸쳐 50년 동안 불패의 기록을 세운 바둑 명인 혼인보 슈사이는 상대 바둑 기사를 선발 하는 데만 일 년 반이 걸릴 정도로 만만치 않은 상대와의 게임에서 궁극의 승자가 되는 바둑을 즐겼다.

대국 조건도 각자 제한 시간 40시간에 각 대국 간격이 나흘 일정에 대국 중에는 줄곧 숙소에 머무르면서 승부가 날 때까지 바둑을 지속했던 명인은 결국 마지막 바둑 경기를 앞두고 숨을 거둔다.


제 21대 혼인보 슈사이(本因坊 秀哉 )명인은 1940년 1월 18일 아침, 아타미에 있는 우로코야 여관에서 죽었다. 세는 나이로 예순 일곱살이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인> 중에서


1938년 6월26일부터 12월4일까지 장장 6개월에 걸쳐 세기의 바둑 대전이 벌어졌다.

14회나 계속된 이 경기는 65세의 바둑의 명인 혼인보 슈사이의 대국 경기로 그는 경기 중반에 병으로 쓰러져서 11월 중순까지 석 달 동안 경기가 중단 되었다가 그가 병원에서 퇴원하자 마자 겨우 제개 되었다.

하지만 50년 간 이어온 '불패의 명인'이라는 기록이 30세의 젊은 신성에게 깨지고 결국 대국이 끝나고 나서 1년 후 1940년 명인은 원래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소설을 쓰지 않는 날이면 항상 바둑판을 펼쳐 놓고 바둑알을 만지작 거리며 바둑판에 흑색과 흰색 기보를 두고 읽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38년 6월부터 12월까지 약 반년 동안 치러진 바둑의 명인 혼인보 슈사이의 마지막 대국을 직접 참관하는 동안 신문에 총 64회의 관전기를 연재하며 일본 열도를 바둑의 열풍으로 몰고 갔을 정도로 바둑 애호가 였다.

일본의 바둑 역사는 약 300여년으로 [명인 名人]이라는 호칭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엔 모든 걸 다 차지할 수 있는 직위일 정도로 바둑 판에서 승자의 자리에 올라가면 막강한 세력을 과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나서 부터 바둑계의 승자인 명인들이 누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명예뿐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명인>에 실존 명인 혼인보 슈사인는 1914년 마지막으로 명인 名人 칭호를 받았던 인물이다.

'명인의 하얀 부채가 얼음물을 얹은 검은색 칠(漆) 쟁반에 비치어 움직이는 고즈넉함. 관전은 나 혼자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인' 중에서

50년 동안 바둑의 명인이였던 혼인보 슈사이는 삼십 년 동안 흑을 쥔 적이 없었다.

그는 이인자가 없는 일인자였고 살아 생전 후진 가운데 8단도 없었다.

동시대 활동 했던 바둑 기사들 중에서 그의 지위에 견줄 자가 없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십 년 동안은 일본 바둑계에서 명인 혼인보 슈사이의 승부를 넘어선 기사도 나타나지 않았고 계승자도 없었다.

흑과 돌의 집짓는 게임을 '도道'의 예술로 끌어 올려 기와 예절을 갈고 닦는 명인 바둑 기사를 탄생 시킨 곳은 일본이였지만 일본의 바둑의 기예를 누른 상대는 한국의 바둑 기사들이였다.

승부의 세계가 원래 그렇다. 아니, 승부를 떠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원래 그렇다.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길 수 있다면 이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반전의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내가 버텼던 이유는 이겨야 한다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아직 이길 기회가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조훈현의 <고수의 생각법> 중에서

한국 바둑의 명인 계보는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9단이 터를 닦기 시작해서 김인 9단-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 그리고 인공지능 알파고를 상대로 1승을 거둔 이세돌에서 현재 2000년생 신진서 9단으로 이어진다.

2019년 1월부터 7년째 세계 1위인 그는 14억 중국의 최고 기사(棋士)들을 줄줄이 무너뜨린 무서운 20대 신진서 9단은 엄청난 인해 전술 전략을 펼치며 만리 장성 같은 바둑 게임 판을 키우고 있는 중국 바둑 기사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상대다.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바둑 기사 다섯 명이 신진서 9단에게 달려 들어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다.

한 해 동안 82국을 소화하는 신진서 9단은 상대가 강할 수록 묘수가 떠오르고 더 강한 상대가 나타날 수록 정신이 집중 되어 강자들을 꺾을 때 마다 자신감이 붙어 마지막 승자 자리에 올라가는 바둑 인간 알파고다.

5일 동안 이어지는 결승 대국이 시작될 때는 신진서 9단은 혼자 다섯 명의 중국 바둑 대표들을 상대 할 때는 게임이 시작되는 오전 10시 40분 부터 저녁 6시간 까지 경기에 임하고 중간 휴식 시간에 식사와 주변 산책을 하며 마지막까지 온전히 바둑판과 혼연 일체가 된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복기를 하고 복기가 끝나면 새로운 상대인 인공지능 바둑을 연구 하고 있다.

2000년 생이 혼자 중국과 일본의 바둑 기사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건 지속적이면서 일률적인 습관 덕분이였다.

신진서 9단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다.

-오전 9시 기상

-식사 전 기보, 두 개

-오전 11시 전 까지 아침 겸 점심 식사

-인터넷 바둑 공부

-오후 시간 동안 기보/기보/기보

- 오후 3시 쯤 간식과 휴식

-인터넷 바둑(이길 때 까지 게임을 지속한다.)

-저녁 6시 까지 기보/휴식/기보

-늦은 밤 이기면 산책을 나가고 지면 이길 때 까지 기보/기보/기보


이겼다고 믿을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잡념은 교활하다. 이겼다고 생각해 방심하는 순간이 자신이 파고들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임을 알고 있다. 목표가 눈앞이라면 그때야말로 조심해야 한다. 그때가 가장 큰 위기일 수 있다.

