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날의 파스타 - 이탈리아에서 훔쳐 온 진짜 파스타 이야기
박찬일 지음 / 나무수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남자를 처음 만날 땐 식당 정하는 게 곤욕이다.
평소에 감자탕이나 삼겹살을 즐겨 먹긴 하지만 남자 앞에서 돼지뼈를 쪽쪽 빨 수도, 입 쩍 벌리고 상추쌈을 우겨넣을 수도 없다.
고등학교 때는 햄버거집에서 소개팅을 한 적도 있는데
소스 잔뜩 묻은 양상추가 줄줄 흘러내려 깔끔하게 먹는 데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었다.
(그 남자애, 내가 흠모했던 우리학교 화학 선생님 아들이었는데 부전자전이 아니어서 참 실망이었지...)
이쯤 되면 처음 만나 만만하게 가기 좋은 식당은 대부분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가격도 적당하고, 포크에 돌돌 말아 먹으면 꽤 예쁜 척 먹을 수도 있고, 뭐 그냥 만만하달까.

사실, 욕심만 버린다면 만드는 것도 꽤 수월하다.
M양과 뉴욕에 있는 2달여 동안 우리의 아침은 거의 언제나 파스타였는데
(슈퍼마켓에서 파스타면은 늘 세일중이라....ㅠㅠ)
올리브유에 마늘과 양파 넣어 달달 볶아서 마늘향과 양파의 단맛을 뽑아내고 닭가슴살 넣어 더 볶아준 다음
여기에 생크림 넣어 졸이면서 브로콜리랑 올리브 넣고 마지막으로 면 넣어 휘휘 섞어주면 땡!
가끔은 시판 토마토소스를 사다가 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냉동 미트볼을 잔뜩 넣어 만들기도 했다. 
여기에 토마토랑 샐러리, 레몬, 그리고 올리브를 잔뜩 넣은 샐러드까지 먹으면 아침부터 배가 뻥!
여기, 주말 벼룩시장에만 가도 신선한 올리브가 잔뜩이고 동네에도 올리브 가게가 있어서 참 행복했는데.
M양은 지금까지도 같이 파스타 먹으러 갈 일만 생기면 "너도 이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라며 비행기를 태워주곤 한다.
ㅋㅋ 내 입맛에 길들여진 게지.  

 



요게 바로 우리를 미국돼지로 만들어줬던 파스타의 실체.
나는 요리사, M양은 설거지꾼이었다.

 
그런데 요놈의 파스타가 만들어 보고 먹어 보고 하다 보면 욕심이 생기게 된다.
이걸 넣으면 어떨까, 저걸 넣으면 어떨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게 되는 것.
우리나라 비빔밥처럼 파스타 또한 변주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상상의 나래를 직접 펼쳐보이는 사람이 바로 박찬일 셰프가 아닌가 싶다.
박찬일 셰프가 있는 논현동 누이누이에 갔는데, 동행한 ㅁㄹ양이 주문한 까르보나라 접시를 보고 그야말로 깜놀!
면 위에 살포시 놓인 건 혹시 '수란'? (사진은 엄써요)
"까르보나라=크림파스타"라는 잘못된 공식을 깨우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
여기는 소스에 계란노른자를 섞은 건 물론 수란까지 얹어준다.
온몸으로 "나 계란 들어간 까르보나라다!"라고 외치는 모습.
한 입 먹어봤는데 끈적끈적 맛있다.
내가 주문한 봉골레는 먹고나면 입술이 미끈미끈.
질좋은 올리브유를 잔뜩 썼나봐 하면서 조개 하나하나 알뜰히 빼먹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제일 빨리 먹었어... ㅠㅠ 
광화문의 줄서서먹는 파스타집 "뽐모도로"에 익숙해져서 요 정도 양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란 말이다.

