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댁이 걸어서 3분 거리에 있지만 직장을 핑계로 주말에 잠깐 가게 된다. 지난 주말에 갔더니 아버님이 유난히 수척해지셨다. 등도 굽으셨고 팔 다리가 새처럼 가늘어지셨다. 한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교육청의 한 획을 그으셨던 분인데(교육감은 아님) 지금은 그저 연로한 힘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보림이도 할아버지 보고 싶어해서 함께 갔다가 눈물만 글썽거렸다. 문득 "돌아가시고 난뒤에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진리가 떠올랐다. "그래 결심했어!"

 

난 집으로 오자마자 어제부터 불린 누런 콩이랑 서리태 콩을 삶기 시작했다. 끓기 시작할때부터 2분만 삶으라고 했으니 타이머 돌려놓고 기다리자 하얀 거품이 뭉게뭉게 떠오른다. 불을 끄고 콩물은 따로 놓은뒤에 찬물에 씻기 시작했다. 바가지에 비비면 콩껍질이 벗겨진다고 해서 살살 문지르니 껍질이 동동 떠오른다. 벗겨졌나 만져보니 껍질은 대부분 그대로 있다. 이런....결국 한개씩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고 내 인내심은 점점 한계에 다다랐다. 꼭 이렇게 해야돼? 하고 네이버를 검색해보니 까야 한단다.

 

힘들었지만 아버님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생각으로 긍정의 힘을 모아 껍질을 다 깠고, 따로 남겨둔 물을 붓고 소금을 넣어 믹서기에 곱게 갈았다. 서리태 콩물이 섞여서 국물은 연한 연두빛을 띄며 먹음직스러웠다. 한 수저 입에 떠 넣으니 "와 바로 이 맛이야!" 첫 작품치고는 환상적인 맛이었다. 그래 음식은 정성이야.

 

기쁜 마음으로 콩국물과 생칼국수를 들고 시댁으로 뛰어가 "제가 아버님 드리려고 콩국물 만들어 왔어요. 콩껍질 까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하며 온갖 생색은 다 냈다. (나 스무살 새댁인거니?) 어머님도 기특한지 "콩껍질을 힘들게 어떻게 깠어. 아버지 콩국물 좋아하시는데 잘했다...." 하며 기뻐하셨다. 므훗!

 

그리고, 주말내내 삼계탕 끓이고 갈비 김치찜, 요구르트 만들고 더치 커피도 내리고, 야클님이 자랑한 양파 와인도 만들어 냉장고에 한가득 쟁여 놓았다. 싸구려 레드 와인에 백원짜리 양파 4개 넣고 만들었다. 모처럼 엄마 노릇, 며느리 노릇 열심히 한 주말이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앉아 있을 틈도 없었다....... 많이 힘들긴 했다.

 

수제 요구르트, 양파 와인, 더치커피, 콩물 

 

 

 

 

2.

 

시골 도서관이지만 무언가 엄마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인과 뜻을 모아 '인문학 서평쓰기' 과정을 개설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우리도서관 프로그램 강사 중 관심이 있을 듯한 두 분도 반강제로 포섭(?)하고, 나름 열심히 홍보한 결과 첫 모임에 11명이 참석했다. 기대 이상의 성과이다. 참여 이유를 들어보니 "아이 교육이 아닌 나를 위한 교육을 받고 싶었어요.", "그동안 인문학 책읽기에 목말랐어요.",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에 오니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 깊이있는 책읽기였어요" 등 기대 이상의 대답이 나온다.

 

모임중 유일한 남자이면서 나의 자랑스러운 지인이기도 한 이센터장님은 인문학에 대한 개론적 설명을 한다. 인문학의 기본은 '중용'입니다. .....(중략)......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용이 지켜지지 않으면 안되요. 그래서 첫 책은 중용으로 했으면 합니다.  자기 소개 시간에 우리도서관 우쿨렐레 강사인 샘은 즉석에서 플룻 연주를 들려 주신다. 그렇게 우리 모임은 단번에 수준이 높아졌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로서 역사적 존재성이 확실한 자사라는 대사상가에 의하여 일관된 의도를 가지고 지은 역저.

 

  '중용'을 읽고 "일상적 삶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중용'을 읽지 않은 것이다.

 

 

 

 

 

제1장 천명장(天命章)

 

희노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 일컫고, 그것이 발현되어 상황의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화라고 일컫는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라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달성해야만 할 길이다. 중과 화를 지극한 경지에까지 밀고 나가면, 천과 지가 바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고, 그 사이에 있는 만물이 잘 자라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윤리학

 

탁월성은 이성적 선택과 결부되어 굳어진 품성의 상태이며, 중용, 즉 우리 삶과 상관관계에 있는 중용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이 중용은 어떠한 합리적 원리에 의하여 결정되는데,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 이성적 원리에 의하여 그리고 행위와 관련하여 결정함직한 방식으로 중용을 결정하게 된다. 중용이란 어디까지나 두 악덕 사이의 중용이다. 하나의 악덕은 과도함에 의존하고, 또 하나의 악덕은 결핍에 의존한다. 그리고 또 그것이 중용인 까닭은 악덕은 우리의 감정과 행위에 있어서 옳은 것에 미치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넘어서지만, 탁월함(덕)은 중간의 것을 발견하고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탁월함은 그 실체와 그 본질을 규정하는 정의에 있어서는 중용이지만, 최선의 것과 가장 옳은 것을 추구 한다는 점에서는 정점(극단)을 따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이란 이런 것이다.