-신진서 9단의 <대국> 중에서


박진감 넘치고 실감 나는 3D게임이 넘쳐 나는 시대에 흑과 돌을 만지작 거리며 몇 시간에 걸쳐 반상 위에 찍힌 361개의 점 안에 돌을 올려 놓은 게임은 과거 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진다.

평생 동안 바둑판만 응시한 채 1년 365일 손에서 바둑 알을 쥐고 사는 명인은 바둑판을 벗어난 세상의 온갖 협작과 질투,교묘한 술책이나 속임수, 눈속임에 크게 개의치 않아야 하고 그런 시선과 모함에 휘둘릴 시간도 없을 것이다.

명인의 하루 일과는 바둑 알을 쥐고 바둑판을 바라보며 시작되고 하루의 마지막도 바둑 알을 손에서 내려 놓아야 끝이 나고 한 번 승부가 펼쳐 지면 끝장 날 때까지 승부를 보는 근성으로 인생의 모든 걸 바둑에 건다.

바둑의 세계를 모르는 이들에게 명인의 삶은 이해 불가다.

기껏해야 바둑이고 이기고 지는 승부의 게임이지만 바둑 판 위에 찍힌 361개의 점 안에 돌을 놓고 서로 집을 지으려 다 보면 경계선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이렇게 흑과 백이 맞붙는 과정에서 흑과 돌의 대결은 마치 온갖 처세술이 난무 하는 세상의 축소판 처럼 인간의 모든 희노애락이 바둑 판 위에서 펼쳐지는 오묘한 게임이다.

인생 전체를 바둑판에 온전히 바쳐 버린 명인처럼 읽고 쓰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매진 하는 사람이 있다.

단 두 편의 소설로 일본을 대표하는 주요 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한 마쓰나가 K 산조는 1년 365일 설계도를 그리며 집을 지어 올렸던 건축가였다.

주중엔 설계도면과 씨름을 하고 주말이면 배낭을 짊어지고 산행을 했던 마쓰나가 K 산조는 산을 오르고 내리는 동안 일상의 자잘한 것들이 떠올랐고 산에서 내려 와서 등산 하는 동안 느꼈던 여러 상념과 공상들을 종이에 쓰기 시작한다.

주말 마다 손에 쥐고 다녔던 산행 루트가 그려진 지도는 종이 위에서 정교한 플롯으로 짜여 졌다.

작가 마쓰나가 K 산조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주인공 하타의 산행을 통해 무탈하게 별탈 없이 직장 생활을 성실히 하던 3년차 직장인이 어느 날 등산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기 시작하면서 전에는 단 한 번도 시도 한 적 없는 산행을 시작한다.

그는 산을 올라가는 동안 유툽 채널 운영자가 알려주는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산을 오르게 되고 산행 중에 여러 인물들을 만나며 챗바퀴 같은 인생에도 나름대로의 보람과 행복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베리에이션 루트(variation route). 베리 루트라는 표현도 쓴다고 한다. 평범한 등산로가 아닌 길, 요컨대 파선(破線) 루트라 불리는 고난도의 숙련자용 루트나 폐지된 길을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명확한 정의는 없지 않으려나. 좀 진귀한 루트를 두고 베리에이션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또는 정해진 루트가 아니라서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없는 계곡이나 능선을 따라가거나, 지형도를 보고 올라갈 수 있을 법한 곳 또는 오히려 못 올라갈 법한 곳을 나아가는 등 루트를 완전히 무시하고 산행 하는―”

-마쓰나가 K 산조의 <베리에이션 루트> 중에서

산을 오르고 내리는 과정도 바둑 판에 흑과 돌을 쌓는 과정도 정해진 '길' 법칙이 없다.

두 발을 땅에 딛고 두 손을 바둑 판에 내밀며 한 발 한 발 , 한 수 한 수 앞으로 나아가면서 포기 하지 않는 노력과 근성으로 버텨 내고 감내 하고 이겨내면서 자신 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작가 마쓰나가 K 산조는 산행을 하면서 자신만의 루트를 개척 했고 산에서 내려와 자신만의 스토리로 종이 위에 활자를 채워서 한 권의 책으로 완성 했다.

산을 오르는 것도 바둑 게임에서 이기는 것도 쉽지 않고 한 권의 이야기를 완성 하는 것도 쉽지 않다.

2024년 2월 1일 부터 쓰기 시작한 장편 역사 소설 <굿바이, 부다페스트>는 매회 1만자를 넘나들며 2025년 1부 50회를 지나서 3월 27일 61회의 고지를 찍었다.

<굿바이, 부다페스트>

https://tobe.aladin.co.kr/s/9373

1회부터 60회까지를 발걸음 수로 계산을 해보면 일반 성인 한국인의 보폭은 60~80cm 정도로, 1,000걸음은 약 1km 정도다.

큰 걸음으로 만보를 걸으면 약 6~8km를 걷게 되고 만보 걸음을 채우려면 2시간 정도 소요 된다.

1년을 넘겨서 61회를 썼으니 61 만보를 두 발로 걸은 것과 비교 할 수 있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AI 시대와 디지털 혁명이 가속화되는 오늘날, 목표 또한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목표를 정하면 마치 만점짜리 과녁처럼 그것에만 집중하지만, 기술과 사회는 끊임없이 변한다. 오늘의 기준으로 설정한 목표가 내일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장기적인 목표라면 빠르게 발전하는 AI 기술, 데이터 경제, 디지털 트렌드의 변화에 맞춰 유연하게 조정해야 한다.