 이날은 사실 알라딘에서 주최한 <저자와의 만남> 행사였기 때문에 먹고 나서 박찬일 셰프와의 대화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최근 '파스타'라는 드라마가 좀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이 극중 이선균이 박찬일 셰프 아니냐, 하는 질문을 많이 한다는데
자기를 모델로 한 건 아니지만 자신의 모습과 스승 주세페의 모습을 절반 정도 섞어 놓은 모습과 비슷하다며 대화 스타트.
그렇지만 자기는 주방에서 절대 욕하지 않는다고 껄껄껄. 그렇게 하면 다들 도망간다나.
나는 사실 '파스타' 할 시간에 '공부의 신'을 보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뭐.
(내가 공부의 신 본다면 다들 의아해하던데 나는 학원물이 정말 좋다.
반올림도 한 회도 안 빼놓고 봤을 정도. 게다가 육남매의 귀염둥이 두희가 나오잖아, 끼욜 >o< !!!)

어쨌거나 커피와 와인과 티라미수까지 짭짭대며 시종일관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된 만남.
질문시간을 갖길래 아까의 그 독특한 까르보나라에 대해 손 반짝 들어 물어보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림파스타와 까르보나라가 동일어인 줄 알다가
인터넷과 <보통날의 파스타> 책을 통해 '진짜' 까르보나라는 계란 노른자로만 만든다는 걸 알았는데
셰프님은 이탈리아 현지의 까르보나라와 한국인이 좋아하는 크림소스 흥건한 까르보나라 중에서 어떻게 타협을 하셨는지,
혹시 아까 까르보나라 위에 올라가 있던 수란 역시 그 타협점의 한 방안인지...
바통을 이어받을 새도 없이 단번에 날아온 셰프님의 답변은 "수란은 창의적인 거다".
창의력을 발휘해서 그냥 한 번 올려본 거라고.
그리고 당연히 한국사람 입맛에 맞춰야 했단다. 왜, 손님들에게 돈 받고 팔아야 했으니까.
그의 지인 중 한 명은 계란노른자만 들어간 '진짜' 까르보나라를 너무 궁금해 해서 한 번 만들어주기도 했다는데
절반도 못 먹고 포기를 선언했을 정도라고.
게다가 원래는 베이컨이 아니라 돼지볼살(?)이 들어가야 한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거의 '돼지머리' 통째로 소비되기 때문에 가능한 선에서 합의를 봤다는 얘기.
옆 테이블의 다른 분께서는, 셰프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파스타는 그럼 무어냐는 질문도 하셨는데
여기에도 가차없이 '알리오올리오'라는 명쾌한 답변을 해주셨다. 
이유는 만들어 먹기 간편하기 때문.
글도 시원시원 맛깔스럽게 쓰시던데, 요리도 호쾌하게 하시나 보다.
흥신소 통해서 주방에 CCTV 라도 달아볼까나.   

어쨌거나 나는 크록스를 신는 호쾌한 찬일 셰프에게 싸인도 받았다. 촌스럽지만.





책을 읽다 보면 중간중간 간단한 파스타 레시피도 나오는데 요게 참 쏠쏠하다.
특히 자취생에게 강추하는 걸인풍 참치파스타는 너무도 만만해서 아무때나 휘리릭 만들어 먹기 좋을 듯.
(만드는 법은 밑의 '밑줄긋기'에 인용해 놨다.)
앤쵸비 만들어 저장하는 법도 나왔는데, 멸치 손질하는 게 어렵다는 얘기를 또 어디서 주워들어서 좀 망설여지는 중.
그렇지만 앤쵸비 통조림은 정말 쬐끔 든 주제에 너무 비싸기 때문에 정말 한 번 만들어볼까 엉덩이가 들썩인다.

이 모임 이후에 저녁에 여의도에서 추적 동갑내기 모임이 있었는데
독불장군 K 양 때문에 또다시 파스타를 먹었다는 건 나만의 슬픈 이야기 ㅋㅋ
여기에서도 까르보나라 시켰는데 역시, 음, 아까완 다르군.
해물샐러드는 엄청나게 맛있었지만.

그런데 셰프님, 파스타 칼로리는 괜히 말해주셨어요.
점심 저녁 두 끼를 모두 파스타 먹었더니 몸에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이 듭니다.
게다가 점심 후식으로는 티라미수, 저녁 후식으로는 까망베르 치즈케익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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