 

용기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이며, 너그러움은 낭비와 인색의 중용이며, 긍지는 허영과 비굴의 중용이며, 기지는 익살과 아둔의 중용이며, 겸손은 수줍음과 몰염치의 중용이다.  

 

Now in everything the pleasant or pleasure is most to be guarded against

 

제22장. 천하지성장(天下至誠章)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이라야 자기의 타고난 성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 자기의 타고난 성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되어야 타인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가 있다. 타인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어야 모든 사물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어야 천지의 화육을 도울수 있다.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어야 비로소 천과 지와 더불어 온전히 일체가 되는 것이다.

 

제23장. 기차치곡장(其次致曲章)

 

다음으로 힘써야 할 것은 치곡致曲의 문제이다. 그것은 소소한 사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극하게 정성을 다한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소소한 사물마다 모두 성이 있게 된다. 성이 있게 되면 그 사물의 내면의 바른 이치가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형상화되면 그것은 외부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드러나게 되면 밝아진다. 밝아지면 움직인다. 움직이면 변한다. 변하면 화한다. 오직 천하의 지성이래야 능히 화할 수 있다.

 

* 역린에서 인용한 명대사라 더 와닿는다.  

중용. 어렵긴 하지만 이제라도 읽으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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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4-07-24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인은 주말에 그냥 쉬고 싶을텐데...가족을 위해 쉬지도 못하고 정성을 들였네요.
몸은 고단해도 마음은 넉넉하고 뿌듯한 기쁨으로 가득 찼어요.
짝짝짝~ 역시 수퍼우먼은 뭐가 달라도 달라요!^^

세실 2014-07-24 09:54   좋아요 0 | URL
쉬고 싶지만 2주에 한번 나오는 보림이도 걸리고, 방학 맞은 규환이도 걸리고, 연로하신 시부모님도 걸리고...... 이래저래 바쁜 주말이 됩니다.
맞아요. 콩껍질 벗기면서 마음을 비웠답니다. 콩껍질채 믹서기에 돌리면 먹기 힘들다네요.
수퍼 우먼....아 슬퍼라^^

라로 2014-07-24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에 구박먹어서 잊지 않고 공감먼저 누르고,,,ㅎㅎㅎ
세실님의 긍정 에너지를 품고서 껍질을 까셨으니 다른 콩물보다 더 좋은 효과를 아버님게 전달할거같아요~~~~.ㅋㅋㅋ
생색에 애교까지~~~며느리 새로 맞으신 기분 들으셨겠네!!ㅎㅎㅎㅎ
나도 양파와인 만들어서 회사에다 놓고 마실까봐~~~~ㅋ
암튼 한국인들 수준이 높아져서 즉석에서 플릇도 부는 분도 계시고,,,암튼 음악을 배워 놓는 건 남는 장사보다 더 훌륭한 듯!!!
나도 뭐 하나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좀 많지??ㅋㅋ

세실 2014-07-24 09:59   좋아요 0 | URL
잘했져요 시아님~~~ 공감 팍팍^^
하긴 공감 많아도 우수 페이퍼에는 당선되지 않는 슬픈 현실. 대체 우수 페이퍼는 어~떻게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요? ㅎㅎ
요즘 시엄니께 전화 드리면 30분 통화시간......임에도 마음 비우고 있습니다.
저 사실 오래 통화하는거 힘들어해용. 그저 만나서 수다떠는거 좋아해요. 직장생활 오래한 사람의 눈치?
시아님도 이해해 주세요^^ 아잉~~~
이분은 결혼해서 음대를 다니셨다네요.
중산층의 기준이 1인 1악기, 1운동이라는데 저도.......볼링은 쪼금 치는데...ㅎ 우쿨렐레 배워야 겠어요^^

단발머리 2014-07-24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아아아~~~~ 세실님 너무 멋지세요.
주말에 아침 9시부터 7시까지... 아버님도 세실님 정성 가득한 콩국물에 기운 펄펄하시겠네요. 거기에다 야클님 양파와인을 더하면.... ??
순오기님 말씀처럼 세실님 진짜 수퍼우먼이세요.
혹시, 5공주 다섯분 다 수퍼우먼이신가요?*^^*