-이라야의 AI 시대, 불안한 오늘을 살아가는 너에게 중에서



인공지능이 바둑도 두고 소설도 쓰고 그리고 뚜벅 뚜벅 만리 장성도 지치지 않고 걸어 갈 수 있는 시대에 창작법을 어디에서도 배운 적 없는 나는 홀로 고군분투 하며 100회를 예정하고 장편 역사 소설 <굿바이, 부다페스트>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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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 넉 장 반 타임머신 블루스 다다미 넉 장 반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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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대학원 재학 당시에 쓴 <태양의 탑>으로 일본 판타지 노벨대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 데뷔한 모리미 도미 히코는 3년 만에 발표한 작품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로 나오키상 후보와 서점 대상 2위에 오르며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수상하며 장르 소설계에 돌풍을 일으킨다.

독자들은 교토 태생의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의 예스러운 단어와 독특한 대화체에 열광했고 교토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현실과 환상의 세계가 오묘하게 조합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그의 작품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며 소설을 넘어 작가 특유의 '의고체' 화법의 열풍을 몰고 왔다.

주요 문학상과 독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한 몸에 받은 작가 모리미 도미 히코가 2011년에 발표한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는 동아리 활동도 연애도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한 채 자책만 하는 대학교 3학년생인 주인공 '나'가 다다미 넉장 반 짜리 방구석에서 . 만약…이라는 가정하에 입학 때로 돌아가 여러 가정을 하기 시작한다.

작품의 전개는 주인공이 '만약'이라는 망상의 시간을 과거와 현재. 미래 시간대를 차례대로 보여주다가 주인공의 삶에 불쑥 불쑥 끼어드는 현실 속의 주변 인물들 때문에 '만약'이였던 망상이 현실이 되어 버리면서 전개되는 모험담을 펼쳐 보인다.

'현실에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지는' 환상적 리얼리즘의 세계관을 보여준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은 출간 즉시 일본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되었다.

작가는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가 애니메이션이나 영상물로 제작되는 것을 전혀 염두해 두지 않고 썼지만 이 작품이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되며 흥행에 성공하자 16년 만에 성공으로 극작가 우에다 마코토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속편 《다다미 넉 장 반 타임머신 블루스》를 완성했다.

출간 즉시 순식간에 10만 부가 판매되었고 속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디즈니 플러스에서 방영되었다.

외전이자 속편 격인 작품《다다미 넉 장 반 타임머신 블루스》는 전작에 등장했던 교토 대학 3학년에 재학중인 주인공이 다시 등장한다.

불지옥과 같은 교토의 여름을 겨우 견디게 해준 교토대학 기숙사의 유일한 에어컨을 켤 수 없게 되면서 부터 주인공에게 황당한 일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대학 생활을 엉망 징찬으로 만든 친구 ‘오즈’가 에어컨의 리모콘을 고장 냈다는 걸 알아차린 주인공이 리모콘을 수리 하려던 중 25년 후의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찾아왔다는 한 남자가 나타난다.

주인공은 이 타임머신을 이용해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고장 나기 전의 리모콘을 가져올 수 있다는 엉뚱한 계획을 세운다.

드디어 주인공은 시간여행에 나서지만 뜻밖에도 예상을 벗어나는 변수의 연속으로 그의 계획은 꼬여 버리게 되고 급기야 세상의 궤멸을 눈앞에 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전작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에서 작가는 “만약 신입생 동아리 모집에서 주인공이 다른 동아리에 들어갔다면, 대학 생활은 어떻게 달라졌겠는가”라는 설정을 속편으로 연장 시켜서 시간의 루프(반복)와 멀티버스(평행세계)의 요소를 적용시켜 작가 특유의 독특한 판타지 세계관을 펼쳐 보였다.

교토의 허름한 하숙집의 다다미 넉 장 반크기의 방에서 시작된 망상이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간을 오고 가는 공상과학과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이 작품은 천편일률적인 이(異)세계물 스토리가 쏟아지는 웹툰과 웹소설계와의 경쟁에서도 압도적 우위를 차지 할 정도로 입체적인 스토리를 탄탄하게 갖춘 작품이다.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만의 고유 대명사 같은 스토리가 된 <다다미 넉장 반>은 한 작품 안에서 피어오르는 청춘 남녀들의 로맨스, 공상과학과 판타지적 요소 그리고 작품의 후반부에 주인공들이 던지는 철학적 메시지가 매우 자연스럽게 구현되어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제한 없는 상상력’으로 독자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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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 다다미 넉 장 반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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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일반 가정 주택이나 료칸 바닥에 깔려 있는 다다미는 일본 전통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닥재이면서 다다미 개수로 방의 크기를 재는 척도로 사용 된다.


볏짚을 압축해서 단단히 묶은 코어로 구성된 다다미는 각 지역에 자생하는 볏짚의 색과 크기도 다르고 기후에 따라 지어지는 건축 양식도 다르기 때문에 지역 별 다다미 치수도 제각각이다.

다다미 1장(조)의 크기는 약 180cm×90cm,로 대략 1.62제곱미터에 달하는데 지역에 따라 다다미의 치수가 달라서 평수를 재는 척도도 달라진다.

수도 도쿄가 있는 관동 지방의 표준 다다미 크기는 전 열도에서 가장 작은 176cm x 88cm 치수가 기준이다.

794년부터 1869년까지 일본 수도였던 관서 지방의 최대 도시 교토는 땅값이 비싸고 협소한 주택인 많은 도쿄에 비해 거주지 용 가옥 규모가 커서 다다미 한 장 크기는 191cm x 95.5cm다.

관서 지역의 가옥을 세울 때 기둥은 다다미 크기에 따라 배치 하고 관동 지방은 기둥 사이의 거리를 기준으로 다다미를 배치 한다.

일반적으로 관동지역의 일반 성인 1명 기준의 방 크기는 다다미 넉 장 반이고 번화가나 중심부로 갈수록 이 다다미 장수는 줄어 들고 방의 크기도 협소해진다.

