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과 하나 된 선비, 정약전


이 덕 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필자는 가끔 순조 1년(1801) 신유박해 때 체포된 정약용 3형제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떤 길을 선택했을까 하는 과람(過濫)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둘째 정약종이 걸었던 순교의 길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걸을 수 없는 길이니 제외하고, 유배지에서 정약용과 정약전의 길 중 어느 길을 선택했을까 하는 생각이다.

민중의 세상 속으로

강진으로 유배된 정약용은 불의한 세상과 절연하고 학문을 피안의 세계로 삼았다. 정약용은 『상례사전서』에서 “한
노파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 집에서 살도록 해주었다. 이윽고 나는 창문을 닫아 걸고 밤낮으로 혼자 앉아 있게 되었다”라며 문을 걸어 잠근 채 경학(經學)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러나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은 그러지 않았다. 정약용이 「선중씨(정약전) 묘지명」에서 “공(정약전)이 바다 가운데 들어온 때부터는 더욱 술을 많이 마셨는데 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패거리가 되어 친하게 지냈다”라고 쓴 것처럼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양반 사대부의 세상을 버리고 민중의 세상으로 들어갔다.

정약전이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는 유일한 시간은 동생 정약용이 초고를 마친 원고를 인편에 보내 감수를 부탁할 때였다. 그 때면 정약전은 방을 깨끗이 쓸고 정약용이 보내온 원고를 보았다. 변변한 참고서적이 있을 리 만무했던 흑산도에서 정약전이 보낸 답변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정약용이 “내가 공(정약전)께서 말씀해주신 것을 조용히 생각해보니 정말로 확실하여 고칠 수 없는 것이어서 지난번의 원고를 없애버리고 말씀해 주신대로 따랐더니···털끝만큼의 어긋남도 없었다”라고 쓴 것처럼 정약전의 학문수준도 동생처럼 당대 최고의 것이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논어난』이나 『자산역간』 등의 글은 이런 답서를 모은 것이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세상에서 정약용의 진가를 알아 준 인물도 역시 정약전이었다. 정약용이 『주역사전』을 보내오자 “가령 미용(정약용)이 편안히 부귀를 누리며 존귀한 자리에 올라 영화롭게 되었다면 반드시 이런 책을 이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며 당대에 정약용의 유배에 더 높은 의미를 부여하는 안목은 정약전에게만 있었다. 자신의 저술에는 큰 관심이 없던 정약전이 드디어 집필계획서를 보내왔는데, 물고기와 해초 등에 관해 그림을 덧붙인 『해족도설(海族圖說)』이었다. 이 책이 오늘날 유명한 『자산어보(玆山漁譜)』가 되는데, 이에 대해 정약용은 “『해족도설』은 매우 뛰어난 책으로 이 또한 하찮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라는 실학자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면서 “글로 쓰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는데, 그 결과 해족‘도설(圖說)’이 자산‘어보(漁譜)’가 된 것이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의 서문에서 “섬 안에 장덕순(張德順), 즉 창대(昌大)라는 사람이 있었다···나는 드디어 그를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 연구를 계속했다···이것을 이름하여 『자산어보』라고 불렀다”라고 이 책이 장덕순과 사실상 공저임을 밝혔다. 저작권법도 없던 그 시기에 양반도 아닌 일반 평민의 이름을 적시하면서 공저임을 밝힌 것은 그가 사람을 신분이 아닌 인격체로 바라보는 자세를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런 태도 를 지녔기 때문에 정약용의 「선중씨묘지명」에 “(정약전이) 다시는 귀한 신분으로서 교만 같은 것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섬사람들이 기뻐하며 서로 싸우기까지 하면서 자기 집에만 있어주기를 원했다”라고 묘사되는 민중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정든 흑산도 사람들 못 가게 막아

정약전은 정약용이 해배(解配:유배가 풀림)된다는 소식을 듣고 ‘아우로 하여금 두 번이나 배를 건너 나를 보러 오게 할 수는 없다’며 흑산도 앞의 우이도로 건너가려 했는데, 흑산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못 가게 막았다. 할 수 없이 정약전은 안개 낀 야밤에 몰래 우이도로 떠났는데, 안개가 걷힌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흑산도 사람들
이 급히 추격대를 편성해 다시 모시고 돌아갔다. 정약전은 흑산도 사람들에게 겨우 애걸해 우이도로 되돌아갈 수 있었지만 정약용의 해배소식은 헛소문이어서 정약전은 동생을 보지 못한 채 유배 약15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정약용은 슬퍼했다. “나를 알아주는 분은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경집(經集) 240권을 새로 장정해 책상 위에 보관해 두었는데, 나는 장차 그것들을 불사르지 않을 수 없겠구나.” 정약전의 죽음은 정약용에게 유일한 비평가이자 독자를 잃은 240권의 경서를 불태우겠다고 할 정도의 슬픔이었던 것이다. 「선중씨묘지명」에서 “오호라,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인데다 겸하여 지기(知己)까지 되어 주신 것도 또한 나라 안에서 한 사람뿐이었다”라고 썼던 정약용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호라! 현자가 그토록 곤궁하게 세상을 떠나시다니. 그 원통한 죽음 앞에 목석(木石)도 눈물을 흘릴텐데 다시 말해 무엇하랴!”라고 정약전의 죽음을 원통해했다.

그러나 정약용이 이굉보(李紘父)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문 받은 죄인으로서 압송하던 장교들을 울며 작별케 한 사람은 오직 돌아가신 형님뿐이었다······온 섬의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다하여 장례를 치러 주었으니, 이 마음 아프고 답답한 바를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듯이 그의 장례는 사실상 우의도장(葬) 이었던 것이다. 신분제의 나라 조선에서 신분을 잊고 민중 속으로 들어갔던, 그래서 마침내는 민중과 하나가 되었던 정약전은 우리 역사에서 드물게 ‘민중을 사랑한 선비’이자 ‘민중이 사랑한 선비’, 곧 ‘민중이 된 선비’였던 것이다.


글쓴이 / 이덕일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저서 : 『조선 왕 독살사건』, 다산초당, 2005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총2권, 김영사, 2004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2004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총3권, 김영사, 2000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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