세실 2014-07-24 10:03   좋아요 0 | URL
음 멋지긴요^^ 콩물은 첫 작품(?)이었답니다. 저 완전 날라리 주부예요^^
아 그러고보니 양파와인은 제가 마실려고 했는데 시부모님도 해드려야겠군요. 땡큐~~~~
음....수퍼우먼은 맞는듯요. 지금까지 23년의 직장생활을 쭈욱하면서 아침밥은 꼭 해먹이고 있으니까요.
요즘 조금씩 지쳐가고 있기는 합니다.
가끔 신랑이 제가 쏜 화살에 맞아요~~~~
5공주 다들 열심히 살고 계시니 진정한 수퍼우먼입니다^^

무스탕 2014-07-24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쉬어야 할 휴일에 휴식대신 선택한 콩국물!! 커피!! 와인!! 요구르트!!
회사에서 또리또리한 며늘이가 집에서 어설픈 경우는 별로 없더라구요.
여기 또 한 분이 증명해 주시네 :)

세실 2014-07-24 12:59   좋아요 0 | URL
반가운 무스탕님^^ 많이 바쁘군요.
행사는 보는 사람은 즐거운데 주최측에선 정말 힘들죠.
행사 며칠전부터 잠도 안오고.......
게으를땐 한없이 게으름 피워요.
몸도 챙기면서 여름 나시길요^^

프레이야 2014-07-24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생활 안 하는 나도 안 하는 일을 저렇게나 많이 하루에!!!
세실님은 정말 대단한 능력자에요. 다 마음과 정성의 문제이겠죠 ^^
중용, 저 책 집에 있는데 지금이라도 자세히 읽어봐야겠다요.
도서관 프로그램도 알차고 수준있게.. 이게 다 센스쟁이 관장님의 능력.
지역주민들도 복이지요.

세실 2014-07-25 09:44   좋아요 0 | URL
평일엔 시간이 안되니 주말에 몰아서 하게 됩니다.
에이....그냥 음식할땐 다른 생각안하고 음식에만 집중해서 최대한 단시간에 끝내려고 합니다.
이 책 박식한 도올선생의 해석이라 좀 어렵긴 하지만 몇 구절만 기억해도 좋을 책이랍니다.
'역린'의 구절을 다시 되새기는 기회도 좋았답니다.
생각보다 높은 관심에 놀라웠습니다. 시골...아직 살아있어요^^
편안한 주말되세요, 프야언니^^

페크pek0501 2014-07-24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우리의 착한 며느리 세실 님...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며느리 노릇 하셨군요.
배우고 갑니다. 따뜻한 미소가 번지게 만드는 글을 읽고... ^^

세실 2014-07-25 09:47   좋아요 0 | URL
우리 아이들을 워낙 살뜰히 챙겨주시는 두 분이라 더 해드리고 싶지만 제 실력이 미천하여........
엄니가 해드리지 않는걸 골라서 해드리려고요. 김밥, 잡채도 좋아하시더라구요^^
오늘은 벌써 주말 전야입니다. 전 금요일이 제일 좋아요~~~~ 토요일도 일요일도 쉴수 있으니 ㅎㅎ
편안한 주말 되세요^^

oren 2014-07-26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역린에 나오는 '중용'의 저 대목은 정말 소름끼치도록 마음 깊이 다가오더군요. 저도 세실 님의 글을 읽고 중용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별다른 일정이 없는 주말이면 동네 도서관엘 습관처럼 들르는데, 세실 님처럼 의욕이 넘치고 유능한 도서관장님이 좀 더 많이 활약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을 늘 하게 되더군요. 관장님 힘내시고 늘 파이팅하시길~~

세실 2014-07-28 10:38   좋아요 0 | URL
그쵸? 역린의 중용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몇번을 되새겼지요.
인문학의 기본은 중용이라는 지인의 말이 와닿았습니다.
제 수준에 좀 어렵긴 합니다만 몇개만 기억해도 좋을듯 합니다.

주말에 도서관에 가시는군요^^ 요즘 도서관은 에어컨도 잘 틀어주고, 신간도 많고.....좋지요.
님의 격려에 힘 입어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어제 당일로 무창포해수욕장 다녀왔더니 눈꺼풀이 무거워요^^ 오늘은 잠시 충천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괜찮겠죠? ㅎ


희망찬샘 2014-08-03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님에 대한 정성-항상 반성을 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저도 돌아가면 어머님 모시고 워터파크 한 번 가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끼리만 놀러를 다녔더라고요. 워터파크 가시면 정말 좋아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어요. 가끔 어른들 모시고 오는 효부, 효자들이 계시더라고요.

세실 2014-08-04 11:10   좋아요 0 | URL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은 찾아 뵈어야지 하는데......10분 앉아있다 나오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우선 순위인점도 죄송하지요. 워터파크.....저도 날 선선해지면 제천 리솜에 모시고 가야 겠어요. 친정엄마가 특히 좋아하시는데 나 몰라라 하고 있으니.....내리사랑은 쉬운데 올림 사랑은 참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