반면에 관서 지역의 평균 방 크기는 다다미 8장이여서 관서 지역의 평균 크기인 다다미 넉 장 반은 이 지역에서 가난의 상징이다.

가난의 상징인 다다미 넉 장 반에서 온갖 기상 천외한 망상을 하는 구제 불능의 청춘이 있다.

대학 3학년 봄 까지 이 년간, 실익 있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노라고 단언해두련다. 이성과의 건전한 교제, 학업 정진, 육체 단련등 사회에 유익한 인재가 되기 위한 포석은 쏙쏙 빼버리고 이성으로부터의 고립, 학업 방기, 육체의 쇠약화 등 깔지 않아도 되는 포석만 족족 골라 깔아댄 것인 어인 까닭인가.

책임자를 추궁할 필요가 있다.

책임자는 어디 있나.

-모리미 도미히코의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 '중에서

다다미 넉 장 반 크기의 자취방에 틀어박힌 채 의미 있는 대학 생활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대학 3학년생인 '나'는 이 모든 것을 친구 오즈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대학에 갓 입학 했을 때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 오즈는 야채를 먹지 않고 오로지 즉석 식품만 먹어 대는 괴짜로 주인공은 만일 1학년 때 다른 동아리를 가입해서 오즈를 만나지 않았다면 꿈 같은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구가할 수 있었다는 망상을 하기 시작한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 없이 대학 내 영화 동아리 "계"에서 괴짜 친구와 그에 못지 않는 기이한 선배들과 교류 하면서 찬란할 것만 같았던 청춘의 빛은 오묘한 색을 띄게 되고 탄탄 대로 같았던 인생은 우연곡절 같은 사건을 겪게 되면서 기상천외한 경험을 두루 겪게 된다.

대학 내에서 역사가 그리 길지 않는 영화 동아리 "계'의 멤버는 30명 정도로 이 동아리에서 처음 제작한 영화는 2차 세계 대전 이전 부터 계속 되어온 유서 깊은 장난 대결을 계승한 두 남자가 지력과 체력을 다할 때까지 자존심 대결을 펼치다는 황당 무계한 스토리의 영화였다.

상영회에서 웃는 사람은 단 한 명, 그 사람은 바로 이 황당무계한 영화를 제작한 동아리 멤버였다.

두 번째로 제작한 영화는 <리어 왕>으로 남자 배역에 너무 많은 공을 들여서 여성 관객에게 야유 소리와 항의를 들었던 망작이였다.

세 번째 작품은 대학 생활 내내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고 자조 하는 주인공 '나'와 그의 엉뚱한 친구 오즈와 함께 제작하는 다다미 넉장 반이라는 영화다.

다다미 넉 장 반에서 살던 남자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미로 안에 갇혀서 그곳을 탈출하는 여정을 담겠다는 시놉시스를 만들자 동기들과 선배들로 부터 황당무계하다며 무시 당한다.

대놓고 면전에서 거절과 무시를 당한 주인공은 파 소스를 얻은 소 혀를 맛있게 굽는 가게가 있다는 친구 오즈의 손에 이끌려 교토 대학가 밤 거리를 쏘다닌다.

온갖 냄새와 사람들로 들끓는 밤 거리를 쏘다니던 나는 고양이로 국물을 낸다는 고양이 라면가게에 들어가 어딘지 신비로우면서도 수상쩍은 가모타게 쓰누미노카미라는 사람을 만난다.

기이한 사람과 기이한 대화를 나누다 술에 취한 나는 온갖 망상을 풍선처럼 불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친구 오즈가 사라진다.

오즈를 찾아 거리로 나온 주인공은 술 기운이 남은 채 새벽녘에 학교에 가서 새로 가입한 동아리 신입들의 면접 보는 자리에 나간다.

4월부터 5월까지 열리는 봄 꽃 축제에 상영할 영화를 제작하느라 동아리 방과 캠퍼스 곳곳에서 노숙을 하며 지내던 주인공은 이따금씩 방으로 돌아 올 때마다 동아리 '계'를 선택 했다는 후회감에 몸부림친다.

자전거를 타고 강둑을 따라 숲 길을 달리다가 마주치는 괴짜들은 신묘한 기운이 가득한 신사에서 튀어나온 기인 같은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동아리 '계'에서 오랫동안 독재자로 군림한 선배,동기들도 선배들도 두려워 하는 동아리 회원, 본인 스스로 언제 대학에 입학 했는지 정확한 년를 기억하지 못하고 학내 교수들 보다 연식이 높은 동아리계에 사부, 알콜 도수가 미약한 술과 벽돌 크기의 카스테라를 들고 다다미 넉장 반 크기의 방에 불쑥 나타나는 괴짜 이웃들이 총 충돌하는 모리미 도미히코의 <다다미 넉 장 반>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지만 현실의 고통과 빈궁함도 망상으로 연결 시키는 괴짜들이다.

주인공 '나'가 망상을 펼치는 협소한 크기의 다다미 넉 장 반에 찾아 오는 괴짜들은 마치 해가 지고 나면 활동을 시작하는 신사의 신령들과 혼령들처럼 각자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암담한 현실에서 고군분투하는 청춘들 앞 길을 열어 준다.

수수께끼 같은 게임에 뛰어들어 결투 끝에 후계자 자리에 올라간 주인공은 어쩌다 보니 이 세계가 아닌 저 세계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며 자칭 '자학적 대리 전쟁'에 휘말리게 되자 동아리 '계'에 가입 하게 만든 친구 오즈를 원망한다.

엉뚱하면서 천하태평한 친구 오즈는 스승이 실종 되고 얼떨결에 스승의 대리인이 된 주인공이 '자학적 대리 전쟁터'에서 친구의 헛발질을 천진난만한 얼굴로 지켜 보다 다리에서 추락해서 병원에 실려간다.

