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 실종자
레알 고부 지음, 양혜진 옮김, 프란츠 카프카 원작 / 이숲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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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삼부작 중에서 <아메리카>(실종자)가 가지고 있는 차별성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그래픽노블 코너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아메리카>(실종자)를 보았다. 

몇 시간이면 읽을 분량이라 단숨에 읽었다. 

고독의 3부작 중에서 주인공이 유일하게 죽지 않는 작품이지만, 카프카의 일기와 서한을 보면 주인공을 죽일 계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미완성 유작이기 때문에 죽지 않은 주인공의 기묘한 방랑기다. 

원작은 <실종자> 또는 <실종>으로 제목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픽노블에서는 <아메리카>를 제목으로 썼다. 

그것은 그래픽노블에서는 미국이라는 무대를 디테일하게 살렸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픽노블의 저자 레알 고부가 캐나다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원작에서는 아메리칸 스타일의 독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 미국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원작의 제목 역시 <아메리카>였는데, 나중에 편집자가 카프카의 일기에서 <실종자>라는 제목을 발견해 고쳤다고 한다. 


<아메리카>(실종자)는 <성>과 <소송>과 분명한 차별성이 있다. <성>과 <소송>은 이미 인생의 하강곡선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미끄러지는 반면, <아메리카>(실종자)는 산 꼭대기로 올라가려다가 기슭을 따라 미끄러지고 추락하는 이야기다. 

추락의 폭이 더 크기 때문에 독자가 느끼는 충격도 더 클 수밖에 없다.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들이 겪는 운명은 '올바름의 역설'이라고 부를 만한 특성이 있는데, <아메리카>(실종자)에서는 그 점이 더욱 분명하다. <성>에서는 자신의 신분을 인정받기 위한 측량 기사의 투쟁이었고, <소송>에서는 정당한 방법으로 소송을 해서 명예를 되찾겠다는 주인공의 투쟁이었다. 두 주인공 모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아메리카>(실종자)의 다채로운 불행이 눈에 띈다. 


이 글의 제목을 '산꼭대기에서 추락하는 단단한 바위'라고 붙인 까닭은 주인공의 선택의 순간에서 자기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 올바른 선택을 한다는 점이다. 여객선에서 화부를 만나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가 하면, 외삼촌의 대저택에서 폴런더 씨의 초대를 받았을 때 외삼촌의 심기를 살피지 않고 이에 응한 점, 로스만이 호텔에 왔을 때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한 선택을 했고 해고를 당한다. 


카프카 주인공의 선택과 그에 따른 불행을 보면 어떻게 살아야 성공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어떤 선택이나 행동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 두는 경우는 어김없이 바위에 부딪친 계란 신세를 면할 수 없다. 거대한 권력과 관행과 억압의 구조를 태양으로 모시는 해바라기 같은 삶만이 성공할 수 있는 세계에서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감히 태양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의 양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추락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주 엄중한 경고이자 질문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의 양심이나 판단을 근거로 행동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길을 택하지 않을 것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예쁨을 받을 대상은 어디에나 있고, 그쪽을 향해서 예쁜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인생이 무척 고달파진다는 것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픽노블의 강조점


그래픽노블 <아메리카>(실종자)에서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인공과 그의 앙숙인 들라마르슈, 로스만을 축으로 전개된다. 옥시덴텔 호텔(엘레베이터 보이)에서 브루넬다의 아파트까지 그린 이야기가 작품집에서는 압권이며 카프카 작품의 특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들라마르슈와 로스만은 퇴물 가수 브루넬다를 호구로 잡고 한몫을 챙기려고 애를 썼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낌새를 채자마자 브루넬다의 돈과 귀중품을 모조리 훔쳐 야반도주했다. 들라마르슈는 브루넬다의 예쁨을 받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태도다. 들라마르슈는 외삼촌처럼 성공할 것이다. 전재산을 털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브루넬다를 마지막까지 돌봐준 것은 언제나 주인공 카를 로스만이었다. 


카프카가 자신의 전 작품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가장 잘 드러난 장면은 외삼촌의 마지막 편지라고 생각한다. <아메리카>(실종자)의 주제의식도 잘 나타나 있어서 마지막으로 인용한다. 특히 외삼촌이 철칙으로 생각하는 '원리원칙'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에 잠기게 한다. 


