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타이피스트 시인선 7
김이듬 지음 / 타이피스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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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을 찾기 힘든 세상에서 천 원으로 배를 채울 것도 없고 지하철을 탈수도 없다.

천 원으로 영혼을 고양 시킨다거나 지성을 갈고 닦을 수도 없으니 천원 지폐 만큼 가벼운 시집 한 권을 구입한다.

당신은 지금 잠의 가시 덤불 속에서 양 떼를 세고 있습니까?

한 마리의 양을 잃은 상실감으로 뒤척거리다 일어나, 모든 양을 풀어 주러 나왔습니까?

집들은 모두 낡은 목조 건물이고, 지붕에서 뜯어낸 판자로 만든 덧문 너머 별들이 빛나고 있습니까?

지붕 고치는 사람처럼 나는 사라져 가는 직업의 사람입니다.

어쩌다가 우연히 걸작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김이듬의 <목동의 밤> 중에서

진주에서 태어난 시인 김이듬은 2020년 『히스테리아』의 영미 번역본이 전미번역상과 루시엔스트릭번역상을 동시 수상하기 전 까지 시를 쓰는 것 만으로 생계를 잇기 힘들어서 일산에서 ‘이듬 책방’을 운영하며 시를 썼다.

시인은 낮에는 책방 주인으로 북토크를 열고 손님들과 함께 시를 읽으며 낭독의 시간을 가졌지만 책은 고작 하루 서너 권 정도 팔렸다.

대학 강사 수입까지 탈탈 털어 넣어도 매년 치솟는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 시인은 책방 문을 닫고 서울 변방에 작은 작업실에서 온종일 시어를 다듬었다.

젊은 시절에 나는 안락의자를 샀다고 말했던가?

이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 나는 열 권의 책을 쓰고 서른 한 번의 겨울을 보냈다.

시인은 안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얼어붙은 길목 앞에서 파쇄한 백지가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길 위에 서 있다.

비애와 불운의 배낭을 메고 길을 떠나는 시인의 고독은 세상과 엇물리는 자의 일방통행로를 따라 이어진 시어들이 누구에게도 사랑 받거나 이해 받지 못했던 이들과 함께 동행을 하듯, 정처 없이 떠돈다.

어제는 에밀리가 내민 지번 주소 들고 그의 부모 댁을 찾아갔지만 삼미시장으로 변한 거리만 확인했을 뿐 우리는 40여 년 전의 시간을 찾을 수 없었다

―블랙 아이스 중에서

또래들과 달리 유치원에 다니지 않았던 나는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을 거쳐 학교와 학원, 다양한 국가의 문화원과 도서관, 여러 국가의 박물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알지 못한 세상, 가 보지 못한 세상을 향한 갈증이 강했다.

한국 땅을 떠나 영어와 독일어를 마스터 하고 프랑스를 여행하며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오스트리아를 거쳐 체코 프라하에서 연극에 심취하고 그리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서 이집트 고대 상형 문자를 배우며 어느 누구도 강요한 적 없는 고대 문명을 연구 해 보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유럽 전 대륙을 누벼 봤고 살아 봤고 북아프리카 이집트 카이로 부터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킬리만자로까지 올라가 봤다.

킬리만자로에서 표범은 보지 못했지만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 거대한 예수상을 보고 볼리비아의 소금 사막 우유니의 모래 가루 같은 소금도 만져 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20대 시절에 하고 싶었던 일들, 버킷 리스트에 적어 놓은 것들을 거의 다 해보았고 대학원까지 다니는 동안 수많은 스승들을 만났다.

하지만 막상 사회로 나와 보니 순수가 어떻게 위협 받고 배반 되는지, 열망은 어떻게 죄가 되는지 인생의 단맛과 쓴 맛을 두루 맛보았다.

그동안 나에게 좋은 스승이 있었던가?