다다미 넉 장 반짜리 방안에서 피어 오른 원망과 망상은 바로 옆 방에 미녀가 새로 이사 오면서 일 순간 꺼져 버리고 착실하게 편지를 쓰며 빨래방에서 도난 당한 속옷을 찾아 주는 의인이 된다.

대학 시절의 끝자락에 선 주인공은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 놓지 못한 채 취직에 대비해서 영어 학원에 등록하고 어딘지 모르게 대단해 보이는 인물이나 화려했던 과거를 갖고 있는 이들을 스승 삼아 사회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한다.

기이한 스승을 만나 기이한 싸움에 휘말리고 괴짜 친구들과 선배들 때문에 탄탄한 성공 대로가 아닌 신들의 무덤이 있는 신사나 축제가 열리는 강가를 배회 하며 청춘의 시간을 허비 하면서도 다다미 넉장 반짜리 방으로 돌아 오면 마음껏 책을 읽고 카스테라를 베어 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 버린다.

늘 최선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던 주인공 '나'는 그 선택의 결과가 실패 하거나 최악으로 치닫게 되자 자신의 선택을 한탄하며 다다미 넉 장 반을 나와 교토 시내 곳곳을 돌아 다니며 '만약에..'라는 말을 시종일관 내뱉고 다닌다.

청춘의 판타지물, 망상계의 신의 손인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는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청춘들이 기기묘묘한 행동을 일삼으면서도 고상한 교토 화법을 구사하며 현실을 벗어난 망상의 세상에서 허우적 거리는 모습을 유쾌하게 그려내어 일본 독자들에게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다.

1979년 생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가 생각하는 대학 캠퍼스를 누비는 청춘의 모습은 몸 하나 누울 수 있는 다다미 넉 장 반 크기의 방에 살며 이성과의 건전한 교제, 학업 정진, 육체 단련과 같은 사회에 유익한 인재가 되기 위해 거듭 노력하며 전력 질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이런 청춘들의 모습은 망상을 너머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시대 청춘들은 대학 진학 후 학점 관리는 기본이고 학회, 대외 활동 등에 참여하며 입사 지원칸에 채워 넣을 스펙을 치열하게 준비해야 한다.

동아리도 취직에 유리한 동아리로 가입하고 인턴십도 능력을 키우고 스펙을 쌓을 수 있는 곳을 열심히 찾고 재학 중에 여러 개의 자격증을 따고 해외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1학기 또는 1년 동안 해외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에 매진한다.

이렇게 고군 분투 하며 청춘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도 입사 지원서를 내는 기업으로부터 정확한 사유도 듣지 못한 채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아빠와 엄마 찬스, 조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청춘들이 불안한 계약직에서 최저 임금을 받거나 졸업을 미루고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동안 정치인이나 고위층 자녀들은 1명 모집하는 꿀 보직에 지원해서 눈 깜짝 할 사이에 부모로 부터 직업 세습을 받는다.

컴퓨터나 제품 사양(specification)의 줄임말인 스펙은 취직을 해도 끝이 나지 않는다.

승진에 도움이 되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퇴근하고도, 주말에도 시험을 준비하거나 더 나은 직장으로 이직 하기 위해 대학원 시험을 준비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연애와 결혼을 위해서도 스펙이 필요할 정도로 스펙 쌓기는 죽을 때까지 끝이 나지 않는다.

기회 조차 잡지 못한 청춘들이 취업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 사회는 노후 걱정 없는 급여를 제공하는 일자리 수 조차 많지 않아 중 장년들도 암담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다.

청년을 위한 나라! 노후 걱정 없는 중장년층을 위해 연금을 개혁 한다고 외치는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기생충들에게 스펙 대신 짱돌을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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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5-03-28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다미 사이즈가 지방마다 다르군요.
 
야수를 믿다
나스타샤 마르탱 지음, 한국화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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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다양한 생태계와 기후 상태를 연구 하고 그 지역에 생존하고 있는 생태계의 습성과 진화 상태를 관찰 하기 가장 좋은 지형은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캄차카 반도다.

일본 홋카이도 쪽으로 흐르는 쿠릴 열도의 출발지인 캄차카반도는 태평양과 오호츠크해에서 미국 알래스카까지 이어지는 알류산 열도와 인접해 있어서 북극의 툰드라 기후와 남쪽의 습한 기후로 인해 불과 얼음이 공존하는 독특한 환경으로 전 세계 과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몰려 가는 곳이다.



17세기말에 러시아인들이 도착하기 이전까지 캄챠카 반도에는 곰과 순록 그리고 연어를 사냥하며 기후 변화에 맞춰 이동하며 살았던 이텔멘족, 코랴크족 원주민들이 드문 드문 살고 있었던 곳이였지만 19세기 러시아와 일본 열강들의 침략으로 백 러시아인들과 일본인 홋카이도의 아이누족들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2차 대전 발발 당시 러시아가 캄차카 반도를 점령 하면서 핵원료 생산과 핵실험 장소가 되었다.

대 자연은 시간이 축적되듯 핵 방사능에 오염 되었고 반도 땅에서 다양한 민족들과 평화롭게 공존 하며 살았던 원주민들은 극소수만 살아 남게 되었다.

소련 체제 아래서 방출된 엄청난 방사능이 캄차카 반도의 자연과 생활 터전을 오염 시켜서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은 전 세계에서 백혈병과 각종 암, 기관지염 같은 질병의 발병률이 높은 곳이 되었다.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나서 서구인들은 이 지역에 탐사와 탐험, 관광과 연구 목적으로 방문 하면서 무분별하게 들어 오는 서구 문명과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생태계가 파괴 되었고 토착 원주민들과 토종 동식물들이 빠른 속도로 멸종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보다 약간 넓은 크기의 캄차카 반도는 1년 중 활동 하기 좋은 온화한 기후가 단 3개월 뿐이고 이 시기에 현지인들은 연어와 곰 사냥 그리고 외지인들을 위한 관광 안내와 숙박으로 생계를 유지 하고 있다.