친애하는 나의 조카에게


너도 확인했겠지만, 난 원리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것은 주위 사람들에게나 나 자신에게나 피곤한 일일지도 모르지. 하짐나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은 바로 그 원칙들 덕분이고, 지금 와서 그것들을 어기고 싶은 마음은 없단다. 그런 연유로 나는 오늘의 사건 이후로 너를 내 집에서 내보낼 수밖에 없구나. 

내게 다시 연락할 생각은 하지 마라. 그래 봐야 소용 없다. 너는 오늘 저녁 내 선의를 저버리고 내 곁을 떠나기로 했지. 너는 평생토록 그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소식을 전할 사람으로 나의 믿음직한 친구 그린 씨를 택했다. 그 친구가 다정한 말로 너를 달래주고, 너의 독립 생활에 길잡이가 될 만한 충고를 해줄 게다. 

사랑하는 카를 네 가족에 관해 좋은 기억은 하나도 떠올릴 수 없다니 정말 애석하구나. 네 새로운 삶에 행운이 깃들기를 빈다. 


변함없는 너의 외삼촌

에드워드 제이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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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숙할수록 사라진다는 상상력은 장자에서 처음으로 보았는데, 마이너 필링스에서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니 신선한 충격이다

이런 종류의 서비스(네일숍) 업종에서 유능하다는 평을 들으려면 너무 능숙해서 사람의 존재가 아예 안 보일 정도여야 하는데, 이 소년은 애초에 글렀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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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드서클이라는 장르명도 처음 듣거니와 이렇게 힘이 센 에필로그는 처음이다. 장르소설은 매력적이구나!

낮밤의 구별이 없는데도 이 지하 건축물만큼 시간의 흐름이 무겁게 느껴지는 곳도 없었다. 건물 자체가 물시계 비슷한 느낌이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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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가 귀족적인 사회였다는 설명이 그대로 이해된다. 평민도 귀족적이었고 천민도 귀족적이었다.

유교는 아래로 침투하면서 평민이나 노비에 대해서도 양반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 대한 문화적 지침을 제공하였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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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작품은 마음속에 씨앗을 심는다


제주4.3 다큐멘터리 <돌들이 말할 때까지>를 보고 왔다. 좋은 영화의 첫 번째 조건은 마음속에서 계속 자라고 움직이는 것이다. 마치 마음에 씨앗을 심어 놓은 것처럼. 처음에는 심심하고 밋밋한 느낌이었다. 김경만 감독은 조사원들과 생존자 면담에 동행하면서 개입을 최소화했다. 거의 0에 수렴하는 개입이었다. 다섯 명의 할머니가 주인공이었다. 여성 영화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다큐를 보면서 생각이 계속 나아갔다. 뭔가 불필요한 것이 제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이 글은 바로 제거된 것에 대한 이야기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무엇이 제거되었나?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4.3 생존자 할머니 다섯 분의 이야기를 따라서 이어진다. 전주형무소에 도착했을 때 모두들 기뻐했던 모습이 참으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갇혀 있는 기간이 짧으면 석방 후 끌려가서 총살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안 갇힌 것보다 갇힌 것이 낫고, 짧게 갇히는 것보다 길게 갇히는 것이 낫다. 집보다 감옥이 더 안전한 역설을 제주 4.3이라는 사건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제주4.3에 대한 재현 또는 작품화에서 과잉된 감정과 목소리, 해석이 불편했다. 특히 남성 생존자의 증언을 듣다 보면 시국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학살의 불가피성 등이 개진될 때가 많다. 사건에 대한 해석은 자유이지만, 해석이 일어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이미 해석을 해버린 상황에서 제주4.3을 생각하게 된 순간은 마치 내 생각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그것을 요새말로 "답정너"라고 할 것이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답정너가 없다. 일체의 해석과 개입을 줄이고 생존자의 이야기에 충실하다. 그래서 사건이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다. 이제는 사람의 이야기가 더 커져야 한다.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온전히 큰 목소리로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상황논리, 국제정세, 정치, 이념 등이 간섭했기 때문이다.

삶에 집중한다는 것은 제주4.3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국제정세나 시국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람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하는 데 성공하면 시국도 정치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이야기가 튼튼한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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