학업의 성취를 넘어 사회에서 성실하게 일한 댓가를 정당하게 받고 있을까? 아니면 피 땀 눈물로 번 돈이 모두 중 범죄 짓을 저지르고 민주주의 체제를 뒤흔들고 국민의 생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들의 밥그릇만 챙기는 권력자들의 세금 루팡으로 전락해 버린 걸까?

시인 김이듬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풀도 가축도 무시하는 목동 같아요.'

퇴계 이황의 얼굴이 새겨진 천 원으로 시집 한 권 살 수 없는 세상에서 늦은 밤 시인이 써 내려간 시를 읽는다.

어떤 순정과 진심은 ‘명작’ 이지만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시는 명작이 되어 누구의 삶을 구원 할 수 있을까?

“길가에 앉아 사람들을 읽는다 내가 읽던 사람이 노란 버스에 탄다 구름을 읽는다 가로수와 새를 읽는다 건성으로 읽을 때도 있다 이상하게 나는 난독증을 고칠 의욕이 없다 다시 길을 걸으며 간판을 읽는다 독일어를 아는 게 도움이 된다 아우구스트스트라세에서 서점에 들어갔다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당나라 말기 러브레터 이집트 상형문자 벵골어 부기어 등 오래된 언어들이 적힌 얇은 책이었다 이상하게 나는 글자를 통해 사람을 읽는 게 재밌다 읽을 게 없으면 죽고 싶다 얼굴은 표지의 기능도 상실했다 워낙 리커버가 많으니까 나는 읽으면서 읽힌다 투명 비닐로 포장된 타이포그래프 잡지도 골랐다 셀프 계산대가 있었다 공항 검역대를 통과할 때처럼 소리가 난다 바코드 읽는 기계로 사람을 읽는다”

-「두 유 리드 미」 전문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은 시를 쓸 때 제목부터 적는다.

커다란 덩어리 같은 제목을 적고 감정의 살점을 붙이듯 한 단어를 쓰다 떼어내고 다시 한 단어를 붙이며 운율을 붙여서 풍경과 사람들이, 어떤 시선들이 온 몸을 관통한다

퇴근 후 늦은 시각 텔레비전을 켜고 OTT에 접속하면 내가 평생 뼈 빠지게 일해도 벌 수 없는 고소득의 개런티를 받는 예능인들, 배우들 모델들이 먹고 마시고 울고 웃고 있다.

나는 이들이 광대짓을 하며 돈을 버는 동안 내 시간을 허비 하며 삶을 소진 하고 싶지 않다.

글자를 깨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시를 읽지 않고 한 편의 시가 누군가의 일생을 바꾸지 못한다.

세상은 앞으로 점점 더 숨이 쉬기 힘들 정도로 탁해질 것이고 전파력이 강한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의 양식을 찾아 다니듯 천 원의 행복과 만족을 찾아 다이소에서 물건을 구입하듯 누구에게도 사랑 받거나 이해 받지 못해도 시를 쓰는 시인의 시집을 사러 갈 것이다.

극장에서 돌아와 글을 써요. 나는 지저분하며 조그마한 구역에 살아요 항상 떠날 궁리를 하죠. 안정감이 밤 물결 소리를 내며 떠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요. 나를 여기 데려다 놓고 데리러 오지 않는 사람이 혹시나 들를지도 몰라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곤 합니다.

방 모서리엔 낡은 회색 슬리핑 백이 있어요. 오늘은 자지 않고 명작을 써요. 반투명한 해파리처럼 생긴 전등을 켜요. 미안하지만 당신을 위로하러 글을 쓰진 않아요.

이어링을 만지작거리며 명작을 써요.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은밀하고 거칠며 쓰라린 글쓰기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죠.

-김이듬의 <밤엔 명작을 쓰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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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2025-03-09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이듬 시인의 시도 좋지만 님의 글도 놀랍네요.

scott 2025-03-09 15: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주말 시간 행복하게 보내세요 ^^

media666 2025-03-09 2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무언가 값진 걸 주고 계시네요. 감사하고 또 부럽습니다 :)

scott 2025-03-09 21: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주말 밤 평안하게 보내세요 ^^

건빵 2025-03-09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책도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