수도 주변 지역은 광물 자원이나 핵실험으로 마구잡이로 개발 되어서 생태계가 파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지구 생태계의 다양한 기후와 멸종 직전의 동물들을 볼 수 있고 특이한 지형이 많아서 외지인들이 끊임없이 이 곳으로 몰려 가고 있다.

불꽃이 치솟는 활화산 부터 얼음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니는 바이칼 호수와 바다 깊숙한 심해까지 전부 외지인들이 훑고 지나가서 생활 터전을 빼앗긴 곰과 순록들이 인간들이 거주 하는 지역까지 내려와 먹이를 찾아 다니거나 습격을 하는 일이 자주 발생 하고 있다.


파리 사회과학 고등연구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프랑스 태생의 나스타샤 마르탱은 알래스카 지역의 원주민인 그위친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이들의 습성과 문화를 탐구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알래스카 북부와 캐나다의 유콘 지역에 걸쳐 살고 있는 애서바스칸 인디언의 11개 지파 중 한 종족인 그위친(Gwich'in)족은 침략자 러시아와 미국에 대항하며 북극야생보호구역의 석유 자원 개발에 반대했던 유일한 부족이였다.

하지만 수 세기 전에 러시아 극동의 캄차카 반도로 이주한 그위친족은 러시아와 일본에게 오랜 시간에 걸쳐 잔혹하게 학살로 극소수만 살아남아서 무자비한 자원 개발이나 동식물 사냥을 막는데 대항하지 못했다.

2015년 그위친족의 이동 경로와 습성과 문화를 연구 하는 젊은 인류 학자 나스타샤 마르탱은 시베리아 북동부로 이주해서 그곳 원주민과 혼혈 된 에벤인을 대상으로 인류학 연구를 진행 하기 위해 캄차카 화산 지대 근처에 연구 기지에 터를 잡는다.

2015년 8월 인류학자 마르탱은 에벤인 족의 한 가정에 거주 하던 중 활화산 움직임이 시작되던 날 연구 진척을 확인하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숲 속으로 들어 간다.

몇 날 몇 일 동안 산을 오르며 강과 불화산을 만나는 위기가 도사리는 숲 속 한 가운데서 동료들이 잠시 다른 지역을 탐사 하러 갔던 날 곰 한 마리가 인류학자 마르탱이 거주 하고 있던 공간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 한다.

단 몇 분 만에 곰의 날카로운 이빨은 그녀의 얼굴 반의 뼈와 살을 무너뜨렸고 턱의 반쪽도 부숴버렸다.

마르탱은 치료를 받는 중에 극심한 통증으로 발 버둥치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마다 상처 부위에 파고 들어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마르탱은 무사히 러시아에서 응급 치료를 받고 프랑스로 돌아가 후속 재활 치료를 받는 동안 러시아 의료진 치료를 불신한 프랑스 의사들이 강행한 재수술에서 병원성 세균에 감염되어 혼수 상태에 빠진다.

눈 깜짝 할 사이에 곰이 이빨을 드러내며 그녀를 공격 했던 절체절명의 위기의 시간을 지나 병원에 긴급 우송 되어 곰에게 습격 당한 부위를 수술하고 회복되는 시기에 마르탱은 곰과 마주 했던 끔찍한 순간을 떠올리며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날 늦은 밤, 문장들이 종이 위를 가로지른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명백한 것들, 내 마음속 깊이 충격을 준 것들을 쓴다. 나에겐 두 권의 현장 노트가 있다. 하나는 주간용으로 세세한 묘사와 대화 혹은 말의 녹취가 어수선한 형태로 한가득 적혀 있다.

집으로 돌아가 체계를 부여 하기 전까지는 상세한 정보의 축적을 정리해서 그것을 토대로 균형적이고 알기 쉬우며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무엇인가로 만들기 전까지는 대부분 몹시 난해 하다.

다른 한 권은 야간용이다. 여기 적힌 내용은 불완전하고 파편적이고 들쭉 날쭉 하다. 나는 그것을 검은 노트라고 부른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간 노트와 야간 노트는 나를 갉아 먹는 이중성의 표현이자,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내가 가지고 있는 객관성과 주관성의 상징이다.

-나스타샤 마르탱의 <야수를 믿다.>

마르탱은 인류학자로서 관찰하고 목격하고 경험한 것까지 모두 연구 자료의 토대로 활용하려는 의지 만으로 노트에 그 날의 사건을 떠올리기 시작하지만 곰에게 무자비하게 습격 당한 육신의 통증으로 정상적인 사고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캄차카 반도 땅에서는 오래 전 부터 곰과 혼혈 종족들이 서로 경계 하며 공존 하는 삶을 살아갔지만 침입자인 외부인들의 약탈과 파괴로 소멸과 멸종의 시간대로 들어섰다.

죽음의 순간에서 다시 회생한 인류학자 마르탱은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곰에게 큰 습격을 받고도 이 사건을 공격이라는 단어를 사용 하지 않고 과거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의 경계가 파열 되어 균열을 일으킨 것이라 스스로 정의 한다.

나는 내가 곰과 함께 무엇을 찾는지 알고 있었나? 내가 기다리던 자가 누군지, 꿈에서 본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나?

내가 사방으로 그의 흔적을 밟은 이유와 언젠가 그와 눈을 마주치기를 은근히 바란 이유를 알고 있었나?

자연의 생태계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종족을 탐구했던 인류학자 마르탱은 회복 되는 동안 그날의 습격으로 부숴지고 함몰된 현재 자신의 몸 안에서 가족에게 받았던 정신적 상처의 트라우마와 조우하게 된다.

유년기 시절에 겪었던 아버지의 죽음, 홀로 고군분투하며 자신을 양육 했던 엄마, 가난과 차별에서 벗어나 엄마를 위해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위해 지구 반을 돌며 인류학 연구에 매진 했던 마르탱은 마음 한 구석에 도사 리고 있던 우울증을 끄집어 내어 자신의 육신이 파괴된 캄차카 반도 땅에 다시 찾아 간다.

곰에게 습격 당하기 전 마르탱은 캄차카 반도 땅의 동과 서, 겨울과 봄 그리고 새벽부터 밤까지 탐험하면서 오로지 자신의 논문에 채워야 하는 탐구 대상 목록을 찾아다니는데 급급했었다.

하지만 반쪽 얼굴이 함몰 되고 다리를 절뚝 거리는 육신으로 다시 찾은 캄차카 반도에서 마르탱은 처음으로 어느 방향에서나 빛이 나는 밤 하늘의 별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나는 태곳적 만남을 따라 끝까지 갔지만 다시 돌아왔고 여전히 살아있다.

이종교배가 일어났지만 나는 여전히 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를 닮은 무엇인가에 애니미즘 가면의 특징을 더한 채로 나의 안과 밖은 뒤집혔다.

인간 애니미즘의 근본은 가면의 변형된 얼굴이다. 반절은 사람, 반절은 바다표범, 반절은 사람, 반절은 독수리, 반절은 사람, 반절은 늑대, 반절은 여자 반절은 곰, 얼굴의 이면, 짐승들의 인간적인 실체, 그것이 봐서는 안 됐을 자의 눈 속에서 곰이 보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눈 속에서 내 곰이 본 것이다.

-나스타샤 마르탱

인간은 캄차카 반도의 땅 속 깊이 매몰된 광물을 캐고 화산재를 퍼 날라서 핵 개발을 하고 강과 바다의 밑바닥까지 훑으며 기후의 변화를 연구 하고 자생하는 동식물을 마구 잡이로 채집하고 사냥 하는 사이 곰의 개체수는 빠른 속도로 줄어 들었고 부화 한 곳으로 되돌아와 생을 마감하는 연어들은 방사능으로 오염 되어 인간에게 먹히지 않아도 곧 죽을 운명이 되었다.

영화 보다 더 악랄한 악당 지도자들이 활개 치고 있는 현 시대에 지구 상에서 가장 부유한 자원과 드넓은 땅을 소유 하고 있는 미국의 지도자는 인접 국가인 캐나다와 멕시코를 집어 삼키고 북극과 가까운 그린란드에 미국 국기를 꼽고 더 나아가 미국 땅으로 건너온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아프리카 대륙으로 내쫓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으로 유럽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을 보유 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땅을 집어 삼키려는 러시아의 푸틴은 캄차카 반도 땅 속에 매몰 시켜 놓은 핵무기를 만지작 거리며 인류 전체를 위협 하고 있다.

숲 속의 사냥꾼은 먹잇감의 냄새를 풍기며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사냥감을 유인 할 수 있어도 지구의 회전 방향을 뜻대로 바꿀 수 없지만 연어는 생을 마감하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고 곰은 자신의 영역에 들어 온 침입자들을 공격 할 수 있는 본능을 갖추고 있다.

자연에서 가장 초라하고 빈약했던 인간은 동굴과 숲을 벗어나 쾌적한 삶을 살 수 있는 도시 생태계를 건설 했지만 남쪽에 살던 기러기가 먹이를 찾아 생명을 부화 시키기 위해 북극 하늘로 날아 오는 걸 막지도 못한다.

눈부신 과학 기술로 문명의 진보를 이룩해 온 인류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기술 발명이 인류의 모든 생명을 구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는 사이에 빙하는 녹아 내리고 있고 땅바닥은 갈라져서 불기둥이 치솟고 있다.

홍수와 쓰나미, 지진과 산불로 철새들은 떼 죽음을 당하고 있고 연어는 돌아 오지 못하고 오염된 토양에서 태어난 가축들은 인간에 의해 살처분 당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읽고 세상의 변화를 분석하고 통제 할 수 시대가 되었다 해도 현재 지구 곳곳은 붕괴되고 무너지고 있다.

세상은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데로 변화되거나 바뀌었던 적이 없었다.

지구 상의 악당들이 앞으로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고의 의료 기술과 치료로 생존 시간을 끌어 올린다 해도 100년을 넘어 설 수 없을 것이고 인간의 삶은 자연을 거슬러서 영원 불멸한 삶을 살 수 없다.

과거를 반복에서부터 조금이라도 해방하는 것, 이것은 이상한 과업이다. 과거의 존재가 아니라 과거의 결속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하는 것, 이것은 오묘하고도 가련한 과업이다. 지나간 일, 일어난 일, 일어나고 있는 일의 연결고리를 푸는 일은 단순하지만 힘든 과업이다.

-파스칼 키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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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스토브 - 오시로 고가니 단편집
오시로 고가니 지음, 김진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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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전 세계 국가 중에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국가로 종이로 발행 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출판 하며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출판대국이였다.

특히 종이 만화의 종주국이였던 일본의 만화 시장은 전 세계 독서 소비인구가 단연 1등이였고 발행되는 만화 잡지 종류도 다양했다.

엄청난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세상 전체가 종이 만화로 뒤덮였던 일본은 손 안에 스마트 폰 시대에 읽는 매개체가 디지털화 되면서 웹툰과 전자책 발행으로 판매 부수로는 인쇄 비용조차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2020년 이전에 일본 도쿄 지하철 안에서 종이 신문과 종이 잡지, 만화, 기타 문고본을 읽고 있는 일본 승객들을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최근에 갔던 일본인들 대부분 대중 교통 이동 중에 스마트 폰만 응시 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일본인들이 스마트폰으로 뭘 보고 있는지 얼핏 보니 게임이나 버라이어티 쇼 같은 예능을 주로 보고 있었고 한국 드라마를 보는 이들도 꽤 보였다.

간간히 웹툰을 보는 일본인들 중 상당수는 종이로 발행 되었던 만화를 가로로 화면에 축소 시킨 흑백 만화책을 스마트 폰으로 보고 있었다.

일본은 잃어 버린 30년 경제 침체 속에서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인구 감소로 유서 깊은 서점들도 문을 닫고 있고 지역 도서관도 사라지고 대세가 된 디지털화 흐름 속에서 종이에 인쇄 된 거의 모든 것들을 스마트 폰으로 볼 수 있어서 종이 만화 발행 부수량도 대폭 줄어 들고 있다.

출처: 오시로 고가니의 단편 만화 <눈 내리는 마을> 중에서

밀려 드는 K-웹툰 공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굳건하게 종이에 펜으로 만화를 그리는 이들이 있다.

종이 만화 중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이어가고 있는 종이 만화들은 ‘원피스·나루토·블리치-귀멸의 칼날·주술회전·체인소맨 같은 소년들이 주인공인 만화가 여전히 대세지만 이 틈을 뚫고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화가 ‘이 만화가 대단하다’ 순위에서 1위(여성편)를 차지했다.

스마트 폰 기기 하나로 집 안의 가전 제품과 연결 되어 원격 조정과 제어를 할 수 있는 시대에 아마존 쇼핑몰에서 구입한 전기 스토브가 집 안의 모든 상황을 감지 하며 말을 한다는 비 현실적인 이야기 조차 나 홀로 살아가는 외로운 이들의 일상과 절묘하게 뒤섞여서 따스한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주변의 공기를 따스하게 해주는 전기 스토브 한 대와 평균 체온이 삼십 칠도에서 삼십 오도 사이의 온기를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나 버린다면 남아 있는 온도는 자신의 체온과 전기 스토브 한 대 뿐이 된다.

종이를 넘길 수록 매회 등장하는 장면 마다 사랑은 쿵 하고 다가와서는 휙 하고 떠나가버린다.

방 안의 온기가 되어 주었던 연인이 떠나고 전기 스토브만 덜렁 남겨진다거나 한 때 따스한 우정을 함께 나눴던 친구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거나 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회사 생활에서 영혼까지 갈아 넣어 버리다 텅빈 영혼의 육신만 덜렁 남겨진다.

펑펑 내린 눈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과 함께 눈덩이를 뭉치거나 공중 목욕탕으로 가던 길에 만난 이와 함께 목욕을 하며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면서 실연당하고 이별 하고 영혼을 치유 받는다.

오시로 고가니 단편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누군가와 헤어지는 걸 항상 두려워 하며 가족과 연인을 잃는 상상을 쉼 없이 하면서도 섣불리 누군가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작가 오시로 고가니는 매 장면 마다 출렁이는 바다, 달리는 지하철, 하늘에서 펑펑 내리는 눈, 따스한 물로 가득찬 공중 목욕탕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거나 함께 걷거나 마주 보며 살을 맞대고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 하고 서로를 보듬는 모습을 보여 준다.

별 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 하지만 한 장 한 장 마다 그려진 그와 그녀의 모습을 따라 가다 보면 미숙한 청춘의 상실과 슬픔이 느껴지고 언젠가 잃어 버리게 될 곁에 머물던 존재의 죽음과 이별이 한 편의 시처럼 다가 온다.

출처: 오시로 고가니의 <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

어느 날 광학연구소로 향하던 차량이 폭발 하고 이 길을 지나가던 스기와라는 그 차량에서 흘러나온 특수 약품을 온 몸에 뒤집어쓰는 사고를 당한다.

사고 이후 스기와라는 나닐이 자신의 육신이 사라지는 기이한 일이 벌어 지고 아내는 자신의 눈 앞에서 사라지는 남편의 모습을 눈물을 흘리며 지켜 볼 뿐이다.

한 때 사랑했지만 함께 사는 동안 울고 웃다가 미워 하기도 했던 사랑이 눈 앞에서 사라지게 된다면 그 사랑이 떠나고 난 후에 남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우연히 들렸던 도쿄 서점에서 이 만화가 대단하다 여성편 1위를 차지 했다는 띠지 문구에 호기심이 일어서 구입한 오시로 고가니의 단편집 <해변의 스토브>는 휘리릭 눈으로 훑어 버리는 만화가 아니였다.

디지털 시대에 화려한 컬러 색상의 웹툰이 대세인 시대에 작가 오시로 고가니는 여전히 편을 쥐고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뚜렷한 명암 대비와 고운 선으로 그린 배경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의 그림체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소소한 일상을 보여 주다가 인간의 기억에 남기 위해 본보기로 사람을 얼려 죽이는 설녀가 등장해서 인간과 한 집에 살면서 처음으로 뜨거운 음식을 먹고 빙수를 먹으며 영화를 보고 축제를 따라가는 기발한 상상이 펼쳐 진다.

현 시대에는 모든 것이 스마트 폰과 연결된 과도한 ‘소통의 시대’를 살고 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자기 전까지 스마트 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동안 엉뚱한 상상이나 잡념 조차도 넘쳐 나는 영상과 이미지 홍수에 푹 젖어 들어서 시간을 들여 생각을 하기 보다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것에 소중한 시간을 쏟아 붓고 있다.

모든 것이 연결 되었지만 통제 하기 힘들 정도로 과도하게 연결 되어 소통이 단절 되고 관계가 단절 되어 오로지 '나' 하나만 덜렁 남겨 버린 시대가 되었다.

가게를 들어가도 자판기로 주문을 하는 시대에 집에 돌아와 반기는 건 내가 없는 사이에 집안 구석 구석을 청소해준 청소 로봇 기기의 불빛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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